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84화 (184/573)

< 2장 122화 - 시대의 흐름(1) >

현동이에게 보낸 갑골문은 제법 큰 파장을 불러왔다. 기껏 해야 네 개에 불과하지만 얼핏 보면 한자와 비슷하여도 해석할 수 없는 문자가 들어온 것이니까.

나도 문자의 해석은 불가능하니 현동이는 안평대군을 찾아갔다. 안평대군은 서예와 회회에 능해 지식이 풍부하며 현동이와 친한 자이니 가장 확실한 상대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현동이가 안평대군을 찾아가고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안평대군은 밤을 지새웠는지 핏발이 선 눈으로 나의 집으로 돌아와 하소연을 하였다.

“분명 문자는 맞지만 저도 몇 글자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기껏 해야 일(日)이나 월(月) 정도가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사흘 내내 고심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구나. 그래도 몇 글자는 알게 되었다니 방법이 궁금하구나.”

“이현전의 오사만국 학자들과 라마국의 사람을 통하여 서역의 문자를 배웠습니다. 듣자하니 고대에는 상형(象形)이라 하여 사물의 형태를 본뜬 문자가 있다 하였지요. 용골에 새겨진 글귀도 같은 방식입니다.”

역시 정답에 가까운 말이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눈을 비비더니 질린 눈빛으로 갑골문을 째려보았다. 여기가 안평대군의 한계인 것 같다.

“진전체와 흡사한 형상이기에 계속 알아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혹여나 저보다 많은 서책을 보신 아바마마라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세종대왕님을 만나보려던 참이었는데 적당한 핑계거리가 되었다. 오랜 간만에 현동이와 같이 이궁으로 찾아가자 세종대왕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며칠 전에 용이가 다녀오던데 무슨 일이더냐?”

“상왕전하께 보여드리고 싶은 기물이 있습니다. 용골이온데 진전체와 비슷한 필적이 적혀 있는 기물(奇物)이옵니다. 일전에······.”

지난날의 이야기와 구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세종대왕님이 고개를 끄덕이시며 감탄한 눈으로 갑골문을 바라보셨다. 그러더니 놀란 눈으로 갑골문을 들어 바라보시며 말했다.

“귀갑수골(龜甲獸骨 - 짐승의 뼈에 글을 새김)이구나. 한나라 시절에는 죽간목독(대나무와 나무를 사용한 기록)이 있었으며 간혹 귀갑수골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내 눈으로 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이상은 세종대왕님도 알지 못했다. 그저 갑골문을 종이에 옮겨 적고 반복해서 적으며 필적을 찾아 나가시다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계시다가 말했다.

“나도 해석할 수 없는 문자가 너무 많구나. 그러나 시대는 알게 되었다. 귀갑수골은 붓이 없던 시대의 것이 확실하구나. 죽간목독이 없던 시대의 것이니 붓이 없고 바늘과 같은 도구로 새긴 것이다.”

“붓이 없던 시대라 하셨사옵니까?”

“획의 굵기와 세기를 보니 확실하구나. 붓을 사용했다면 강약과 경중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귀갑수골에 나타난 흔적이다.”

“그러하면 전한 이전의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물건이라는 말씀이시옵니까?”

세종대왕님 또한 확답을 내릴 수 없어서인지 따로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시더니 갑골문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적어도 춘추시대 혹은 그 이전의 은(殷)이나 주(周)시절의 물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효가 적으니 문자를 알아차릴 방법이 없구나. 잠시 유와 이야기를 나누려 하니 현동이는 내가 즐겨 볼 수 있도록 갑골문을 탁본하여 두어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현동이가 탁본 도구를 들고 조심스럽게 문자를 베끼는 사이 세종대왕님과 나는 안뜰로 향했다. 안뜰에는 이미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차를 만들어 건네주었다. 요즘 유행하는 인도식 우유차인 것 같다.

차를 한 잔 들이켜니 향신료의 진한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든다. 세종대왕님은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네가 문자가 새겨진 용골을 구할 적에 상인에게 주문을 넣어 구하라 한 것이 맞느냐. 그러한 방법을 어떻게 생각하였느냐?”

“제가 직접 명국을 오갈 방법이 없으니 약재상을 통하여 구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종친이 이문을 얻으려는 일은 사특하지만 학문을 위한 일이라 여겼사옵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권세가에서 알음알음 상단을 지원하여 상업을 키우는 일이 있는데 종친으로써 학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상단을 지원하였구나. 요즘 상업이 중흥하는데 잘 된 일이 아니겠느냐.”

상업의 중흥은 나라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외국의 물자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교통 수요가 늘어나고 예산이 편성되며 도로와 교량은 지속적으로 건설되었다.

여기에 형님이 중고 선박을 헐값에 팔아넘겼다. 사용하고 5년이 지난 대방선이 대상이었고  항해사 가운데 연령이 많은 이들은 대방선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열대 해역에서 바다벌레의 침식에 당한 대방선은 수명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다시 열대 해역으로 내려가면 바다벌레가 달라붙으니 서행사와 탐검사에서 쓸 수 없는 물건이기에 스무 척 정도가 팔렸다.

팔려나간 대방선은 왜구 소탕으로 인한 해금령의 제한적 해제와 맞물려 중국을 오가며 지속적인 무역에 나섰다. 중국 사정에 능통한 유민들의 도움이 컸을 것이 분명하다. 세종대왕님도 알고 있는 말이니 오히려 이야기하기 편한 일이다.

“벽란도에 머무는 상단들이 사용하는 대방선만 하여도 열 척이 넘는다 하옵니다.”

“명국의 새로운 황제가 교역을 허가한 덕분이다. 어린 나이라 하여 아국을 겁박할까 염려하였는데 오히려 풀어주니 혜안이 있는 자가 분명하구나.”

“세월이 흘러 상단이 바닷길을 쉬이 거닐 수 있게 되면 흉물이나 다름없는 바다벌레가 말썽을 부리겠지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시 문제가 생겨나는 일이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종대왕님의 마음에 들었던 답 같다. 세종대왕님은 아무 말도 없이 웃으시더니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계셨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는데 너에게 자랑하고 싶은 서책이 있구나. 아직 제목도 정하지 못하였지만 너에게 반드시 보여주고 싶은 서책이었다. 윽!”

자리에서 일어나신 세종대왕님은 갑자기 흉통이 찾아왔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세종대왕님의 어깨를 잡고 의원을 부르려 하던 참이었다.

“아바마마!”

“소란 피우지 말거라.”

통증이 진정되었는지 세종대왕님은 허리를 펴시면서 나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심장병 같은데 아직 진행 단계인 것 같다. 하지만 고칠 방법이 없었다.

현대에도 일흔이 되면 성인병을 비롯한 노인질환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시대에 해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세종대왕님은 집어든 서책을 옆에 내려놓고는 다시 자리에 앉으셨다.

“이제 내 나이도 예순 아홉이다. 인생칠십고래희(일흔까지 장수하는 일은 드물다)라는 말도 있지 않더냐. 슬픈 것이 있다면 입신체비를 행할 수 없다는 것 하나일 뿐이다.”

자세히 보니 세종대왕님의 몸이 점점 수척해지고 계셨다. 아마 첫 통증은 입신체비를 하면서 노환으로 약해진 심장에 부담이 가면서 생겼겠지. 하지만 세종대왕님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설명을 계속 하였다.

“석 달 전부터 흉통이 시작되더니 간혹 이러는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이더냐.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이렇게 되는 법이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소자는 이러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불효라 여겨질 뿐입니다.”

“주상이 알게 된다면 나라의 일에 크나큰 해를 끼칠까 염려되어 숨겨 두었다. 비밀스럽게 불렀던 전순의가 말하기를 심부(心府)의 기가 약해지고 있으니 약재를 처방하는 것이 전부라 하였지. 하지만 약조차 함부로 마시기 힘든 형편이구나.”

호화로운 물건을 싫어하시는 세종대왕님이 우유차를 마신 것도 이해가 된다. 향신료는 약이기도 했으니 여기에 약재를 섞어 마시며 몸을 다스리신 것이다. 세종대왕님은 차를 모조리 마시고 말을 이어나가셨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양녕대군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죽지 않는 것이며. 아쉬운 것이 있다면 주상이 치세와 세자의 치세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영원히 살 수는 없느니라.”

“아직 아국은 갈 길이 멉니다. 새로운 영토를 아국의 것으로 만들며 더욱 넓은 세상을 만나지 않습니까. 탐검사도 새로운 땅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였다 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길어보았자 백 년에 불과하니 더는 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정음은 천 년을 이어지겠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자신이 남긴 훈민정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왈칵 치솟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세종대왕님은 내 등을 두드리시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갑골에 새겨진 문자를 보아라. 나라가 멸망하고 세월이 지나서 읽는 일도 힘들어지지 않았더냐. 하지만 정음은 어떠한 문자이더냐. 이미 정음을 아는 이가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

“정음이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 하셨사옵니까?”

“어찌하여 그렇게 자신이 없는 것이냐. 네가 정음을 창제할 당시에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아른거리는데 네가 잊어버리면 안 될 일이다.”

세종대왕님이 펼쳐주신 인쇄본 정음 교재의 마지막 장에는 [천 년이 지나도 이어질 문자니 필히 익혀라] 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세종대왕님은 웃으며 다른 서적도 보여주셨다. 놀랍게도 라틴어로 적힌 책인데 형식을 보니 사전이었다.

“라마국에서 아국에 배움을 얻으려 찾아온 자들이 있지 않더냐.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옛 글인 불가타라는 문자로 정음의 발음과 단어를 남기게 되었다.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

“아바마마의 뜻에 저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사옵니다.”

천 년이 이어질 문자라고 했지만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세종대왕님이 모든 일을 해결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세종대왕님은 먼지가 쌓여가는 입신체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주상도 조만간 이궁으로 내려올 것이니 이궁에 자리가 비는 일은 없겠구나. 그렇다면 네가 남길 일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저는 입신체비를 남겼으나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당장 입신체비 기구만 하여도······.”

너무 비싸고 일체형이지. 그래서 입신체비 기구를 완비한 입신체비장은 동궁, 나의 집, 연희당, 청계천의 네 곳에 불과하고. 그런데 왜 일체형이지? 현대에서는 조립해서 잘만 썼는데?

“어허. 생각에 잠겨있으니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더냐.”

“입신체비기구를 널리 퍼트리는 방책을 떠올렸습니다.”

아직 십 년은 정정하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입신체비를 더욱 널리 퍼트릴 기반을 마련하는 일도 쉬울 것이다. 현대에도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헬스기구를 수리했던 경력이 있는 나다.

조선은 예전의 조선이 아니다. 이미 기술과 문화면에서 비교할 수도 없이 발달한 나라가 되었으니 조립형 헬스기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네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그렇다면 훗날이 되어 입신체비와 정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이 퍼질 것인지 알 수 있더냐.”

“입신체비가 분명합니다.”

“입신체비를 즐기는 자가 세상에 열 가운데 하나라 하여도 대단한 일이로다!”

“정음을 말로 삼은 자가 세상에 열 가운데 하나라 하여도 대단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게 세종대왕님이 웃으시고 나도 웃음이 나왔다. 한글을 사용하는 인구가 10%? 꿈 같은 일이지만 일어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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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황실의 실세. 섭정이자 태상황인 정통제는 원래 역사보다 2년 늦은 1466년 6월에 숨을 거두었다. 격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정통제를 위문하는 사신의 행렬이 12월의 북경을 가득 메웠다.

조선에서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했다. 비록 원하는 일은 아니었어도 조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황제의 죽음이니 군마 사천 필을 포함한 조공을 가져온 것이었다. 심지어 사신단의 정사(正使)는 세자의 동생인 정산대군이었다.

부사로 배정된 도원군은 군마를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기록으로 보면 전국 팔도를 긁어내서 모아온 군마가 오천 마리였는데 이제는 사천 마리를 조공으로 보낼 정도로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사천 필에 달하는 군마라 하면 너무 많은 수가 아닌가.”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군어른께서 익히 아시다시피 아국에서는 한혈마가 생산되는 만큼 군마를 조공으로 보낼 뿐입니다. 이번에는 두 해 분량을 모은 것에 불과하지요.”

“한혈마라 하여도 조금 작은 녀석이 아니겠소.”

“그것이야 아국의 한혈마는 피가 섞인 녀석이고. 흑우는 순수한 한혈마인데 너무 거대한 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매 해마다 천 명 이상의 왜구를 소탕하고 수급을 보내왔으며 이천 마리 이상의 질 좋은 군마를 조공으로 바치고 있었다.

아직 국상(國喪)중이며 애도기간이니 화려하지 않은 간소한 연회와 면담이 이어졌다. 이윽고 조공품의 수량을 점검하고 황제와의 접견이 시작되었다.

황제가 되었을 무렵 어린아이였던 영덕제는 이제 스무 살을 앞둔 청년이 되어 있었다. 환관이 귓속말을 전하자 영덕제는 크게 웃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군마의 품질이 빼어나다 하더구나. 참으로 만족스러운 일이다.”

“아국은 오롯이 황제께서 내려주신 은덕을 칭송할 뿐이옵니다.”

“참으로 기쁘구나. 그러고 보니 월국(베트남)에서 훈련도감이라는 병사들이 공을 세웠다 하더구나. 훈련원이라는 관청이 생기고 휘하 병사들을 조련한다 하였는데 참으로 강병이구나.”

베트남에서 활약을 보이고 2년이 지나자 훈련도감의 소식이 명나라 황궁에 들어오게 되었다. 정산대군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지만 영덕제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바람직한 일이다. 요동병이 수천의 달자를 몰아치고 있는 정병 중에 정병인데 조선에서도 이러한 정병을 가지고 있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러하니 조공으로 군마를 보내는 것이 분명하겠지.”

“실로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요동의 병사가 싸움에 능하다는 말은 처음 듣게 되었사옵니다.”

“요동군을 지휘하는 요동총병관 석형(石亨)은 북경에서 승전을 거둔 자이며 여섯 번이나 달자들을 몰아쳐 도합 팔천 개의 수급을 얻어낸 명장이니라.”

“실로 감축 드리옵니다. 아국을 범하려 하는 달자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는데 요동에서 승전을 거듭한 덕분에 아국이 평안하게 되었사옵니다.”

하지만 정산대군의 얼굴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요동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궐 밖으로 나와 한가롭게 살고 있으니 소식에 늦을 수도 있지만 정도가 지나친 것이다.

옆을 돌아봐 도원군과 예조판서 신숙주와 눈이 마주쳤지만 둘 다 모르는 일이었는지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렇게 사신들이 침묵하자 영덕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수양대군 이유의 아들 도원군이 청할 것이 있다 하였느냐? 너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국에서 얻어갈 것이 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황상께서 은덕을 내려주시어 하남성의 안양이라는 고을에 잠시 머물게 허가하여 주시옵소서. 금석학에 심취하여 있는데 전조 초에 안양에서 베껴온 고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사옵니다.”

“고서라 하였느냐? 세월이 오래 지나 확인하기 힘들 것이 아니겠느냐.”

대충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이 시대의 역사학은 발달하지 않았다. 기껏 해야 관아를 헤집다 돌아올 것이라 예상한 영덕제는 당혹스러운 눈빛을 비추며 말했다.

“그러한 일이라면 참으로 쉬운 일이로다. 사행이 끝나면 사람을 보낼 것이니 안양으로 내려가 마음껏 산야를 돌아다니다 오거라.”

“황상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뼈에 새기겠사옵니다.”

번국의 종친이 시골 마을에서 무슨 소득을 거둘지 몰랐지만 요청은 요청이었다. 접견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사신 일행은 탁자에 앉아서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눈치를 보았다.

새로운 정보가 문제였다. 외교의 업무를 담당하는 예조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전투가 여섯 번이나 있었다면 크나큰 실책이며. 북방 정책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결국 신숙주가 말을 꺼냈다.

“대군어른께서 보시기엔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제가 사 년 전에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그동안 여섯 번이나 전투를 벌였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나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기에 황당할 지경이었소. 분명 아국의 영토인 하르빈에서 달자들과 교역을 행하지 않소. 주상전하께서 친히 관리하시는 일이오.”

“저 또한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엄친(아버지)께서 가르친 제자들이 북방에서 야인들에게 유학과 입신체비를 가르치는데 정말 전쟁이 일어났으면 야인이 소식을 전하여 엄친께 서한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몽골 내전은 타이순 칸을 필두로 내몽골 세력이 승리하였다. 오이라트는 머나먼 서쪽으로 도주하였다. 내전이 끝났으니 북방의 정세는 다시 안정되었고 몽골의 여러 부(部)에 속하는 이들은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누구와 싸웠는지 알 방법이 없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전쟁이 요동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학살이었지만 지금은 전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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