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17화 - 훈련원 삼군의 일 >
1465년 10월, 형님은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굳혔는지 나와 안평대군 그리고 병조판서 권절을 호출하였다. 형님의 뜻이 정해졌으니 홍위를 위하여 최대한 안정적인 자리를 만들려 하였고. 개중에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이 왜구였다.
“그러하니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다. 당장 너희보다 왜국에 대하여 지식이 많은 이가 있더냐.”
“하오나 저희 모두 왜국에 다녀오고 육 년이 넘게 지나갔사옵니다.”
“어떤 의견을 제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상황을 점검하고 병조판서 권절의 자질을 시험하는 자리로 삼을 것이다. 혹여나 권절을 시험할 의도가 있다면 왜국에 대한 질문을 하거라.”
전쟁 준비를 하는데 병조판서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다. 그러니 권절의 자질과 지식을 시험하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방에 들어온 권절은 놀란 얼굴로 형님에게 인사를 올렸다.
“신 병조판서 권절 입궐하였사옵니다.”
권절이 자리에 앉자마자 형님이 질문을 시작하였다. 아무런 시간을 주지 않고 가진 지식을 시험하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보였다.
“근래에 들어 왜구가 경상도 일대에 출몰하였다. 이를 병조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심대한 위협은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일이 아니오며 철저한 대응이 필요하다 여겨지옵니다.”
왜구의 출몰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형님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이 염려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왜구들이 전라도가 아닌 경상도를 침략한 것이다.
당장 고려말기에 왜구와의 전투 가운데 규모가 큰 4개의 전투. 홍산대첩, 진포대첩, 관음포 전투 중 3개가 충청남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발발했으니까. 권절의 첫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형님은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준비한 질문을 해야겠다.
“어찌하여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는가.”
“침략하기 쉬운 전라도를 내버려두고 경상도를 향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을 행할 적에 쉽고 편한 길을 택하며 왜구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분명 의도를 가진 행위가 분명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왜구의 주요 침입경로를 경상도로 생각한다. 임진왜란의 주요 침입경로가 경상도이기 때문이며 대마도를 거치면 바로 상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전라도가 왜구에게 공격당한 사례가 많았다.
나의 질문에 완벽한 대답을 말했다. 다음은 안평대군의 차례이며 안평대군 또한 일본 내부의 정치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 날카로운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의도를 가졌겠는가. 정확히는 경상도를 택한 근본이 무엇인가?”
“대내씨와 아국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하여 경상도를 택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국이 철저히 방비하는 지역을 노릴 이유가 없습니다.”
권절이 지도 위에 압정을 꽂아 경상도에 왜구가 침입한 장소와 일자. 그리고 남경 일대에서 격퇴당한 왜구의 위치와 일자를 표시하였다. 압정 위에 있는 글자를 보면 일목요연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가장 먼저 아국과 교전을 벌인 왜구는 영덕 5년(1461년) 10월 무렵입니다. 이 이후로 아국이 대양도에 보급을 보낼 때마다 두 달에 한번 꼴로 교전을 벌였습니다. 그렇지만 경상도의 항로는 전혀 다릅니다.”
“혹여나 태조대왕께서 세우신 위명에 겁을 먹고 전라도를 침범할 마음을 먹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한 일로 교훈을 얻을 자들이면 상왕께서 대마도를 정벌하신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구들이 배우는 일은 약탈과 살인이 전부입니다.”
안평대군도 만족하면서 넘어갔다. 권절의 지식이 부족하였다면 태조 이성계의 위업을 칭송하며 쓸모없는 말을 했겠지만 그렇게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형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권절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전라도를 노리는 것이 유리한지 의견을 듣고 싶네. 자신이 왜구의 수장이라 여기고 말해 보게나.”
병조판서로서 필요한 자질은 전황을 보는 것이리라. 형님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권절이 생각을 정리하고 조곤조곤 의견을 말했다.
“첫째. 아국의 곡창은 경상도이며 인구 또한 한양과 경기도를 다음으로 하여 가장 많습니다. 그러하니 소득이 많더라도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도둑들이 권세가를 노리지 않고 부농(富農)을 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옵니다.”
“그렇지. 경상도의 인구는 아국의 2할 5푼(25%)에 달한다네. 북방을 제외하면 병사가 가장 많은 곳이 경상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왜구들이 섣불리 공격할 수 없는 것이네.”
“그렇사옵니다. 경상도 일대에 침략한 왜구들은 기껏 해야 서른 척의 선박을 동원하였습니다. 왜구들이 수적 열세에 휘말려 도주하다 덜미를 잡혀 궤멸당한 일이 네 번이옵니다.”
잡색군이 도감군의 지휘 하에 시간을 벌고. 관아에서 보내온 정군(正軍 - 정식 병사)과 거점을 수비하는 영진군(營鎭軍)이 소집되면 진출이 막힌 왜구들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배로 도망가다가 격멸당하거나 끝까지 싸우다가 격멸당하거나.
권절이 정답을 말했지만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권절은 해로를 보면서 전라도 해안에 손가락을 짚었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이 어지럽게 널려있었으니 대부분 갯벌이 있으리라.
“둘째. 왜구들이 이미 남경을 약탈하고 있으니 중간에 전라도로 향하는 일이 쉽습니다. 더군다나 아국의 대방선과 방패선과 같이 거대한 선박은 전라도에서 무용지물이니 후환이 적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네. 그래서 전라도 일대에는 아직도 조운선을 사용하지.”
대방선과 방패선이 좋아도 기존의 첨저선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시대의 전라도는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갯벌이 넘쳐난다. 당연히 농토도 적고 인구도 경상도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전라도가 성장하게 된 이유는 조선 말기의 민간 간척사업과 일제강점기의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산미증산계획의 여파로 전라도 일대는 엉망진창이 되었지. 나의 생각이 이어지던 말든 권절은 생각을 거듭하다가 말했다.
“셋째. 노략질을 실행하는 지형으로도 전라도가 훨씬 유리합니다. 아국의 선박이 오가는 경상도와 달리 전라도는 섬 사이에 숨어 상황을 판가름하고 진퇴를 정할 수 있사옵니다.”
“참으로 훌륭한 대답이라네. 병조판서의 자리에 오른 것이 이 년 전이건만 참으로 많은 일을 알고 있지 않은가.”
권절이 고개를 깊게 숙여 예를 표시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형님이 권절을 보면서 말했다.
“왜국에 국서를 보내 항의의 뜻을 전했으니 몇 년 동안은 잠잠해질 것이 분명하다네. 대내씨와 대마도주는 자신들에게 혐의가 돌아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왜구들을 막아내겠지.”
“주상전하께서 정하신 뜻이 참으로 크시옵니다.”
“하지만 다시금 왜구가 창궐한다면. 그것은 대내씨와 대마도주가 수세에 몰려서 여력을 쏟아내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면 왜구가 끊임없이 창궐할 것이네.”
권절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형님을 바라보았다. 형님의 표정을 보면서 무슨 말을 숨기고 있었는지 짐작 하고 있으리라. 형님은 소매에 손을 넣어 다섯 장의 교지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훈련원에 소속된 절제사들을 소집하여 교지를 전하게. 이미 정군과 병부에 소속된 이들에게는 교지를 전달하였으니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일이라네.”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전쟁을 벌이기 가장 좋은 시일은 오 년 뒤라네. 그 이후로 늦어지면 준비과정에서 아국이 겪는 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지. 하지만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 철저히 준비하게.”
오 년 뒤에 전쟁을 벌인다는 말은 형님의 뜻이지만 홍위를 위한 배려가 분명하리라. 형님도 왕위에 오르고 삼 년이 지나서야 나랏일에 대해 안다 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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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에 있는 훈련도감의 모태. 남한산성 훈련장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찾아올 일이 없던 삼군의 절제사 모두와 병조판서, 그리고 훈련원 지사가 소집된 것이다.
훈련원 휘하의 삼군으로 불리는 훈련도감, 화기도감, 임해도감은 각기 지휘관인 절제사(節制使)를 두고 있었다. 물론 시작과 동시에 창설된 훈련도감과 화기도감은 각기 종 3품의 절제사였지만 임해도감의 격은 다소 낮았다.
물론 격이 낮다 하여도 흔히 말하는 사형(師兄)이나 사제(師弟)관계와 같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대하여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기수에 따라 대접하기를 즐겨 하였다. 작년에 훈영절제사로 임명된 곽연성(郭連城)은 정범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하였다.
“절제사님을 뵙습니다. 무과에 합격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안양(安襄)어르신은 저보다 연배가 많을뿐더러 저는 임해도감 절제사님이니 정4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저는 훈련도감 3기생입니다. 철령 전투에서 절제사님이 성취한 위업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의 칭찬을 듣자 정범수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윽고 들어온 자는 화기도감의 지휘관인 화영절제사 성담로(成聃老)였다.
“잠시 뒤에 훈련원 지사 경음당(홍윤성의 호) 대감과 병조판서께서 당도하실 것입니다.”
“경음당 대감은 참으로 오랜 간만에 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 절제사를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분이니 잘 되었구려.”
성삼문의 육촌 동생인 성담로는 본래 무과시험을 보아 관직에 오른 자였으나 화기를 다루는 일에 능숙하였다. 화기도감의 설립 목적이 화력 지원을 총괄하기 위한 자리이다 보니 화기도감 출신이 관직에 오르기는 힘든 일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홍윤성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당상관의 관복에 멋들어진 호랑이 문양의 흉배가 있었다. 늦가을 추위에도 관복만 입고 있으니 자랑하려는 속셈이 여실히 보였다. 홍윤성은 정범수를 보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무과 시험에서 격구를 행하다 낙마한 일은 잘 보았다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 군문에 있었으면 무어라도 배운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나마 전시에서 실수를 행하였으니 무과에 합격해서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어서 품계를 올리게. 나는 지사가 된 이후로 더 이상 군복을 입지 않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네. 공을 세우지 않아도 좋고 모든 일이 아주 좋게 풀리고 있다네.”
다들 홍윤성의 행적에 대하여 알고 있으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훈련도감 1기, 철령 전투의 주역, 거양 전투의 주역, 하르빈 전투 별동대 승전 그리고 오사만국 사절단 호위까지 행했던 자이다. 정범수는 소매를 더듬어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경음당 대감을 오랜 간만에 뵙습니다. 그러하니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선물이라?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나지 않는가? 혹여나 가배(加背 - 커피)가 아닌가?”
“바로 그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양도에서 가배를 처음으로 수확하게 되어 가져왔습니다.”
조선의 무역은 일 년마다 이루어진다. 여기서 홍삼을 팔고 향신료, 초석, 귀금속과 기호품인 커피 원두를 사들이게 된다. 물론 정식으로 수입하는 커피 원두는 모두 볶아서 싹이 트지 않는 원두이다.
향신료를 삶고 볶아서 싹이 트지 않게 하듯이. 오스만 제국도 주요 수출상품인 커피를 보호하기 위해 오로지 볶은 원두를 팔았다. 하지만 조선에 이주한 오스만 제국의 농민들은 메흐메트 2세에 대하여 강한 반발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자신들의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에게 복수를 할 방법으로 소중히 여기는 커피 생두를 작물 종자 사이에 몰래 반입한 것이다. 메흐메트 2세의 명을 받은 관원들도 농민들이 커피 생두를 밀수하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커피는 5년 동안 자라났고. 가까스로 커피를 수확하게 된 것이다. 커피의 재배는 대양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라도 궁궐에서는 비밀이었다. 훗날이 되면 비밀이 새어나가겠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다. 홍윤성은 커피콩을 하나 집어 들었다.
“참으로 훌륭하네. 나는 가배를 마실 적에 쓰고 떫은 맛 외에는 향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 얼마나 마음속에 스미는 향이란 말인가.”
홍윤성이 기름이 살짝 올라온 커피콩을 손 위에서 굴리다 풍부한 향을 맡으며 감탄했다. 수입하는 커피콩은 산패하여 향이 달아났지만 한 달 전에 수확한 커피콩은 진한 향기가 남아있었다. 홍윤성을 시작으로 관원들이 향을 즐기자 정범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비밀입니다. 혹여나 오사만국에서 귀부한 관원들이 사실을 알아차렸다가는.”
“알고 있다네. 오사만국과 아국간의 관계에 금이 가겠지.”
“그렇다면 어서 가배를 마셔서 없애버립시다. 수양대군어른이 창안한 가누 방식으로 우려낸다면 병조판서 대감께 드리는 선물로도 적당하겠군요.”
정범수는 이런 저런 준비를 했는지 깔때기 모양으로 엮은 아마포와 절구. 여기에 놋쇠로 만든 주전자를 꺼냈다. 이윽고 영문을 모르는 하인이 끓는 물을 주전자에 담아왔고 부서진 커피콩 위로 뜨거운 물이 부어졌다.
한 방울씩 우러나오는 커피를 보면서 모인 이들의 입에서 침이 넘어갔다. 그런 와중에 병조판서 권절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놀란 눈으로 우러나오는 커피를 보았다.
“조금 늦어서 미안하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건물 밖에서부터 향이 진동하였는데.”
“대양도에서 가져온 가배입니다. 갓 수확한 물건이니 가누로 마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양도의 소문을 들었는데 거기서 지내는 이들은 가배를 즐겨 마실 것 같군. 홍 지사는 대양도로 내려갈 생각이 없는가?”
“저는 이 자리가 좋습니다.”
수양대군이 창안한 가누, 현대의 드립커피가 권절을 시작으로 훈련원 지휘관들의 입으로 넘어갔다. 풍부한 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회의가 시작되었다.
“주상전하께서 얼마 전에 여러 질문을 하시며 명을 내렸다네. 나야 병조판서로 일하고 있으니 전체적인 일은 알아도 세세한 일은 알지 못하고 있지. 먼저 훈련원 현황은 어떠한가?”
“훈련원 지사 홍윤성 보고하겠습니다. 훈련원의 총원은 훈련도감 7,952명. 화기도감 5,548명. 임해도감 3,129명입니다.”
“훈련원에 휘하 삼군에 소속된 이들만 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을 합산한 것인가.”
“삼군에 소속된 이들만 계산하였습니다. 십 년이 지나 관직을 받은 이들이나 중간에 다른 보직으로 옮긴이들은 제외한 숫자입니다.”
훈련기간도 변하였고 도감군의 체계도 변하였다. 졸업 이후 오 년이 지나면 정교(正校)의 자리에 올라 정9품의 관직을 얻으며. 이후 오 년을 추가 근무하면 정7품의 관직에 오르게 된다.
이후 종6품부터는 청원 혹은 천거에 의지하여 보직을 변경하였다. 훈련원에 소속되어 병사 일을 계속 해도 좋으며 다른 보직으로 옮겨서 군문에 투신하여도 좋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본래 정원은 훈련도감과 화기도감이 일만 명, 임해도감은 오천 명에 달하여야 한다네. 특히나 화기도감 출신이 다른 보직으로 옮기는 비율이 높군.”
“화기도감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방패선에도 화기도감 인원이 화포 하나마다 둘은 달라붙어야 하며. 관아에 화포가 하나만 있어도 화기도감 병사를 보내라고 청원합니다.”
훈련도감은 잡색군의 중간 지휘관과 훈련을 담당하여 삼남 지방의 잡색군을 통솔한다. 하지만 잡색군이 화약무기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기에 화기도감은 관아에 소속된 지방군의 훈련을 담당한다.
당연히 지방 관아에서는 실력이 좋은 화기도감 병사들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여기에서 보직을 옮기는 이가 제법 되었다. 권절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런 덕분에 왜구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군. 그렇다면 묻겠네. 왜구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어떻게 되겠나. 자네들의 의견을 직접 말해보게.”
“왜구들과의 전투는 이미 벌이고 있습니다. 임해도감의 병사들이 맹렬이 활약하고 있으니······.”
“주상전하께서 몇 년 이내로 왜구와의 전면전을 벌이려 한다네. 선봉에는 도감군이 설 것이 분명하고.”
권절의 말이 끝난 직후 홍윤성이 놀란 눈으로 권절을 바라보았다. 그는 훈련원 지사이며 훈련도감의 3개 군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평소 훈련원 지사는 예산 편성, 훈련 과정, 그리고 입영 인원을 계산하는 한가한 관직이다. 하지만 최종 관리직이니 전쟁이 벌어지면 전면에 나서서 삼군의 총괄 지휘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하오나 선봉에는 기마갑사도 있습니다. 또한 귀부한 야인들도 도합 팔 만에 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 하지만 보급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마갑사야 당연히 대동할 것이지만 야인들이 문제라네. 과연 야인들을 보내서 성과를 크게 거두겠는가?”
홍윤성을 비롯한 삼군의 절제사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미 바다 건너인 대양도 원정에서 여진족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싸우기는 잘 싸우지만 몇 배의 보급이 필요했다. 기병 한 명이 말 세 필은 기본으로 끌고 다니니 사람 여섯 명 분량의 보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진족 대부분은 대양도가 안정화 된 직후 철수해 버렸다.
홍윤성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권절의 말이 이어졌다. 홍윤성은 어떻게든 훈련원 삼군을 동원한 전쟁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여기에 쐐기가 하나씩 박히고 있었다.
“북방에 있는 젊은 야인들이 왜국으로 떠난 공백을 달자들이 노린다면? 달자들이 아니라 하여도 흑룡강 유역에는 아직 아국과 접촉하지 않은 야인들이 무수히 살고 있다네.”
“하오면 전쟁이 얼마 뒤에 벌어질 것입니까?”
“아마 5년 뒤인 기축년(1470년)에 벌어질 것이라네. 더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지만 주상전하의 뜻이 그러하지. 그러니 자네들에게 어명을 전달하겠네.”
문종이 작성한 교지가 홍윤성을 비롯한 네 명의 지휘관에게 전달되었다. 홍윤성은 어명을 받지 않으려고 눈을 돌렸지만 지엄하신 임금의 명이니 어쩔 수 없이 교지를 펼쳤다.
[훈련원 지사 홍윤성에게 명을 내린다. 조만간 왜구가 창궐하여 상왕께서 행했던 대로 본보기를 보일 것인즉. 훈련원에 소속된 삼군의 정원을 충원하며 삼군이 호응하여 훈련할 기회를 ···(중략)··· 이를 반드시 참관할 것이니 철저히 준비하여라.]
홍윤성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삼군이 호응하여 훈련할 기회라는 말은 쉽지만 서로 성향이 다르고 훈련 과정이 다른 병사들이다. 여기에 정원을 임시로 충원하라는 명이 함께 있었다.
신병들이 호흡을 맞추어 훈련하게 할 장소도 시간도 문제이다. 주상전하께서 참관하시는 훈련에 허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는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다른 관직으로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진급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외직이라도 좋았다. 오히려 정범수처럼 대양도에 들어박혀 있으면 크나큰 고난을 겪지 않을 것이다. 홍윤성의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 꼬리가 올라가며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 아니 세상에! 주상전하께서 저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경음당 대감. 어찌하여 경망스럽게 웃는 것이오?”
“홍 지사는 저런 버릇이 있다네. 어명을 받으면 기분과 상관없이 웃음이 나오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을 행하게 되었으니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크하하하하하!”
권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팔 년 전 그날과 같이 홍윤성은 광인처럼 남한산을 뛰어다니며 뒹굴고 넘어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만 입에서는 웃음이 나오는 모습을 밝은 보름달이 내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