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80화 (180/573)

< 2장 118화 - 대양도 정복(1) >

정범수는 숙소로 돌아가 문종이 하사한 교지를 종이가 뚫어져라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그를 위한 배려인지 정음과 한자가 섞인 혼용체로 적힌 교지의 내용은 간단하였다.

[임해도감은 전면전을 벌일 병사들이 아니며 사람이 넘쳐나지도 않으니 무리하지 말라. 이들의 성품을 다잡고 기강을 잡아 조만간 행할 합동 훈련에서 다른 이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여라.]

“무리하지는 말라는 명을 내리셨으나 대양도는 생각보다 살기 좋은 땅이지. 주상전하께서 은혜를 내리심이 하해와 같구나.”

대양도에서 지낸지 벌써 육 년이 다 되어가니 늦가을의 추위도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인을 시켜 군불을 때게 하였지만 코에 스미는 한기가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장계를 읽는데 하인이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제사님! 산남(山南)이라는 분이 찾아뵈었습니다!”

“들라 하게.”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는 임해도감의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남이였다. 그는 지난 달 시행된 과거시험에서 당당히 급제하였으니 종7품의 사정(司正)에서 종6품 낭청(郎廳)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그는 기마와 궁시에 모두 능통하니 임해도감에 두기는 아까운 젊은 인재였다. 남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겠다고 했던 효자 중에 효자였다.

“춘부장께서는 뭐라 하시던가.”

“엄친께서는 저를 엄중히 꾸짖으시며 험한 길로 돌아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오나 절제사님의 이야기를 하자 환히 웃으시며 칭찬을 아끼시지 않았습니다.”

“춘부장께서 자네의 활약상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네. 임해도감을 인솔하여 대월(베트남)과 점파(참파)의 전쟁에 참전하고 무훈을 세우지 않았는가.”

“그러한 일 보다는 제가 기마(騎馬)에 능한 일을 바라셨습니다.”

정범수가 웃음을 참으며 남이를 보았다. 그동안 임해도감의 실전 경험을 위하여 갖은 애를 썼으며. 결국 이천에 달하는 임해도감 장병들을 데리고 전쟁에 참가한 것이 2년 전이었다.

훈련도감이라면 한 끼 식사도 되지 않을 상대였지만 참전한 이들은 의욕만 앞선 임해도감이었다. 통솔도 힘들고 실전 경험이라고 해 봐야 같은 원주민을 상대하거나 배 위에서 왜구를 상대한 것이 전부였던 이들이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덕분에 기본적인 전략과 전술, 정확히는 육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가 쌓였다. 이는 정범수 혼자의 공이 아니었다. 정범수는 남이에게 자기로 된 병을 건네주었다. 남이는 병에 붙어 있는 글귀를 보더니만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당주(糖酒)가 아닙니까? 이렇게 귀한 것을 어찌 주시는 것입니까.”

“안사람이 대양도에서 당주를 만드는 일은 잊었나? 자네는 종6품 낭청이 되었으니 훈련원에서 소속을 이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 덕을 많이 보았으니 춘부장께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 하지 않겠나.”

잠시 뒤, 남빈의 집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대양도에서 재배한다지만 아직도 귀한 것이 설탕이고 설탕을 생산하는 부산물인 당밀 또한 귀한 재료였기에 요리에 아낌없이 쓰였다.

정범수는 술을 받아 마시면서 대양도에서 보냈던 세월을 떠올렸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아내도 생겼지만 돌이켜 보면 험난한 시일을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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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2년 5월, 조정 대신들은 임해도감의 창설을 반기는 눈치였지만 한편으로는 경계의 눈길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조선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였던 이들이기에 힘을 키우고 반란을 도모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런 마음은 문종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해도감의 철칙은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교육 과정에서 제외하였으며 화약무기도 일체 금지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임해도감 병사들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머저리들아! 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말을 알아듣지를 못하냐!”

아직 임해도감의 절제사가 아닌 사직(司直)의 품계인 정범수는 부상을 입은 임해도감 병사들을 보며 울분을 터트렸다. 자신이 계획한 작전은 단순했다. 본대인 훈련도감이 적을 끌어들이고 임해도감 병사들이 후방을 기습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말을 잘 듣던 임해도감 병사들은 갑자기 돌변했다. 부눙족(布農族)의 마을을 발견하자마자 작전 따위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공격에 나섰고 난전이 시작되었다.

지난 훈련을 보상하는 양 임해도감 병사들은 신들린 도끼질로 부눙족의 전사들을 압살했다. 하지만 소수로 다수를 상대했으니 피해가 막심했다. 이해할 수 없는 항명이기에 정범수의 화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죄송합니다. 서로 앞서서 나서자고 하니 도저히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상관의 명령은 지엄한 것인데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너희는 군명을 어겼으니 조만간 유황을 캐면서 반성하면 좋을 것이다. 어디 변명이라도 해봐라.”

“저희 가운데 절반은 명령을 듣지 못했습니다.”

정범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닥을 걷어차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분명 본영에서 작전을 전달하고 전선에 나서서 상황 보고를 듣고 작전을 변경했고 명령도 하달했다. 그의 눈이 분노로 차서 부상병을 내려 보았다.

“지금 뭐라 했었지? 분명 내가 직접 아국의 말과 너희들이 쓰는 말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나.”

“정 사직님은 쿨론의 말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희 아타얄은 대충 알아듣지만 타오카스 녀석들은 언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진영에서 내린 첫 명령만 이해하였고 전투 전에 하달된 명령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정범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눈으로 부상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훈련을 하면서도 은근슬쩍 패거리를 만들고 다른 이들과 지나친 경쟁을 벌여 퇴소당한 이들이 있었다.

이번 전투에 투입된 임해도감 병사 삼백 명은 오로지 훈련소에서 보인 성적으로 선발한 이들이었다. 훈련소에서는 서로 대화가 통하는 이들이 조금씩 있었기에 명령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명령을 전달하지도 않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설마 명령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저희 가운데 타오카스의 말을 아는 이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짓 발짓으로 말을 전했지만 제대로 통하지 않아 전선에 나서니 처음 명령대로 마을을 기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항명으로 볼 수 없는 일이네. 처분은 잠시 미루도록 하겠네.”

결국 자신의 실수이다. 정범수는 새로 부임한 관찰사인 유성원(柳誠源)에게 올리는 장계를 몇 번이고 다시 작성하다가 모든 일을 숨김없이 보고하고 잘못을 뉘우치기로 했다.

정범수는 한숨을 내쉬며 얼마 전에 부(府)로 승격한 서원부(西原府)의 관청에 들어섰다. 유성원은 정범수의 표정을 보면서 혀를 차면서 말했다.

“혹여나 패전하였는가?”

“승전하였지만 피해가 제법 큽니다.”

“내가 알기론 임해도감의 병사들 가운데 가장 성과가 뛰어난 이들을 보냈다고 하네. 하지만 피해가 크다니 어찌 된 일인가. 잠시 앉아 있게나.”

경원부에서 부윤(府尹)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던 유성원은 정음과 한자가 섞여 작성된 장계를 뚫어져라 보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정범수와 다르게 유성원은 나지막한 말로 정범수를 위로했다.

“그래, 처음부터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는 일이 쉬웠겠는가. 두 배에 달하는 상대를 힘으로 몰아내다니 참으로 대단한 성과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앞길이 태산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아국에게 반기를 들 염려도 있지 않습니까? 부족들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서로 헐뜯고 싸우려 할 것입니다.”

“아닐세.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군.”

정범수는 상대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분노를 억누른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유성원의 예리한 눈은 다른 장계에 박혀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유성원이 말을 이어갔다.

“생각보다 대양도 원주민들의 복속은 빠를 것이네.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자네 덕분에 일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군. 다른 장계에 의하면 아국의 사람이 대양도 사람과 혼인한 수효가 일천이 넘어섰다 하네.”

“하지만 대양도의 사람은 구만 명에 달합니다. 심지어 고산족(高山族)은 제대로 된 수효조차 파악하기도 힘든 실정이니 십만 명이 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여도 이백 명 가량의 부락이 사백오십 개가 모인 것이 아니겠는가.

유성원은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연기를 뿜어내는 분화구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고난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려가고 있었다. 그는 정범수를 물끄러미 보면서 말했다.

“자네를 시작으로 훈련도감 출신 병사들이 혼인을 하였다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나?”

“저는 배움이 짧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각 부락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죽은 사람들의 태반은 사내였으니 당연히 혼기가 찬 여인들이 남게 되었다네. 그런 여인과 혼인한 것이 아국의 광부(曠夫 - 홀아비)일세.”

“하지만 수효가 너무 적지 않습니까. 아국의 사람 천 명이라고 해봤자 한 푼(1%)에 불과합니다. 한양에 왜인 일천 명이 있다 하여도 이들이 왜국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양에 거주하는 왜인 천 명이라고 하여도 이들이 나라의 뜻을 막을 방법 따위는 없다. 유성원도 그런 말에 동의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생각하여 보게. 이들은 부락을 만들어 씨족끼리 모여 생활하지. 그렇다면 보통 마흔 호 정도가 머물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마흔 호 정도이며 제가 인연을 맺은 곳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국과 대양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이들에게 부족은 같은 혈통의 먼 친척들이 모인 곳이며. 아국과 같이 주상전하가 있지도 않으며 왜국과 같이 영주가 통치하지도 않네. 그러한 이들이 아국의 사람과 인연을 맺었네.”

정범수가 눈을 굴리며 계산하였다. 가만 생각하여 보니 자신도 혼인을 하고 부족장의 친척이니 뭐니 하면서 이런 저런 대접을 받았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유성원이 말했다.

“아국과 대양도 주민들이 혼인을 시작한 근본이 무엇인가? 아국에 대항한 이들을 일벌백계하기 위해서 전투를 벌였고. 그로 인하여 혼기가 찬 남성들이 모조리 죽어나간 것이 시초였지.”

정범수가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다. 유성원은 정범수를 이해시키기 위해 붓 두 필을 손에 들더니 하나를 떨어트렸다. 배필(配匹)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으니 누구나 알 만한 비유였다.

“그렇게 아국의 힘을 알고 복속하였지만 남성이 사라지니 여인들이 남았네. 아무리 풍속이 다르다 하여도 혼인을 행할 적에 언제 남녀가 만나 바로 배필을 찾던가? 혼인이 허락된 순간부터 그 부락은 아국과 인연을 맺은 것이네.”

“하오면 배신할 이유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다른 이도 아니고 누구의 친척이며 누구의 삼촌인 이를 죽이고 전쟁을 시작하라는 말인가? 그저 핍박하지 않고 좋은 대접을 하면 될 일이네. 그리고 자네를 비롯한 임해도감의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네.”

정범수가 받은 물건은 정음만 적힌 서책이었다. 아직 많은 내용이 비어있는지 책장에는 군데군데 빈 흔적만이 보였다. 그렇지만 자신도 아는 단어가 몇 개씩 적혀 있었다.

“이것은 제 안사람인 타이야족의 말이 아닙니까.”

“바로 그러한 것이네. 대양도의 사람들은 여러 부족을 이루고 있지만 문자가 없고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지. 심지어 임해도감의 훈련에서도 말과 문자를 가르치지 못했네. 그러니 먼저 문자를 가르치는 것이네.”

듣고 보니 그랬다. 자신이 훈련도감을 다니던 시절에도 정규 수업과정으로 정음을 배웠고 덕분에 세상에 나서서 부족하지만 앞가림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준다면? 그렇지만 문자를 가르쳐도 서로 간에 말이 통하지 않으니 조선의 말을 가르쳐야 하리라. 정범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유성원을 바라보았다.

“대양도에 살던 이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이 잦다네. 또한 문자도 없으니 아국이 나서서 문자를 알려 주는 것이지. 그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어차피 정음을 발음대로 읽을 수 있다면 아국의 말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시작은 문자가 없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문자를 보내주는 것이네. 하지만 아국의 문자를 배우면 말을 배우는 일이 쉬워질 것이며. 결국 아국에게 동화될 것이네.”

“그렇다 하여도 말이 통하면 부족 간의 분쟁이 격화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심히 염려됩니다.”

정범수의 우려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유성원은 이미 경원부에서 일하며 여진족간의 분쟁을 다스린 경험이 많았다. 그는 얼마 전에 접촉한 호아냐(洪雅族)족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염려하지 말게. 부눙족을 임해도감 병사들이 격멸하지 않았나. 조만간 이들과 다투던 호아냐족에서 사람을 보내 아국과 복속을 논할 것이니 기다려 보게나. 앞으로 대양도의 방침을 본다면 자네의 염려도 사라질 것이네.”

보름 뒤, 유성원의 말 대로 호야나족의 사절이 머나먼 서원부까지 도착했다. 부눙족을 격멸시킨 일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지 여러 부족장들과 노인들이 포함된 사절이었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을 뵙습니다.”

“자네들은 명국의 말을 할 줄 아는군. 참으로 반가운 일일세.”

가장 처음 조선에 복속한 쿨론 족과 마찬가지로 호아냐 족의 사람들도 명나라와 접촉했던 평보족에 속한 이들이니 명나라의 말을 아는 이가 있었다. 유성원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미 호아냐 족이 조선의 무력에 저항할 의지도 방법도 없었으니까.

“자네들은 복속을 청하여 여기 왔는가. 아니면 전쟁을 위하여 왔는가.”

“복속을 원합니다.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부눙 놈들의 마을 열 두 곳을 무너트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칼을 들이대겠습니까. 다만 대접을 서운치 않게 해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대양도의 정복은 정형화된 방식이 생겨났다. 새로운 부족을 찾아서 남하하면 평지에는 언제나 고산족에게 시달리는 평보족이 나온다. 그리고 고산족과 전쟁을 벌여 물리친다.

대부분의 평보족은 목을 베어 성인식을 벌이는 악습이 없으니 받아들이기도 쉬웠고 적응도 빨랐다. 이번에 조선에 귀부한 호아냐족 또한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국에 귀부한 것을 환영하네. 앞으로 전쟁은 일절 금할 것이며 우마(牛馬)와 곡식을 길러 풍요롭게 먹고 살 길을 열어 주겠네.”

“그러하면 저희가 바쳐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국이 만들게 될 전답에서 농사를 도우면 되는 일이네. 수확량의 4할은 자네들의 것이요. 2할은 서원부(西原府)로 보내 세금으로 삼고. 남은 4할은 땅을 개간한 이의 것이네.”

부족장을 보좌하는 노인들은 예전의 일을 알고 있었는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유성원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희가 일을 하는데 4할은 너무 적습니다. 5할을 주시지요.”

“그렇다면 10년간 세금을 면제하며. 농토를 새로 만들 때마다 10년씩 세금을 면제할 것이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이 더 있다네. 아국에 충성하면 할수록 새로운 작물을 내려주겠네.”

“새로운 작물이라 하셨습니까?”

유성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얼마 전에 수확한 고구마와 서원에서 재배에 성공한 멜론이 담긴 접시를 건네주었다. 노인들은 한 입씩 먹어보고 단맛에 눈이 돌아갔다.

그들도 사탕수수를 기르지만 제대로 된 농법이 없었기에 강가에 자라나는 사탕수수를 힘들게 베어 가져오는 일이 전부였던 것이다. 유성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맛이 어떠한가?”

“참으로······. 이런 물건은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충성하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아국은 대양도에서 임해도감이라는 특수한 병사들을 모집하네. 병사들의 모집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막지 않으면 충분한 일이지. 그리고 아국의 문자를 배워 자네들의 말을 기록하게나.”

노인들은 명나라의 문자를 생각하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유성원이 차근차근 정음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처음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자모의 수가 많고 성조(聲調)가 남아있었으니 많은 발음을 적을 수 있었다.

한참을 낑낑거리던 노인들이 훈민정음의 방식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훈민정음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발음을 표현하기 힘들어 했지만 거의 모든 음을 표현할 수 있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저희에게 문자를 내려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복속할 것이니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염려하지 말게나. 한 달 이내에 사람을 보낼 것이니 호구를 조사하고 새로운 농토를 만들어 나갈 것이네.”

그렇게 호아냐족의 사람들이 돌아가자 정범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로 유성원을 바라보았다. 기껏 해야 훈민정음을 알려주고 너무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래서야 저희가 이득을 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득을 보는 일이 없다 하였는가? 내가 저들에게 정음을 가르치고 확인한 다음 보내줄 서책이 과연 저들의 언어로 되어 있겠는가?”

유성원이 펼친 책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개찬한 것이었다. 머나먼 서역에서 들어온 작물들의 재배방법이 추가되었으며 풍부한 도해(圖解)가 포함되었으며 오로지 정음으로 인쇄된 판본이었다.

“생각하여 보게. 새로운 작물을 얻었으면 새로운 작물을 기르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억지로 농사직설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분명 부락의 수가 적으니······.”

“부락에서 몇 명만 정음을 익히고 아국과 능숙히 소통하게 되면 삽시간에 부락 전체가 아국의 말을 익히는 것이네. 말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성원의 계획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구만 명의 사람들을 조선으로 동화하는 일은 어렵지만 수백 단위의 사람들을 동화하는 일은 매우 쉬웠다.

농사를 짓기 힘든 고산족은 혼인관계를 맺어 서서히 동화시키며. 농사를 짓기 쉬운 평보족은 문자를 가르치고 조선의 말을 배울 것을 종용하여 언어를 통하게 만든다.

물론 모든 원주민들을 조선의 품으로 받아들이자면 오랜 세월이 걸릴 일이다. 하지만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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