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11화 - 새로운 세대(1) >
1461년 4월, 김종서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에서 은퇴한지 석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노령의 몸으로 서책을 편찬하던 그는 웃으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김종서의 죽음 이후 며칠이 지났다. 의정부의 관원들은 석 달 전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이징옥의 자택에 모여 간단한 주연(酒宴)을 열었다. 부족한 주안상에는 김종서가 생전에 즐겼던 백숙이 놓여 있었다.
삼정승과 찬성, 참찬이 모인 자리이나 주안상의 자리는 한 곳이 비어 있었다. 이징옥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축에서 가져온 이름 모를 술을 비어있는 자리에 놓인 잔에 채웠다.
“부족한 몸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필요한 것이 많다네. 우선 충익(忠翼 - 김종서의 시호) 어르신을 위하여 잔을 들도록 하세.”
술이 한 순배 돌고 침묵이 이어졌다. 대부분 환갑을 넘긴 대신들이니 일흔 여덟에 세상을 떠난 김종서의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보였으리라. 그러나 이징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어. 우리가 관직에 올라올 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따로 없군.”
“이것이 다 상왕전하와 주상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린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주안상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용물은 이전과 달랐다. 김종서가 좋아하던 백숙은 조선의 작은 토종닭이 아닌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는 거대한 천축의 닭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찬성인 조극관은 닭 가슴살을 뜯어 입에 넣었다. 질긴 맛이라 예상하였지만 제법 부드러운 육질이 느껴지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여기에 천축에서 가져온 후추를 조금 뿌리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향신료는 이전처럼 진귀한 물자가 아니었다. 조금 값이 비싸긴 해도 천축행 무역이 물고를 트니 유구와 일본을 통하여 구매하던 가격의 오분의 일로 하락한 것이다.
술잔이 이어지고 생소한 먹거리들이 의정부 관원들의 배를 채워나갔다. 이윽고 술잔이 몇 순배 돌았을 무렵. 조극관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시작했다.
“이제 저희도 은퇴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본래 환갑이 넘으면 몸이 급격히 쇠하는데 저 또한 허리가 구부러지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입신체비를 행하니 몸이 쇠하여도 그럭저럭 감내할 수 있더군. 당장 효령대군어른을 생각하여보게. 그분은 천축을 다녀오지 않았는가. 아직 은퇴는 이르다네.”
“영의정께서 하시는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인재들이 정말 대단한 재능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이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의정으로 올라온 한확이 말을 끝내자 이징옥은 헛웃음을 지으며 김종서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삶이었지만 즐거운 삶이기도 했으니 할 말은 많았다.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오고 김종서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이야기도 떨어지자 이징옥은 인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람을 천거하는 일에 관심은 없었지만 조정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 올라오는 젊은이들 가운데 빼어난 이가 여덟이 있다고 들었네.”
“각각을 말씀드리자면 이미 형조판서로 내정된 성삼문이 있군요. 그리고 공조판서로 내정된 이개도 있습니다. 특히 성삼문은 비범한 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재들이 아닌가. 성삼문의 일화는 알고 있다네. 형무소에 보내진 뇌물만 하여도 은자로 삼천 냥이 넘어섰다 하였는데 모조리 돌려보냈다 하던가.”
좌참찬으로 진급한 이맹전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은자 삼천 냥이면 미곡으로 삼천 석이다. 종친 가운데 가장 토지가 많은 수양대군조차도 한 해 소득이 일천 석인데 그 세 배의 뇌물을 모조리 거절한 것이 성삼문이었다.
“정말로 대범한 자이니 주상전하께 천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주상전하께서도 마음이 정해지신지라 세상을 뒤늦게 본다면서 작은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네. 그리고 이개도 실무에 능통하고 눈이 밝은이이지. 여기에 병조판서는 누가 될지 궁금하군. 훈련원의 권절이 될지 아니면 중추원의 유응부가 될지.”
그렇게 의정부 관원들은 자신들과 인맥이 닿은 자에 대한 칭찬을 하면서 인재들을 간추리기 시작했다. 훗날 왕위에 오를 세자를 보좌하여 일할 신료들 지금 40대인 관료들이 대상이 되었다.
여덟 명의 신진 관료를 정하는 일에 다소 이견이 있었으나 성삼문, 이개, 권절, 유응부, 정척, 신숙주, 권람까지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을 정하는 일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가장 먼저 한확이 손사래를 치면서 한명회를 추천하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친인척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한명회는 참으로 비범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천축 원정에서 크나큰 손실을 입었지만 대군어른께서 자신의 책임이라 하셨으니 조만간 주상전하께서 대업에 쓰실 것입니다.”
“우의정께서는 한명회가 저지른 일을 너무 감싸고 계십니다. 제가 보건데 여덟 번째 자리에는 홍윤성이 제격입니다. 그는 훈련도감으로 시작하여 벌써 훈영절제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허, 아무리 훈영절제사라 하여도 무과에 급제하지 않으면 종3품이 한계가 아닙니까. 그러하니 제가 보기에는 박팽년이 자격이 있다 여겨집니다.”
“박팽년은 능통한 자이지만 흑룡사를 비난하였다가 주상전하에게 꾸지람을 듣고 경원부로 내려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동생인 박인년이 공을 세웠으니 박인년을 천거함이 옳지요.”
환갑이 넘은 의정부의 대신들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여덟 번째 인재를 천거하기 위하여 서로의 공을 추켜세울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징옥은 웃음을 짓다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만들 하게나. 우리가 하는 일은 주상전하의 앞길에 놓인 잔돌을 치워내고 구덩이를 메우는 일일세. 오히려 인재를 모두 등용해서 열 넷으로 만들면 족하지 않겠나. 인재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네.”
술을 들이켠 이징옥은 잠시 마음을 정리하였다. 다른 의정부 관원들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이징옥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여보게. 북방의 영토를 얻은 일은 아국의 뜻이 아니었지만 대비하고 견뎌내서 수확을 얻어낼 수 있었다네. 만약 보총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북경은 함락당하고 난세가 시작되었을 거라네.”
보총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인해 실제 역사보다 명나라의 피해가 커졌지만 그런 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총의 덕으로 북경을 지켜냈다 여겼다.
“훈련도감이 없었다면 철령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겠는가? 아마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는 할 수 있더라도 북경의 패배가 전해진 이후 준동하는 여진족 덕분에 요동은 모조리 박살났겠지.”
“그러고 보면 훈련도감과 보총을 만드는 일은······.”
“상왕전하께서 허가하신 일이지만 주상전하와 수양대군어른의 힘이 컸지.”
이징옥의 입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들이 계속 나열되었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이 모이니 거대한 흐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흐름의 중심에는 지금의 왕인 문종과 종친을 이끄는 자. 수양대군이 있었다. 이징옥이 다시금 천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주상전하께서는 천축을 다녀올 마음이 있으셨겠지. 그러나 일이 어떻게 되었는가? 명국에서 아국에 수군을 양성하고 함선을 만들라 강요하지 않았는가.”
“당시에 저희도 반대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상전하께서는 필요한 일이라 하시며 수군을 만들고 대양도를 아국의 영토로 삼았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바라보시는 앞날은 혜안(慧眼)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그런 희미한 길이지. 그러한 길을 주상전하께서 찾아내고 우리가 보좌(補佐)하는 것이네.”
대신들이 지난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양도를 개척하면서 맛을 들인 다음에 천축에 욕심이 생겼고. 다시 천축에 욕심이 생기니 대식국까지 다녀왔던 것이다.
그러나 조극관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조극관은 한숨을 쉬고 당시의 일을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천축 원정을 반대하던 때의 일이 떠올라서 부끄럽습니다. 당시에 효령대군어른과 수양대군어른께서 사재를 내놓아 함대의 보급을 충당한 일도 떠오르는군요.”
“나도 자네의 말이 기억나는군. 혹여나 구풍에 휩쓸릴지도 모르며 이국의 풍토병에 사람이 상할 지도 모르니 규모를 축소하라 하였지. 하지만 주상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구풍은 매 년 몰려오는 것이며 풍토병은 오래 머무를수록 생기는 것이니 사람을 많이 보내 단번에 일을 끝내야 좋다 하셨지요.”
조극관의 의견대로 함대의 규모를 10척으로 축소했다면 머무는 기간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리라. 오히려 조극관의 말대로 풍토병과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주상전하께서 혹여나 잘못된 선택을 하신다면 그러한 일을 방지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만 작금의 주상전하께서는 영민하신 분이시니 앞으로 어떤 세상이 열릴지 궁금할 뿐이네.”
이징옥의 말이 끝나자 의정부의 관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들고 미래를 예측하려 하였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발버둥 치면서 나라를 만들어 갔던 아득한 과거는 지나갔던 것이다.
이제 세상은 점점 더 변해가리라. 조만간 탐검사(探檢司)라는 관청이 들어설 것이며 더욱 넓은 세상을 바라보려고 함대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이징옥을 시작으로 대신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입신체비를 하였으니 아직도 건장하지 않은가. 다들 환갑이 넘었지만 허리가 구부러진 자는 없었지?”
“병이 생기면 탕약을 먹고. 몸이 상하면 재활의를 통하여 몸을 다스리니 몸이 망가지질 않습니다. 듣고 보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본래 예순만 되어도 삶이 경각에 달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조정에서 일해야 하는 것인가.”
어째서 영의정 황희가 웃으면서 죽었는지. 얼마 전에 죽은 영의정 김종서도 웃으면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들도 생각보다 오래 살면서 오래 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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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년 8월, 경원 인근에 새로 세워진 대령(大嶺)에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예전에 건주위 소속 족장이었던 정충렬이 십 년 전에 배재당에 보냈던 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아명으로 하질이(何叱耳)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아이였다. 그러나 문종은 새로운 이름인 진영(眞映)을 하사하였고 놀랍게도 정식으로 과거를 보고 관직을 얻었다. 정진영은 말에서 뛰어내려 큰 절을 올린 다음 당당하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니 크나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불효라니! 이렇게 건장하게 자라놓고서 무슨 말이더냐.”
정충렬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이미 사십이 넘어 노쇠해가는 자신과 달리 정진영의 몸은 건강함 그 자체였다. 제대로 된 복식을 갖춰 입고 상투를 튼 아들을 바라보던 정충렬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이제 너를 보고 누가 야인이라 손가락질 하겠느냐. 조선의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며 오히려 어중간한 사람보다 듬직할 뿐이구나.”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저를 낳아 주시고 보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정충렬은 뿌듯한 미소를 머금고 아들의 등을 두드렸다. 배재당에 입학하고 10년이 지났고 비록 빈공과(賓貢科)에 해당하는 과거 시험이라고 해도 당당하게 문관으로 합격한 것이다.
“너는 대령에 온 적이 없겠구나. 그러고 보니 빈공인지 뭔지를 보고 합격해서 관직에 올랐다면서?”
“아직 미관말직에 불과한 훈도(訓導)입니다. 주상전하께서 은혜를 내리셔서 아버지가 계신 고장에 내려오게 되었지만 오 년 뒤에는 다른 고장으로 떠나야 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건주위 출신의 후손들은 익숙한 고장에 머물게 많은 배려를 하신다 하였다. 훗날 너도 토관(土官)이 되어 대령 인근을 다스리면 되지 않겠느냐. 어서 마을을 돌아보자꾸나.”
십 년 전에 4,000여명의 여진족들이 거주하게 된 대령은 많은 것이 변했다. 기존에 지어진 건물들은 혹한에 견디고자 거양현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벽돌로 만들어진 벽을 쓰다듬은 정진영은 감탄하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조선에서는 궁궐에서도 이런 전벽(磚壁 - 벽돌벽)을 모든 건물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령군에서는 민가조차도 전벽으로 만들어 졌습니까?”
“다 홍길동이라는 젊은이가 고안한 것이다. 겨울에도 춥지 않고 따스하니 참으로 좋더구나. 손이 많이 들어도 필요한 일이었지.”
“그리고 밭이 제법 많이 보입니다. 곡식을 기르는 일이 익숙해 보이는군요.”
“네가 어릴 적을 생각하면 큰 코를 다칠 것이다. 이미 곡식을 기르는 일은 생활이 되었지.”
건주위에서 건너온 여진족들의 생활도 십 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다른 누구도 아닌 조선인들과 함께 마을을 구성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인들을 보낸 일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사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손재주만 좋은 이들은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니 가장 좋은 일이었다.
“첩(帖 - 첩목아, 티무르)서방! 거기 그쪽을 파게나! 거기에 모래가 쌓여서 물길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으니까!”
“알겠소! 수차를 세워놨는데 왜 물이 들어오지 않나 했더니만!”
“농사라는 것은 매일 논밭을 보면서 잡초를 뽑고 물길을 관리해야 하지. 자네가 떠났던 닷새 사이에 막혔는데 나도 지금에야 알았네.”
“사냥을 하지 말라는 말이슈? 사슴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나보고 어쩌라고! 댁들 사슴고기 먹은 일은 기억도 나지 않소? 확 사냥 끊고 농사만 지어버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나?”
조선인 농부와 여진족 사냥꾼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농지를 관리했다. 조선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여진족의 논밭을 관리해주고 약간의 보수를 얻는다. 여진족에게 농사는 부업이었지만 조선인에게는 생업이었다.
생필품은 조선인 아낙네와 여진족 아낙네가 힘을 합쳐서 만든다. 장포(長袍 - 치파오의 원형) 라고 불리는 의상은 만주 일대의 전통복식이지만 손이 많이 들고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베틀을 놀려 옷감을 만들고. 만들어진 옷감을 섬세하게 염색하고 옷으로 만든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서 경원 일대는 북방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유한 지방이 되었다.
다만 정충렬이 보기에도 아쉬운 것이 있었다. 아무리 조선에서 양반가의 얼자나 서자들이 찾아와 도움을 준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식자(識字)가 부족했다.
관청 근처에는 서당이 있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는지 방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몇 권 없는 서적은 심각히 파손되어 읽기조차 힘들었다. 정일영은 교재를 훑어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상만호로 계시는데 이 고장에서 정음을 깨우친 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정음을 깨우친 이는 우리 건주위 출신 가운데 오 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조선의 말을 하는 자는 칠 할은 된다. 사실 나조차도 정음을 알지 한자는 알지 못한다.”
“저는 일 할은 될 줄 알았습니다.”
“너도 알지 않느냐. 어린이도 할 일이 있으니 배울 시간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도 부족하고 배우려는 이도 부족하다. 그러하니 일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책이 비싸지.”
이 시대는 당연한 일이었다. 여진족과 같이 유목민의 생활방식을 택하면 가축을 관리하고 부산물을 가공하는 일에 아이들이 나서야 한다. 농사를 지어도 예닐곱 살이면 생업을 돕는 일은 당연하다.
여기에 값비싼 교재도 한 몫을 했다. 먹고 살기 바쁜 나날은 점점 옛 일이 되어가지만 책을 사들여서 배우고자 하니 감당할 수 없는 돈이 들어간다. 그렇게 정충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신체비인지 뭔지는 꿈에도 꾸지 못하고. 그저 홍일동이라는 분이 가르쳐 주신 방법으로 몸을 단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계에 다다랐구나.”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가 훈도로 일하는 오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제가 가져온 짐은 정음을 가르치는 교재가 태반입니다.”
“서책이 얼마나 비싼데. 주상전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로구나.”
정충렬도 정음을 알고 있으니 궁금하긴 했다. 그렇게 주상전하의 은혜를 확인해 보고자 교재를 펼쳤지만 생소한 글자가 보였다. 정음이긴 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글자들이었다.
“이게······. 무엇이더냐? 이런 괴이한 필체를 누가 써내려간 것이냐? 그리고 이게 몇 권이더냐? 서당에 아이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지경이구나!”
“구단배(구텐베르크)라는 자가 상왕전하와 안평대군어른과 함께 인쇄기라는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종이인 아마지로 인쇄한 것이니 값은 싸지만 필적이 온전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교재는 훈민정음을 배우고 응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상세히 적혀 있었다. 필체가 불안정하고 작으니 노인들이 배우기 힘들다 하여도 아이들은 알아볼 수 있으리라. 정충렬은 익숙하지 못한 이름에 놀라 되물었다.
“그러하면 가장 처음으로 만든 서책이 정음 교재인 것이냐? 어찌하여 정음 교재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이냐?”
“상왕전하께서는 배움이 가장 필요한 이들은 어느 누구도 아니고 아이들이며. 배움이 가장 필요한 장소는 머나먼 북방이라 하셨습니다. 북방으로 떠나기 전에 상왕전하께서 제 손을 잡으시며 당부하신 바입니다.”
“정녕 그러하단 말이냐. 그렇지 않아도 글을 배운 이가 부족해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이런 은혜를 내려 주시다니.”
정충렬도 아는 것이 힘이고 배움이 중요한 시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북방은 인재가 부족하니 정음만 능숙히 알아도 미관말직(微官末職)의 자리는 보장되어 있었다.
대령군에서 정음을 시작으로 간단한 한자를 배운 이가 백 명만 되어도 먹고 살 일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교재를 수레에 넣은 정충렬과 정진영은 세종대왕이 있는 남쪽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