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66화 (166/573)

< 2장 104화 - 한명회의 기묘한 항해 >

한명회는 음력 12월에 말라카 해협을 떠나 4월에 돌아왔다. 기껏 해야 5개월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가 돌아올 이유도 방법도 없다. 이런 저런 문제를 제외하고 들릴 수 있는 곳은 호주와 파푸아 뉴기니다.

아주 잘 하면 마리아나 제도의 괌이나 투발루, 사모아 같은 미크로네시아 까지는 도착하고 돌아올 방법은 있다. 그러나 한명회는 태풍에 휩쓸려서 배를 수리해야 했으니 저런 먼 곳에 다녀올 방법이 없다.

“태풍으로 난파해서 표류하고 다시 돌아온다면 미크로네시아는 불가능하고. 이건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야 하는데. 그리고 폴리네시아인의 고구마 전파는 어디까지 학설 아니었어?”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배웠던 것이 있었다. 폴리네시아의 고대 무역 경로를 통해서 고구마가 유입되었으며 파푸아 뉴기니를 시작으로 동남아 일대에 10세기경 퍼지기 시작했다는 학설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설이었고 애매한 DNA 분석이니 어원이 비슷하다는 말로 추정만 했었지. 일단 만나봐야 알 일이니 가마에서 내려서 배재당으로 향했다.

배재당에 들어서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명회는 감정이 풍부하지만 이렇게 우는 사람은 아니다. 조용히 배재당에 있는 정자로 다가가니 한명회는 술도 못하는 주제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동생이 보기에 내가 어떤 녀석인가. 쓸데없이 욕심을 앞세웠다가 이렇게 변고를 당했으니 나는 도저히 나라의 일을 도맡아 할 자격이 없다네.”

“욕심을 앞세웠다 하여도 살아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애초에 조와국(마자파힛 제국)의 정세가 불안하니 소득이 아예 없어도 무어라 할 자가 없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다행이라네. 진상을 아시고도 나무라지 않으시다니 성은이 망극하다네. 앞으로 허튼 짓을 할 마음 따위는 없어.”

김시습을 잡아놓고 신세한탄을 하고 있다니 마음의 상처가 큰 모양인데 진상?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정자에 올라간 다음 한명회 옆에 대놓고 털썩 앉았다.

“술을 그렇게 마시면 근손실이 일어난다 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입신체비를 무엇으로 아는 것인가.”

“대······.대군어른 죄송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제가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네의 공은 나와 비교하여도 부족하지 않으니 염려하지 말게.”

벼락을 맞은 듯이 한명회가 술에 취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한 잔 받은 다음 들이켜고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에게 받은 씨앗이 네 종류나 되었지. 그것들 중에 견우화(牽牛花 - 나팔꽃)를 닮은 씨앗이 자라났고 서리가 내리자 시들었지. 땅을 파니 먹을 수 있는 뿌리가 나왔다네.”

“견우화를 닮은 씨앗이라 하시면 구마라(kumara)가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이 특별할 일이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구마라 혹은 쿠마라 라는 명칭이면 정말 고구마다. 폴리네시아인을 만나서 고구마를 얻었단 말인가? 내가 보았던 학설이 정설이란 말인가. 그렇게 놀란 기색을 감추고 한명회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두엄을 듬뿍 뿌린 밭에 구마라 라는 작물을 심었겠는가. 조금만 시험해 볼 작정으로 두엄도 뿌리지 않는 뜰에 심었는데 소출이 나왔다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는가?”

“네? 하긴 안뜰에 두엄을 뿌리면 악취가 심하니 두엄을 뿌릴 이유도 없고. 그러하면 구마라라는 녀석들은 춥지 않으면 어디서나 자란다는 말씀이십니까?”

김시습도 한명회도 농업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고구마가 가진 잠재력을 금방 알아차렸다. 한명회는 찬물을 들이켜서 술기운을 몰아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고 이런 신묘한 작물을 얻어낸 것인가? 실책에 대한 일은 논하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길어집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작년 시월 경에 정암(整庵 - 정척의 호) 어르신과 다시 만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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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년 10월, 마자파힛 제국의 정세는 불안하다 못해서 바늘로 찌르면 터질 것 같이 악화되고 있었다.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각 지역의 영주들은 독립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봉급을 받지 못한 해군들은 해적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조선의 선단을 습격한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 대가는 모조리 목숨으로 치렀다.

“저놈들 자모포를 쏩니다!”

“그렇다면 벽력포로 응대해라!”

해협 사방에서 조선의 선단을 습격한 해적들은 놀랍게도 화약병기인 자모포를 쏘아댔다. 하지만 방패선에 자모포로 구멍을 낸 답례는 벽력포로 돌아왔다. 삽시간에 해적들 모두가 육편이 되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피해가 보고되었다. 방패선에 화공을 시도하였지만 순식간에 진화하였으며 조선의 피해는 부상자 둘이 전부였다. 피로가 쌓인 한명회는 차를 들이켜면서 한숨을 늘어놓았다.

“여 호군님. 정암 어르신을 만나 뵈면 적은 소득을 거뒀다고 꾸중을 들을 것 같습니다.”

“조와국의 정세가 불안하니 방법이 없지 않나. 어서 천축으로 돌아가도록 하세.”

교역품의 물량과 품질 모두 정척이 인솔하는 1조와 비교할 수도 없이 적었다. 기껏 해야 천축과 비교한다면 싼 가격에 정향을 많이 얻었지만 아주 큰 소득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척은 그런 모습을 칭찬하고 있었다. 이번 원정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한명회가 고생을 한다면 좋은 일이니까. 그렇게 정척은 은근슬쩍 자신의 업적을 자랑했다.

“천축에서는 땅에서 염초를 캐내더군. 이러니 화약이 값싸다 못해서 아국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지경이라네.”

“정녕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천축 일대의 염초는 참으로 훌륭한 물산이 아니겠습니까.”

“대군어른이 당도하기 이전에 몇 달 정도 시일이 남는다네. 그러하니 자네도 조금 더 세상을 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한명회는 눈을 번뜩였다. 명분은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소득을 거두면 권력과 부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지 않겠는가.

자고로 교역은 싼 물건을 사서 싼 물건을 사들이는 방법이다. 해적조차도 화약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마자파힛 일대에서 화약은 정말 귀한 물건이리라.

대방선 세 척에 화약이 잔뜩 적재되었다. 그리고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인 마자파힛(현 트로울란 일대)에서 판매하니 막대한 소득을 거둘 수 있었다. 한명회는 거래를 하면서 상인들과 정보를 주고받고 화약이 가장 비싼 지역을 알아냈다.

1458년 12월, 한명회가 지휘하는 4조의 목적은 통교가 아닌 무역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한명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국강과 다음 항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번 계획은 참으로 장대할 것입니다. 조와국의 수도 동북쪽에 있는 술라웨시라는 섬에 당도해 통교하고. 다시 동쪽으로 항해하여 스란 섬과 통교하는 일입니다. 조와국의 여러 지역을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은 내가 가 본적이 없는 곳이지만 함대에 소속된 다른 분견대에서 소식을 들은 적이 있긴 하다네. 기왕 시일이 남는 일이니 확실히 하면 좋겠군.”

한명회는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여국강의 경험을 믿고 무턱대고 의지한 것이며. 교역을 위해 많은 화약을 준비했다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다는 것이다.

화약병기를 즐겨 사용하는 해적들에게 화약을 잔뜩 적재한 조선의 선박은 보물창고나 다름이 없었다. 화력이 압도적이지만 이긴다면 화약을 마음껏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암본 섬 남쪽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저것이 다 해구란 말인가? 이게 대체······.”

지금까지 해적은 나룻배 스무 척이 전부였다. 하지만 해적들과 화약에 눈이 먼 지방 해군들이 연합하여 백 척이 넘는 선단을 만들어 냈다. 한명회는 천리경으로 머나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여국강의 어깨를 잡았다.

“이런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사방이 적입니다! 천리경으로 미리 확인하였지만 도망갈 구석이 없습니다.”

“아닐세. 바람이 다행이도 남동으로 불어오며 해류 또한 남동쪽이라네. 이대로 스란으로 향하지 말고 바로 남동쪽으로 도주하여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네.”

여국강의 판단은 좋았지만 상대 또한 잔뼈가 굵은 뱃사람들이었다. 퇴각 경로에도 수십 척의 함선이 가로막고 있었으니 난전이 이어졌다. 그렇게 현재 말루쿠 제도의 얌데나 섬 인근에서 격렬한 해전이 시작되었다.

“아무거나 던져! 밧줄을 끊고 갈고리를 몰아내라고!”

“젠장! 나 맞았어! 화살이라고!”

“화약은 충분하다! 아낌없이 쏘고 또 쏘아라! 적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라!”

아예 작정하고 나선 것인지 방패선에 불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고 화포 또한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방패선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몰아냈지만 모든 함선을 격퇴할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수천 마리의 쥐떼를 모두 몰아내지 못하듯이. 방패선 세 척의 화망을 뚫은 배들이 대방선으로 향했다. 여국강은 입술을 깨물면서 한명회에게 말했다.

“일단 남동쪽으로 움직이겠네. 방패선이 당한다면 이제 희망이 없어! 차라리 우리가 분열해서 방패선으로 향하는 적을 줄이는 것이 답이네!”

“알겠습니다. 깃발로 신호를 보내 조와국의 수도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정해라!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삼일 내내 추격전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적들이 대방선을 따라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하늘이 먹장구름이 생겨나고 빗줄기가 서서히 굵어지고 있었다. 하늘의 변화를 알아차린 해적들은 모두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구풍(具風 - 태풍)이 몰아치려는 것 같다네. 참으로 다행이지만 이제 남서쪽으로 항해해서 구풍을 피할 것이니 준비해 두게나.”

“저들은 북쪽으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저들을 따라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구풍은 대부분 북쪽으로 향하는데 저들이 사용하는 항구가 있으니 정박하려고 도망친 것이겠지. 저들을 따라 간다면 해구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네!”

여국강의 실책이었다. 북반구의 태풍은 전향력의 영향을 받아 북동쪽으로 움직이지만 여기는 적도를 넘어선 남반구였다. 여국강의 예측과 정 반대로 태풍은 남서쪽으로 이동한 선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도 인근이니 완전히 성장한 태풍이 아니었기에 배가 부서지거나 돛대가 꺾일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풍은 태풍인지라 피해가 속출했다.

“어서 짐을 버려라! 자라새끼들아! 움직여! 움직이라고! 이런 세상에! 구풍이 어찌 반대로 움직인단 말인가!”

“아무래도 머나먼 이국인지라 구풍의 방향이 정 반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동쪽으로! 어떻게든 동쪽으로 항로를 정해라! 이대로는 버틸 수가 없다!”

가까스로 태풍에도 견뎌낸 대방선 세 척이지만 상태는 처참하다 못해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피해가 적은 한 척은 밤중에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어디론가 사라졌고. 두 척은 선체에 균열이 생기고 돛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해류를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선원들은 쉴 새 없이 물을 퍼냈지만 대방선의 구조였던 활수창이 문제였다. 화물이 침수되고 식량도 바닷물에 젖어버렸다. 여국강은 상황을 정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염려하지 말게. 남은 한 척은 돛이 파손되지 않았으니 방향을 잡고 조와국으로 돌아갔을 것이야. 조만간 수리를 마치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겠지.”

“하지만 이대로 해류를 따라 움직이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식량도 문제입니다. 태풍이 부는 와중에 배의 무게를 줄이려고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더니 보름을 버틸 식량도 없습니다.”

한명회는 고개를 들어 완전히 찢겨진 돛을 보았다. 배는 만신창이였지만 어떻게든 정박하여 수리하면 고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항해는 계속되었다. 간혹 내리는 비로 식수를 충당했지만 수양대군이 애써서 챙겨준 보존식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보름이 지나고 가까스로 뉴기니 남쪽, 텔벗 제도 인근의 해안에 대방선이 상륙했다.

선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해안에 뛰어내려 입을 맞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한명회는 물자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화약이 물에 젖어서 비료로 쓸 물건이 되었고 보총 백여 발을 쏠 화약만 있었다.

용골이 뒤틀리거나 부서지지 않았지만 선체에는 손상이 심했다. 선체의 부담을 덜기 위해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호신용 천자총통 4문은 백사장에 버려졌다.

“어서 식량을 찾아 나서게. 그리고 비축할 수 있는 모든 물산들은 비축하도록 하고!”

작업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나무를 베어 함선을 보수할 목재를 만들고 예비 돛을 옷과 엮어서 새 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험난한 작업은 다른 무엇도 아닌 식량이었다.

선원 중 한명이 손목을 묶은 채로 뱀에 물렸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의원은 살무사와 같은 독사라 여기고 칼로 째내서 피를 빨아내었지만 보통 독사가 아니었다.

“나······.나리!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칼로 째고 독을 빨아냈으니 금방 나을 걸세. 이봐! 숨을 쉬게! 어서 숨을 쉬라고!”

뉴기니 남부 해안에 서식하는 뱀은 최악의 독사인 타이판이었다. 선원의 숨이 멎자 의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었다.

“무슨 독사가 이렇게 악랄하단 말인가! 반 각(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숨이 끊어진다는 말인가?”

고기를 잡으러 나섰던 선원들도 피해를 입었는지 배로 돌아와서 하소연을 하였다. 갈 때는 열 명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여덟 명이었다.

“압구 어르신! 얕은 바다에 대홀(大㺀 - 바다악어)이 여럿 있어서 선원 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황소도 잡아먹고 남을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었습니다! 화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총으로 쏘아 죽여라!”

거대한 바다악어도 문명의 이기에는 무력했다. 보총이 쏘아지고 바다악어는 순식간에 해체되어 선원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총성은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뉴기니 섬은 수많은 부족들이 사는 섬이었지만 이 일대는 오로지 한 부족이 점거하고 있었다. 하와이와 이스터 섬까지 항해한 해양민족. 폴리네시아인이 그들이었으며 뉴기니 일대의 거점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선원들은 숲 속에서 튀어나온 폴리네시아 부족민을 목격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체격이 담대하고 온 몸에 문신을 새겼으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무기를 들고 숲 속에서 뛰쳐나왔다.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입신체비사는 되어야 가까스로 견줄 만한 거대한 체격이었다. 겁에 질린 선원들이 배로 물러나자 폴리네시아 부족민은 자신들의 풍속인 하카(haka)를 추기 시작했다.

정체를 모르는 원주민들이 난데없이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자 선원들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은 함선으로 도주하였다.

“이봐. 보총 지금 다섯 정이 있지 않나? 장전하고 허공으로······.”

여국강은 더 이상 기세에서 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보총을 지닌 선원에게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한명회는 여국강의 손을 잡아 끌면서 귓속말을 하였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교역을 하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와국의 수많은 섬들에 있는 토인들은 마나라는 개념을 믿는데 아국의 기와 흡사한 개념이라 여겨지더군요.”

“저러한 춤으로 자신들의 기를 내세워서 선원들의 기를 꺾으려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더 강한 힘을 보여주면 될 것이 아닌가.”

“저들은 강한 상대에게 마나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상대를 죽여 먹어치운다 하였습니다. 만에 하나 보총을 쏜다면 신비한 힘을 얻으려고 달려들 것이 분명합니다.”

여국강은 군문에 있지 않았지만 셈은 빨랐다. 기껏 해야 보총 백 발을 쏠 수 있으니 상대가 겁에 질려 달아나지 않는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여국강은 목소리를 높이면서 되물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다면 우리를 소나 돼지로 여기고 잡아먹으려 하겠지. 배를 타고 떠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여국강이 놀라서 내뱉은 소리를 들은 선원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제대로 된 병장기도 많지 않았으며 체격은 상대가 월등했으니 싸움이 될 이유가 없었다.

기껏해야 배로 도망쳐 농성을 하다 끌려가 잡아먹히거나 배와 함께 불타 죽으리라. 선원들의 동요를 알아차린 한명회는 머리를 굴렸다. 선원들은 상대의 체격에 주눅이 들어있지만 한명회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하카의 동작이 근육의 움직임을 드러냈다. 한명회는 담담하게 상대의 몸을 평가하였고 승산이 있다 여겼다. 어디까지나 실낱같은 것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체가 비대하고 상체는 빈약하군. 이는 입신체비를 행한 것도 아니고 날것 그대로 몸을 다룬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지. 자질은 뛰어나지만 참으로 한심하구나.”

“명회!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겐가!”

“여기서 기세를 꺾어놓지 않으면 돌이킬 방법이 없습니다. 혹여나 제가 공격당한다면 어떻게든 살아서 도망치십시오.”

폴리네시아 부족민의 눈에는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하카가 끝나서 상대가 도망치거나 혹은 맞서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이다. 여기서 체격이 가장 작은 자가 앞으로 나선 것이다. 한명회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서 갓을 벗고 웃옷을 벗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을 대표해서 나온 것이라 여기고 원주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머리 크기 하나 차이가 날 정도로 신장이 차이나니 도저히 비교 할 수 없는 격차였다.

“자네에게 입신체비의 신비함을 알려주겠네. 손씨름으로 시작하면 어떠한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전사가 앞으로 내민 한명회의 손을 맞잡았다. 전투 이전의 유흥이자 자신의 힘을 자랑하려 했지만 한명회는 입신체비를 꾸준히 하여 삼대 운동 750(약 480kg)근을 돌파했다.

거대한 체격으로 한명회의 손을 짓누르려 하였지만 근육의 양이 훨씬 많은 한명회가 힘을 쓰자 전사의 손이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전사가 악을 써대며 힘을 쏟았지만 한명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악력이 형편없는데 창은 무엇을 하러 쓰나! 그러한 몸으로 자신 있게 나선다니 참으로 한심하군!”

“우오오오오오오!”

“닥치게! 소리를 지른다고 나아질 것은 없으니! 자네는 내수린으로 다스려야겠군!”

전사가 뒤로 넘어지자 한명회는 다리를 굴러 온 몸의 힘을 팔꿈치에 쏟아 명치를 내리찍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기괴한 공격에 전사는 가까스로 일어나서 주먹을 휘둘렀지만 호흡이 곤란한 상황인지라 너무 느렸다.

한명회는 가볍게 주먹을 피한 다음 능숙하게 파고 들어 전사를 등으로 짊어졌다. 자신보다 체격이 훨씬 작은 자에게 업힌 꼴이 된 전사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한명회의 움직임은 멈출 줄 몰랐다.

“다리의 힘이 강하다면 즉시 박차 일어나 싸워야 했을 것이 아닌가. 다음 가르침이네! 이것이 짊어 메치기(사모안 드롭)일세!”

“끄아아아악!”

전사의 눈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기술의 고통. 여기에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주제에 압도적인 완력을 자랑하는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한명회의 손길이 다시 전사의 몸을 잡아챘다.

“자네 정도는 이렇게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것도 가능하지! 끄랴아아아아아아아앗!”

참으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머리 하나는 작은 소인(小人)이 부족 최고의 전사를 어린 아이 다루듯이 집어던지고 메치다가 마침내 머리 위로 들어올린 것이었다. 전체승압(파워클린)을 완성한 한명회는 힘차게 전사를 집어 던졌다.

“가장 작은 내가 이렇게 강하다! 너희들이 마나를 먹으려고 우리를 습격한다 하였느냐! 네놈들에게 승산이 있을 것 같더냐!”

처절한 허장성세였지만 한명회의 힘을 본 폴리네시아 부족민들은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최고의 전사가 가장 작은 자에게 당했으니 도저히 승산이 없다 여긴 것이다.

다시 하카가 시작되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목숨을 부지하고 굴복하겠다는 하카였으며 한명회를 비롯한 조선의 선원들은 말은 몰랐지만 뜻이 전해졌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해서 힘을 쓴 나머지 사지가 후들거리는 한명회를 여국강이 반갑게 맞이했다.

“자네가 우리 모두를 살렸다네. 이렇게 힘으로 이기면 저들이 항복하는 풍속이 있던가?”

“전혀 모르고 행한 일입니다. 만약 실패했다면 제가 가장 먼저 목숨을 잃었겠지만 어차피 죽어도 조금 덜 고통스럽게 죽었겠지요. 하지만 모든 일이 잘 되었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조선인들은 폴리네시아 부족의 손님이자 상전이 되어 그들의 마을로 초대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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