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23화 - 시대의 흐름(2) >
1467년 1월, 동지사가 복귀한 직후이지만 조정의 분위기는 냉랭하였다. 정산대군이 자신 있게 보고를 올리고 있지만 생소한 정보가 잔뜩 들어있었다. 요동의 병사들이 북원을 공격하여 팔천 개가 넘는 수급을 거뒀다는 소식이었다.
형님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올해에 양위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며 이미 세종대왕님이 머물고 계실 이궁을 대신하여 경덕궁(慶德宮)을 중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변수가 더 생긴 꼴이었으니까.
정산대군은 일이 이렇게 돌아갈 것이라 예측하지 못하였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형님은 아직 일에 능숙하지 못한 정산대군 대신 뒤에 서 있는 신숙주를 보면서 말하였다.
“예조판서에게 다시금 확인하고 싶도다. 명국에서 정녕 그러한 말을 하였는가.”
“명국의 황제는 아낌없이 요동 총병관인 석형의 일을 칭송하며 사례감 태감인 조길상이 증좌를 확인하고 시찰을 하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고 있사옵니다.”
“일전에 하르빈 전투에서 얻어낸 수급이 별동대와 본진을 합쳐서 팔천 개였다. 혹여나 석형과 조길상이 전공을 부풀리려는 마음에 아녀자의 수급을 합산한 것은 아니더냐.”
“노인과 아직 청년도 되지 못한 아이들의 수급이 있었지만 절반 이상이 성인 남성의 수급이라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적어도 삼 년 동안 사천 개 이상의 수급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원래 역사의 석형은 오이라트가 처음 침략한 대동에서 참패를 거듭하고 북경공방전에서 가까스로 체면치례를 한 졸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맹장이 되었단 말인가?
같은 정주민족을 상대로 저런 전과를 올렸으면 이해할 수 있다. 인구도 많으며 병력도 많고 병력 각각의 질을 따져 이득을 극대화하고 손실을 줄이면 되니까. 하지만 상대는 유목민족이다.
조금만 불리하여도 퇴각하길 주저하지 않고 유리한 지형을 노려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형님 또한 이러한 점을 알고 있는지 초조한 얼굴로 이징옥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의정이 보기에 석형이 어떠한 장수라 여겨지는가.”
“전공이 사실이라면 천하의 명장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하오나 북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사리에 맞지 않으며 기묘한 일이 있사옵니다.”
“사리에 맞지 않으며 기묘한 일이라 하였는가? 무엇이 기묘한지 상세히 이야기하라.”
“북방의 일인지라 주상전하의 귀를 어지럽힐까 염려하여 증좌를 찾던 중이었사옵니다. 하지만 요동의 일과 완전히 상반되어 있으니 주상전하께 고변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지옵니다.”
잠시 물러난 이징옥이 장계 여러 장을 들고 와서 형님 앞에 섰다. 이윽고 이징옥의 입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최근 삼 년 동안 경원부 일대와 솔빈 일대. 그리고 하르빈 일대의 송화강 유역에서 열 살 이상의 늙은 말이 꾸준히 요동 일대로 팔려가고 있사옵니다.”
“열 살 이상의 늙은 말이라 하면 대체 어디에 쓴다는 말인가? 군마로 쓰인다 하여도 구색을 맞출 정도에 불과하지 않는가.”
말의 수명은 25년이 평균이지만 군마로 쓰일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체력과 근력을 감안했을 때 군사 용도로 쓰이는 말의 한계 수명은 10세 정도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준마라 하면 4~6세 정도의 말이다.
8세만 되어도 경험으로 부족한 체력을 무마할 지경에 이르러서 오래 쓰기 힘들다. 당장 명나라에 보내는 말은 6세를 넘은 늙은 녀석이니까. 이징옥도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지 애써 변명하듯 말했다.
“요동 일대에서 구매하는 자는 건주 양위의 잔당에 속한 이들이라 하였는데.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몰라도 은자를 들고 와서 거래하는 일이 잦다 하였사옵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로구나. 본래 건주 양위에 속한 이들이 말을 팔면 모를까. 이는 순리에 어긋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하면 혹여나 요동 일대의 정황을 염탐하려는 일은 행하였느냐.”
“몇몇 관원을 보내 시도하여 보았으나 문전박대도 모자라 창날을 들이밀며 쫒아냈사옵니다. 기세가 흉험하였기에 방도가 없다 하옵니다.”
모든 일이 앞뒤가 맞지 않으니 형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알고 있으니 명나라 말기의 일이라 가정한다면 해답이 나오기는 했다.
행정력이 붕괴해서 위소제와 이갑제가 모조리 상실되고 무법천지가 된다. 병사와 도적의 구분이 없어지며 백성들은 아무런 땅에 이주해서 아무렇게나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서류상으로 완벽하고 실제로는 허상인 국가가 완성되는 것이다.
도적들과 백성들이 무장을 하고 전쟁을 벌이며 군대는 돈을 받고 고용된 도적들이 대신한다. 하지만 이건 백 오십년 뒤의 일이니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형님은 답답한지 정보를 얻을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요동에서 탈주한 유민들의 소식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가혹한 통치에 시달리다 도주를 결심하였으니 상세한 일은 알지 못하였지.”
“그렇사옵니다. 요동 총병관인 석형의 통치를 비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사옵니다.”
“생각하여 보니 달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구나. 토묵특(土默特 - 투메드 부)은 요동의 북방에 있으며 석형이 수급을 취한 달자들은 토묵특에 속한 달자들이 분명하구나.”
가장 확실한 정보는 투메드 부에 소속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형님은 생각을 거듭하다 이맹전을 빤히 바라보았다.
“작년 말엽에 홀리늑태(忽里勒台 - 쿠릴타이)에 참가하라는 서한이 당도하지 않았더냐.”
정산대군의 동지사가 출발한 직후 북원에서도 사절이 도착했었다. 칸의 자리에 있는 타이순이 늙고 지친 나머지 양위를 원하고 있으니 쿠릴타이가 1467년 4월에 열릴 것이며 참가하지 않아도 약조에 의거하여 1회의 권한이 사라진다는 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철령 전투에서 사로잡힌 타이순 칸은 굴욕적인 조약인 기사(己巳)약조를 맺었고. 대부분 지켜진 약조 가운데 마지막 한 가지 항목이 남아 있었다. 2회에 한정된 예케 쿠릴타이 참석 권한이었다.
본래 참가관원으로 우의정인 이맹전이 내정되어 있었다. 나이가 많은 관료이며 몇 년 동안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사직을 청하였지만 형님이 사직을 윤허하지 아니하고 있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안경(眼鏡)을 쓸 수 있도록 허하겠다. 상왕께서 행차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안경을 벗지 않아도 좋다.’
‘귀가 들리지 않으니 내관을 붙여 필담을 작성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아직 허리가 굽지 않았는데 귀가 상하다니 애석한 일이로구나.’
‘입신체비기구에 쓰이는 물산을 활용하여 먼 길을 다녀도 파손되지 않는 마차를 만들었으니 달자들의 수도인 대도까지 다녀오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공조 장인들이 한껏 솜씨를 부려 만들어내는 마차에는 대나무와 굴참나무 껍질을 활용한 충격 완충장치가 달려있었다. 그렇게 이맹전이 식은땀을 흘리며 형님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아국이 대총 한과 맺은 약조에는 홀리늑태의 참가 권한을 종1품 이상의 관료나 종친이라 정하였다. 왕실 종친인 효령대군이 하르빈의 흑룡사에 머물며 토번의 승려와 함께 불사를 올리고 있다 하더구나.”
“옳은 말씀이옵니다! 전하!”
“그러하니 우의정은 속히 하르빈으로 나아가 효령대군과 함께 홀리늑태에 참가하여 상세한 일을 알아보아라. 토번의 승려가 인근 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모든 일이 평안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신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이맹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형님을 빤히 올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조회가 끝나고 돌아가려는 찰나 형님이 나를 다시 불렀다.
“생각하여 보니 맞이하러 갈 사람이 필요하지 않더냐. 홀리늑태가 끝나고 두 달이 지나면 효령대군과 이맹전이 하르빈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들을 맞이하려무나.”
“저는 달자들의 도읍인 대도로 저를 보내실까 염려하고 있었사옵니다.”
“종친이 둘이나 움직이면 될 일도 아니 될 것이다. 그러하니 효령대군이 도성으로 올라올 때 보좌하여라.”
그나마 나은 일이라고 했지만 결국 지겹고 또 지겨운 하르빈에 다시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고 1467년 6월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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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벌판에서 한 떼의 기마병이 먼지를 피워 올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타이순 칸이나 그의 후계자가 보낸 호위병이라 여겼는데 규모가 너무 컸다.
“적어도 천 이상은 되는 거대한 규모일세.”
“아무리 홀리늑태가 중요한 일이라 하여도 너무 많은 수효가 아닙니까?”
“수레도 제법 많이 있군. 아무래도 누가 인근으로 이주하는 것 같다네.”
행렬이 분열하더니 한 행렬은 송화강을 거슬러 오를 준비를 하는지 조선 관리의 도움을 받아 배에 짐을 올리고 있었으며 다른 행렬은 하르빈 맞은편에 있는 나루터에 멈췄다. 이윽고 정갈한 옻칠로 장식된 마차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뛰쳐나왔다.
효령대군은 마차에서 내리더니 엉덩이를 매만지고 허리를 펴면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더는 볼 수 없었기에 뛰어가서 효령대군의 손을 잡았다.
“중부님을 모시러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편찮으신 곳은 없습니까?”
“편찮았으면 어찌 하란 말이더냐! 주상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다. 칠순이 넘은 노구에게 이러한 과업을 내리시다니. 그나마 희마납아(喜馬拉雅 - 히말라야 산맥)를 넘는 일에 비하면 편하였지.”
“새로 설계한 마차가 효험이 없었단 말입니까?”
“효험은 있었다. 딱 열흘 동안 효험이 있다가 축이 부서졌으니 이후로 마차가 계속 요동쳐 허리가 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도와준 덕분에 가까스로 홀리늑태에 늦지 않게 되었다.”
한숨을 쉬면서 허리를 매만지는 효령대군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카라코룸까지 왕복 거리는 4,000km인데 여기를 어떻게든 다녀온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도왔다?
“중부님께서 하르빈에 머물며 달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하였지만 머나먼 곳의 달자들이 어떠한 도움을 준 것입니까.”
“네가 오사만국에 다녀오는 동안 내가 토번에 다녀오면서 황모파(겔룩파)의 승려들을 아국으로 데려오지 않았더냐. 승려들과 함께 움직이니 사방의 달자들이 구름과 같이 몰려들었다.”
“중부님께서 승려들 덕분에 덕을 본 일은 좋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듣자 하니 와라부(오이라트)의 수뇌 야선(에센)이 퇴각할 적에 승려들을 모조리 끌고 준갈이(準噶爾 - 준가르) 분지로 도주하였다 하더구나.”
끝까지 훼방을 놓는다는 명목이겠지만 덕분에 북원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졌으니 잘 된 일이다. 효령대군은 미리 준비한 차를 마시더니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덕분에 토번에서 데려온 승려 스무 명 가운데 열 명이 달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남는다 하였다. 그렇다면 홀리늑태의 이야기를 할 것이니 들어오너라. 우의정도 이야기를 하면 좋겠네.”
본래 형님에게 보고해야 할 일이지만 나도 알 권리가 있다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아무런 말이나 하는 것일까.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본디 홀리늑태는 달자들이 국정을 다스릴 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국이 참가한 대 홀리늑태(예케 쿠릴타이)는 대총 한(타이순 칸)이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선양의 뜻이 있었사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요. 그렇다면 토묵특에서 온 이들의 말은 들었소?”
“충분히 들었습니다. 전쟁은 없으며 하르빈 전투 이후 건주 양위의 포로들에게 농업을 받아들인 고장이 토묵특 남부입니다. 이들은 달자들이건만 농업에 힘쓴다 합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반농반목이라는 생활방식도 있으며 몽골 고원의 지독한 건조기후 비하면 요동 북부는 농사가 가능한 정도의 건조함이니까.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군사력도 약화되겠지.
그렇게 보고가 이어졌다. 북원은 조선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양분되어 있지만 지나치게 길어진 내전으로 안정을 추구하고 있으며 새로운 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찰나였다. 어서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 효령대군이 사람을 불러 밖으로 보냈다.
“우의정과 나의 말은 온전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차라리 탈탈불화(脫脫不花 - 톡토아부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빠르지 않겠느냐.”
탈탈불화가 누구지? 그러고 보니 행렬이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고위 귀족이 아닐까.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익숙한 얼굴이지만 오랜 간만에 보는 얼굴이 들어왔다.
“타이순?”
“근육괴물은 여기 왜 있는 겁니까! 칸의 자리를 물려줬더니만 이 괴물딱지를 만나게 되다니! 총카파께 수계를 받은 제일제자께서 이게 무슨 일입니까!”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타이순 칸이 나를 보더니만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췄다. 하르빈 전투 이후 오랜 간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움이 몰려왔지만 타이순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잘 들어! 나는 더 이상 칸이 아니야. 칸의 자리는 장남인 토구스멩케한테 물려줬고 녀석은 멀런 칸이 되었다. 나는 은퇴해서 투메드부에 머물러 했던 거야!”
“장남? 보통 말자가 상속하는 것이 평범한 일 아닌가?”
“토구스가 조금 잘 싸웠어야지. 마르코르기스는 전쟁 중에 죽었고 여하튼 나는 더 이상 조선이랑 관계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해라.”
멀런 칸은 어서 들어본 이름인데 살해당했었나? 하지만 역사가 변해 전공을 세웠다면 귀족들을 휘어잡을 수 있으니까 후계 구도는 안정적으로 잡았다. 타이순이 눈치를 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조정에서 이상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너희들과 전쟁을 벌여 수급을 팔천 개나 얻었다고 하던데 투메드부의 사람들이 손해를 많이 보았나?”
“전쟁? 수급 팔천 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투메드부의 장정이 삼만 명이 조금 넘을 것인데 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다면 보고가 들어올 것은 분명하잖아?”
“투메드부가 장정 삼만 명? 그렇다면 인구가 이만 호가 넘어섰다는 소리냐?”
“당연한 말이지! 지금 예케 몽골 울루스에서 가장 부유한 고장은 투메드부 남부다. 더 이상의 전쟁도 없을 곳이니 말년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장소지.”
내전에서 강해진다 하여도 확고한 구심점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십 년이 넘게 양분된 내전은 사람도 나라도 피폐하게 만들기 충분하고 남음이 있었다. 북원의 승전으로 끝났다 하여도 후환이 남아 있었다.
북원의 승전은 에센의 죽음 이후 오이라트의 구심점이 사라져 버린 탓이 컸다. 에센의 후계자 가운데 뛰어난 무훈을 쌓은 이는 없었다. 있긴 했는데 하르빈 전투에서 이징옥의 칼에 맞고 죽어버렸다.
결국 병력은 우세지만 구심점이 없어서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북원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오이라트 잔당을 공격했다 역으로 결집할 빌미를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본래 형님이 원한 구도는 수십 년 동안 내전을 이어가는 것이지만 이런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타이순에게 물어볼 것은 아직도 많았다.
“그렇다면 재위에 오른 네 장남은 조선이나 요동을 칠 이유나 명분은 있고?”
“적어도 이십 년 길게는 사십 년은 숨을 죽인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예 불가능하다. 원정에 나서봤자 삼 만을 쥐어짜내는 것이 전부이고 여기서 패전하면 오이라트가 다시 일어나겠지.”
“네 장남이 오이라트의 명줄을 끊어버린다면?”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했지! 자리를 물려준 이유도 더 이상 전장에서 지냈다가 늙어 죽을 것 같아서 선양한 것인데!”
생각해 보면 몽골 기준으로 50세면 정말 죽음을 앞둔 노인이나 다름이 없다. 너도 나도 늙어가는 와중에 옛 추억이 샘솟기는 하지만 이 나이 먹고 내수린을 할 수도 없으니 참아야지.
술을 한 잔 줬지만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했다. 그러면서 우유로 만든 차는 넙죽넙죽 마시는 것을 보면 알코올 중독을 극복해서 다행이다. 그렇게 타이순은 이런 저런 정세 이야기를 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는 편안히 살려고. 투메드부는 지난번 전쟁 이후로 살기 편안한 고장이 되었고. 바얀 뭉케 녀석은 귀족들에게 암살당할지도 모르니까.”
“뭉케라 했나? 무슨 죄라도 지은 가문의 후손인가?”
“내 아들이지만 에센의 조카이기도 하다. 본래 에센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돌아갔다면 녀석이 칸의 자리에 오르고 에센이 섭정으로 군림했겠지. 그래도 자식이니 정이 들어서 내치지는 못하겠어.”
뭔가 역사상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후계구도가 뒤틀려 버렸으며 몽골 최후의 명군인 다얀 칸의 존재는 사라져 버렸겠지.
“좋은 정보였다. 혹시나 요동을 손대지는 말아라. 우리도 요동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하르빈에 주둔중인 오천의 갑사들과 일만의 기병들이 모조리 공격할것이고 이런 일은 말리지 못한다.”
“요동에서 우리 쪽에 공격이나 하지 말라 해라! 케시크(호위병)는 당연히 있고 머무는 병사만 투멘(만 명)에 이르니 몇 만 정도는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타이순도 나름 위협은 했지만 조선의 강병들과 싸울 생각을 했는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결국 투메드부에 전쟁이 없었으니 앞으로의 일이 골치가 아파진다.
정말 나의 예측이 옳으면. 요동의 행정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오로지 보고만 제대로 올라가는 상황이며 석형이 도적을 토벌하면서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다면 요동은 도적의 소굴이나 마찬가지이다.
영덕제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석형과 환관의 수뇌인 조길상이 요동의 소식을 전할 이유도 없으니까. 토벌할 수 없는 도적들이 무한대로 생겨나는 지옥도일지도 모른다. 한양으로 돌아와 형님에게 보고를 올리니 적지 않게 놀란 눈치이다.
“대총 한이 그런 말을 하였단 말이더냐. 왕위를 선양하고 탈탈불화(脫脫不花)로 돌아가 야선의 혈통을 이은 아들과 조용히 살겠다고?”
“이미 요동 인근의 토묵특으로 이주할 마음을 정하였으며 하르빈에 잠시 들렸사옵니다.”
“그러하면 잘 된 일이다. 아국의 변방이 어수선하지 않으니 대업을 이루기에 적당하지 않아도 내실을 다지고 통치를 행하기에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나름대로의 예측과 역사를 섞어 요동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지만 형님은 코웃음을 치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의 뜻은 더욱 웅대한 것이었다.
“요동에 도적이 들끓는다 하면 아국을 침략할 것이 분명하구나.”
“그렇사옵니다. 실로 불순한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옵니다.”
“도적들이 더욱 왕성해진다 하여도 아국의 병사들은 강성하기 이를 데 없으니 도적 따위는 격퇴할 수 있다. 이윽고 명국이 요동을 포기하게 되면 아국이 권리를 내세워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머나먼 훗날의 이야기는 홍위의 대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후대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모를 일이지만 방침은 정해졌다.
다만 요동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는 궁금하다. 나도 명나라 말기의 행각에 대한 지식만 있고 실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