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24화 - 시대의 흐름(3) >
조선이 북방의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는 와중에도 한명회는 언제나 바빴다. 1466년 3월, 멀리서 다가오는 선박을 보고 한명회는 생소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지식이 별로 없는 마일용은 한명회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압구 어르신. 저러한 함선은 처음 봅니다. 분명 대방선과 닮기는 하였으나 화포도 많고 형태가 완전히 다릅니다.”
“나도 모르는 함선이네. 돛대가 선체 앞에 튀어나와 있으며 삼각돛이 달려있군. 그러고 보니 선공감에서 남봉(濫捧 - 방길주의 호) 어르신의 설계를 적용한 함선을 만들었다 하는데.”
함선은 아직 조종에 능숙하지 않아 방향을 이리 저리 틀며 가까스로 정박에 성공하였다. 함선을 설계한 선공감의 정(正 - 정3품) 이윤손이 멀미에 시달렸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내려왔다.
“찬보(纘甫 - 이윤손(李尹孫)의 호)어르신 아니십니까? 이런 머나먼 신농도까지 어인 일로 방문하신 것입니까?”
“어르신이라 하였는가? 주상전하께 교지가 내려왔으니 직접 전달해 주겠네. 앞으로 같은 품계가 되었으니 어르신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아도 좋다네.”
이윤손이 전해준 교지를 펼친 한명회는 웃음을 참느라 노력하였다. 품계를 올려 탐검사의 정으로 배정할 것이며 일 년간의 항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궁금한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기존에 사용하던 대방선과 방패선을 보내시지 않으시고 새로운 함선을 내려 보내신 겁니까.”
“주상전하의 명일세. 기존 대방선의 수명이 너무 짧아 계속 사용하면 손실이 막대해질 것이니 새로운 함선인 풍역선(風繹船 - 바람을 다스리는 배)을 사용하라 명하시더군.”
한명회는 팔짱을 끼고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풍역선을 바라보았다. 그가 항해를 하며 얻은 경험대로면 항해사들이 익숙해지는 일만 해도 두 달은 걸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선체 앞에 튀어나온 돛대에는 거대한 삼각돛이 있었으니 측풍을 받아 바람을 거스르며 나아가기 좋아 보였다. 하지만 돛이 늘어난다는 말은 더욱 높은 숙련도를 요구한다는 말과 같다.
심지어 선체 앞의 돛과 다른 돛이 밧줄로 연결되어 있으니 함부로 제거하지도 못하는 녀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밧줄은 차고 넘친다는 사실이었다. 한명회는 조선에서 만든 삼베 밧줄을 만지며 말했다.
“우산도를 다녀오는데 성공하였다면 대양을 다니는 일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밧줄이 제법 많이 들겠지만 좋은 밧줄의 재료를 구하였으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밧줄을 만드는 일에 보탬이 된다 하였는가?”
“명명하기를 여송마(呂宋麻 - 필리핀 삼)라 하였는데 옷을 입기엔 거칠고 질기지만 오히려 돗자리를 만들거나 밧줄을 만드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선공감에서 즐겨 쓸 물산이 아니겠는가. 대양도에서 재배하면 좋을 것이니 가지고 돌아가겠네.”
이윤손의 얼굴을 보며 한명회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공을 세워 출세할 욕심으로 일하였지만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명회가 배를 바라보다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였다.
“돛은 그렇다 치고 선수와 선미에 활수창이 없습니다. 혹여나 활수창을 닫아두신 것입니까?”
“풍역선은 활수창이 없고 선체 하부에 철광석과 같은 무거운 물품을 넣어 균형을 맞춘다네.”
“그렇다면 배가 흔들릴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일전에 난파하였을 적에 활수창을 닫고 천자총통을 넣었습니다만 항해하는 일이 고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방도가 없네. 알다시피 활수창을 통하여 바다벌레가 들어간 대방선은 삽시간에 망가지지 않는가.”
결국 내구성을 위하여 선체 균형을 포기한 것이니 항해 난이도가 올라갔다. 새로운 함선에 적응하기 위한 항해 연습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명회는 많은 경험을 쌓아 뛰어난 항해사였으며. 휘하 선원들도 그러하였다.
그렇게 1466년 9월이 되어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9개월이 흘렀다. 1467년 6월, 한명회를 시작으로 한 조선의 함대는 가까스로 목적지인 타히티에 도착했다. 선원들을 인솔한 박노포의 계산보다 삼 개월이나 늦게 도착하게 되었지만 돌아갈 일이 남았다.
드넓은 백사장과 이가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드넓게 펼쳐진 풍경은 조선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해안가에 바닷바람에 삭아 들어가는 한복을 입은 이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타히티라 하였는가. 명명하기를 일호천도(一壺天島 - 호리병 속의 하늘, 이상 속의 낙원을 뜻함)라 하길 정말 잘하였군. 무릉도원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곳인데······.”
폴리네시아인의 전승은 해류와 방향을 명확하게 지시할 수 있었으며. 열대기후에 살던 이들이니 기상이변은 즉각 파악하여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명회를 시작으로 한 조선의 항해사들은 중요한 단어를 알아듣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를 배울 지경이었다.
그렇다 하여도 지겨운 항해였다. 보급이 꾸준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건면포(건빵)를 먹어댔고. 평소에 즐겨 먹었던 밀가루 음식을 떠올리니 헛구역질이 나왔다. 하지만 항해 기간이 길어진 이유는 한명회의 잔꾀 때문이었다.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꼴이라니. 철을 이렇게 좋아할 줄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동안 너무 많은 시일을 낭비한 것 같아서 답답하구려. 한 섬에 머물면 보름이나 시일을 보냈으니 환영이 너무 길어져도 문제요. 이러다가 손자가 돌잔치를 벌이고도 남겠소.”
“저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아이의 돌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박노포의 입에서 주자가례가 나왔지만 지겨운 항해를 달래려 주자가례를 가르쳐준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한명회였기에 아무런 도리가 없었다. 한명회는 지난 항해를 되새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한명회는 여전히 금전욕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의 실책을 떠올리며 정말 항해에 필요하고 남들이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물건을 가져가서 팔아치울 생각을 했다. 그렇게 고심하다 약간의 수익을 거둘 방법을 떠올리게 되었다.
풍역선은 선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선체 하부에 철광석과 같은 무거운 물건을 채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돌도 상관이 없었지만 무거운 물건이면 더욱 좋았다. 그래서 잡철을 잔뜩 사들여 선체 하부에 적재하였다.
“기껏 해야 잡철인데 잡철 한 조각에 하인을 자처하고 진주를 쥐어주다니!”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이러한 섬에 철을 캐내는 곳이 있을 리가 없지요.”
현지 보급을 위해서 금과 은은 물론이고 진주나 귀갑(龜甲 - 바다거북 등껍질. 이 시대에는 귀금속의 일종으로 쓰인다)을 잔뜩 챙겨갔었다. 하지만 금과 은에 시큰둥하던 이들이 잡철을 보자 돌변하였다.
사방에서 귀중한 물건들이 쏟아졌다. 진주는 수백 개가 넘게 쌓였으며 조선에서는 부르는 것이 값인 흑진주가 오십 개나 있었다. 한명회는 약간의 수익을 챙기려 하였지만 너무 많은 수익이니 대부분 나라의 재산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폴리네시아인은 더 많은 철을 얻어내기 위해 시종을 자처할 지경이었고 선원들은 사치와 향락을 누리기 위해 배에서 잡철을 꺼내 팔아치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선 이는 마일용이었다.
마일용은 신농도의 사람들에게 입신체비를 퍼트린 공을 인정받아 새로 생길 입신체비장의 체장이 되기로 정해진 사람이었지만 기나긴 사치와 향락으로 근손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섬인 양상도(兩廂島 - 사모아)에 도착하기 직전 한명회에게 말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시일을 보내고 있으니 조선에 돌아가는 일은 내후년이 되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잡철을 이렇게 귀중하게 여기는 이라면 좋은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마일용이 제안한 방법은 이러했다. 선원들이 몰래 철을 가져가서 축제가 이어지고 사치와 향락이 계속 되니 정해진 양을 지급하며. 그 양은 섬에 있는 장정이 들어 올리는 대역기와 같은 무게로 정하자고.
‘이들에게는 귀한 철이지만 귀하다 하여 함부로 버릴 것이 아닙니다. 저희의 본분은 타히티라는 섬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명회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수익이 생겨도 나라의 것이 될 상황이니 금전욕이 생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마일용은 하나의 꾀를 더 부렸다.
“자! 공좌(스쿼트)의 방법을 알려줬으니 시도해 보아라! 조금은 늘어나지 않았겠느냐!”
“으억! 으아아아악! 이게 얼마나 된다고! 이게 몇 근입니까?”
“이백 근에 조금 모자라는구나. 하지만 네가 며칠 전에 들어 올렸던 무게는 백칠십 근이 아니었느냐. 입신체비의 위대함을 이제야 알겠느냐?”
“이렇게 마나를 모으면 위대한 전사가 될 겁니다! 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보급과 휴식에 걸리는 시간은 적게 잡아도 열흘이었다. 마일용은 이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섬에 있는 장정들에게 입신체비를 퍼트렸다. 가장 간단한 삼대 운동이지만 충분한 성과가 있었다.
조선과 접촉하고 공좌를 시도한 장정들은 기껏 해야 이백 근(128kg)을 들어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입신체비를 배우면 배울수록 무게가 늘어났으며 삼백 근(192kg)에 도달하는 이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입신체비에는 올바른 자세와 올바른 근육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아무리 체격이 건장하여도 이러한 방법을 모르고 있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근력(실제로는 아니었지만)에 열광하였다.
“내가 한 것은 상향(上向)공좌(하이바 스쿼트)다! 공좌의 근본이 되는 동작이며 가동범위가 가장 크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무게를 들려 하면 하향(下向)공좌(로우바 스쿼트)로 방식을 바꾸어라.”
“더욱 많은 무게를 들 수 있다 하셨습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하향공좌는 등의 삼각근에 대역기를 얹고······.”
근육의 가르침이 폴리네시아인에게 퍼져나갔다. 신농도 원주민과 달리 철저한 유교 지식이 뒷받침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근력을 기르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훗날 다른 함대가 방문하여도 조선의 이름을 기억하고 조선의 편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한명회가 생각을 거듭하던 가운데 박노포는 무엇인가 떠올렸는지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압구 어르신. 조선으로 빨리 돌아갈 방법이 있기는 한데 여기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라서 확신이 없습니다.”
“여태 여기에 있었소? 그런데 그 방법이 위험한 것이오?”
더 이상 얻을 수익도 없었다. 이대로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아홉 달을 바다에서 떠돌게 되리라. 도박이나 다름없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제법 위험합니다. 북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키리바시라는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약간 남쪽의 일부 바다에는 해류와 풍향이 모두 서쪽으로 일치하는 곳이 나온다 하더군요.”
“해류와 풍향이 모두 서쪽으로 일치한다 하였나? 그렇다면 두 달이 걸릴 항해가 한 달이 될 일이 아닌가?”
“하지만 항로를 잘못 찾아 키리바시까지 향하면 역으로 해류와 풍향이 동쪽으로 움직이게 변하고. 너무 남쪽에서 해류를 따르면 방향이 어긋나 신농도에 향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함대를 이끄는 선장으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잘만 하면 여섯 달이 걸릴 귀향을 넉 달로 단축시킬 방법이었지만 애꿎은 목숨을 바다에서 날리느니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일을 하다 잘못하면 물귀신이 되는 것일세. 아쉽지만 포기하도록 하세나.”
한명회는 모르고 있었지만 폴리네시아인이 추천한 경로는 훗날 마닐라 갈레온이 사용하는 남적도 해류와 무역풍이었다. 그렇게 역사적 발견을 뒤로 한 채 한명회의 함대는 조선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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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 11월, 겨울 추위를 뚫고 장병들이 입김을 피워 올리며 대열을 형성하고 있었다. 권절의 감독과 홍윤성의 지휘 하에 진법 훈련이 시작되었다. 일반 합동훈련이 아니고 훈련원 휘하 삼군이 집결한 훈련이니 모인 이들이 많았다.
가용 인원을 모두 동원하니 훈련원 휘하 삼군의 수효는 일만에 달하였고 여기에 교대로 운영하는 갑사들이 끼어들어 일만 오천에 달하는 거대한 군세가 되었다. 형님과 홍위 여기에 여러 종친과 의정부 관원까지 모여 숨이 막힐 지경이리라.
“진형을 갖추어라!”
“진형을 갖추라 명하신다!”
형님의 명령 한 마디에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이전 철령 전투와 하르빈 전투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에는 오백 단위의 병사가 뭉쳐 움직였다면 이제는 질서정연하게 맞물리는 모습이 거대한 기계와 같았다. 그렇게 병사들은 거대한 사각형 대열을 만들었다.
“훈련원 휘하 삼군이 모여 집성진(集成陣)이루니 참으로 보기가 좋구나! 세자가 보기에는 어떠하더냐.”
“참으로 대단한 진법이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창안하셨던 오위진법(五衛陣法)이 오백 이상의 병졸을 이끌지 못하였는데 집성진에 포함된 병졸만 하여도 오천에 달하지 않사옵니까.”
“실로 그러하구나. 훈련원 지사 홍윤성의 고생이 남달랐을 것이다.”
이 시대의 진법(陣法)은 단순히 진형을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군사들이 시행하는 기초 전술이자 무기 사용법의 집결체이며 군사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니 진법이 부족하다 여긴 것이 형님이었다. 숙련도가 높은 훈련원 휘하 삼군이라지만 이런 진법을 창안하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홍위는 홍윤성이 머무는 본영을 바라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홍윤성은 참으로 뛰어난 인재이옵니다. 작금에 이르러 홍윤성을 따라올 무장이 없으니 아바마마께 진심으로 흠복(欽服)하는 이가 아니겠사옵니까.”
“세자의 말이 옳다. 지금까지 홍윤성의 경험이 집성진을 만들었지만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하더구나. 집성진은 즉각 초요진(招邀 - 부르고 맞이하다)으로 변환하라!”
집성진이 움직이더니 삽시간에 요철과 같은 형상을 갖추었다. 천리경을 들어 보니 튀어나온 부분에는 창병과 미늘창병 그리고 보총수가 중점적으로 배치되었고. 움푹 들어간 부분에는 방패수와 기병이 중점적으로 배치되었다.
“세자가 보기에는 어떠하더냐.”
“아직 배움이 부족하여 군문의 일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영의정이 보시기에는 어떻소?”
“얼핏 보면 집성진에 빈 틈이 생겨난 것 같지만 빈틈이 아니고 거대한 덫입니다. 약한 부위라 여겨 들어가면 들어가는 와중에 후속병력이 끊기고 기병의 돌격이 시작될 것이옵니다.”
이징옥의 평가에 만족했는지 형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일에는 이징옥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는데 형님의 입에서 난데없는 이야기가 새어나왔다.
“영의정은 참으로 고생이 많소. 그러고 보니 일 년 전에 사직을 청하였는데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고 있었소.”
“하오나 주상전하께서 이러한 대업을 원하고 계시지 않았사옵니까. 그저 늙은 몸이 한스러우며 사직을 청한 일이 송구스러울 따름이옵니다.”
“그러하면 사직을 윤허하겠소. 훈련이 끝나는 대로 좌의정 한확을 새로운 영의정으로 올릴 것이오.”
이징옥의 사직을 윤허했다! 이징옥은 난데없는 선물에 기뻤는지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맹전은 자신의 사직을 원하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형님이 이맹전을 돌아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우의정도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보름 뒤에 사직을 윤허할 것이니 몸을 다스리고 후계를 양성하시구려. 다만 도성에 머물도록 하시오.”
순식간에 삼정승 가운데 둘의 사직을 윤허한 형님을 보고 의정부의 관원부터 명령을 하달해야 하는 권절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형님의 명령은 계속되었다.
“무엇을 하느냐! 적진을 꿰뚫을 낭창진(狼槍 - 이리가 치다)을 만들어라!”
훈련의 마무리는 진형을 갖추는 동안 산을 넘어 가상 적진의 후방을 기습한 임해도감이 마무리 하였다.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으나 신료들 모두가 놀라서 형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은 신료들을 뒷전에 두고 훈련의 평가에 여념이 없었다.
“아국의 병사들은 지금껏 오백 단위로 뭉쳐 움직였다. 북방의 야인들이 날뛸 적에 진을 창안하여 생겨난 약점이며 수효가 일천 명이 넘어서면 일자진(一字陣)외에는 택할 진법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진법을 창안하였느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하니 나의 일이 끝난 것 같구나. 다음 달에 세자에게 양위할 것이다.”
“아바마마! 소자는 아직 미욱하옵니다.”
당연히 홍위는 엎드려서 형님의 뜻을 되돌리고자 노력했다. 이게 단순한 양위 시도일수도 있지만 세자의 마음을 시험하는 자리일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건 간에 세자는 엎드려 뜻을 돌리게 만들어야 한다.
형님은 아무런 말이 없이 홍위를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한동안 홍위의 얼굴을 바라보던 형님은 낮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하였다.
“그렇다면 마흔이 되어서 내가 쇠한 다음에 권좌에 오를 셈이더냐. 나라의 일이 순탄하지 않으며 북방의 도적과 남방의 도적이 들끓고 있는 판국이다. 군사에 능통하지 않아도 당분간 군권을 물려주지 않을 작정이니 염려하지 말라.”
“소자는 기껏 하여야 공조판서와 치수를 행하고 숙부의 도움을 받아 북방을 잠시 다스린 것이옵니다. 아직 미숙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내가 세자로 있을 적에는 잡무를 행하고 군기시에 머물며 포연을 들이켜는 일만 하였느니라. 재능은 차고 넘치며 경험은 부족함이 없으니 더 이상 뜻을 거스르지 말라.”
형님의 뜻이 정해졌다. 그렇게 새로운 왕이자 본래 역사의 단종, 새 역사에서는 아직 시호가 정해지지 않은 왕이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