소설리스트

근육조선-191화 (191/573)

< 3장 5화 -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다 (0430 수정) >

소 사다쿠니는 이미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쟁 징후를 탐망(探望)하며 조선의 편에 서겠다고 청원을 올렸고. 홍위는 탐망에 요긴한 물건이라 하며 천리경(千里鏡) 20개를 하사하였다

여름이 지나가고 선선한 가을이 시작되었다.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곡식을 수입하였으니 축제나 다름없어야 할 쓰시마 섬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영주 소 사다쿠니는 오우치의 서신을 읽으며 한숨을 쉬었다.

“소젠 어르신이 계셨다면 땅을 치고 한탄할 일이군. 11개 쿠니(國)을 다스리던 오우치가 내가 가진 삼천의 병력을 갈구하며 서신을 보낼 지경이라니.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조선에 알렸어야지.”

오우치는 다급하게 병력을 요청하며 조선에서 보내올 원병의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교토 일대에 집결한 병력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집결한 교토 일대의 병력은 10만 이상, 후일 도착할 북부의 병사까지 합치면 추정치는 20만까지 늘어날지도 모른다. 원정 개시는 내년 초이지만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멍청한 놈들. 예전부터 킨푸산(金峯山 - 현 이와미 은광 인근)에서 은광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파다했거늘. 다른 이들을 구슬리려고 킨푸산 은광을 멋대로 파헤쳐?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한 꼴이지.”

호소카와의 전횡에 대항하여 오우치는 은을 퍼트렸다. 하지만 만성적인 기근 직전 상태의 일본 열도에서 은 보다 귀한 것은 마음대로 곡식을 수입할 수 있는 감합무역 증서였다.

상황이 반전되며 오우치가 수세에 몰렸다. 호소카와의 눈 밖에 난 세력이 막대한 은광을 차지하였다면 협공을 마다할 세력은 없었다. 사다쿠니는 조선에게 상황을 정리한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우치를 향한 공세가 시작될 징후가 있사옵니다. 각지의 병력이 호소카와의 깃발 아래 집결하고 있사오며 총 병력은 현재 10만에 달하며 훗날 충원될 병력을 감안할 경우······.]

“조선식으로 쓰려면 5만 내외지. 조선은 보인을 따로 계산하는 방식이라 참으로 귀찮단 말이야.”

시종이 가져온 종이에 서신을 작성한 사다쿠니는 밀봉을 위해 봉투 입구를 접고 밀랍을 발라 자신의 직인을 찍었다. 라마국(신성 로마 제국)의 방식이라 하는데 실제 본 일은 없지만 쓰고 보니 편하고 좋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이 서신을 급보라 하여 당장 조선의 동래로 보내라. 시일이 늦으면 일이 틀어질 수 있으니 당장 출발하여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가신이 고개를 숙이고 나서자 다른 가신이 들어왔다. 간소한 도오마루(胴丸 - 동환, 전국시대 일본의 하급무사 갑주)지만 전면전을 벌인 적 없는 쓰시마는 가난한 고장이니 제대로 된 요로이(鎧 - 전신갑주)는 열 개도 되지 않아 답이 없었다.

젊은 가신은 성큼성큼 나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어제 밤을 지새웠는지 눈에 핏발이 서 있고 흥분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타이라 시게스구(平茂績), 자네는 어제 밤늦게까지 탐망(探望)에 나섰으니 쉬라 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무장을 갖추고 내 앞에 나선 것인가.”

“주군께서 조선의 편을 드시는 일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전쟁에 나서지 않고 조선의 눈과 귀가 되는 일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려다 분기가 치밀어 올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소 사다쿠니는 젊고 혈기가 넘치는 가신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전공과 무훈을 세워 높은 작위와 많은 영토를 얻는 것을 절대적 가치라 여겼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이미 한양에 오간 일이 다섯 번이며 동래에 오간 일은 스무 번이 넘었으니 조선에 대한 많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소 사다쿠니는 젊은 가신을 위하여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무훈을 원하면 싸울 수 있다네. 조선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니 병사를 지원받는 일도 간단하며. 조선의 요로이(찰갑과 두정갑을 뜻한다)나 제련된 강철로 만든 무기는 효과적이지. 그렇다면 얻는 것이 무엇이겠나.”

“쇼니씨를 축출하거나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크나큰 전공입니다. 이를 통하여 큐슈를 발판으로 삼아 여러 쿠니(國)를 다스리는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좁아빠진 촌구석에서 무엇을 하겠나.”

큐슈를 통틀어 좁아빠진 촌구석이라 칭하자 시게스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일본 열도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남만(南蠻)이라 멸시하는 고장이 큐슈이다. 하지만 시게스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큐슈가 좁아빠진 촌구석이라 칭하여도 더욱 큰 고장으로 나아갈 발판이 아닙니까. 주군께서는 대체 어디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 세상이라네. 자네는 이 지도를 본 적이 있는가? 전국 육십여주(六十余州)를 헤아려도 지도에서는 손가락 하나 조차 되지 않는다네.”

한자를 거의 알지 못하는 시게스구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의 전부라 여겼던 일본은 손가락보다 작게 그려져 있었으며(실제보다 작다). 조선은 손가락 두 개 크기로. 명나라는 손바닥 크기로 나와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지도 제작술이 정립되지 않을 시기이니 오차가 있었으나 이전까지의 지도와 다른. 유라시아 전체를 표현한 지도였다. 사다쿠니는 지도를 보여준 모든 사람이 했던 말을 다시 듣게 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넓단 말입니까.”

“그렇지. 얼마 전에 조선에서 라마국과 오사만국을 다녀왔다 하였으며 이주를 청한 학자들을 관직에 올려 극진히 대접하고 있지. 라마국이 얼마나 먼 고장인지 아는가? 뱃길로 일만 리(일본의 1리 = 4km)라네.”

시게스구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 줄 알고 있는 주군이니 더욱 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다쿠니는 본론에 들어갔다.

“이미 노신(老臣)들은 알고 있지만 자네에게도 알려 주겠네.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조선의 편에 설 것이며. 조선의 신하로 거듭날 것이네.”

“저는 주군을 평생토록 모실 것입니다. 비록 출세의 길이 막혀도······.”

“자네는 스물넷에 불과하니 촉망받는 인재라네. 이미 조선의 관직을 받아 투화(投化)하지 않았는가. 처음 가신이 될 때에 조선에 적(籍)을 두면서 이미 관직이 배정되었지.”

소 사다쿠니 정도의 직책이면 가신 모두를 투화왜인으로 추천하는 일이 가능했다. 이미 모든 가신을 이중 봉신으로 만든 셈이지만 조만간 조선의 신하가 될 것이다. 시게스구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조선의 신하이며 주군의 가신인 이중 봉신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맞는 말이네. 녹봉은 없지만 자네는 가신이 된 순간부터 정7품이 되었지. 신숙주라는 관료의 말을 들으니 연배에 비하여 높은 관직이라 하더군.”

“얼마나 높은 관직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관직을 받았다면 그에 걸맞은 무훈을 세우는 일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출병을 허하여 주신다면 바다에서 와코의 허리를 끊겠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사소한 무훈에 얽매이지 말게. 조선이 얼마나 강대한 국가인지 아는가? 소문이 퍼진 적이 있지. 미도리오니(綠鬼 - 녹색 오니)라는 이들의 이야기는 들어 보았는가?”

몇 년 전부터 소문이 퍼지긴 했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구들이 만난 병사들 가운데 녹색 옷을 입은 놈들이 지휘관으로 있으며. 귀신같은 활약을 보인다 하였다.

큐슈로 돌아온 왜구는 그들의 무력에 치를 떨었지만 수효가 적으니 조선에서 부시(武士 - 무사)와 비슷한 직책을 가졌다 여겼다. 하지만 시게스구는 이어지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선에서 이들을 훈련원(訓鍊院) 삼군이라 칭하네. 각자 백병전과 포술 그리고 해전에 능숙한 이들이며 총원은 이만 오천에 달한다 하지. 자네는 이런 병사들을 앞세운 조선을 능가하는 무훈을 쌓으려 하는데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만 오천 모두가 병사가 아니며 아니고 오천 명이라 하여도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든 집단이다. 아마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지리라. 소 사다쿠니는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의 병사가 모두 긁어모아야 삼천에 불과하니 무훈을 세워도 한도가 있다네. 그렇다면 탐망에 힘써 공훈을 세워 실리를 거두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

“주군의 뜻을 마음 속 깊이 새기겠나이다.”

“그러하면 지금 명을 내리겠네. 내일은 무조건 쉬도록 하고 오늘은 날이 밝았으니 탐망에 나선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게. 간혹 천리경의 사용법을 숙지하지 못한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평상시에는 어업에 나서던 쓰시마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기강 따위는 없었다. 쓰시마 남부의 츠츠자키(豆酘) 절벽에 배정된 병사들은 천리경으로 먼 바다를 보지 않고 남서쪽에 위치한 이키 섬(壱岐 - 일기도)을 보면서 넋을 놓고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이키가 이렇게 훤히 보일 줄을 몰랐는데.”

“이런 녀석이 있으면 바다에서 참으로 편하겠어.”

“그래서 이게 천리경이라는 기물인가? 조선은 참으로 신비한 물건이 많단 말이야.”

하라아테(腹當 - 최하급 갑주) 조차도 갖추지 못한 병사들은 잡철로 만들어진 창을 바닥에 내려놓고 서로 천리경을 돌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이 나서서 자신의 경험을 자랑하였다.

“신비한 물건만 많던가? 얼마 전에는 하얀 귀신도 보았다네. 동래라는 고장에서 미곡을 들여오는 일에 나섰는데 세상에! 길거리에 새하얀 얼굴에 갈색 머리를 가진 귀신이 있지 않던가.”

“거짓말은 하지 말게. 백주대낮에 귀신이 나오다니 조선이 이매망량(魑魅魍魎)이 날뛰는 고장이라도 되나?”

“참말이라네. 조선 사람도 큰 편인데 세 치는 크며 코는 하늘 높이 솟아있더군.”

“하얀 낯빛을 한 텐구(天狗)라도 보고 왔는가?”

병사 셋은 탐망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언쟁을 벌이다 몸싸움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서로 열이 올라올 무렵에 고함이 들려왔다.

“네놈들이 탐망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네 놈들이 들고 있는 천리경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알기나 하느냐!”

“타이라님! 죄송합니다!”

“나에게 고개를 숙이기 전에 천리경을 들어 바다를 바라보아라. 만약 이러한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엄벌에 처할 것이다!”

평소와 같았으면 칼을 뽑아 본보기로 목을 쳤을 일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서는 시게스구의 귀에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와코놈들의 배가 분명합니다! 빠르게 북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디 보지. 적어도 스무 척이 넘으며 조선을 향하여 움직이니 와코가 맞구나. 네가 큰 공을 세웠으니 주군께 청하여 포상을 내릴 것이다.”

수십 척의 선단이 북쪽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천리경이 아니었으면 발견하기 힘들 거리였으며 상대도 같은 생각으로 항로를 정한 것이 분명하였다.

급보를 전하기 위하여 가장 빠른 고바야부네(小早船)가 동래로 향했다. 그렇게 경인왜란(庚寅倭亂)이라 불린 전쟁의 첫 전투가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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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타츠히사(島津立久) 휘하의 가신 진스케는 무훈을 세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조선과 오우치의 이반(離反)을 꾀해 억지로 경상도 일대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약탈을, 아니 징벌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호소카와가 감합증서를 나눠준 이후 인삼으로 흉년을 부른 조선을 징벌하자는 의견이 큐슈의 영주들 사이에서 오갔다. 일방적으로 이득을 챙긴(자신들의 기준으로) 조선의 부를 빼앗아 오자는 의견이 앞섰다.

각지의 영주들이 연합하니 병력과 함선을 앞다투어 징발하였고 칠십 척에 달하는 선단을 구성하였다. 이전에 가장 많은 무훈을 쌓아 대장이 된 진스케는 멋들어진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좀이 쑤셨는데 잘 되었어. 이렇게 터는 것이 좋은 일이지.”

“조선의 전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놈들은 여전히 남경 일대를 시찰하는 것이 분명하군요.”

감합문서를 가진 상인을 무슨 수로 막겠나?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으니 이득이지.”

조선의 전함을 만나서 살아 돌아온 이가 없었지만 상인을 통한 정보는 천천히 쌓여갔다. 조선의 함선은 크고 둔중하며 돛으로만 움직이는 함선이며. 섬이 가득한 남해안을 마음대로 거닐 수 없다 여겼다. 항해사로 일하는 노인은 타공으로 방향을 조정하면서 고함을 쳤다.

“속도를 줄여라! 이러다가 섬에 부딪히겠다.”

“길을 잘 찾아가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예전에 아버지의 말을 들었으니 고성(固城)에 대한 일은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함선은 둔중하니 이러한 물골을 따라 올라올 수 없겠군.”

수많은 섬들 사이로 왜구의 선단이 이동하다 사량도(蛇梁島) 인근에 정선하였다. 두 섬 사이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밤새 물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진스케는 오오요로이(大鎧)를 차려입고 있었다.

“물이 차오르는 새벽까지 한 나절이 넘게 남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갑주를 입으시는지요.”

“무사는 전쟁에 나설 때에는 언제나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네. 어디서 유시(流矢)가 날아올 줄 안단 말인가.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키는 법이지.”

계획적 약탈을 전쟁이라 칭하는 모습을 한심하게 보았는지 노인은 뒤로 돌아서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스케는 이를 전쟁이자 징벌로 취급하였고 그의 주군인 시마즈 타츠히사를 비롯한 영주들의 의견도 같았다.

그들이 판단하기로 조선의 무력은 하잘 것 없었다. 쓰시마를 정벌하지도 못하였으며. 한때 자랑하였던 도이(여진족)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없었다. 그저 숫자를 앞세워 수비에 급급한 무기력한 국가라 여겼다.

그래서 수를 늘렸다. 70척의 함선을 모았으니 병사가 2,400명에 달하고 비상시 병사로 쓰이는 잡부를 합치면 5,000명에 달하는 군세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어떠한 정보도 없이 과거의 기록을 믿고 보낸 일에 불과하였다.

당연히 병사들의 사기도 좋지 않았다. 여느 세력과 일전(一戰)을 벌이는 줄 알았는데 배를 타고 이레 동안 항해한 것이다. 부하들이 웅성거리자 진스케는 바닥을 박차며 외쳤다.

“무엇이 그렇게 무섭더냐. 우리는 오천에 달하는 병사가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저희가 쳐들어가는 고장이 고성이라 하였는데 어떠한 곳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미도리오니들이 떼로 몰려온다면 감당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어허! 놈들이 백 명 가운데 하나만 있지 않더냐. 여태껏 만난 조선의 병사는 한 고장에 일천에 불과한데 개중 열 명에 불과한 놈들에게 겁을 먹느냐? 좋은 것을 알려주마. 고성은 조선에서 부유하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진스케도 고성이 어떠한 고장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저 고성을 약탈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약탈에 나서는 것에 불과하였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한심하기는 항해사인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통해 들은 지식은 희미하고 변질되어 있었으나 꿋꿋히 자신의 기억을 믿은 것이다. 노인은 진로를 정하며 크나큰 실책을 범했다.

“서쪽! 서쪽의 만(灣)으로 들어가야 한다! 섬이 많다 하였으니 천천히 노를 저어라!”

그렇게 왜구의 선단이 향한 곳은 동쪽의 고성이 아닌 서쪽의 사천이었으며. 사천 북쪽의 고장은 진주였다. 아침 해가 뜬 사천의 해안가에 왜구들이 상륙하였다.

“여기가 고성이다! 닥치는 대로 짓밟으면서 진군하라. 부유하기로 이름난 고장이니 물산도 풍부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혹시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희 사백 명은 남아 배를 지켜라.”

왜군의 상륙을 감지한 병사가 화포를 쏘았고. 신호를 받은 봉수가 네 줄에서 다섯 줄로 변하며 침략을 알렸다. 사천현에 속한 잡색군과 병영군이 왜구를 막아내려 했지만 적이 너무 많았다.

“백성들을 산성으로 피난시켜라! 조만간 진주에서 원병이 도착할 것이다! 봉화가 올랐으니 동래의 임해도감도 왜구의 퇴로를 막아낼 것이다! 한 시진만 버텨라!”

“잡놈의 새끼들! 올 거면 다른 곳으로 오지 여기는 왜 왔대!”

백성들의 피난시간을 벌기 위해 잡색군은 훈련 대로 급히 목책을 세우고 진형을 갖추어 전투에 나섰다. 서로 창을 내지르며 응전하였지만 조선군의 수는 칠백에 불과한데 왜구는 이천에 달했다.

분전을 이어나갈 뿐 극복할 길이 없었다. 여러 이점을 살려도 잡색군 하나가 죽을 때마다 왜구 하나가 죽어나가니 점점 더 산성을 향해 밀려나가고 있었다. 이미 전선을 유지하기 힘드니 산성으로 퇴각하여 수성전을 벌여야 할 지경이었다.

“놈들을 모두 죽일 생각은 하지 마라! 산 속으로 밀려나면 마을을 약탈하고 퇴각한다!”

“진스케님! 북쪽! 북쪽을 보십시오!”

“북쪽에 무엇이 있다고 그렇게 놀라서······.”

진주와 사천 사이의 거리는 20리(8km)도 되지 않았다. 도감군의 행군속도로 한 시진(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며. 이미 왜구들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각지의 주(州) 이상의 행정구역은 훈련원 휘하 삼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훈련원 휘하 병사들이 병장기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시점에 봉화가 다섯 줄로 변하였다. 그렇게 언덕 아래에서 총원 팔백, 훈련도감 병사 오백 명에 화기도감의 보총수 삼백 명이 진형을 갖추고 천천히 진격하였다.

“이러다가 양쪽으로 포위당하게 생겼습니다!”

“염려하지 마라! 초록색 옷을 두려워하니 허장성세를 벌이는 것이 분명하다! 지형이 유리하니 언덕을 달려 내려가며 내려가 놈들을 단숨에 짓밟아라!”

“산 위의 놈들은 어떻게 합니까.”

“염려하지 마라. 놈들이 진형을 정비하고 공격에 나서려면 한참 걸릴것이다. 가자! ”

원군의 등장으로 떨어진 사기를 되돌리기 위해 진스케는 아껴뒀던 보검을 높이 빼들고 말을 박차며 달려 나섰다. 왜구들의 돌격과 동시에 후열에 있던 화기도감 병사들은 보총으로 일제사격을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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