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13화 - 4년이 흐르고(1) >
1465년 3월, 한때 야인여진의 아골타(阿骨打)는 팔다리를 뻗으며 겨우내 굳어있던 몸을 풀었다. 눈이 녹는 3월이 되었으니 여름이 오기 전까지의 짧은 사냥철이 되었다. 그는 튼튼한 벽돌로 쌓은 집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세상 참 많이 변했어.”
한때 사차(沙車) 라는 부족에 속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춥고 배고프고 매일이 걱정되는 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조선에 귀부한 이후 모든 일이 변했고 특히 최근에는 더욱 그랬다.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자 아내가 나서서 따듯한 마유(馬乳)를 건네주었다.
“사냥에 나서는 것입니까? 작년처럼 고생하시면 안 될 일입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예전에야 히제족(赫哲 - 허저족, 현 하바롭스크 일대에 사는 만주족의 일파) 녀석들에게 줄 돈이 아까워서 안내를 받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거요.”
“큰 놈을 노리다 해를 입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넷이나 되지 않습니까.”
스물일곱인 그의 직업은 사냥꾼이었다. 여진족 대부분은 사냥꾼이지만 사람이 많아지니 모피의 가격은 날이 갈수록 뛰어올라 짐승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아골타가 향한 곳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대장간이었다. 한때 야인여진 부락의 대장장이이며 조선에 귀부한 이후에도 대장장이 일을 하는 노인의 곁에는 강철 화살촉이 쌓여있었다.
노인은 아교와 노끈으로 사냥을 위한 작살 화살촉과 혹여나 벌어질 분쟁에 대비하고 맹수를 사냥하기 위한 버들잎 화살촉을 화살대에 결합했다. 언제 보아도 뛰어난 솜씨였기에 아골타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런 녀석이면 순록 정도는 쉽사리 잡을 수 있겠지.”
“순록이라? 세상에, 우리 아골타가 많이 컸구나.”
“내 나이가 스물일곱이오! 아내도 있고 자식만 넷인데 그런 노력은 해야지.”
“너무 노력해서 작년에는 산군을 잡게 되었나? 아니 잡지 못했지?”
아골타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대장장이 노인이 겨울 동안 수선하였던 마체퇴(劘搋桘 - 마체테)를 건네주었다. 대양도에서 널리 쓰이는 이 칼은 길이가 환도의 반조차 되지 않았지만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휘둘러 잘라내는 일에 험하게 쓰면 되니 정말 좋은 칼이었다. 칼 하나로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으니 여진족 사냥꾼들은 마체퇴 하나 정도는 필수로 가지고 다녔다. 그렇게 짐을 다시 꾸리자 거대한 빵 덩어리를 보며 대장장이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작년에 조카인 러오단(劉闡)은 건면포(乾麺麭 - 말린 빵)를 구해서 편하게 사냥을 다녀왔더군.”
“건면포는 다 좋은데 비싼 것이 흠이지. 그러니 주식은 면포(麺麭 - 빵)로 삼으면 될 일이고. 내가 이 나이 먹고 면포를 쪼개지 못하겠소? 영감이 만든 마체퇴도 있는데?”
“네가 오래 사냥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머리통만한 면포를 언제 잘라서 언제 씹어 먹는다고 그러는 것이냐. 하긴 내가 다닐 적에는 귀리가루만 해도 감지덕지였지.”
다시 노인의 손에서 질이 떨어지는 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쓰지도 않는 잡철로 만든 쇠도끼나 단검이었지만 히제족에게 주면 거리낌 없이 나설 귀한 물건들이었다. 아골타는 사금 몇 조각으로 값을 치르고 마을로 나왔다.
야인여진이건 건주위건 해서여진이건 모두 조선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특히 식량 문제를 해결한 이 년 전부터는 이주민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전처럼 전가사변(全家徙邊)이 아닌. 나라에 자원하여 이주하는 이들이다.
북방은 더 이상 추위와 싸우고 넓은 땅을 개척하여 먹을 양식을 얻는 빈곤한 지역이 아니었다. 새로운 밀인 사종(四宗)을 심으면 논에 심은 쌀과 수확량을 견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들판에는 밭을 일구는 농부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직 미타호(湄沱湖)의 물이 온전히 녹지 않았지만 밭을 축일 물은 충분히 되었다. 그런 분주한 모습을 보면서 아골타는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농사나 지어볼까.”
농사를 짓지 않을 뿐이지 자신 소유의 밭이 두 결은 있었으니 말년에는 농사일을 하면 될 것이다. 아골타는 미타호 근처에서 가장 큰 고을인 솔빈군(率賓郡 - 현 러시아 우수리스크)으로 향했다.
솔빈군의 인근에 도달하자 풍차들이 보였다. 거대한 날개가 돌아간다 하여 귀물이라 칭하는 자도 있었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자도 있었으나 필요한 물건이었다. 일대에서 수확한 밀을 먹으려면 풍차를 이용해서 고운 가루로 빻아야 하니까.
그렇지만 풍차를 만들려면 수많은 아마포, 그리고 질 좋은 목재가 필요하며 기술자들의 힘도 많이 필요하니 양반가에서 재력을 투자하여 풍차를 세워 사용료를 받았다. 그렇기에 널리 쓰이는 것이 연자(碾子)방아였다.
연자방아는 돌리는 물건이니 말이나 소가 필요하다. 간혹 입신체비를 하는 유생들이 연자방아를 굴렸지만 보통 겨울 동안 말을 관리하는 대가로 말의 힘을 쓰게 만든다. 그렇게 단련한 말은 비루먹지 않고 힘이 왕성하기에 쓰기 좋았다.
연자방아 주변에는 자신의 말을 돌려받으려는 여진족들의 사이로 조선인 사냥꾼들도 섞여 있었다. 개중에 아골타를 알아보는 이가 있었기에 아골타도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였다.
“러오단! 자네도 사냥에 나서나?”
“물론이지. 이번에는 배를 타고 내려가 안주(安州 - 현 러시아 올가)에서 산군 사냥을 할 작정이라네. 나는 자네처럼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네.”
“웃기고 있군! 내가 너무 잘 숨어서 산군이 내 앞까지 오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지!”
아골타는 작년의 일을 떠올리자 팔에 소름이 돋아왔다. 멧돼지를 노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에게 마체퇴를 전력으로 휘둘러 코를 적중시켜 쫒아냈다. 그렇게 기다리자 하인이 나와서 자신의 말과 종이를 내밀었다.
“댁이 아골타 맞으시오? 수령증에 서명 좀 부탁드리오.”
“맞소이다. 그나저나 아골타가 이게 맞기는 하나? 나도 정음을 잘 배우지 못해서.”
“아곤··· 아골타 맞소이다.”
자신이 아는 유일한 정음인 이름 석 자를 삐뚤빼뚤하게 적은 아골타는 겨울 동안 부지런히 몸을 놀린 말을 껴안았다. 이제 사냥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들일 차례였다.
솔빈군 시내로 들어서자 빵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한양 양반들은 피렌체의 제빵사에게 들은 파네라고 불렀지만 지방에서는 익숙한 한자를 따서 면포라고 불렸다.
북방의 촌락이 도시가 되는 과정은 철저히 계획적이었다. 농지가 늘어나니 풍차를 시작으로 한 제분시설이 생기고. 다시 빵을 굽는 일이 번거로우니 제빵사들도 모이게 된다. 솔빈군에는 제빵사들의 가게인 면포방이 여러 곳에 있었다.
가게를 기웃거리며 갓 구운 빵의 향기에 군침을 흘리던 아골타는 어느 새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자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런 일에 익숙했는지 점원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보자기를 받아들었다.
“건면포는 좀 있소? 사냥 가려고 하니 석 되만 주시구려.”
“석 되면 제법 오래 사냥 하시려나 봅니다. 여기 갓 구운 건면포도 좀 잡숴 보십시오.”
건면포는 엄지 크기로 빚은 면포를 세 번 구운 녀석이었다. 아골타가 입 안에 건면포를 하나 넣고 침을 축이자 고소한 맛이 퍼졌다. 수양대군이라는 종친은 이걸 보면서 흉물이라고 칭하였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골타가 찾은 다음 가게는 율도(栗島)상회였다. 율도상회는 요긴한 물건들을 들여오는 재주가 있었으며. 상주인 홍길동(洪吉童)은 상재가 능통하여 사방을 누비며 물건을 들여와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상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건장한 장년의 남성이 인사를 하였다.
“오늘 새 상품이 들어왔는데 잘 된 일이군요. 무엇을 찾으려 오셨습니까?”
“이거 참, 율도상회의 주인을 뵙게 될 줄은 몰랐소.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사냥에 필요한 물품 좀 골라 주시구려.”
송상(松商)으로 대표되는 상인 가운데 가장 발 빠르게 북방으로 나선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홍길동이었다. 그는 손을 비비면서 소금과 비상시에 쓰일 약초, 육포를 대신한 어포. 그리고 이상하게 꾸덕꾸덕하게 마른 덩어리를 내밀었다.
“이건 뭐요? 소금이야 당연하고 약초나 어포야 필요한 물건인데.”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말랭이라는 물건입니다. 남도에서는 단 맛이 나는 고구마라는 녀석을 기르는데 그걸 쪄서 말린 놈이지요. 이번에 새로 들어왔으니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아골타가 쪄서 말린 고구마를 질겅거리면서 씹자 은은한 단맛이 퍼져 나왔다. 북방에서는 과일을 제외하고 느끼기 힘든 단맛에 쉴 새 없이 고구마가 입으로 말려 들어갔다. 홍길동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크게 웃었다.
“참으로 잘 팔리겠군요. 남도에서 고생하면서 가져온 보람이 있습니다.”
“맛이 좋구려. 그런데 상회의 주인께서 어인 일로 변방인 솔빈군에 머무르는 것이오? 경원이 가장 큰 곳인데?”
“사역원(司譯院)에 계시는 매월당(梅月堂) 어르신의 강연이 여드레 뒤에 열립니다. 그래서 강연을 따라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지요.”
아골타의 고개가 끄덕이면서 웃음이 지어졌다. 사역원은 본래 외국어 교육기관이자 통역기관이지만 변방의 부족 간의 분쟁을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외방(外方) 관원을 두고 있었다.
외방 관원 가운데 으뜸이 되는 이는 첨정(僉正 - 종4품 관직)으로 재직하는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그는 단순한 외방업무를 넘어서 악습을 철폐하고 풍습을 살리는 일을 즐겨 하였으니 그의 강연을 들으러 주변의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나는 되었소. 그리고 요즘 벌이가 시원치 않은 것 같은데 돈벌이가 될 물건이라도 있소?”
“요즘 늙은 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더군요. 저희는 말을 취급하지 않으니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이야기지만요. 너무 늙지도 않고 경험이 많은 말을 사들인다 합니다.”
“어디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오? 너무 늙지도 않고 경험이 많은 말을 왜 찾지?”
“저도 모르겠지만 팔린 말들이 송화강을 따라 하르빈 너머까지 옮겨진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경험이 많은 말은 초보자가 타도 좋은 말이다. 하지만 적당히 늙었다면 몇 년을 쓰지도 못하고 말고기가 되거나 수레나 끄는 말이 되리라. 상회 밖으로 나온 아골타는 시장을 둘러보면서 손님과 싸우는 미곡상(米穀商)을 보았다.
“진(眞)가루 한 말에 쌀 세 말이라니.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오?”
“이미 진가루는 더 이상 귀하지 않아서 밀가루로 불리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쌀 네 말을 샀던 때는 작년까지고 올해부터는 누가 뭐라 해도 서 말이오.”
“이래서야 농사 지어먹지 못하겠구먼! 에이 내가 더러워서 졌소. 쌀 세 말이나 주시오.”
진가루라 불리면서 귀하게 여길 때는 언제고 이제는 밀가루라 불리면서 천덕꾸러기 신세라 하는가. 하지만 먹고 살 일에 걱정이 없었다. 이미 근방에 정착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퍼지고 있었다.
‘지주 등쌀에 휘말리고 자투리땅을 쪼개서 쌀 먹고 사느니. 북방에 올라와서 면포 먹으면서 열 결을 돌려먹고 말지! 북방 오기를 잘 했어!’
북방은 농지가 될 땅이 넘쳐났다. 이 시대의 토지 면적인 1결은 흉년도 풍년도 아닐 시기에 4인 가족을 먹여 살릴 면적이었다. 그러나 북방의 농부들이 소유한 땅은 평균을 잡으면 10결에 달했다.
그러니 3결은 밀을 길러 식량을 얻어내고 3결은 다른 작물을 기른다. 나머지 땅은 휴경지로 내버려 두지만 그렇게 살아도 부족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다른 무엇도 아닌 쌀이었다. 아골타는 주변에 사는 조선인 농부의 푸념을 떠올리면서 말에 올랐다.
“세상살이가 쉬운 줄 아나. 그래도 북방에서는 추위만 버티면 쉬운 삶이지.”
십 년 전만 해도 전가사변의 고장이자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고장인 북방은 사라졌다. 앞으로 북방이 어떻게 변할 줄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먹고 살 걱정을 없게 만들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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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년 5월, 대방선 다섯 척과 방패선 다섯 척으로 구성된 선단이 마자파힛 제국의 바다를 가르고 지나갔다. 작년에 새로 창설된 관청인 탐검사(探檢司)의 실무자이자 이번 선단의 지휘자인 한명회는 눈에 불을 켜면서 항로를 읽어나갔다.
방길주는 작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설계한 새로운 선박이 조만간 완성될 예정이다. 그렇게 정4품 제조(提調)의 자리에 있는 한명회는 천리경을 내리고 눈을 비볐다.
“이놈의 천리경은 다 좋은데 거꾸로 보여서 문제란 말이야. 눈이 너무나 피로해지는군.”
“그런데 오 년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기억은 모두 하고 계십니까?”
“그날의 일은 잊히지 않는다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신농도(神農島)에 사는 이들이 항해에 능숙하여 여의치 않으면 다른 곳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네.”
뉴기니의 이름은 농업의 신인 염제 신농의 이름을 따서 신농도라고 불리었다. 다른 무엇을 떠나서 고구마는 삼남 지방의 요긴한 식량거리가 되었으니까 합당한 이름이리라.
그렇게 항해하기를 며칠. 간혹 보이는 머나먼 남쪽에 있는 땅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호기심을 억눌렀다. 한명회는 자신이 표류했던 해역에 접근하여 빠르게 이동하였다. 그의 시야에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풍경이 들어왔다.
“저기다! 저 섬이다! 저 섬 안쪽에 신농도의 토인들이 살고 있으니 경계를 충실히 하라!”
“그런데 토인들이 아국까지 오게 될지 의문입니다. 많은 준비를 했지만 오지 않는다 하면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일을 대비하여 여러 준비를 하지 않았는가. 혹여나 저들이 이주하지 않는다 하면 안내를 받아 다른 섬으로 향하면 충분한 일일세. 정말 고생스러운 일이겠지만.”
폴리네시아인의 조선 이주를 위하여 강철로 만든 도끼, 마체퇴, 그리고 농기구를 준비했다. 값진 물건이 아니지만 금속이 부족한 이런 섬에서는 정말 진귀한 물건이리라.
상륙 이전에 원주민들에게 신호를 보내고자 보총 몇 발이 쏘아졌다. 하지만 적막한 숲 속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한명회는 병사들과 함께 기억을 더듬으며 숲 속으로 향했다.
“뱀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창으로 쫒아라. 물리면 반 시진(1시간)이내에 목숨을 잃게 되는 맹독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분명 이 길이 맞습니까? 사람이 다녀간 지 시일이 꽤나 흐른 것 같군요. 혹여나······.”
“남 사정(司正 - 종7품 무관)은 너무 걱정이 많군. 그런 일은 마을에 당도하면 알 일이니 염려하지 말게.”
함대에 소속된 임해도감 지휘관인 남이와 달리 한명회는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여기서 토인들을 데려가지 못하면 다른 토인과 만나서 물물교환을 하고 정보를 얻어서 다시 수색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마을까지 도착하였을 때 한명회의 눈에 보인 것은 크게 파손된 목책과 고함을 치는 파수병이었다. 그렇게 마을의 문이 열리고 조선인들 앞에 족장이 성큼성큼 걸어 달려 나왔다.
“이럴 수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요!”
5년 전에는 500명이 넘었던 부족민들은 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자신이 내수린으로 제압했던 덩치가 큰 전사는 한 팔을 잃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에 서 있었다.
손짓과 발짓과 회화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표류했던 자신에게 식량을 전해 준 덕분에 주변 부족 모두에게 협공을 당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화포를 녹여 만든 청동기로 대응하였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오 년 만에 부족의 절반이 몰살당하고 잡혀가기에 이르렀다. 족장은 자존심이고 뭐고 내버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한명회의 옷깃을 잡으며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그건 댁들이 잘못한 것이오. 주변에 사는 이웃들에게 일방적으로 해를 입히니 독이 오른 것이 아니겠소. 하지만 그러한 일로 내 목숨을 구하였으니 기회를 주겠소. 나를 따라 아국의 땅으로 올 것이오?”
예전과 같이 바닥에 배가 그려지고 폴리네시아인을 뜻하는 사람이 그려졌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표현하자 족장은 고개를 저으면서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한명회는 상황을 파악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주변에 사는 놈들이 아녀자를 납치하여 노예로 삼는다는 말이겠군. 그래서 갈 수 없다 하는 것이고. 그러니 자신들도 다른 섬으로 피난하지 못하는 것 같네.”
“그냥 힘으로 압박해서 태우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영 귀찮은데 말입니다.”
“자네들은 대월국(베트남)에서 힘 좀 쓰지 않았나! 가족들이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는데 조선으로 귀부한다 하여 이들이 진심으로 복속하고 주상전하를 위하여 힘을 쓰겠나?”
이들에 풍속에 대한 이야기는 서책으로 작성되서 널리 알려졌다. 사람을 잡아먹는다 하여도 조상을 귀하게 여기고 가족을 보호하는 일에 힘쓰니 그런 정성만큼은 조선 사람들과 비교하여도 뒤떨어지지 않은 자들이었다.
남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주상전하에게 신임을 얻은 토인들이 높은 직책에 올라 떠나보낸 가족을 되찾기를 원한다면? 더욱 골치 아픈 일이 되리라. 그렇게 한명회의 명령이 떨어졌다.
“남 사정은 이들의 안내를 받아서 납치된 자들을 구출하고 오게.”
“알겠습니다! 임해도감! 싸울 시간이다! 이 토인들의 가족을 납치해간 도적들을 모조리 죽여라! 길안내를 할 사람도 충분하고 싸울 방법도 충분하다!”
“머리는 베어가도 됩니까!”
“배에 공간 없으니까 상투만 베어라!”
남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임해도감의 9할을 차지하는 대양도 원주민들은 기세 좋게 도끼를 양 손으로 치켜 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대양도의 말을 듣자 폴리네시아인도 귀를 쫑긋거리면서 알아 듣는 척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말투가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한때 동속(同俗)으로 살아왔을지도 모를 자들이군.”
임해도감의 병사들이 얼룩덜룩한 람보(藍補)복을 갖춰 입고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처음 창설될 때에는 진위를 의심할 지경이었지만 임해도감 병사 600명이면 며칠도 걸리지 않으리라. 한명회는 우두커니 서 있는 화기도감 병사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자네들도 일을 돕게. 안내를 받아서 작렬신기전을 비롯해서 화포를 몇 발 쏘아대면 놈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리멸렬 할 것이라네.”
“알겠습니다!”
닷새 뒤, 납치당했던 가족들을 되찾자 부족민들은 기쁨의 축제를 열고 다른 섬으로 소식을 전할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조선으로 향하였다. 삼백여명의 인원이 승선하였으니 고달픈 항해가 계속되었다.
좁은 배에 오랜 시간 머물며 자신들의 기준으로 이상한 음식을 먹던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이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인근 해역을 지나칠 무렵. 한 노인이 하늘을 보면서 별을 확인하고 해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불현 듯이 머나먼 북쪽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사와이키!”
“사와이키! 사와이키!”
삽시간에 모든 함대의 폴리네시아인들은 기쁨의 하카를 추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며칠 전 까지 불만에 차서 육지로 도망치려던 사람들이라고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제조님. 이들이 뭔가를 아는 것 같습니다.”
“사와이키가 대체 뭘 뜻하는 말일지 알 길이 없군. 일단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염려하지 말게나.”
한명회는 알 길이 없었지만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은 구전을 통해 전승되던 자신의 머나먼 고향. 수천 년 전에 떠나왔던 대만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던 것이다.
임해도감의 주력을 차지하는 대양도 원주민들과 조선에서 붙인 명칭인 신농도 원주민은 사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전 일이니 서로의 생김새도 풍습도 다른 자들이어서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의 항해를 거듭한 선단은 폴리네시아인들이 갈망하던 대양도(대만)를 지나쳐 한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머나먼 고향 근처에 도착하게 된 폴리네시아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