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06화 - 휴식과 성장(1) >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단순한 미술가가 아니었다. 몇몇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귀족이나 상인과 같은 재정적으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다.
미술은 부유한 이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목탄을 통한 스케치를 넘어서는 순간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다. 송근유를 아낌없이 사용하는 유화는 물론이고 계란을 들이 부어 채색하는 템페라(tempera)는 시작에 불과하다.
채색을 위한 수많은 안료는 금을 칠하는 일과 같으며. 질 좋은 대리석을 조각하는 일은 집 한 채를 조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부모들은 뛰어난 하인들을 보내왔다.
1460년 음력 4월, 남해의 푸른 바다 위에 칠 년 전에 죽은 장영실이 설계한 호군어선 여러 척이 선단을 이루어 그물을 펼쳤다. 기존까지 사용되던 조선의 그물보다 복잡하고 거대한 녀석이었다.
가장 앞에 나선 호군어선에는 그물도 없었으며 사람 여럿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한 어부가 다른 어부에게 신기하다는 듯이 그물을 보면서 말을 걸었다.
“참으로 신묘하단 말이야. 라마국(신성 로마제국)에서 고기를 잡는 방식인데 이런 방식을 여기서도 쓰게 되어서 소득이 더욱 늘어나다니.”
“그물을 만드는 일만 하여도 한 세월이었는데 효험을 이렇게 볼 줄은 몰랐어. 이래서는 어획량의 2할을 준다 해도 아깝지 않은걸. 거기 알씨! 알! 저거 어군(魚群) 아니야?”
“조금 기다리시오. 기다려야 합니다.”
볕에 그을린 피부와 벗겨진 대머리. 여기에 오뚝한 콧날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어부 알베르토가 어눌한 조선의 말로 답했다.
그는 피렌체의 귀족 가문에 고용된 어부였다. 그를 고용한 귀족은 자신의 아들이 소모하는 자금을 조선에서 일하며 충당하라고 말했다.
알베르토라는 이름을 알려줘도 어부들은 그를 알이라 불렀다. 그는 시칠리아 출신의 어부로서 지중해 연안에 전수되는 어업 중 하나인 마탄자(mattanza)를 할 줄 아는 숙련자였기에 조선의 어부들을 만나 일하게 되었다.
먼 바다에서 물고기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참돔임을 파악한 알베르토는 손짓을 하며 자신의 제자들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들어옵니다! 너희 둘은 어서 들어가라!”
젊은 이탈리아 어부 두 명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넓게 벌려진 그물의 입구로 참돔 어군을 인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호군어선은 커다란 그물을 끌고 어군에 다가가 포획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기에 그물의 크기도 작았으며 잡아들일 수 있는 양이 제한되었다. 하지만 마탄자는 정치망(定置網) 방식이었다.
어부들이 물장구를 치자 놀란 참돔들이 바다 위에 펼쳐진 깔때기 형상의 그물로 빨려 들어갔다. 입구는 넓었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견고하고 사방으로 조이는 형상이었다.
알베르토는 참돔 떼의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다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였으니까.
“당기십시오!”
“신호 보내! 당겨!”
본래의 마탄자는 나룻배 여러 척으로 움직이니 그물의 크기도 작았고 잡을 수 있는 물고기의 양도 적었다. 하지만 거대하고 녹로(轆轤 - 크레인)가 달린 호군어선은 힘이 넘쳐나는 놈이었다.
수천 마리의 참돔들이 정치망의 끝으로 몰려들었다. 터질 듯이 부풀은 정치망의 끝이 열리고 참돔들이 배 위로 쏟아졌다. 안드레아는 생각보다 튼튼한 어선을 보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뭘 하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는데 세 번째 반복하니 이해할 수 있구만. 오늘도 정말 고맙네.”
“수확이 좋음. 다음에 토노(tonno – 다랑어)를 노립시다.”
“토노? 토노가 뭔데?”
“사람 같은 큰 물고기. 등이 파랗고 빠른 녀석.”
“사람이랑 비슷하게 크다고? 등이 파란색이면 유어(鮪魚)를 말하는 것인가? 그놈은 여섯 달 뒤에야 돌아온다네.”
해역이 달라도 물고기의 생태는 비슷했다. 그렇게 미어터지게 담겨 있는 참돔은 충분한 자금이 되리라. 항구로 돌아와 수익을 분배하는 작업이 남았다.
알베르토와 어부들의 시선은 똑같이 호군어선으로 향했지만 마음에 두는 것은 달랐다. 알베르토는 조선의 어선을 연구하기로 하였고 어부들은 새로운 형태의 그물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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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충주의 한 산골에서 백정촌의 촌장으로 있는 우전상은 너스레를 떨면서 머나먼 오스만 제국에서 이주한 농부를 위로했다.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일은 일상 다반사였지만 처음으로 농사를 짓는 이에게는 심각한 일이리라.
“기운 내게. 자네들이 가진 기술이 어디 하나만 있던가? 사방에 쌓여있는 골분(骨粉)을 두엄으로 쓰는 방법은 나도 몰랐던 것인데 자네들이 알고 있지 않았나.”
“하지만 그렇게 퇴비를 주고 가꾸어도 수확이 없는 것을 어찌 한단 말입니까.”
“공조에서 일하는 분이 오늘 당도하시니 염려하지 말게. 그분은 농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니 해답을 알려주실 걸세.”
우전상은 농부가 아니고 백정이었지만 지난 16년의 세월은 그를 어설픈 농부로 만들기 충분했다. 일이 없다고 만들어진 농토를 놀릴 이유가 없었으니 닥치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심어보면서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그리스 지방에서 가져온 밀은 차디찬 조선의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제대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한 달 만에 찾아온 공조 관원이 다가오고 밀을 살펴보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싹이 돋은 숫자부터 적었는데 수확이 거의 없는 지경이군.”
“이렇게 추운 겨울이 있을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기후가 다르니 적응하지 못한 것이야. 작년이 제법 따듯한 겨울이었으니 이 녀석을 겨울밀로 심는 것은 불가능하겠군.”
“하지만 제가 가져온 밀은 모두 겨울에 심어 초여름에 수확하는 녀석들입니다.”
혹시나 하고 자라난 밀을 확인한 농부는 울상을 지었다. 기껏 이삭이 맺혔어도 쭉정이가 가득했으니 수확량은 본래 거두는 양의 2할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지만 공조의 관원은 웃으면서 어깨를 두들겼다.
“염려하지 말게. 나도 농서를 많이 보아온 사람이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네. 얼보리를 만들듯 봄밀로 탈바꿈 하도록 조절한 종자를 가져왔으니 모두 갈아엎고 다시 심으면 되네.”
농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공조 관원을 바라봤다. 겨울에 심는 품종은 오로지 겨울에 심는 것이 정상이다. 시선을 견디다 못한 관료가 되물었다.
“자네들은 가을보리를 봄에 심는 방법을 모른단 말인가?”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리나 밀은 가을에 심는 품종을 봄에 심었다가는 열매가 맺히지 않고 풀만 무성하게 자라나지 않습니까.”
“나는 잔뼈가 굵은 농부라 하여 지식이 넘쳐나는 줄 알았지만 별 일이 다 있군. 이건 조금만 배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것일세.”
서구에서는 20세기에 개발되는 춘화처리(春化處理 - vernalization) 기법을 알게 된 농부는 경악하다 못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공조의 관원은 묵묵히 겨울 동안 살짝 얼려뒀던 밀을 꺼내왔다.
“본래는 가을밀과 번갈아 가면서 심어야 하니 경칩(驚蟄 - 양력 3월 20일)에 심어야 하지만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녀석이니 지금 심으면 될 일이네.”
“저는 도저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일 년 내내 밀과 보리를 심어서 수확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보통은 그렇게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지. 기껏해야 식량이 부족할 때에 이모작을 위하여 행하니 널리 퍼지지 않은 것일세.”
다시 밭이 갈아엎어지고 겨울 동안 춘화처리가 끝난 밀이 심어졌다. 그러나 공조 관원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사만국이 라마국보다 따스한 고장이라 하였지? 그렇다면 다음 골짜기로 가서 피렌체에서 가져온 밀을 심어야 하네. 자네가 조금 도와줄 수 있나?”
“다······. 당연합니다! 새로운 기술은 배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번 겨울에는 저를 좀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농부로 살아가기 위한 애처로운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전혀 다른 기후에 적응하고 새로운 농사방법을 익히는 과정은 농부로서 반드시 배워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품종인 앉은뱅이 밀이 현대의 품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그것이었다.
현대의 유전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새로운 품종인 소노라 64의 핵심 요소는 한반도 재래종인 앉은뱅이 밀의 유전자와 터키 레드의 유전자.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밀의 유전자가 결합된 품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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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 8월, 대양도의 도감군은 교대시일이 얼마 남지 않아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복속한 부족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으며 다음 병사들이 교대하고 개척이 시작될 것이니 일시 휴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선은 지난 2년 동안 네 개의 부족을 추가로 복속시켰다. 가장 거대한 부족인 타이야족과 인접해있는 케타가란, 카발란, 타오카스, 사이시얏이 복속되었으니 대만의 3할 이상이 조선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 도감군의 군영 한가운데에서는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감군의 최고참이자 실무자인 정범수는 머리를 싸매며 병서를 읽어 내려가다 도저히 앞뒤의 뜻이 맞지 않는 문장을 발견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옥편을 찾으려다 포기한 정범수는 사람을 불렀다. 잠시 뒤 장구류를 점검하고 있던 앳된 기가 빠지지 않은 청년이 달려와서 정범수의 앞에 섰다.
“그러니까 이 한자는 정(程)인데 평상시처럼 길이로 쓰이는 것이 아니고 법도라는 뜻으로 쓰인단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뜻이 무엇인가?”
“한문으로 정도(程度)이니 알맞은 한도라는 뜻도 있지만 우열을 가리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시느니 사서삼경부터 온전히 읽어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서삼경은 죽어라고 배웠는데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의 나이도 스물아홉이니 배움이 늦다 할 수 있었다. 남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자 정범수의 분노는 자기 자신에게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감군 시절부터 계속 배우는 것이었는데 너무 늦었나. 혹시 한자를 빠르게 배우는 방법은 알고 있나?”
“정 사직(司直)님. 무경칠서(武經七書 - 대표적인 병서 7종)를 모두 외워야 무과 복시에 가망성이라도 열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빠른 길이 없습니다.”
정범수가 일천 자를 배웠던 것도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품계가 올라갈수록 정음만 사용해서 장계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형무소에서 머물며 뼈저리게 느꼈다.
품계가 낮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 일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무소의 가장 높은 직책에 있는 성삼문은 정범수를 가르치는 일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자를 배우고 제대로 된 보고서를 작성했을 무렵 들려온 소식이 있었다. 훈련원 휘하 도감군 출신은 진급이 빠르더라도 무과에 응시하지 않을 경우 당상관(堂上官)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십 년 전의 정범수라면 엄두도 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내년이면 종4품 부지부사(副知府事)로 진급하게 된다. 그렇게 눈앞으로 다가온 당상관의 직책에 욕심이 생겼지만 너무 멀고 험난한 길이었다.
“난 애초에 정음만 제대로 아는데 이렇게 무수한 한자를 배워야 한단 말이야? 언해(諺解)본은 언제쯤 도착하는지 모르겠군.”
“병서는 비교적 순위가 낮은지라 늦는 것이겠지요.”
“나이를 먹어서 이런 짓을 하다니 나도 참 한심하네. 그러고 보니 남이(南怡) 자네의 춘부장께서는 제법 직책이 높으신 분이 아닌가? 어찌하여 훈련도감에 온 것이지 말해보게.”
“아버지께서 도감군에 들어가서 오 년을 근무하고 다시 무과를 보는 것이 좋다 하셨습니다. 근래에 들어 인재는 몸만 따지는 도감군으로 모인다 하지 않습니까.”
정범수는 남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훈련도감과 화기도감이 나누어지지 않은 시절에는 1할 이상이 노비였으며 양반가 자제들은 눈을 씻고 돌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양반가라 하여도 부유하지 않은 집안이면 승마와 궁시를 배울 방법이 없으리라. 자신이야 정5품이니 가족을 꾸리고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이 태반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세상 참으로 좋아졌네. 십 년 전만 하여도 천것이 사람이 되었다면서 냉대를 받았는데. 이제는 도감군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다니. 이제 보고를 받고 퇴청해서 진수나 돌봐야겠군.”
“저도 아내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아내가 아니고 첩이지! 자네는 재혼까지 해서 했다면서 머나먼 대양도까지 내려와서 첩을 들여?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는 생각하지도 않고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지 모르겠네!”
“정 사직님이 덜컥 혼인하셨기에 다들 혼인하려는 생각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애초에 대양도에 온 도감군은 대다수가 광부(曠夫 - 홀아비)이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랬다. 땅이 넓고 나무는 풍족한 대양도이기에 부교(副校)를 달게 되는 2년차부터 자택이 주어진다. 들끓는 청춘의 젊은이들 수백 명이 집까지 있는데 혼인 따위야 충분히 일어날 법 하다.
자신도 그랬다. 홍윤성의 후임자로 도감군을 지휘하며 타이야족의 마을을 돌아다니다 한 눈에 반했고. 부족의 남성이 거덜나다 시피 했으니 상대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떨결에 결혼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내 채(蔡)씨를 얻게 되었으니 남이를 뭐라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사방에서 돌아온 도감군 장병들이 보고를 시작하였다.
“타이야족의 마을에서 입신체비에 쓰이는 공령(플레이트)과 역기봉이 도난당했습니다.”
정범수의 눈매가 찌푸려지면서 쓴 소리가 나오려다가 억눌러졌다. 하는 일 없이 마을을 지키고 있으니 각종 취미생활을 하는 일이 잦았고. 가장 인기 있는 취미생활은 입신체비였던 것이다.
도감군 병사들은 유생들에게 입신체비를 배웠고. 평소의 훈련 외에도 입신체비에 맛을 들린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금속이 귀중한 원주민들에게 쇳덩어리는 값진 보물이었다.
“입신체비는 타이야족이 있는 곳에서 하지 말라 했는데 명령을 어기고 무슨 소리인가! 금속을 쓰지 못하는 이가 부지기수인데 쇳덩이를 들고 있다니! 애초에 보고 할 일도 아니니 그만 돌아가게.”
“그러한 일이면 보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둑놈들이 훔쳐간 대역기로 입신체비를 하려다가 몸이 다쳐 붙잡혔으며 지금 연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했나?”
귀한 쇳덩이를 훔쳐가는 일은 당연하지만 녹여서 팔아치우지 않고 입신체비를 하다니. 정범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에 팔짱을 끼고 도둑을 만나기 위해 기다렸다.
잠시 뒤. 팔이 꺾인 타이야족 청년이 도감군을 알아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에게 도감군은 사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며 숲 속에서 보이지 않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정범수는 조심스럽게 청년의 행색을 살펴보고 아내에게 배운 타이야족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네 놈들이 할 일은 새로운 작물을 길러서 종자를 수확하는 것인데 이게 무슨 생각이냐. 그리고 어찌하여 입신체비 기구들을 가져가서 입신체비를 하려 했지?”
“저희도 성인식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을 베어올 수 없게 명령을 내려서 방법이 없었습니다.”
“입신체비랑 성인식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고.”
“저희 족장님께서 당신들과 같은 힘을 가지면 성인으로 인정해 줄 것이니. 저 쇳덩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라 하셨습니다.”
정말 한심한 짓이었기에 정범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목을 베어오는 성인식에서 의미 없이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성인식으로 탈바꿈했단 말인가.
입신체비사를 찾아가면 될 일이다. 순수한 완력으로 입신체비사가 가장 뛰어난 이들이고 자신도 삼대 운동이라는 녀석을 700근을 가까스로 할 뿐이다. 그런데 도감군과 같은 힘이라? 애초에 성인식의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일단 네 놈은 물건을 훔쳤으니 하옥할 것이며 이후 세워질 형무소에서 노동을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대체 왜 목을 잘라오면 성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냐.”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걸로 여깁니다.”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훈련소를 졸업하고 나서 부모님이 했던 말이 정범수의 머릿속을 스쳤다. 다녀오니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네 녀석들이 우리가 단련하는 방식을 견뎌낸다면 성인식을 대신할 수 있겠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야족 도둑을 보면서 정범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무료한 시일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