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67화 (167/573)

< 2장 105화 - 대양의 초석 >

한명회를 시작으로 한 선원들이 초대받은 폴리네시아 부족민의 마을은 제법 거대한 규모였다. 목책과 망루가 즐비하게 있었고 어설픈 해자까지 있었으니 요새나 다름없었다.

마을 밖에 잠시 대기하던 여국강은 목책을 살펴보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니 함부로 공격에 나섰다가는 큰 화를 입을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설령 화약이 손상되지 않았다 하여도 선원들의 수준으로 여기를 점령하는 일은 불가했겠군. 혹여나 훈련도감 인원들이 당도했으면 모를까. 명회 자네의 방식이 참으로 옳았어.”

“대양도의 토인과 견주면 하늘과 땅 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것은 무엇이기에 요새를 만들고 신묘한 우상(偶像)들을 늘어놓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기거하지 않는 곳으로 보이니 무덤이 아닐까 싶네. 효(孝)는 이역만리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군.”

마을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자 옷을 갈아입고 나온 부족장이 멀뚱멀뚱 한명회를 쳐다보았다. 폴리네시아인 특유의 풍속인 선물의 예식을 모르고 있던 한명회는 잠시 생각을 거듭하다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를 배불리 먹이는 값을 먼저 내라는 말이겠구나. 애물단지나 마찬가지인 천자총통을 주면 충분할 것이다. 체격이 좋은 이들이 나서서 두 문을 끌고 오거라!”

천자총통은 귀중한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니 충분한 값이 되리라. 그렇게 두 문의 천자총통을 선물 받은 부족장은 묘한 형태에 어리둥절해 했으나 뉴기니 일대에서 귀한 금속임을 알아 차렸다.

부족장이 환호성을 지르자 부족민들도 천자총통을 확인하며 같이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까지는 기껏 해야 예물로 돼지나 개를 주고받았지만 정말 값진 물건을 선물 받은 것이다.

잔치가 시작되었다. 부족민들은 마을 안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야자수 잎으로 흙이 새어 들어가지 않게 잘 막은 다음 불에 달군 돌을 집어넣었다. 돌 위로 온갖 식량들이 구덩이 안으로 던져졌다.

조선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방법이지만 음식이 익어가는 냄새가 선원들의 주린 배를 자극했다. 이윽고 돼지고기와 개고기도 구덩이 안에 들어갔고 바나나 잎으로 만든 덮개 아래에서 음식이 익어갔다.

“참으로 기묘한 방식으로 음식을 장만하는군요.”

“청동을 비롯한 금속이 귀하니 솥을 만들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군. 홀라온(忽剌溫 - 여진족)과 흡사한 수준 같다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곡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내가 먹으라고 주는 것인가?”

한명회는 바나나 잎으로 만든 그릇에 푸짐하게 담긴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소금이 귀한 고장이기에 짠 맛이 적었지만 주린 배를 채우기에 차고 넘치는 양이었다.

이윽고 가장 중요한 곡분, 탄수화물을 먹을 차례였다.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은 눈을 뜨고 찾아도 보이지 않기에 토란과 같은 덩어리를 베어 물었는데 미묘한 단맛이 베어 나왔다.

“허어? 참으로 기묘한 녀석입니다. 서(蒣 - 참마)와 같이 미끈하지도 않고 푸근한 식감인데다 단 맛이 은은하게 배어있으니 요긴하게 쓰일 것 같습니다. 이게 무언가?”

“쿠마라? 쿠마라!”

“구마라라고 하는 작물이군요. 세상은 넓고 신묘한 것들은 넘쳐납니다.”

“이건 사탕(砂糖 - 설탕)의 맛이 나는군. 대남도(대만)에서 사탕을 만드는 작물을 찾았다 하던데 여기에도 있었단 말인가.”

식사가 끝나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한명회를 따라온 역관도 말을 했지만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으며 필담 또한 통하지 않았다.

한명회는 어쩔 수 없이 몸짓과 회화로 대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들도 낮과 밤은 알며 달과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알고 있으니 대화가 통하리라. 한명회는 먼저 그리운 조선의 모습을 간략하게 그리고 거대한 배를 그렸다.

“말은 통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조선에서 왔소. 조 선.”

“조 선.”

“대양도를 건너 말란가(말라카)를 시작으로 조와국(마자파힛 제국)에 이르렀으며 머나먼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오. 도합 넉 달이나 걸리는 여정이오.”

한명회가 어설프게 그린 회화는 뭍에서 출발한 배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배가 여러 섬을 거쳐 태풍을 만나고 여기까지 표류했다는 이야기가 끝나자 족장은 한명회의 어깨를 잡으면서 환호성을 쳤다.

“사와이키!”

“사와이키가 무엇이오? 당신들이 기거했던 땅이 사와이키라 하는 곳이오?”

부족장은 말이 통하지 않자 답답해하다 자신이 나뭇가지를 들고 땅에 회화를 그려나갔다. 여러 섬 사이로 배가 거니는 모습과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한명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달. 보름달 네 개를 보았다.

“달은 보름을 나타내는 것이오. 당신들이 섬을 넘나들기 위하여 두 달이나 바다 위에 머물렀다는 소리요?”

하늘 위에 뜬 보름달을 가리켰지만 부족장은 초승달과 보름달을 번갈아 그리더니 막대기 열다섯 개와 태양의 형상을 그렸다. 여국강 또한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아바이키, 하와이키, 통가타푸.”

부족장의 말이 이어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계속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 섬마다 거주하는 사람들과 섬의 형태를 계속 그려나갔다. 끊임없이 전해지는 정보에 한명회는 머리가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어찌 야인들이. 한 달을 버티려면 대방선보다 거대한 배가 필요하다네.”

“이들은 평범한 야인들이 아닙니다. 섬 하나하나의 형태를 알고 있으며 물산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 호군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나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라네. 철물이 귀한데 어찌 이런······. 설마 저 나룻배를 타고 대양을 오간다는 말이었나!”

마을 구석에 있는 아웃리거 카누, 폴리네시아인이 즐겨 쓰는 선박은 스무 명이 타면 비좁을 것 같이 작은 배였다. 저런 작은 배로 망망대해를 해쳐나간다면 여국강과 비교할 수 없는 항해사들이리라. 한명회는 족장을 보면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우리는 조와국으로 돌아가야 하오. 여기서 보름이 넘게 걸릴 거리인데 식량을 마련해주실 수 있겠소?”

초승달과 보름달, 다시 그믐달을 그린 한명회는 입을 벌리고 먹는 시늉을 했다. 부족장은 선원들을 훑어보고 천자총통을 보더니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대체 무슨 방법을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선물을 더 드리겠소.”

바닷물에 적셔진 화약은 더 이상 쓸 방법이 없었다. 질 좋은 퇴비로 쓰일 물건이니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천자총통과 함께 배의 밑바닥에서 균형을 잡을 것들을 제외하면 모두 버리고 가는 것이 좋으리라.

작업이 계속되었다. 식량은 계속 공급되었으며 선원들은 생소한 음식에 질겁하면서도 어떻게든 선박을 복구하는데 힘을 썼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배의 임시 수리가 모두 완료될 무렵이었다.

마을 안의 식량은 모두 떨어졌지만 식량을 얻을 곳은 차고 넘쳤다. 천자총통을 녹여 병장기를 만든 부족민들은 인근 부족을 모조리 습격해 식량을 강탈해온 다음 사람들을 불렀다.

하지만 한명회는 바보가 아니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피로 물든 병장기와 부상을 입어 신음하는 부족민들이 넘쳐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명회는 땅을 치면서 한탄했다.

“세상에! 천자총통을 녹여서 병장기를 만들다니! 천자총통 두 문이면 청동 창 오백 개는 만들 수 있는데 어찌 그런 사실을 간과하였단 말인가.”

“야인들의 일이 아닌가. 그러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게나.”

“여 호군님! 그러하여도 머나먼 이국에 분란을 초래했으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떠나면 충분한 일이라네. 혹시나 걱정이 되면 다시 찾아오면 그만이긴 하네만.”

이들의 언어를 알고 항해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른 여국강은 배로 돌아갔다. 이윽고 억지로 수리된 대방선에 보름 분량의 식량이 차곡차곡 쌓였으며 부족장은 마지막으로 한명회를 만나려 하였다.

부족장은 얼굴을 부비면서 고마움을 나타냈고 한명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마지막 선물로 야자열매 속에 가득 담긴 씨앗이 전해졌다.

“쿠마라(고구마), 타로(타로토란), 파나나(바나나), 쿠마레모아나(사탕수수).”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국에서 요긴하게 키울 것이오.”

머나먼 이국의 작물이니 조선에서도 대양도에서도 기르기 힘들 것이리라. 그렇게 작별인사를 마친 한명회는 대방선에 올랐고. 대방선 두 척은 물살을 가르며 마자파힛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역풍이었기에 고된 항해가 계속되었다. 길어지는 항해에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물품을 팔아서 식량을 사들이니 말라카에 도착했을 무렵에 한명회의 함대에는 어떠한 물품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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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끝나자 김시습도 나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한명회가 만난 이들이 힘을 숭상하는 폴리네시아인인 것만 하여도 운이 좋다 여길 것인데 고구마 씨앗까지 얻어냈으니 천운이나 다름이 없었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군. 그러한 머나먼 곳에 사는 야인들과 만나고, 야인들을 내수린을 응용하여 제압하였으며, 마침내 야인들의 도움을 얻어 돌아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모든 일은 저의 욕심으로 비롯된 것이니 어찌 공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한명회가 몸이 아파서 관청에 나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몸의 병이 아니고 마음의 병이었나. 절친한 벗인 권람이 대만에 내려가 있으니 하소연을 할 사람조차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북방에서 고생하고 있던 김시습이 돌아오자 하소연을 늘어놓은 것이리라. 한명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 김시습이 항변을 늘어놓았다.

“형님께서 화약을 판매하신 일은 이문을 얻어 아국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며. 설령 두 번째 항해에서 다른 물산을 선적하였어도 해구(海寇)들이 아국의 선단을 습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라 하여도 서른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나의 욕심 때문이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욕심을 버리고 대양도로 돌아가 일을 돕는 것인데.”

김시습도 아무런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한명회가 과욕을 부린 일은 맞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목적도 없이 사방을 떠돌게 만든 쓸모없는 명령이었다. 한명회를 감싸기로 마음먹고 말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군. 사건의 전말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되는가.”

“대군어른과 매월당 그리고 여국강 어르신입니다.”

“함선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전말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지 않겠나. 지금은 귀환하여 잠잠한 것이지 소문은 천 리를 오고 간다네. 몇 년 뒤에는 어찌 되겠나?”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흐를지 모르지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고 한명회는 그런 일을 막지 못한다.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한명회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매는 먼저 맞는 것이 나은 법이지. 주상전하께 알릴 것이며 내가 약간의 책임을 질 거라네.”

“하오나 제가 저지른 일은 사형에 준하는 일이 아닙니까! 공이 있다 하여도 평생 형무소에 하옥될 것입니다!”

“4조가 행하였던 일이 무엇인가? 조와국 일대를 돌아다니며 수교를 맺으라는 말이 아니었는가.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이문을 얻기 위하여 행한 일이니 외도(外道)가 아니고 과욕일세. 내가 그렇게 책임을 지면 자네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겠지.”

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일의 진행과 책임 또한 마찬가지다. 한명회가 비록 욕심을 부려 일을 망쳤지만 형님의 뜻이 정해지면 그걸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형님이 한명회 혼자가 아니고 나를 포함해서 잘못했다 말하면 한명회는 약한 징계를 받을 것이고 나는 공이 너무 많으니 과를 감면해도 차고 넘칠 지경이다.

다른 신료들이 하소연해도 방법이 없다. 종친이 확실한 명령을 내리지 않아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 책임을 지면 누가 뭐라 할 것인가. 한명회는 눈물을 뚝뚝 흘려대다가 내 말을 듣고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앞으로 고된 일이 이어지겠지만 이는 감내해야 하는 것이네. 과욕을 보였다면 욕심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 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 절대 과욕을 부리지 않고 주상전하의 명을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한명회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업적을 세웠는지 모른다. 한명회를 시작으로 조선을 칭송하는 말이 폴리네시아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갈 것이며 나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폴리네시아인은 야만인이 아니다.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할 뿐 축적된 지식을 물려받는 천부적인 항해사들이다. 조선에 경험 많은 폴리네시아인 항해사가 합류하게 되면 하와이는 당연하고 조금 무리하면 이스터 섬 까지 항해가 가능하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남미와 북미다. 해류나 조류의 문제 때문에 험난한 여정이 되겠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형님을 만날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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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시에 방문한 형님과 잠시 대화할 틈이 생겼다. 형님은 마침 인도산 염초의 위력을 시험하고 있었는지 군기시 안에 탄연이 자욱했다.

“주상전하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호조 경비사(經費司 - 호조의 하위기관, 경비 지출을 담당한다)에 소속된 정랑(正郎) 한명회에 관한 것이옵니다.”

“일전에 용이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일이 좋게 돌아가는데 그렇게 방임하니 사람이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송구하옵니다. 제가 벌인 일이니 엄히 꾸짖어 주시옵소서.”

“조만간 너를 엄히 꾸짖을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고 있거라. 그런데 한명회의 일은 어찌 하여 묻는 것이냐.”

형님도 바보는 아니니 사건의 전말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으며 한명회가 겪은 상세한 일을 알지 못할 뿐이었다. 그래서 한명회가 겪은 일을 상세히 말했다. 형님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혀를 끌끌 차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임과 과욕이 겹쳐서 크나큰 악운으로 돌아왔구나. 그런데 한명회가 가져온 구마라라는 작물이 무엇인지 소상히 말하여 보거라. 구휼에 쓸모가 있는 작물이라 하였느냐?”

“확실치는 않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작물입니다. 고작 석 달을 길렀을 뿐인데 손가락만한 덩이줄기가 열렸고. 서리를 맞아 썩어 버렸지만 은은한 단맛이 느껴졌사옵니다.”

“서리를 맞아 썩는다 하였으면 제대로 길러봐야 알 것이다. 대양도(대만)와 해남 일대에 심어서 소출을 확인하고 종자를 늘려나가는 것이 좋겠구나.”

해남이면 좋은 선택이다. 현대에도 고구마 수확량이 넘쳐나는 곳이니 어지간해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고구마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명회의 공은 그러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머나먼 남도에서 만난 이들은 평범한 자들이 아닙니다. 당장 어느 누가 나룻배를 타고 대양을 두 달 동안 오갈 수 있겠사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한명회의 회화를 보고 바다를 건너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며. 더더욱 먼 곳에 자신들의 고향이 있다 하였지.”

“세상은 넓사옵니다. 이순지와 오사만국(오스만 제국)의 천문학자들이 말한 바와 같이 이 땅의 둘레는 십만 리에 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머나먼 남도의 토인들도 자신들이 번성했던 고장이 있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훌륭한 말이다. 그러니 네가 직접 나서기는 싫고 한명회를 내세우겠다는 생각이 아니더냐.”

정곡이 찔려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데 형님이 껄껄거리면서 웃으시다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이제 마흔이 넘었느니라. 다시 머나먼 이국으로 보낼 마음은 없으니 안심하여도 좋다. 그렇지 않아도 오사만국의 군주가 좋은 제안을 하였느니라.”

“국서에 어떠한 말이 있었기에 좋은 제안이라 하시옵니까?”

“홍삼을 많이 보내라는 말이었다. 홍삼 일천 근을 보내면 향신료의 종자 중 하나를 주어서 답례한다 하더구나. 참으로 식견이 뛰어난 자이며 욕심도 많은 자이다.”

“홍삼이라 하여도 생소한 물건이라 여겨 값이 비쌀 뿐이지 효능은 입증되지 않았사옵니다.”

“그 효능을 자신이 퍼트린다고 하였다. 자신을 귀신으로 여기는 멍청이들을 침략하며 홍삼 덕분에 기력을 되찾았다 말하면 오사만국 가격의 몇 배를 내서라도 사들일 것이라 하였지.”

메흐메트 2세는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다. 값만 비싸고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홍삼의 판매경로를 찾아내는 방법까지 모색한 것이다. 그렇게 형님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하니 매년 오백 근의 홍삼을 오사만국에 보내 교역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호조 휘하에 관청을 신설할 것이다. 하나는 서행사(西行司)라 하여 교역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예조 휘하의 관청이 아니라는 말씀은 국경무역(國境貿易 - 외교적 관례가 없는 일반 무역)에 해당되는 일이옵니까?”

“그렇다. 그리고 다른 관청을 세울 것이니 탐검사(探檢司)라 하면 좋겠구나. 한명회를 시작으로 하여 세상에 알려진 국가와 교류하기 위해 탐검(探檢 - 탐색하고 살피다)하는 관청이다.”

이걸로 한명회의 인생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가장 경험이 많은 호조 관료로서 세상을 돌아다니며 물산을 파악하는 끊임없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폴리네시아인의 고용에 성공하면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떠돌 것이고 미 대륙까지 항해할 수 있겠지. 아마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항해사로 명성을 떨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뉴기니의 이름은 뭐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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