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1화 - 왕, 상왕, 태상왕(1) >
군사 훈련을 마치고 양위의 뜻을 정하니 법도에 어긋나 보였지만 형님 입장에서도 앓던 이를 뽑은 기분일거다. 대규모 군사 훈련의 기반을 마련했으니 홍위의 치세에 전쟁이 벌어져도 충분한 성과를 거둘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님과 홍위에게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형님은 혼란을 가까스로 다스린 철령 전투 직후 양위를 받은 것이며. 홍위는 정세가 안정되어 있지만 조만간 전쟁이 시작될 상황에서 양위를 받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론을 분열시키지 않으려면 관료들의 세력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이다. 사직을 윤허한 이징옥과 이맹전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들이었다. 양위 확정과 사직 윤허는 다음 날 조회에서 공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미 양위의 뜻을 정하였으며 세자 또한 양위를 받아들였다. 다음 달 초하루에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다.”
“전하,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상왕께서 양위할 적에 무어라 말씀을 하셨더냐. 이미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팔의 힘이 빠지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을 알 방법이 없도다.”
그러고 보면 형님은 근손실이 진행되면서 3대 운동이 650근으로 떨어지셨지. 신료들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지만 형님의 뜻은 정해져 있었다. 결국 신료들이 포기하고 고개를 숙이자 본론을 시작하셨다.
“사직을 청하는 이들이 여럿 있으니 먼저 경들의 사직을 윤허하도록 하겠다. 또한 관직을 비워둘 수 없으니 새로운 자리에 제수할 이도 있다. 가장 먼저 사직을 청한 이는 영상이니 앞으로 나오도록 하시오.”
“신 이징옥. 주상전하를 평생 보필할 소망이 있었사오나 북방의 혹한에 시달리며 더 이상 산군과 같은 기개를 자랑할 수 없었나이다. 송구하오나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징옥은 울먹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나이도 칠순이 다 되어가며 군문에 있던 세월만 54년이 지나간 것이다. 형님은 이징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경이 북방에서 달자들을 토벌한 덕분에 아국이 평안할 수 있었소. 혹여나 청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여 보시오.”
“신의 청원이 있다면 추운 북방 대신 따스한 대양도에 머물며 가배를 마시는 것이 전부이옵니다. 더위에는 익숙한 몸이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러한 일이면 염려치 마시오. 여름마다 빙고에 있는 얼음을 대양도로 보낼 것이니 평안한 시일을 보낼 수 있을 것이오.”
이징옥의 말을 들어보니 앞으로 대양도, 대만이 은퇴한 관료들이 작물을 기르며 말년을 보내는 휴양지······.가 아니다. 이징옥은 황희처럼 은퇴하고 일을 할까 염려하여 가급적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분명하다!
이맹전의 사직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한양에 남아있으라는 말은 황희와 같이 은퇴하고 일을 더 하라는 말이었지만 사직이 그렇게 좋은지 이맹전의 얼굴은 십 년은 젊어보였다. 열 명 정도의 관료가 사직을 당하고 비어있는 관직을 채울 차례였다.
늙은 관료를 대신한 신진 관료를 누구로 정할까 궁금해 하는 신료들의 시선이 대전 안에 오갔다.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넘긴 형님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먼저 정할 자리는 어느 누구도 아닌 영의정의 자리이다. 한참을 고심하여 보았으나 좌의정 한확이 적임이라 생각되는군. 경은 앞으로 나오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관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확이 앞으로 나섰다. 몰락한 친명파의 필두여서 좌의정도 주변의 힘으로 올라왔다는 소문이 퍼진 사람이다. 주변의 힘은 종친인 나의 힘이지만 나는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좌의정 자리에 올라온 것이 맞지.
여기에 한확은 비교적 몸이 건강했다. 68세의 나이에 비하여 건강한 이유는 입신체비도 있지만 부과된 업무가 대부분 잡무였기 때문에 막중한 업무에 시달리지 않은 덕분이다. 형님은 한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경이 일을 행할 때에 심혈을 기울여 나서며 효험을 따지는 일을 익히 알고 있소. 몇 년간 국정에 임하는 세자를 보필하고 때가 되었다 싶으면 사직을 청하도록 하시오.”
“신은 아직 오 년은 일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 다음은 좌의정에 조극관을 임명할 것이며······.”
영의정 한확, 좌의정 조극관 그리고 우의정 황수신. 셋 다 60대의 문관 출신 관료들이며 행정에 능하고 의정부에 속할 자격이 충분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형님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육조 판서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삼정승은 직급에 비하여 권세가 대단한 이들이 아니었다. 한확은 허수아비 좌의정이었으며 조극관은 많은 관직을 거쳐 올라왔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 조만간 줄줄이 사직을 청할 것이니 다시 승진의 기회가 열리리라.
하지만 황수신이 거론되자 신료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황수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이러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황수신을 보며 웃었고 아니나 다를까 이맹전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항의하였다.
“전하, 신 이맹전 아뢰옵니다. 황수신은 일전에 아산 일대에 백성들이 휴경을 하는 전답(田畓)을 무단으로 점거한 일이 있사온데 나라의 중책을 도맡아 하는 이로는 부족하다 여겨지옵니다.”
“이미 끝난 일이며 용서하였으니 문제는 없다. 전답을 무단으로 점거한 것이 아니고 실책을 범한 것이다. 사소한 이문을 얻으려는 자가 어찌 이백 결의 전답을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넘겨주겠느냐.”
이맹전과 황수신이 눈싸움을 벌이다가 범죄를 저지른 황수신이 눈빛을 피했다. 아버지인 황희에게 배운 것이 있었는지 소유가 애매한 휴경지를 10결을 멋대로 사용하다 적발된 것이 4년 전이다.
형무소로 가서 죄를 뉘우치거나. 아버지처럼 죽기 직전에야 사직을 허가받거나. 혹은 이런 일을 무마할만한 농지를 백성에게 무상으로 불하하거나. 결국 황수신은 재산을 털어 죄를 면하게 되었다. 이맹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의 귀가 어두운 것이 분명하오니 주상전하의 옥음(玉音)을 귀담아 두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그저 송구할 뿐이옵니다.”
“하지만 경의 말도 옳다. 우의정이 세자를 보좌하며 실책을 범할지 모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형님의 관직 정리는 철저히 홍위를 위한 방침이다.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양위가 아닌 기존 공신 세력의 약화와 억제를 동시에 달성했다.
군권을 거머쥔 상왕이라 하여도 언제까지 형님이 정치에 관여한단 말인가. 원래 역사의 조선처럼 사림이 득세하지 않으면 정치하기가 편하다고? 관학파도 파벌을 형성하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관학 세력은 나라의 발전과 비례해서 성장한다.
관학파의 후계자인 훈구파도 발전 동력인 국책 사업을 통한 경험 축척이 불가능해지며 몰락하였는데 현재 조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홍위의 통제가 어설프면 비대해진 관료들의 파벌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형님이 쐐기를 박았다.
“다음으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임시 폐지하며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되돌릴 것이다. 이는 국책을 논하는 일이 번거롭고 절차가 길어질지도 모르나 세자가 거닐 첫 걸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도 좋은 수법이다. 아무리 의정부의 힘이 없어도 육조와 비교하면 직급과 경력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 정확히는 왕권과 행정능력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세 정승을 시작으로 한 의정부 관원들이 홍위를 어떻게 통제하거나 이용하려고 해도 일흔이 되어가는 늙은 관료들이다. 몇 년이 지나면 사직을 청할 것이 분명하니 홍위가 자리를 잡기에 충분하다.
한 달 뒤인 1468년 12월 18일. 도성은 양위 이후 새로운 왕인 홍위의 등극을 축하하며 연신 축제가 이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방안에 틀어박혀서 입신체비 기구들을 만지작거리며 구조를 분석했다.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몸을 사릴 시기이다. 사돈이 영의정이 되었다면 분명 내가 권력을 행사해서 종친의 힘을 발휘했다 여기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착실하게 입신체비기구의 조립식 완성법. 현대로 따지면 모듈화의 개념을 잡아내기 위해 사람을 불러 나무로 본을 뜨고 구조를 만들어 나갔다. 그런 와중에 경덕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상왕전하께서 심도(강화도)에 행차하시옵니다. 수양대군께서도 이를 따라 심도에 다녀오라는 명이옵니다.”
“상왕전하께서? 어인 일인지 말씀은 없으시던가.”
“간척사업이 완수되었다 하여 급히 심도로 찾아오라 전하셨습니다.”
강화도의 해안가로 다가서니 추운 겨울날씨에도 갯벌을. 이제는 농토로 변할 땅을 드나드는 농민들이 보였다. 지난 5년 동안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두 조로 나뉘어 일했다.
평상시에는 강화도 일대의 갯벌을 간척하고 주말에는 사람을 고용해 성당을 지어나갔고. 미술가들은 사방을 떠돌며 조선의 풍속을 회화로 남기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있으니 내금위 병사가 와서 인사를 올렸다.
“주상전하께서는 라마국의 사람들이 만든 성당이라는 곳에 계십니다.”
“성당이라? 거기는 라마국의 불당이 아닌가?”
“오늘은 사람이 없는 날이라 머물며 담소를 나누기 좋은 곳이니 당장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성당으로 들어가자 형님을 호위하던 내금위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리고 형님은 눈을 부라리며 꾸중을 하길 시작했다.
“네 괘씸함을 네가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당장 패도(플랭크)를 취하여라.”
“형님! 제 죄과가 크다 하여도 어느 죄를 지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기군망상(欺君罔上)이며 불효이다. 다른 말은 하지 말고 어서 패도를 행하지 못할까!”
기군망상에 불효가 겹쳤다면 세종대왕님의 일을 알고 계신단 말인가? 그렇지만 왕보다 상왕이 더 대단한 사람이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버지잖아. 하지만 형님이 까라 했으니 깔 수밖에 없다.
차디찬 대리석 바닥 위에 플랭크를 하니 팔이 시려 죽겠다. 이놈의 성당은 난로도 없는지 냉랭한 한기가 전신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형님은 장궤틀(천주교에서 쓰이는 미사용 의사)대신 놓인 방석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 불효막심한 녀석아. 아바마마께서 병환이 나아지지 않는다 하여도 어찌하여 나에게 고변하지도 않고 따로 행동하더냐. 혹여나 일이 잘못될까 얼마나 염려하였는지 아느냐?”
혹시나 했지만 역시다. 세종대왕님이 걱정되니 사람을 통해서 심장에 좋은 약재와 처방을 찾아봤는데 뭘 비교해도 전순의를 비롯한 어의들보다 나을게 없어서 함부로 전해드리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형님에게 말씀을 드리면 세종대왕님의 말을 거스르는 행동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하지만 형님은 병환을 알고 있었으니 이야기 하는 것이 좋았나. 형님의 말이 이어졌다.
“어찌하여 너를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패도를 취하게 하였는지는 알고 있더냐.”
“아바마마의 환후가 깊어지시며 팔다리에 기가 통하지 않아 한기가 스며든다 하셨사옵니다.”
“잘 알고 있으니 두 각(30분)은 행하여라. 하지만 아바마마의 뜻을 거스른 것이 아니니 기군망상의 죄를 묻지는 않겠다.”
형님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강화도에 지어진 이탈리아식 성당에는 신비한 것이 많았는지 한동안 주변을 돌아보신 형님이 다시 돌아왔다.
“어허! 둔부가 올라가면 제대로 된 패도가 아니다!”
“송구하옵니다!”
“너도 나도 늙어가는구나. 이전에 네가 고려사를 집필할 적에는 반 시진동안 패도를 하며 서책을 읽어도 땀이 흐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한 각이 지나기도 전에 자세가 흐트러지다니.”
50이면 충분히 늙었지. 하지만 오기와 끈기로 플랭크를 마치고 일어서자 정말 팔다리에 한기가 스며서 몸을 가누기 힘든 지경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팔다리를 풀고 있으니 형님이 혀를 찼다.
“언젠가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를 자주 찾아뵈며 항상 효행을 품고 살아야 하느니라.”
“아바마마의 앞에서 저는 언제나 효행을 다하려 애쓰고 있사옵니다.”
“그렇긴 하지. 네가 아니었다면 나라의 일이 어떻게 돌아갔을지 궁금하구나.”
한동안 성당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형님이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우물쭈물 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셨지만 모든 일을 다루시지 않고 하나를 비워 두셨다. 무엇인지 아느냐?”
“관직에 대한 내용은 관여하지 않으셨다 알고 있사옵니다. 모두 형님의 손에 맡기기 위하여 행한 조처입니다.”
“그렇지만 네가 보기에는 태조대왕께서 만드시고 헌릉에 계신 분이 고쳤던 관직에 대한 법제가 작금의 아국의 모습과 일치한다 생각되더냐.”
현대적으로 따지자면 아예 관직 제도를 뜯어고쳐야 하지만 나는 관료제에 대한 지식은 국회의원의 난투극 외에는 모른다. 그러니 가장 평범한 대답을 해야겠다.
“아국의 영토가 늘어났으며 수많은 이들이 복속을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건국될 무렵의 팔도에 얽매여 있으니 확장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구나. 겸직(兼職)을 없애서 신료들이 하나의 일에 몰두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형님의 말대로 겸직도 큰 문제다. 전문성을 보장하고 유사한 업무를 포괄할 수 있는 겸직이라면 모를까 자리를 채우기 위한 겸직은 인력 낭비다. 형님이 임명한 정승들도 관직을 모두 합치면 11개에 이른다. 형님도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말을 이어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반에 속하는 외직(外職)이니라. 당장 관찰사가 절도사를 겸하며 경관이 첨절제사를 겸한다. 평시라면 문제가 없지만 전시라면 어찌 하겠느냐.”
“하지만 너무나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옵니다. 아국의 관원은 육천 명이 넘어 칠천 명에 달하지 않습니까.”
형님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종대왕님이 법제를 개편하듯이 형님은 관직을 개편하며 확장하는 영토에 맞추어 나갈 틀을 잡아나갈게 분명했다.
다만 아쉬운 일은 당분간 국정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적어도 일 년 정도는 이렇게 형님과 같이 허송세월하며 지내야지. 그런데 형님이 신발을 두툼한 가죽신으로 갈아 신으신다.
“어서 산으로 올라가자꾸나. 듣자하니 인삼 가운데 겨울에 채집한 인삼이며 섬에서 난 인삼은 심부의 기를 북돋게 하는데 효험이 좋다 하였다.”
형님이 세종대왕님의 병을 언제 알아차린 거지? 이미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알고 있던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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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1월, 홍위가 국정에 나선지 보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김시습을 비롯한 관원들이 이년 전부터 진행한 연해주 일대의 토착 부족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시작하였다. 임금이 변하였지만 정책은 꾸준히 이어져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파견한 외방 관원들을 통하여 조사한 결과가 이러하옵니다.”
김시습은 어느덧 북방의 풍속과 문화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보고에 따르면 조선과 접촉하지 않은 여진족 분파라 여겼지만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히제족(赫哲 - 허저족)의 부락에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하지만 이들이 정녕 야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이오? 야인들 간에 언어가 다른 일은 자주 있지 않소.”
“자신들을 용르버이라 칭하는데 이들의 풍속은 야인들과 다릅니다. 얼핏 보면 야인과 비슷한 복식을 갖추었으며 풍속도 비슷하다 여길 수 있지만 불씨를 모르고 있습니다.”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풍속의 비교와 물산의 비교 그리고 회화를 통한 간단한 비교까지 이루어지니 모든 내용이 정리되었다. 홍위는 김시습이 가져온 물고기로 만든 가죽 옷을 만지며 말했다.
“일전에 보고에 따르면 북방 야인의 분파라 하였는데. 율도상회의 홍길동이라는 자가 보고를 헛되이 올린 것이오?”
“히제족 가운데 일부는 보고대로 북방 야인의 분파가 맞습니다. 하지만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점점 다른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의복과 식습관과 주거의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 아니오. 그리고 야인들이 섬기는 석씨(불교를 낮춰 부르는 말)를 모른다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이들이군.”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며 만물에 혼백이 있다 여기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나오는 환웅(桓雄)을 아는지 물어보았지만 곰과 호랑이는 혼백이지 조상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조선과의 접점이 없는 부족이니 김시습도 더 이상은 관여할 방법이 없었다. 세종대왕이면 이들을 조선으로 귀부시킬 것이며 문종이라면 문화적 흡수를 추구하리라. 하지만 홍위의 답을 들은 신료들은 감탄하기 시작했다.
“아국에 함부로 합병하기에는 너무나 먼 고장이 아니오. 솔빈군(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강을 따라 북상하여 1,800리(720km)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준마를 타고 왕복하는데 두 달 가까이 걸리는 머나먼 고장이옵니다.”
“외방 관원을 더욱 많이 파견하여 이들의 거취(去就)를 분명히 하고 생활을 파악하시오. 방치하면 도적이 될 지도 모르며 아국이 당장 나서기에는 너무 머나먼 고장이오.”
홍위의 방식은 안정과 숙고(熟考)였다. 종교적 통합이 불가능하며 생활이 바쁜 이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면 헛된 일이고 함부로 받아들이면 탈이 날 정도로 머나먼 고장이었다.
김시습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다 펴졌다. 몇 번 정도 북방을 오가면 끝날 일이니 다음 기회에는 외방 관원에서 벗어나 한양에서 떳떳하게 궁궐을 드나들며 살려 하였다. 그렇게 논의가 끝나는데 보고가 이어졌다.
“주상전하, 일전에 상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남도를 순시하고 다녀온 탐검사의 함대가 귀환하였사옵니다.”
“분명 오가는 일에 일 년이 걸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너무 늦게 귀환하지 않았는가. 혹시 몸이 상한 이는 없던가?”
“열 둘 정도가 괴질에 시달려 목숨을 잃었지만 많은 소득을 얻었습니다. 수천개의 진주와 아국에서 찾기 힘든 나각(螺角 - 소라나 게의 껍질, 귀금속으로 쓰인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탐검사가 얻는 수익은 3할이 항해에 나선 이들에게 배당되고 7할이 내수사에 환수된다. 아직 모든 권한에 익숙하지 않으니 상왕인 문종이 알아서 할 일이리라. 그렇게 공을 치하하러 내려간 홍위는 한명회의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자신의 공을 자랑해도 모자를 판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찧고 있으니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던 한명회는 고개를 들고 말하였다.
“주상전하께 아뢰옵니다. 신의 공은 있으나 감히 사직을 청하옵니다. 어릴 시절부터 물욕이 있었으며 이러한 버릇을 지천명(50세)가 넘어가도록 고지치 못하고 있으니 탐검사에서 버틸 재간이 없사옵니다.”
“물욕이라 하였으면 어찌하여 공을 세운 뒤에 고변한단 말이오.”
“일호천도(타히티)에서 돌아오며 배 안에 있을 때마다 많은 고심을 하였사옵니다. 약간의 진주를 숨겨서 팔면 훗날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 고심하며 밤을 지새웠사옵니다.”
물론 한명회는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자였다.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하며 사직을 청한다. 재산은 제법 쌓여있으니 상회를 차리고 항해술을 사용하면 될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욕을 억누르지 않았소.”
“이러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 나라의 것이 될 물건으로 사욕을 채우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신은 관료로서 머물 수 없는 몸이니 사직을 청하옵니다.”
한명회의 계산은 이랬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귀한 물산을 수집하는 탐검사의 관원이 물욕을 주체하지 못하면 크나큰 흠집이지만. 상인의 길로 나선다면 크게 흠 잡힐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홍위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탐검사의 정(正) 한명회를 정3품의 부제조(副提調)로 임명하겠소. 물욕이 있다 하여도 초심을 되찾으면 충분한 일이오.”
“초심이라 하셨사옵니까?”
사직을 청하며 억지를 부렸는데 날벼락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즉위한 주상의 입에서 초심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들려온 말은 한명회의 약점을 후벼파냈다.
“부제조가 관직에 출사하게 된 연유가 왕태조(왕건)의 능을 보수하는 공사에서 빼어난 모습을 보여서 종친의 천거를 받은 것이라 알고 있소.”
한명회의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빼어난 모습이며 종친의 천거라 하면 주상은 자신이 저질렀고 수양대군이 숨겨줬던 범죄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서행사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소득을 거두며 세력을 확장하는 송상에게 원한을 사게 되며 상인의 꿈은 커녕 해코지를 당할 걱정이 앞설 지경이다.
“사소한 일이며 힘쓸 필요가 없는 왕태조의 능을 보살피는 모습에 감동하였다 하는데 그러한 초심을 되찾으면 충분한 일이 아니오. 우선 일 년 동안 편히 쉬도록 하시오.”
“성은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홍위가 문종의 치세를 보면서 배운 것이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하나의 분야에 대하여 막대한 지식을 가진 관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묶어 놓으라고.
그런 점에서 홍위의 눈에 비친 한명회는 완벽한 관료였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약간의 단서와 임기웅변으로 막대한 수익을 뽑아내는 능력 있는 관료이다.
한명회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능신(能臣)이자 충신으로 역사에 남아 온갖 권세를 누리게 되리라. 다만 이 년 정도 항해하고 일 년 동안 권세를 누리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