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09화 - 태풍이 지나간 자리(2) >
1459년 음력 10월, 초겨울에 접어든 요동의 심양성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사람들이 병사들 앞에 집결해 있었으며. 이런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곡식을 받아가려고 애썼다.
“한 줄로 서란 말이다! 거기 너! 너무 어린 녀석인데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나?”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제가 나왔습니다. 이번 수해로 역병에 걸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성함은······.”
병사들은 호적을 대조하기도 바빴다. 지난 7월에 급작스럽게 덮쳐온 태풍은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유정이 설계한 치수는 오로지 평상시의 침수를 막는 일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단순한 범람이 아닌 끔찍한 참극이 되었다.
농사는 모두 엉망이 되었다. 엉망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으로 처참한 꼴이 되어버렸으며 그동안 벌여온 치수와 동시에 진행된 개간 또한 대부분 물거품이 되었다. 관원 둘이 미곡의 수량을 확인하면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내년에는 어떻게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곡식 줄어드는 속도 보셨습니까?”
“낸들 아나. 그래도 요동 총병관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올해의 소출이 이미 결딴났으니 내년부터는 배를 곪을 일만 생기겠군.”
내년부터 요동에 공급되는 곡식은 오로지 녹봉 지급과 군사적인 용도로 줄어든다.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으로 내년을 버티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자신들도 공사에 나섰으며 주변의 피해를 파악했으니 무슨 상황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관료 중 한명은 잠시 짬이 나는 사이 허리를 돌리면서 저 멀리 무너진 제언(堤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예쁘게 제언을 만들면 무얼 하나. 속절없이 무너져 버리는걸.”
“공사에 참가한 자들을 잡아서 벌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일을 허투루 하였으니 이런 변고가 일어난 것이겠지요.”
“요동 총병관께서 가만히 두라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가만히 두면 될 일이네.”
“애초에 그들을 잡아들일 일손이라도 있겠습니까. 야인들도 지금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에 힘쓰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문제의 시작은 서유정이 평상시의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치수의 규모를 설정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설계하지 않은 어설픈 제방은 홍수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무너지며 강물을 틀어막는다. 이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물길은 농지를 덮치고 농작물을 휩쓸어 버린다.
홍수가 지나가고 석 달이 지났지만 피해 보고조차 집계되지 않았다. 심양의 집무실에서는 산더미 같은 서류 사이에서 서유정을 비롯한 관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요양(遼陽)일대의 피해가 이게 전부인가? 이갑(里甲)가운데 피해를 입은 곳이 스물여섯 곳 가운데 열두 곳 이라고?”
“요양에 배정된 군호 가운데 삼 할만 소집에 응하였으니 실제 피해는 훨씬 심각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요양 일대의 농토의 대부분이 범람원(汎濫原 -홍수가 나면 잠기는 지역)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빨리 보고를 하란 말이다!”
서유정은 다시 탕약을 들이켜면서 시뻘건 눈으로 서류를 보고 피해를 짐작하였다. 홍수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새로 생긴 농토였다. 요하 주변의 범람원을 치수한 농지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범람원은 우기에 물이 불어나면 침수되고 건기에는 말라버린다. 그러하니 적당한 제방을 쌓아 물길을 틀어막으면 수원지 인근이어서 가뭄에 대처할 수 있고. 쌓여 있는 퇴적물로 충분한 작황을 보장하는 좋은 땅이었다.
하지만 기록적인 폭우를 만난 제방은 삽시간에 무너져서 농지가 물에 휩쓸렸으며. 무너진 제방을 구성하는 돌은 요하를 틀어막고 더욱 큰 물줄기를 쏟아내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이미 피해가 커질 대로 커졌으니 수습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새로 모든 것을 만들어나가야 하리라. 그러나 요동 일대에 할당된 병사도 부족했다. 서유정은 병사와 관련된 서류를 훑어보더니 관원을 잡고 물어보았다.
“생각하여 보니 호적에 있는 이들이 곡식을 받아 가는 것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군호에 소속된 이들은 어찌 하여 소집 명령에도 응하지 않는 것인가.”
“군호의 곡식은 봄에 징집하면서 지급하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군호 가운데 소집에 응한 이들은 몸이 상한 친척의 곡식을 대신 수령하고자 움직인 것이 분명합니다.”
서유정이 서류를 구겨버리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까지나 일을 편하게 하고 병사들의 신뢰를 얻으려는 방식이 상황을 더욱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올해 추수한 곡식들이 창고에 가득 쌓여있다는 것 하나이리라.
그래봤자 병사의 소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일은 차일피일 미루어질 것이다. 서유정은 잠시 붓을 들어 보고를 올리려다가 종이를 헝클어트리고 괴성을 내뱉었다.
“망할! 망할! 이런 빌어먹을 일이! 아아아아아아악!”
“총병관님. 조정에서 감찰관으로 태감(太監 - 환관 가운데 관청의 우두머리를 담당하는 자) 어른께서 내려오신다 합니다. 사흘 뒤에 당도한다 하셨습니다.”
“왜 지금 오시냐고! 본래 내년 3월에 오시는 것이 예정 아니었나? 그리고 어느 분이신가?”
“저도 모를 일입니다. 하오나 분명 태감 가운데 한 분이라 하셨습니다.”
서유정은 터덜터덜 집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관원들이 따라 들어가려 하였으나 손짓을 하여 관원들을 쫒아내 버렸다. 관원들이 방 밖으로 빠져나가자 부서지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고함이 집무실 안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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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도착한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환관의 우두머리 사례감 태감 조길상(曹吉祥)이었다. 그가 도착한 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서유정이 지난 6월에 올렸던 장계 덕분이었다.
[요하 일대의 치수를 완료하였으며 충분한 농토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조길상이 직접 나섰다. 하지만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요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무너진 제방 너머의 농토였던 자리에 조길상의 시선이 멈추었다.
사람의 시신이 있었지만 상반신은 들짐승에게 뜯어 먹히고 하반신은 요하의 얼음 속에 박혀 있었으니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따로 없었다. 주변에 보리의 이삭이 보이기에 조길상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저게 농토인가? 아니면 늪지인가?”
“농토······.이었습니다.”
그나마 온전한 제방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운이 좋은 일부였다. 시찰이 끝나고 집무실에 앉아 있는 서유정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조길상이 질문을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틀 사이 한 척(명나라의 척은 약 32cm)이 넘는 폭우가 내렸습니다.”
“이틀 동안 한 척이라 하면 기와가 모조리 뒤집히고 지붕이 벗겨져서 건물을 새로 만들어야 정상이네! 하지만 건물은 아주 멀쩡하군!”
“죄송합니다. 일곱 치(약 22.4cm)입니다. 일곱 치의 비가 사흘에 걸쳐 쏟아졌습니다.”
조길상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풀린 채 사지를 부들거리는 요동 총병관 서유정을 노려보았다. 국정에 많은 지식이 없지만 제법 오래 살아온 자이다.
고향인 난주(灤州 - 현 하북성 성주)에도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우가 내려 홍수가 발생한 일은 많았다. 하지만 일곱 치의 비로 이러한 피해가 일어났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런 조길상의 귀에 서유정의 변명이 들려왔다.
“이런 일은······. 이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평시에는 비가 많이 내려도 두 치만 내렸으며 그에 맞추어 요하의 치수를 하였는데 하필 제가 공사를 완료한 시점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세상만사가 어찌 평시의 일로 돌아간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사례감 태감 어르신! 제발 저를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이대로는 수십 년이 지나도 치수를 완료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유정이 고개를 숙이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나 큰 절을 하면서 바닥에 머리를 찧어댔다. 그런 몰골을 보면서 조길상은 생각에 잠겨있다 이윽고 불길한 미소를 지었지만 서유정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서유정의 이마에서 피가 솟구칠 무렵 조길상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을 물리고 나서 그의 어깨를 잡아 제지하였다. 서유정이 이마에 솟구친 피를 닦아내자 조길상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하면 하나 물어볼 것이 있네. 이갑(里甲)과 위소(衛所)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분명 저는 호적을 제대로 조사하여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집에 응하는 이가 군호 가운데 3할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 홍수에 마을이 사라진 이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겠군. 그러하면 요하 일대의 이갑과 위소의 태반이 붕괴하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갑제(里甲制)는 행정 제도이며. 유복한 가구와 평범한 가구를 묶어 행정의 기본 단위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요동 일대에 새로 이주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갑제에 따른 편제로 마을을 구성하였다.
위소제(衛所制)는 군사제도이다. 이갑제로 구성된 기본 단위 안에 공동 경영하는 토지를 만든다. 토지의 수입으로 병사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제도이다. 두 가지 제도는 모두 철저한 행정 능력과 관리 능력을 요구하였다.
“차근차근 시작하면 될 일입니다. 먼저 병사들을 동원해 이갑제부터 다시 시작하여 호구를 재조사하고 피해를 보고한 다음 위소제를 재편성하고 사람을 동원하여 치수를······.”
“그래서 지금 소집 가능한 인원으로 가능이나 한 일인가? 듣기로는 3할의 병사만이 가까스로 소집에 응하였다 하는데.”
서유정이 도저히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갑과 위소는 사람의 생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가상의 단위이다. 기록적인 수해와 함께 행정의 공백이 생기자 백성들이 살 길을 찾아 이주를 결심한 것이다.
물론 요동 밖으로 나서지는 못할 것이다. 요동 남쪽에도 장성이 있으니 기껏 해야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요동의 사방을 헤매면서 좋은 땅을 찾아가리라. 결국 서유정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나마 지난 시일 동안 곡식이 끊임없이 공급되었기에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곡식은 공급되지 않는다. 결국 조정에 보고를 올리고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서유정에게 조길상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자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돌리면 된다네.”
“없던 일로 돌린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하여 보게. 이러한 일을 보고한다면 자네와 자네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나? 그리고 내 체면은 어떻게 되겠나? 그리고 얼마 전에 은퇴한 회양공 우겸의 체면은?”
우겸의 이름이 거론되자 서유정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오르며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까마득한 상관인 사례감 태감의 앞이니 심호흡을 하고 진정한 서유정은 가래 끓는 소리로 말했다.
“병부상서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자네는 모든 파벌에게 뭇매를 맞을 것이라네. 작금의 태상황께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백각형(百刻刑 - 살점을 저며 죽이는 형벌)에 처하여도 할 말이 없겠지.”
“그렇다면 모든 일을 없는 것으로 한다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이런 참극을 그대로 방치할 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요동 총병관으로 부임하는 즉시 전임자의 실책을 따지고 들어가리라. 그러나 조길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자네의 후임자로 내정되는 사람이 방임한다면 충분한 일이지. 금의위의 전임 지휘사인 석형(石亨)이 나에게 약간의 금품을 보내왔다네. 자신을 좋은 자리에 천거해달라는 청원이었지.”
“그는 문제가 많은 이가 아닙니까? 듣기로는 뇌물을 받았다 파직당하여 한직을 전전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한 자를 요동의 총병관으로 부임시킬 연유가 있습니까?”
“북경 공방전에서 와라부의 달자들을 매섭게 몰아치던 일은 잊었는가? 그러한 호걸이니 내가 천거하면 태상황께서도 충분히 용인할 것이네.”
실제로 석형이 승리를 거둔 시점은 오이라트의 병력을 몰아내던 전투 말기의 일이었지만 승전은 승전이었다. 하지만 서유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황폐해진 땅을 받아서 어떤 이득을 챙긴다는 말씀이십니까.”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무관으로 이 자리에 부임하였으니 달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것이며 소득을 거두었다고 수급을 보내면 충분한 일이지.”
서유정이 보기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요동의 행정력은 급격히 쇠퇴하여 병사의 3할도 동원할 수 없으며 원정군은 반 토막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껏 해야 1만의 병력으로는 수급을 거두기 전에 사방에서 공격당하며 몰살당하리라. 서유정도 잘 아는 사실이었기에 황당해 하면서도 되물었다.
“지금 요동의 군사로 원정에 나선다면 몰살입니다! 오히려 적들에게 수급을 안겨주겠지요.”
“어허. 요동에는 떠나지 않은 건주 양위 야인들이 제법 있지 않은가. 그것들이 사라진다 하여도 수급을 거둘 이들은 지천에 널려 있다네. 머리를 조금 깎으면 쉬운 일이지.”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서유정은 광인(狂人)을 바라보듯이 조길상을 노려보았으나 조길상은 태연하게 웃어 넘겼다. 석형은 정말로 권세와 돈에 미친 자라고 생각했지만 조길상은 더욱 돈에 미친 자였다.
본래 조길상은 요동이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서유정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여 치수를 알선하며 축재(蓄財)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만 생각이 변했다.
그의 눈으로 보니 엉망이 된 요동은 다른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돈을 버는 수단에 약간의 희생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리라. 그런 사실을 눈치 챈 서유정은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후임자로 배정될 석형은 조길상의 뜻을 따라 요동에 거주하는 이들을 돈으로 바꾸어 나가리라. 서유정의 눈빛이 약해지자 조길상의 말이 다시 시작되었다.
“계획은 간단하다네. 먼저 건주위 야인들의 목을 베어 원정을 다녀왔다는 증좌(證左)이자 전공으로 삼아 지원을 받는 것이지. 요동 일대의 병사는 6만에 달하지 않는가.”
“그러하면 보고를 올릴 때에 요동이 온전한 상태라 보고를 올린다는 말씀이십니까?”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군. 본래 원정을 하면 이에 대한 수고비를 조정에서 하사하는 일이 기본이네. 당연히 이견(異見)이 나오지 않으려면 기름칠을 약간 해야 하지만 더욱 많은 소득이 생기겠군.”
“그렇다면 건주위 야인이 사라진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요동에 사민 당한 백성들의 거취는요! 개돼지처럼 살을 찌우다 관군에게 학살당하고 목이 베어져서 달자로 변모하는 겁니까!”
서유정 또한 자책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고 험한 노동을 시키다가 탈주한 이가 부지기수이며 죽어간 이도 제법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일을 제대로 하려고 노력하다가 틀어진 것이다. 그렇게 서유정이 마지막 양심을 쥐어 짜내 목소리를 높였지만 조길상은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속삭였다.
“그렇다면 자네에 대한 말은 태상황께 온전히 전하겠네. 자네를 시작으로 가족들이 백각형을 당할 때에는 내가 아는 기술자들을 천거하여 천 회 이상의 칼질을 받도록 노력해 보겠네.”
서유정은 아무런 말도 이어나가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조길상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했던 말 그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20만에 달하는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고 구족이 몰살당하며 백각형을 당하느냐. 아니면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조용히 감내하느냐. 결국 서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쓸모는 없겠지만 수재로 인한 피해를 정리하여 보고할 것이니 두 달만 기다려 주십시오.”
“참으로 좋은 선택을 하였네. 그렇다면 태상황께 새 요동 총병관을 천거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그러고 보니 주변에 야인(아라합을 시작으로 한 야인여진)이 조금 있던데 그들은 뭔가?”
“조선에서 온 이들인데 백성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은자를 주고 고용하였습니다. 이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조길상은 잠시 고민하였지만 조선을 함부로 건드려서 득이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이 이런 요동의 실상을 목격한다면 말이 나올 것이니 철저히 배제해야 하리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우겸이 조선에 다녀와 수군을 양성하라는 황명을 전달하였지. 우겸도 참으로 머리가 좋은 이야.”
한 달 뒤. 조선에서 파견하는 사신은 긴급한 상황이 아닐 경우에는 무조건 해로사행(海路使行)택하라는 칙서가 내려왔다. 조선 또한 항해 경험이 쌓였던 덕분에 육로로 사신을 보내느니 선박으로 오고가는 것을 바람직하다 여겼다.
그렇게 요동은 조선과 명 사이에 있는 거대한 시궁창으로 변해버렸다. 요동 총병관으로 부임한 석형은 건주위의 야인들을 무차별 습격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목이 베어져서 북경으로 전해졌다.
요동의 백성들은 민초(民草)와 같이 끈질긴 삶을 이어나갔다. 땅은 지천에 널려있었으며 곡식이 배급되지 않아도 어떻게든 농사를 지어 입으로 잡곡을 우겨넣고 마을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 닥친 재앙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후 조선은 수 년 간에 걸쳐서 요동에서 탈주한 유민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요동의 실상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