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16화 - 이국(異國)의 인재들 >
폴리네시아인은 한명회의 소개를 받아 연희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석 달이 지나면 초겨울에 접어드니 추위에 몸이 상하기 전에 필리핀에 내려 보내서 섬 하나를 터전으로 삼고 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필리핀에서 수입한 구리 광괴에 금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 가늠하는 일이리라. 형님은 홍위에게 명을 내려 구리 광괴를 분석하고 금의 유무를 확인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연히 내가 자문을 담당했다.
“아바마마께서 북방의 일 이후에 남방의 일을 행하라 하셨는데 책무가 막중하여 저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옵니다. 세자저하께서는 일을 행할 적에 사려가 깊으며 언제나 본보기가 되고자 솔선수범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하니 주상전하께서도 세자저하께 거는 기대가 크신 것입니다.”
“숙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여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집현전(集賢殿 - 현인을 모아두다)과 대조되는 기관인 이현전(肄賢殿 - 현인을 익히다)이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도입한 학자들은 조선의 학문과 대조되는 천문학과 화학을 익혔으니 새로운 학문의 갈래라 여긴 것이다.
조선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 학자들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종교 행사는 열지 않아도 매년 들여오는 향신료와 커피를 하사하며 조선식 이름도 지어줬다. 그렇게 조선에 적응한 이들은 많은 예산을 사용했지만 만들어 내는 것도 많았다.
단청에 쓰이는 안료를 조선에서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찾아냈고. 사옹원을 오가며 분청사기의 개량과 고려청자의 복원에 힘쓰고 있었다. 이런 이들을 통솔하는 자는 천문학으로 명성이 드높은 정인지였다. 그러나 이현전에 도착했지만 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대감은 어디에 있는가?”
“어젯밤에 대제학 가심(카심)과 함께 천문을 보시다 피로가 몰려와 잠시 오침(午寢)을 하고 계십니다.”
“올해 일흔이 다 되는데 아직도 학문에 열정을 보이고 있다니.”
홍위와 내가 잠시 기다리자 방금 전 잠에서 일어났는지 얼굴에 기름이 번질거리는 정인지를 시작으로 관원들이 뛰쳐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일흔이 다 된 노인이 밤을 지새운 것일까.
“송구하옵니다. 세자저하가 당도하심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학문에 매진하는 일은 언제 보아도 좋은 일이지만 연배를 생각하시오.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밤을 지새우게 되었소.”
“토성을 관측하다 기이한 것을 보았습니다. 가심과 함께 새로 만든 천리경으로 토성을 보니 토성에 귀가 달려 있었습니다.”
“귀가 달려있었다는 말이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영전사(領殿事)대감을 만나러 온 일은 아니오. 구리 광괴에서 금을 분리할만한 자를 찾고 있소이다.”
이슬람의 천문학자들은 천리경을 보자마자 천문 관측에 사용한다면서 마구 개조하고 분석하였지. 그렇게 망원경을 개량하다 보니 토성의 고리를 관측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직 명확한 성과는 거둘 수 없지만 이건 염두에 둬야 할 일이다.
정인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중년의 학자 한 명을 소개해줬다. 손끝이 시커멓게 물들고 한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으니 실험을 하다 부상을 입은 것일까.
“광괴에 대하여 상세히 아는 자는 자배(자파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옹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생각대로 자배는 연금술을 배웠던 학자인지 개인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약품냄새가 풍겨왔고 서책 대신 작은 광물조각과 약품을 담아두는 자기병이 즐비하게 있었다. 홍위가 자리에 앉자 자배가 인사를 올리고 말을 시작했다.
“구리 광괴에서 금을 분리하라 하셨사옵니까. 그런데 이 구리들이 금광에서 산출된 것이 분명합니까?”
“자세한 일은 탐검사의 관원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톤도(현 필리핀 마닐라 인근)라는 고장에서 소출된 구리요. 그곳에서는 구리 속에 섞인 금을 분리하는 법을 모르지 않겠소.”
“구리 속에 섞인 금이라. 참으로 어려운 물건을 가져 오셨습니다.”
나는 화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생물학과 연관된 지식을 알고 있지만 이런 시대에 적용하기는 힘들어서 필수 영양소에 대한 지식만 입신체비서에 기입했었다.
홍위가 화학 지식을 가질 이유도 없으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자배는 손톱만한 크기의 광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구리에 녹이 슬어 푸르스름한 가루가 나옵니다. 분명 구리가 풍부한 광석은 맞습니다.”
“이미 구리에서 은을 분리하지 않았소? 하지만 금은 다른 것이오?”
“은은 구리보다 빨리 녹으니 쉬운 일이었지만 금은 무게가 무거운 것을 제외하고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선 금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겠군요.”
광석을 쪼갠 자배는 대나무 막대를 가져오더니 눈에 대고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의 빛을 잡아내려고 어두운 곳에서 보나 했는데 놀랍게도 양 끝에는 수정을 깎아 만든 렌즈가 달려 있었다.
“금이 약간 들어 있습니다. 석영과 구리와 금이 같이 휘감겨 있군요.”
“그건······. 뭐요? 그러한 기물로 무엇을 보는 것이오?”
“천리경을 응용한 확대경(擴大鏡)입니다. 돋보기로 보면 희미하지만 확대경은 열 배는 크게 볼 수 있으니 금의 알갱이까지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숙부님께서 천리경을 창안하신 이후 오사만국에서 귀부한 이들은 천리경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숙부님의 공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금이 있다 하였소?”
그러니까 천리경을 보고 나서 바로 응용해서 다른 학문에 접목했다고? 이런 응용력을 생각해보니 이 세계의 과학발전은 나의 생각과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것 같았다. 자배는 광석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광괴가 석영 사이에 구리가 끼어들고 약간의 금도 분명히 보였습니다.”
“확대경으로 보아 약간의 금이라 하면 분리하기 까다로운 물건이겠군.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이오?”
“가장 쉬운 방법은 수은과 섞어 수은금(水銀金 - 아말감)을 만들어 수은금과 수은동의 무게 차이를 이용하여 분리합니다. 제가 있던 고장에서는 이런 방식을 택합니다.”
수은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이 시대에는 중금속 중독에 관련된 어떤 지식도 없으니 수은을 마음껏 사용해 땅을 오염시킬게 분명하니까. 당장 그만두라 말하려 했지만 자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 같이 수은이 풍부한 지방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은 수효가 적은 주사를 달여 수은을 만들어야 하니 배보다 배꼽이 커다란 일이 벌어지겠군요.”
“당주홍(唐朱紅 - 수은 안료)만 하여도 제법 비싸다고 들었소. 그러니 아예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택해 주시구려.”
“조금 거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인부들을 불러 일을 시작하지요.”
거친 방법이라 했는데 아예 궁궐 밖에 이현전에 소속된 관아로 들어가더니 사람을 시켜 커다란 절구로 구리 광괴를 빻기 시작했다. 자배는 모래보다 조금 굵게 변한 구리 광괴를 손으로 쓸어보더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윽고 커다란 대접을 여럿 가져오더니 사금을 채취하는 모습과 같이 물을 넣고 흔들어 모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렇게 되면 석영만 분리되고 구리는 남지 않을까? 홍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참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저렇게 되면 녹여서 구리를 뽑아내기는 쉬운 일이겠군요. 하지만 아국이 원하는 것은 구리가 아니고 금입니다.”
“자배는 능숙한 이이니 분명 수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궁금하군요.”
그렇게 몇 번의 작업을 거치고 다시 구리 광석들이 비중별로 차례대로 분리되었다. 저렇게 해도 황금색은 보이지 않으니 구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겠지.
“오래 기다리게 하여서 죄송합니다. 다음 작업은 금방 끝나는 일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구리를 녹여서 모아오너라!”
“무거운 광석만 모아온 일은 알겠소. 금이 많이 섞일수록 무거운 광석이니 따로 분리하겠지. 하지만 저렇게 되면 금이 많이 들어간 구리가 되는 것이 아니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선에 있는 물산으로 제법 좋은 녀석을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오십 근에 달하는 구리 광괴에서 금이 가장 많은 구리가 뽑혀 나왔다. 모아두니 얼굴 크기의 구리판이 되었는데 홍위는 구리판을 만져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제법 무겁고 생각보다 잘 휘어지는군. 금이 많이 들어있어서 이러한 것인가?”
“제가 살펴보니 금이 일 할 정도 들어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음 작업은 위험한 일이니 세자저하께서는 뒤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자배는 구리판을 무쇠가위로 잘게 깎아내더니 커다란 병을 가져왔다. 자세히 보니 유리인데 이 양반들 유리도 만들었던가? 언제 만들었지?
유리병은 사람 팔뚝 정도의 크기지만 일그러진 형상에 불투명한 갈색이니 섬세하게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기반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낸 유리이다. 새로운 문물이 계속 튀어나와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 잘린 구리판이 들어가고. 자배는 나무상자를 열더니 유리병을 꺼내고 액체를 조심스럽게 부었다. 이윽고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알지 못하지만 진한 산(酸)이 아닐까. 홍위는 깜짝 놀라며 자배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참으로 신비한 녀석을 만들어 냈구려. 그 물건은 무엇이오? 어찌 하여 구리를 만나서 연기를 피우며 끓어오르는 것이오?”
“유산(硫酸 - 황산)입니다. 금을 제외한 대부분의 금속을 녹이는 녀석이지요. 일전에 질 좋은 석류황(石硫黃)이 들어온 덕분에 값싸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금속을 녹이니 참으로 위험한 물건이겠군. 그런데 연기가 줄어들고 있소.”
“유산에 구리를 녹이면 유산동(硫酸銅 - 황산구리)이 되며. 녹지 않은 구리와 황금이 남게 됩니다. 여기서 더욱 정제하려면 금을 다른 산으로 녹이면 되지만 그런 일을 하면 훨씬 값이 올라가니 여기서 중단하겠습니다.”
금을 녹이는 물이면 왕수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화학자는 삼대강산을 모두 만들 수 있는 기술자이니 앞으로 이현전에서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지.
반응이 끝난 유리병에 물을 넣어 희석시키고 남은 물질을 체에 걸러내니 제법 많은 금가루와 함께 시퍼런 황산구리 수용액이 쏟아져 나왔다. 자배는 체에 걸러진 금가루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순도는 육 할 정도겠군요. 수은을 사용해서 수은금으로 만들었다면 더욱 많은 금을 뽑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쉽지만 쉰 근의 구리 광괴에서 스무 근의 구리와 열다섯 돈의 금을 구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오. 그런데 유산을 제법 많이 사용했던데 값진 물건이 아니오?”
“유산의 원료인 석류황은 대양도의 죄수들을 시켜 만들고 있으니 상관 없습니다. 듣고 보니 대양도의 죄수들이 많이 죽었다 하던데 참으로 큰 죄를 저지른 자들이 분명해 보입니다.”
홍위도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양도에 수감된 자들 중에 중죄인. 형무소에서 유황을 채취하는 자들은 보통 죄수가 아니고 모두 왜구 출신이다. 예전에는 유황 채취 도중 유황독에 당해 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니까.
죄수들에게 작업을 지시했더니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눈이 멀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자가 속출하였고. 관원들마저 고통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조선에서 노략질을 하다 사로잡힌 왜구 백여 명이 유황을 채취하고 있었다.
도주를 결심해도 숲속에서 임해도감의 추격을 따돌릴 방법도 없으며.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배를 타고 열흘 이상 움직여야 하니 탈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위가 정제된 금가루를 만지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이 소출된 구리와 비교하였을 때 이득이오? 아니면 손해요?”
“큰 이득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욱 많은 양의 구리를 단번에 만들어내면 소득이 많아질 것입니다. 단번에 천 근 이상을 정제한다면 황금이 많이 들어있는 광괴만 선별할 수 있으며. 소모되는 유산이 상대적으로 적어질 것이니까요.”
“알겠소. 방법을 알았으니 당분간 유산을 많이 만들어 내시구려.”
이론적 기반이 생기자 홍위도 자신감이 붙었는지 당당하게 나를 돌아봤다. 모든 일을 나의 공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나도 일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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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연희당에 사람들이 들어찼다. 폴리네사이인들에게 조선의 문물을 가르치려 애썼지만 다들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조선으로 동화시킨 여진족과 대만 원주민들보다 덩치가 크고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으니까.
“들어 올려! 천천히! 그렇게 하면 가슴의 근육이 늘어난다!”
“네! 알겠다!”
“이럴 때에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농도 원주민, 폴리네시아인을 교화한다 하였을 때에 모든 신료들이 염려를 표시하고 심지어 병조판서인 권절은 연희당 인근에 수백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것이 의압(벤치프레스)이다. 너희들은 마나를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이지만. 모든 마나는 조상님께 물려받는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의 마나를 주었다!”
“입신체비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하여 몸을 굳건히 만드는 일이 시작이다. 그렇다면 왜 강해지느냐! 그것은 모든 만물이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마나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만물은 부모와 자식!”
내가 하는 짓은 일종의 세뇌다. 입신체비서를 가르치기 이전에 이들의 악습을 뿌리 뽑아야 하니 닥치는 대로 말을 가르치고 입신체비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말을 마구 지어냈다. 마나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이고 다른 이에게 강탈하는 것은 부정적인 방법이라고. 스스로 몸을 놀려 마나를 키워나가면 몸이 더욱 강해진다 하였다.
“자네는 의압을 백사십 근을 들었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니 어떠한가!”
“백칠십 근을 들었다!”
“그렇다면 마나는 삼십 근이 늘어난 것이 아닌가!”
“몸을 움직이면 마나가 생긴다! 나는 고기의 마나를 먹고 쇠로 마나를 키웠다!”
아직 이론이 부족하니 저런 쓸데없는 말을 하지만 배우는 속도는 놀랍다 못해서 경이적이기까지 하였다. 폴리네시아인은 단순한 야만인이 아니다.
오전의 운동이 끝나고 오후의 학습이 시작되었다. 나이가 마흔이 좀 넘어 보이는 족장은 더듬거리면서 교재 대신 시험삼아 보여준 용비어천가를 읽어나갔다.
“뿌리 깁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안 음직··· 움··· 움직이므로.”
“참으로 훌륭하네. 고작 두 달 만에 정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는가?”
“수양대군 어른이 힘을 줘서 그랬··· 그렇 습니다.”
고작 두 달 만에 대부분의 폴리네시아인은 조선말의 기본적인 단어를 읽고 쓸 정도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이 먹고 사는 일이 바쁘기 때문이지 잠재 능력은 대단한 것이다.
덕분에 이들을 필리핀으로 보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나를 대신해 입신체비를 가르칠 훌륭한 제자 몇 명과 관원들을 붙여 보내면 충분한 일이지.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추워지는데 이주하기 좋은 시기이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수양대군어른이 이들과 함께 한다면 이역만리라도 거리낌 없이 나서지 않겠습니까.”
“내가 왜 가는가? 신농도 원주민들과 친한 자네가 가야지.”
눈치도 없는 한명회가 자랑스럽게 말하니 황당할 지경이었다. 내 나이가 50이 다 되어 가는데 필리핀에 왜 내려가나. 머나먼 이국에 새로 생긴 땅에 종친이 머문다 하면 반란이다 흉계다 하면서 간관들이 형님과 홍위를 들들 볶아버릴 것이 분명한데.
물론 내가 가면 일이 편해진다. 폴리네시아인의 충성도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갈 것이며 명령 체계도 일원화 되겠지. 그런데 그런 귀찮은 일을 왜 해? 내가 항로를 배워서 뭐에 쓰라고?
한명회는 상소에 관한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개를 숙이며 내 소매를 붙잡더니 애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들이 이렇게 대군어른을 따르지 않습니까. 저는 이들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입신체비사들도 따르지 않는가. 자네는 신농도 원주민의 언어를 알고 있으며 그들에게 은혜를 배풀어 신임을 얻고 있으니 자네가 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제가 언어를 안다 하여도 단어 몇 개만 주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어허. 종친이 함부로 머나먼 이국에 발을 들여 머무는 일은 옳지가 않네. 외교를 행할 적이라면 몰라도 영토를 개척하는데 어찌 종친이 나서는가.”
지난 몇 년 동안 동남아시아 다니면서 많이 고생했지? 이제 네가 갈 곳은 태평양이야. 아직도 현실도피를 하는 한명회에게 쐐기를 박아버리기 위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국강은 여송으로 내려가 저들과 함께 바다를 오가며 항로를 찾아내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네. 이제 환갑이 다 되어가는 사돈을 머나먼 남도에 방치해 둘 셈인가?”
“여 호군 어르신은! 그, 그렇다면 저도 신농도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라네. 듣자하니 이들은 머나먼 뱃길을 따라 동속(同俗)으로 엮인 이웃들을 두고 있으니. 이들을 따라 움직인다면 머나먼 고장까지 뱃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한명회는 사지에 힘이 풀리더니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지난 4년 동안 죽어라 바다를 오간 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 분명하다. 그런 한명회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자네의 호는 압구(狎鷗 - 갈매기와 친숙하다)가 아닌가. 갈매기는 실컷 보겠군.”
“대군어른! 제발! 적어도 제 손주는 보게 해주십시오! 갈매기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명회를 비웃듯이 연희당 용마루 위에 갈매기가 내려앉아 까악 하는 울음소리를 내고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대양을 오가는 갈매기는 없을 것이니 갈매기를 보기 힘들 것이다.
결국 행동과 호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해안에 사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항해가 끝나간다는 신호와 같으니까. 며칠이 지나고 한명회는 대양도 원주민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의 앞길에는 태평양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