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83화 (183/573)

< 2장 121화 - 집들이 >

1466년 1월, 정월 대보름도 지나고 겨울도 끝나가고 있으니 추위가 풀려야 정상이지만 올해 겨울은 제법 추운 것 같다. 본래 집들이를 하려 청계천에 향한 것이지만 중간에 들릴 곳이 있었다.

청계천에 새로 세워진 약방에 현동이와 같이 들어가니 이미 안면이 있던 약재상이 반갑게 맞이한다. 이 년전에 주문한 물건이 있는데 구할 수 있었을까.

“수양대군어른!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그리고 주문한 물건은 구해올 수 있었는가.”

“물론입죠. 약재상을 오래 한 저조차도 알지 못하던 물건인데 대군어른의 혜안은 참으로 탁월하십니다. 용골(龍骨 - 용의 뼈, 여기서는 땅을 파내 발견한 뼈)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니요.”

현동이의 취미인 금석학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전국 팔도에서는 더 이상 발견할 비석이 없을 지경이니 일 년 전에는 조선과 명의 영토 경계까지 사람을 보내 광개토대왕비를 탁본하는 일이 발생해서 약간의 소란이 벌어졌다.

소란이라고 해도 국경까지 사람을 보낼 이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었기에 언쟁 정도로 끝났지만 내 입장에서는 자식을 더욱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약재상이 부서진 거북이의 뼈를 건네줬는데 파손이 있었지만 구불구불한 상형문자. 현대에서 갑골문이라 불리는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고고학 지식은 없지만 닳은 수준으로 보아서 가짜는 아닌 것 같다.

“제대로 구해왔네. 참으로 고생이 많았군.”

“저도 구하느라 애를 많이 썼습니다. 혹여나 중간에 수작을 부릴까 염려하여 거북이 용골만 구해오라 말했습니다. 용골 일천 개를 사들였지만 문자가 있는 녀석은 네 개에 불과합니다.”

“나에게는 사백 개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 도합 일천사백 개의 값을 치르겠네.”

현동이는 내가 건네준 거북이 뼈의 배딱지에 쓰인 갑골문을 눈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한자를 제법 배운 나도 몇 개의 형태만 잡아낼 정도로 뒤틀린 문자. 당연히 몇몇 한자를 제외하고 알아보지 못했다.

“몇 글자는 알아볼 수 있지만 대부분이 쓰이는 한자와 상이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예전에 마음의 병이 생겼을 적에 용골과 주사를 넣은 약재를 마셨는데. 명국에서 수입한 용골 가운데 문자의 형상을 한 것이 있어서 불현 듯 떠오르더구나.”

“아버지께서 문자라 말씀하시기 전에는 어린아이의 장난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통고(通古 - 진나라의 승상 이사)가 만든 진전(秦篆)의 글귀를 보아오지 않았더냐. 내가 사람을 시켜 각지의 비문을 탁본하여 가져오게 하였는데. 개중에 역산비(譯山碑)의 필체를 떠올려 보려무나.”

아는 척을 많이 했지만 현대의 지식을 활용해서 유물은 선점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남성의 시골 마을에서 갑골문이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금석학의 발달 이전까지 용골이라는 약재로 쓰였다.

그렇다고 해도 고고학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은 분명했다. 현동이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약재상을 보면서 질문을 퍼부었다.

“그래서 이 용골이 어디서 나왔다는 것이오? 함양이오? 낙양이오? 수춘이오?”

“듣자하니 하남성의 북쪽에 있는 옛 마을인 안양(安阳)에서 발견되었다 합니다. 질 좋은 용골이 밭에서 굴러 나오는 고장이라 하였지요.”

“밭에서 굴러 나온다 하였소?”

현동이는 직접 안양에 가보려는 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북경에 사신으로 오가는 일도 아니고 나도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촌까지 다녀오려면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는데 향신료의 냄새가 코를 찌를 지경이다.

“향이 좋은 약재가 제법 많구려. 이것은 정향(丁香)이 아니오?”

“요즘 들어 향신료의 값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잔뜩 들여 놓았지요.”

생각해 보면 입신체비장은 땀 냄새가 가득하니까 방향제로 쓰일 약재가 필요하겠지. 그렇게 풍부한 향을 가진 약재를 사서 집들이가 한창인 청계천 입신체비장으로 향했다.

“어허 저기 보거라. 병조판서인 권절도 방문하였구나.”

“입신체비장의 새로운 체장(관장)으로 하위지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합니다.”

“그렇지. 주상전하의 입신체비사로 열심히 일하던 자이니 이제 결실을 맺는구나.”

입신체비장의 입구에는 유생들이 가득했다. 입신체비를 즐겨하는 이는 청계천에 생긴 사설(私設) 입신체비장을 축하하러 들어왔으며. 즐겨하지 않는 이는 인맥을 만들려는 의도가 보였다.

“대군어른! 이런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하 천장은 고생이 많군. 입신체비장에 땀내가 들어찰 것이니 여기 향을 내는 약재들을 사왔다네. 달여 먹어도 좋고 향을 풀어 놓아도 좋을 것이야.”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군어른이 조금 일찍 오셨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방금 전에 영의정께서 다녀가셨습니다.”

“영의정을 만나면 귀찮은 일이 많을 것인데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닌가. 밖이 추우니 따듯한 안으로 들어가고 싶군.”

4년 전에 세워진 청계천 입신체비장의 새로운 주인은 하위지가 되었다. 기존에는 나를 포함해서 형님의 입신체비를 담당하는 이들이 돌아가며 일했지만 형님이 은퇴할 마음을 정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마 체장은 열산도로 떠났다 합니다.”

“그도 그러겠지. 자네야 집현전에서 일하던 이이니 이러한 입신체비장의 주인이 되어도 말이 나오지 않겠지만 마일용은 주상전하의 입신체비사도 아니고 훈련원에서 일하던 자였으니.”

“마 체장과 비교하면 제가 부족하지만 도리가 없지요. 이런 훌륭한 입신체비기구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 모두 주상전하의 은덕입니다.”

입신체비장에 사대부들이 몰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역기와 소역기 정도야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기구는 너무나 비싼 것이 문제였다.

현대의 헬스기구는 전자기기가 없어도 되는 녀석이지만 이 시대에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기술력을 투입해야 하는 물건들이다. 처음 만들 때에도 장영실을 이용해서 만들었지. 그때를 떠올리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작은 녹로(轆轤 - 도르래)가 네 개나 들어가고 강철로 만들어진 축이 평형을 이루고 있군요. 이러한 것을 쉬이 만들 수 있겠습니까. 자고로 녹로라 하면······.’

‘주상전하께서 이러한 기구를 사용하셔야 어깨 근육을 놀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참으로 주상전하께 어울리는 기구입니다. 역시 대군어른께서는 혜안을 가지고 계십니다.’

힘의 전달에 대한 기술의 정수가 담겨 있는 것이 현대의 헬스기구. 이 시대의 입신체비 기구이다. 그러니 장영실도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하나씩 만들었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으니 하위지는 웃옷을 걸쳐 입으며 말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입신체비장이 너무 춥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다네. 라마국(신성로마제국)에서 온 자들은 겨울 추위를 모르니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짓는 것이 전부가 아닌가.”

입신체비장에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단점도 있었다.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고장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설계한 건물이니 구들이 없어서 난방이 불가능했고. 멋들어진 트러스 지붕은 단열재가 없어서 열을 모조리 지붕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추위에 시달리다 보면 열산도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지경입니다. 다녀와 보시니 어떠하셨습니까?”

“열산도는 대월국(베트남)보다 남쪽에 있는 섬이지. 아마 지금 더위가 초여름보다는 조금 덜 더울 것이라네.”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탐검사의 외방 관원들은 한여름에 쪄 죽을 것이 분명합니다.”

“진담이라네.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그만이네.”

하위지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지만 한명회가 걱정되었다. 한명회가 이번 여름을 버틸 수 있을까? 아니면 여름에는 바다에 떠있느라고 더위를 알아차릴 틈도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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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465년 9월에 탐검사의 정(正 - 정3품 관직)인 유응부(兪應孚)를 앞세워 톤도와의 협정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구리에서 황금을 뽑아낸다는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던 귀족들이었지만 자배(자파르)를 시작으로 한 이현전의 학자들이 시연을 벌였다.

자신들이 길거리에 버린 구리 광괴를 부수고 걸러내며 무거운 광괴를 모아 녹이는 모습에 코웃음을 쳤지만. 그들이 가져온 황산이 구리판에 뿌려지자 시퍼런 물과 황금만 남게 된 것이다.

섬의 할양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본토를 할양하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루방이라는 섬을 즉각 할양하였으며 기존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본토로 강제 이주시켰다.

“섬은 넓지 않으나 백사장이 아름답다 못해 눈이 아플 지경이구나. 가로로 팔십 리 세로로 삼십 리의 섬이니 항구를 만들기 좋은 자리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섬의 이름은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신농도에서 이주한 자들이 거주하니 신농의 시호인 열산(烈山)을 붙이는 것이 좋겠군.”

유응부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처음부터 본토를 할양받으려는 욕심을 보여 기술 유출이 적고 조선의 영토로 삼기 쉬운 섬을 할양한다. 너무 넓은 섬이면 관리하기 힘들겠지만 좁은 섬이니 오히려 일하기 편했다.

섬에 폴리네시아인을 거주시켜 기본적인 터전을 만들어 두는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열대의 나무는 성장이 빠르고 가공하기 쉬우니 항구를 만들기도 좋았으며 집을 짓는 일도 쉬웠다.

“우리의 고향! 사와이키의 남쪽인 열산도가 새 고향이다!”

“사당부터 만들자! 티키(폴리네시아인의 토템)를 상징으로 삼아 위패를 대신하자!”

“대역기와 소역기도 필요하다! 마나를 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온 폴리네시아인들은 정열적으로 일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는 이가 있었으니 진급하여 탐검사의 부정(副正 - 종3품 관직)이 된 한명회였다.

“몇 년 동안 보급이 이어질 것이니 외방(外邦 - 외국)에서 열심히 일 할 것이라 믿겠네.”

“제발 저와 교대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자네의 공을 대신할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니 큰 기대는 하지 말게. 여하튼 나는 돌아가 보겠네.”

유응부를 포함한 탐검사의 관원들이 돌아가면서 어명을 전해줬다. 한명회를 비롯한 탐검사의 외방 관원들이 받은 어명을 요약하면 세 가지였다.

첫째. 톤도와 협정을 맺어 할양받은 섬에 항구를 만들어 서행사와 탐검사 모두가 활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들어 둘 것.

둘째. 항해에 능숙한 신농도 원주민(폴리네시아인)의 마을을 만들어 이들이 익숙한 기후에 머물며 확고한 조선의 신하가 될 수 있게 만들 것.

셋째. 만약 신농도 원주민들이 스스로 항해하여 먼 섬을 찾아 나선다면 강요하지 말고 이를 도와 항로를 개척해 나갈 것.

마지막 어명이 문제였지만 새로운 섬에 적응하는 상황이니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게 여섯 달이 흘러 1466년 3월이 되었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머나먼 고장에 왔단 말인가. 호가 압구(狎鷗 - 갈매기와 친하다)인데 정말 갈매기와 친해지게 생겼구나.”

한명회가 시끄러운 갈매기 울음소리에 익숙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폴리네시아인도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어업은 당연한 일이고 뉴기니 섬에서 가져온 작물을 길러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물론 조선인들에게 적응하기 힘든 고장이었다. 쌀이 떨어져 안남미를 사들여 밥을 지었더니 고슬고슬 흘러내리는 밥이 되었다. 밥을 보며 울상을 지은 한명회는 쉬어버린 김치(이 시대의 김치는 백김치이다)를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밥이란 말인가. 입으로 불면 쌀알이 날아가 버릴 것 같으니 평소에 먹던 밥이 그리워지네.”

“조금 참으십시오. 하역한 짐의 분류가 끝나면 흰쌀밥을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저희에게 어명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건면포(건빵)와 수양대군어른이 창안한 보존식량이 잔뜩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여나 구풍이 몰아닥쳐 기근이 생길까 염려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한명회도 나이가 쉰이 넘었다. 하지만 다음 달에 태어날 손자의 얼굴도 보지 못하게 생겼으니 한숨이 나왔다. 밖에서는 입신체비사의 지시에 따라 대역기를 들면서 유교경전을 외우는 폴리네시아인 청년들이 보였다.

“증······.증자가 말씀하셨다. 깊기도 하구나 효의 위대함이여!”

“좋다! 다음 글귀를 읽어보아라!”

“효란 하느, 느, 늘의 법도이며!”

“네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내가 네 덕분에 마음이 놓인다.”

한때 훈련원에서 훈련도감 병사들을 가르쳤던 마일용이라는 자가 열산도로 건너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만간 새로 생길 입신체비장의 체장(관장)이 되기 전에 공적을 쌓으려고 이주를 택한 자였다.

관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놀 거리라고 해봐야 낚시를 하거나 당밀을 정제해 만든 당주(럼)와 활쏘기가 전부인 섬에서 입신체비를 하며 글을 외우는 모습은 보기 힘든 광경이었으니.

“정음을 참으로 빠르게 배우지 않습니까. 박노포(노폴라우)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부족장은 이미 정음을 읽을 줄 안다 합니다.”

“그런 것은 맞지만 저들이 유학을 배우는 방식이 잘못 되어있지 않는가.”

“좋은 일이 아닙니까? 본디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는 자들이 교화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한명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남미를 먹어치웠다. 신농도 원주민들의 조선어 실력은 어린 아이와 비슷했다. 기껏 해야 문장을 구성하는 정도지만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만큼 익숙해졌다면 평균적으로 보아도 뛰어난 지능을 가진 것이리라.

솜에 물이 스미듯 폴리네시아인의 중심 사상은 순식간에 수양대군이 전해준 유교로 변했다. 유교라고 하여도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으니 같은 학문이라 여길 수 있는 부분은 경전의 해석이 전부였다.

수양대군은 여기에 폴리네시아인이 가지고 있는 마나를 결부시켰다. 그렇게 변형된 유교는 학문의 경지를 넘어서서 광적인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나은 일이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한 부정님! 박노포가 부정님을 만나 뵙고자 합니다.”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식사가 끝나고 들어오라 하게!”

지난번에는 증조부님의 기일을 찾는답시고 자신을 불러서 밑도 끝도 없이 조상을 모시는 방법에 대한 논의로 이틀 동안 언쟁을 벌였던 자였다. 그만큼 머리가 좋은 이인데 어찌하여 나를 찾았을까.

한명회가 식사를 마치고 터덜거리며 밖으로 나서자 부족장인 박노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이번에도 성가신 일인 것 같지만 한명회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소. 대체 무슨 일이오?”

“우리 신농도 사람들은 본래 조상 때부터 전통이 있읍, 습, 습니다. 새로운 곳에 옮기면 서로 선물을 보내는 선물의 전통입니다.”

“새로운 곳에 이주하면 서로 선물을 보낸다는 말은 집들이와 흡사하군. 그렇다면 미풍양속(美風良俗)이니 길이 간직하는 것이 좋겠소.”

“그렇다면 새로운 집들이를 해야 한습니다. 집들이가 아니고 섬들입니다.”

한명회는 본능적으로 뒤로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이들이 본래 왔던 곳이 신농도이며 뱃길로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머나먼 고장이다. 거기로 다시 가란 말인가?

“섬들이라 하였소? 농담도 잘 하시는구려. 새로 이주한 고장에서 원래 있던 고장으로 선물을 보낸다고 하는데 너무 번거로운 일이 아니오.”

“나의 조부도, 증조부도, 현조부도 모두 배를 타고 나서서 선물을 주었다. 커다란 돌머리를 만드는 섬은 선물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다른 섬은 모두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폴리네시아인의 전통은 선물 교환이었다. 새로운 섬에 이주하거나 자신들의 섬의 자원이 고갈되면 다른 섬과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답례였다. 혹은 자원이 남아도 남는 자원을 선물로 보내는 것이 전통이었다.

한명회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일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식이 없을 뿐이지 뛰어난 지능을 가진 박노포는 한명회를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조선의 주상전하께서 우리에게 많은 철과 옷감을 내려주셨다.”

“그러한 일은 주상전하의 은덕이오.”

“하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써도 좋다 하였다. 우리에게는 커다란 배도 있으니 선물을 잔뜩 실어 나를 수 있다.”

“하지만 열산도를 언제고 비워놓을 수는 없지 않소. 나도 일이 있고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명이 내려오기 전에는 잠시 내버려 두면 아니 되겠소?”

한명회는 주먹을 움켜쥐면서 박노포를 뜯어 말렸다. 결국 주상전하의 어명을 내세웠으니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이들이 함부로 반발할 수 없겠지. 그러나 박노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종이를 한 장 건네줬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하는 것을 깜빡했다. 석 달 전에 돌아간 가심(카심) 대감님에게 주상전하에게 전해달라고 글을 써서 올렸는데 어제 도착했다. 부정님에게 먼저 드려야 하는데 깜빡했다.”

빳빳하고 순백색에 가까운 종이는 교지에 쓰이는 종이가 확실했다. 주상전하의 어명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한명회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교지를 읽기 시작했다.

[신농도에 살던 이들이 열산도에 적응한 것이 확실하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이들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가지고 있으니 아국의 덕을 널리 퍼트리거라. 일 년 동안 항해하며 선물을 전해주고 돌아오너라.]

박노포가 읽을 수 있도록 정음으로 쓰인 교지였다. 한명회는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일 년 동안 항해하라는 말을 듣고 어디까지 항해할 것인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주상전하께서는 기한을 일 년으로 삼았소. 대체 어디까지 다녀올 수 있겠소.”

“타히티가 적당할 것 같다. 라파누이에 다녀오려면 일 년이 넘을 것이니까.”

다시 한명회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얼마 전 하역한 짐의 정체를 깨달은 한명회는 억지로 웃으며 사택으로 돌아갔고. 다음 날 애꿎은 갈매기 스무 마리가 돌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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