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65화 (165/573)

< 2장 103화 - 돌아와도 일이다(2) >

영의정 김종서의 보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의정 정분을 시작으로 신료들이 일어나서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형님의 권위가 너무 대단하니 홍위를 공격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나선 자는 이징옥이다.

“본디 치수라 함은 제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합니다. 정황을 상세히 파악하여 이개가 제대로 된 치수를 행하였는지 확인하여 주시옵소서.”

하르빈에서 이개와 함께 일했던 이징옥은 나름 중립에 속해서 공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하였지만 형님은 침묵하고 계셨다. 형님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신료들이 말을 이어나갔다.

“치수를 백성에게 일임하지 않고 형무소의 죄인으로 하였으니 태만하게 일하여 치수를 제대로 행하지 못한 일이라 사료됩니다. 하오니 철저히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고장도 아닌 곳의 사람들이 일을 서툴게 한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죄수들을 다시 도형과 유형으로 돌리시며 형무소를 서역에서 건너온 이들이 머물 거처로 변용하시옵소서.”

“하늘이 진실로 재앙을 내리게 된 것은 화기(和氣)가 번창하지 않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죄수들을 사면하시어 덕을 보여주시옵소서.”

결국 저놈의 소리가 나왔네! 그렇게 자신과 연이 닿아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고 싶었나? 형님이 뭐라 말하기 전에 판을 깔아놔야 하니 조용히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신 수양대군 아뢰옵니다. 이번 수해의 원흉을 보았으며 이는 화기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도 아니며 시우(時雨 - 여기서는 장마)에 구풍(具風 - 태풍의 옛 명칭)이 겹쳐서 벌어진 일이옵니다.”

“도대체 구풍을 어떻게 보았다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대양도(대만)로 향하던 와중에 북쪽에 있는 바다에서 먹장구름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기에 한동안 대양도에 정박하고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원인을 보았다는 말이 나오자 형님의 눈빛이 변했다. 그 태풍이 조선에 몰아닥친 태풍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이어나가야지. 그렇게 신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말에 조금씩 살을 붙였다.

“여국강도 바다에 오랜 시일을 머무르면서 목격한 구풍 가운데 가장 거대한 녀석이라 하였습니다. 구풍이 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밀려와 아국으로 향한 것이라 여겨지옵니다.”

“그러한 일이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구나. 본디 치수라 하면 시우를 막거나 구풍을 막는 일에 쓰이지 둘이 겹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겠느냐.”

말이 끊어지고 고요한 적막이 이어졌다. 그렇게 이번 사건을 빌미로 형무소를 어떻게 해 보려던 신하들은 아무런 말도 이어나가지 못했다. 한 번 공격을 했으니 이제 두들겨 맞을 차례가 되었다.

화기가 생긴다고 태풍과 같은 자연현상이 사라지나? 머나먼 남쪽에서 태풍이 불어와 한양을 시작으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는데 그걸 죄수를 방면한다고 막아낼 수 있어? 하지만 형님은 역시 이 시대의 사람이다.

“형무소에 하옥되어 노동을 하는 죄수들 가운데 형기가 삼 년 이하로 남은 죄수들 가운데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가 고향인 이들을 한 달간 집으로 돌려보내 가족들을 보살피게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든 일은 과인의 잘못이다. 시우라 여겨 대응이 늦었으며 보고가 들어온 직후 도성을 비롯한 황해도와 평안도에 명을 내려 백성들을 피난시켰다면 손실을 막을 수 있었느니라.”

과인(寡人)이라는 말은 덕이 적은 사람을 뜻하고 임금이 자책할 때 하는 말이다. 지금껏 승승장구 해온 형님이 과인이라는 말을 사용한 순간 모든 신료들의 고개가 숙여졌다.

형님이 스스로 책임을 떠맡겠다고 하였다면 그걸로 끝난 일이다. 위신이 깎일 일도 없고 정말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신료들이 고개를 숙여 일제히 외쳤다.

“각 고을에서 제때 장계를 올렸다면 이런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러하면 어서 평안도와 황해도에 사람을 보내 피해를 막는 일에 힘써라. 그리고 제언(堤堰 - 제방)과 치수를 행한 곳이 얼마나 무너졌다 하였느냐.”

“아직 집계가 온전하지 않사오나 선공감에서 새로 치수를 행한 곳은 보고가 먼저 들어왔사옵니다.”

얼마 전 공조판서로 임명된 박중손이 장계를 모아서 돌아왔다. 공조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장계를 읽어나가면서 목소리에 기쁜 기색이 역력하였다.

“새로 쌓은 제언 여섯 곳 가운데 한 곳이 무너졌으며 치수를 행한 장소 가운데 이 할 가량이 피해를 입고 침수되었다 하옵니다.”

“의금부에 하옥된 이개를 즉시 방면하며 경기도 일대의 치수를 우선 행하게 하여라. 구풍과 시우가 겹친 큰 비에 견딘 치수이니 조금만 힘을 더하면 백 년은 능히 버틸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본디 치수라 하면 시우에 능히 버틸 정도로 족하다 여겼고 이전에 공조판서를 역임한 정창손 또한 그러한 방침을 택하였다. 하지만 시우와 구풍이 겹치는 일에 능히 견뎌낼 치수가 올바른 것이다.”

형님은 은근슬쩍 전임자인 정창손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그렇지 않아도 형님에게 찍힌 정창손은 일반적으로 다른 관직에 있는 자가 겸직하는 집현전의 수뇌 영전사(領殿事 - 정 1품 관직)로 있으니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리라.

그렇게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갔다. 이번 수재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농간에 의해 벌어진 것이며 앞으로 조선의 기조에서 덕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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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년 만에 동궁에 있는 입신체비장에 돌아왔다. 형님 또한 마흔이 넘었고 홍위와 함께 두 명의 입신체비를 하는데 홍위는 현동이와 비교해서 부족한 삼대 운동의 합이 칠백 근에 다다르고 있다.

“구풍이 그렇게 머나먼 곳에서 올라온다 하였느냐.”

“여국강의 말을 들어보니 대월국(베트남) 인근의 바다에서 시작된다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화기이니 덕이니 하는 소리는 모두 올바른 것이 아니옵니다.”

“그렇다 하여도 나의 잘못이 크니 어쩔 수 없구나. 세자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더냐.”

홍위는 백 근 대역기로 의압(벤치프레스)을 하다가 조용히 내려놓고 아무런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러자 형님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보고가 들어온 날 즉각 백성들을 피난케 하였으면 이러한 일은 없었다. 단 반나절 동안 대우가 끊임없이 내리니 삽시간에 청계천이 불어나서 백성들이 휩쓸리게 되었다.”

“형님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반나절 만에 청계천이 불어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늘의 일은 알 길이 없으나 사람은 하늘이 어떠한 일을 행하여도 이를 막아낼 준비를 하여야 하느니라. 설령 힘에 닿지 않더라도 피난만큼은 즉각 행해야 하느니라.”

결국 형님의 책임이란 말이군. 그런데 생각해보니 피해 집계가 도성,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가 전부이다. 태풍은 보통 한반도를 통과해서 영동까지 피해를 입히지 않나?

“신 수양대군 여쭐 것이 있사옵니다. 구풍이 들이닥쳤다면 강원도와 함경도 또한 큰 손실이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러한 보고는 없었다. 오히려 강원도에는 가뭄이 생길 지경이라 하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니라.”

참으로 요상한 일이다. 아마 태풍의 경로가 경기도에서 해안을 따라 쭉 북상한 것이니까. 경로로 보면 요동 일대에 상륙했을 것이 분명한데 조금 걱정된다.

요동 총병관인 서유정이 아편이 들어있는 한약을 먹고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미쳐 돌아가지는 않을까. 하지만 명나라 땅이잖아? 무슨 큰 일이 났겠어? 그렇게 뒷정리를 하고 있으니 형님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도원군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더구나. 수해가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 격문(檄文)을 보내 입신체비를 행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였느니라.”

“현동이가 그렇게 행동하다니. 모든 것이 저보다 나은 아이입니다.”

“네가 있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느냐. 그러고 보니 네가 돌아왔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구나. 청계천 일대의 보수를 지휘하여라.”

갑자기 일을 떠맡아서 정신이 없는데 형님은 웃고 있다. 아니 뭐 일반적 건물이야 대목장 시켜서 만들게 하면 되지만 또 다시 물이 불어나면 침수되는 지역이잖아. 그렇다면 나중에 딴 소리가 나온다고.

“라마국(신성 로마 제국)의 피렌체에서 온 이들이 회화뿐만 아니고 축성과 건축에 능하다 소개하지 않았느냐. 그러한 이들이 청계천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여라.”

“하오나 아국의 풍속과 라마국의 풍속은 다르옵니다. 혹여나 제가 미숙하여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니 청계천 일대를 어떻게 정비하여야 하는지 지침을 내려주시옵소서.”

“기존에 살던 이들은 가난한 이들이기에 돌아와 살 방법이 없다. 그러한 이들을 위하여 잠두봉(현 절두산) 인근에 새로운 집을 마련해 줄 것이니라. 그러하니 괘념치 말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하여라.”

한마디로 청계천 일대를 개수하면서 피렌체의 방식을 보고 싶다는 말이지. 다시 생각해보니 형님이 정말 무섭다.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아내겠다는 말이다.

물론 예산과 장소의 문제도 있다. 조선의 풍속과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나 종교적 건물은 짓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입신체비사들이 전국에서 몰려왔고 때를 맞춰 피렌체의 미술가들도 청계천에 모였다.

“조선의 군주께서 어떠한 일을 일임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네. 청계천 일대를 자네들의 방식으로 치수하여 보게나. 그렇다면 자네들이 보기에는 어떤가?”

조선에 처음 와서 청계천을 처음 본 사람들이니 어떻다고 할 말이 없겠지. 청계천에 몇 번 와봤지만 지금도 아수라장이었다. 홍수로 밀려온 시신들이야 치웠지만 집은 무너져있고 아직도 날품팔이들이 쓸 만한 가재도구를 찾아내고 있었다.

피렌체 미술가들의 시선이 주변을 스치면서 청계천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바닥의 진흙이 보일 지경이었다.

“하천의 바닥이 너무 낮습니다. 가장 먼저 행해야 할 일은 하천의 바닥을 깊게 파서 홍수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의 테베레 강은 쉴 새 없이 범람하니 익숙한 일입니다.”

로마가 홍수와 싸우면서 도시를 세웠다고 하는데 미술가의 눈빛을 보니 정말 사실인 것 같다. 나는 모르는 척 능글맞게 되물었다.

“준천(濬川 - 하천을 깊게 파서 홍수를 방지함) 작업이 시급하다는 말이군. 그러하면 다들 듣게! 가장 먼저 원하는 일이 준천이니 모두 실시하게!”

“네! 대군어른!”

수십 명에 달하는 내 제자들과 제자들에게 입신체비를 배운 이들. 그리고 동원된 인부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노동에 편한 입신체비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피렌체 미술가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저들은 귀족이 아닙니까?”

“아국의 풍속은 귀족이 하인을 도와 일을 행하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긴다네. 정확히는 몸을 단련하는 일은 찬양하고 같이 행하려 노력하지.”

입신체비에 대한 것은 알려줄 생각이 없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최고의 운동이니까 이런 식으로 적당히 정보를 숨기면서 알음알음 알게 해야지. 하지만 미술가들은 손을 움켜쥐고 흥분하고 있었다.

“참으로 훌륭한 풍속입니다. 그러하면 중노동을 거리낌 없이 행해도 좋단 말입니까?”

“몸이 상할까 염려하면 스스로 그만 두고 휴식을 취할 것이네. 몸을 단련하는 한도를 아는 자들이니 저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게나.”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저희가 사람을 부릴 줄은 모르고 설계할 줄만 아는데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혹시나 과도한 노동으로 사람이 상할까 염려하였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내 제자들은 적어도 삼대 운동 기준으로 500근(320kg)은 들어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현대 기준으로 헬스클럽에서 3~4년 정도는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격이다

이건 최고의 조합이다. 아무런 것도 모르고 현실적인 설계만 할 줄 아는 설계자와 자신의 몸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시공자의 조합.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무섭다. 그러나 공사는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이 있다네. 아국의 겨울은 자네들이 있었던 고장과 다르게 매섭게 춥고 두 달 뒤에는 물이 얼어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네. 그렇다면 얼마나 가능하겠는가?”

“보십시오! 기껏 해야 삼백 명에 밖에 안 되지만 벌써 하천의 진흙을 저만큼이나 퍼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이들과 함께한다면 두 달이면 하천 공사를 완료할 수 있습니다.”

나도 가끔 참가했지만 공사는 정말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하천 아래에 쌓인 진흙은 사라지고 청계천의 깊이는 다섯 자(1.74m)나 깊어졌으며 하천의 폭 또한 사람의 힘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힘든 점은 있었다. 한 조각가는 둑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머릿돌을 조각하면서 터진 손을 부여잡고 정을 내던졌다. 강철로 만든 정은 이미 끝이 닳아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조선의 돌은 정말 단단합니다. 이러한 돌 외에 부드러운 돌은 없습니까? 예를 들면 대리석이나 석회암만 하여도 공사가 수월할 것입니다.”

“석회암은 머나먼 강원도 산간에 많이 있으나 옮기는 일이 힘들지. 대리석은 자네들이 머물렀던 강화도에서 산출되지만 역시 많지는 않고.”

“참으로 아쉬운 일이군요. 이러한 돌이 아니고 조금 무른 돌이 있다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궁궐을 나무로 만든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목조를 모른다는 말인가?”

설마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거대한 화강암을 부여잡고 기둥으로 깎아나가는 석공들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소름이 돋았지만 미술가는 바닥에 나뭇가지로 무언가 형태를 만들어냈다.

“하부를 돌로 만들면 충분합니다. 여기에 벽을 벽돌로 만들고 기둥은 나무로 쌓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되었네.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내년에 다시 보세나.”

결국 목조로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고 철이 펑펑 쏟아져 나와 철근 콘크리트를 만들 방법도 없으니까 이렇게 진행해야지. 그렇게 입신체비사의 힘으로 청계천 일대의 하천 공사는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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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년 음력 10월. 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돌아다니니 세월의 무심함이 느껴진다. 인도에서 가져온 허브차를 한 잔 하면서 조용히 뜰을 돌아보았다. 슬슬 둘째이자 큰딸인 주현이의 혼담을 나눠야 할 시기이다.

갑자기 오스만 제국까지 가지 않았다면 진작 혼인했을 아이이다. 하지만 내년은 흉년 확정이니 함부로 혼례를 치루면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니 겨울 동안 정하고 혼인은 내년 가을로 미뤄야겠지.

뜰을 돌아보니 한명회에게 받아놓은 씨앗을 심었던 곳이 보인다. 나라의 일이 바쁘니 계속 돌보지 못하고 드문드문 보아왔으니 알 길이 없었다. 뜰을 돌보길 좋아하는 주현이에게 물어봤다.

“한명회가 가져온 작물 가운데 종자를 맺은 것이 있더냐.”

“꽃이 피어서 씨앗을 맺은 것은 하나였고 나머지는 소득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서리가 내리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 작물이 태반입니다.”

“그러고 보니 파초와 같이 잎이 커다란 녀석이 가장 먼저 시든 것 같더구나.”

대부분 열대작물이기에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명회가 받아온 씨앗들을 대만에서 시험할걸 그랬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씨앗은 한 줌을 넘게 받아놨었다. 오히려 작물 가운데 하나라도 씨앗을 받아놨으니 다행이고. 그렇게 주현이를 바라보는데 옷고름에 생소한 꽃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견우화(牽牛花 - 나팔꽃의 한문 이름)인데 특이한 견우화구나. 본디 견우화는 백색과 자색이 섞인 것이 있더라도 꽃의 바깥쪽이 자색이 아니더냐.”

“아버지께서 주신 작물이 꽃을 피웠으나 보통 견우화와 색이 정 반대이기에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기에 없는 솜씨로 자수를 놓아 보았습니다.”

“견우화가 곱다 하여도 네 손길이 곱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자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에 기화요초는 넘쳐나니 한명회의 공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이 꽃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현대의 아련한 기억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주현이의 말이 이어졌다.

“견우화가 아니고 반대편 뜰에 심겨져있는 메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명회라는 자가 바다를 떠놀다 머나먼 이국의 사람을 만났다 하는데 기근에 대비하라고 메꽃을 나눠 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메꽃은 어린 순을 먹을 수 있고 뿌리를 삶아 먹으면 요긴하게 쓰이니 한명회를······. 메꽃?”

대학원을 다닌 시절에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시 석사 논문을 쓰겠다면서 전 세계의 닭 가슴살을 연구자료 용도로 무관세 수입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했던 푸념이었지.

‘자네는 지식이 너무 편중되지 않았나. 보디빌더들이 즐겨 먹는 고구마는 메꽃과에 속하는 작물이야. 차라리 메꽃과 식물을 논문으로 써 보면 어떤가? 내가 자료로 쓰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고구마는 메꽃과에 속한다. 메꽃은 뿌리에 녹말을 저장해 구황작물로 쓰인다. 그리고 머나먼 열대지방의 원주민들이 메꽃을 나눠줄 이유가 있을까.

씨앗을 심었던 장소로 달려가서 손으로 흙을 파냈다. 주현이와 하인들이 달려왔지만 나는 정신없이 고구마일지도 모를 식물의 덩이뿌리를 찾는데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마침내 손끝에 무언가 단단한 녀석이 걸렸다.

“드디어 찾았구나! 이걸 당장 삶아오게나.”

손가락 보다 조금 작은 덩어리 두 개가 나왔다. 현대의 고구마처럼 자색이 아니고 누런 빛깔의 고구마로 추정되는 물건. 하인들이 삶아온 고구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는데 너무 작은 녀석이라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쪼개보니 속살도 현대의 자색이나 황색과는 다른 희미한 백색이었다. 하지만 향기는 고구마의 향기 그대로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 지겹게 먹어온 이 녀석을 잊을 수 없다. 시험 삼아 슬쩍 떼어다 한 입 먹었다.

“아버지! 드시면 안 됩니다! 독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당연하지만 서리를 맞고 시들어 버린 고구마이니 뿌리 또한 썩어있었다. 은은한 단맛 사이로 썩은 고구마의 쓴맛이 느껴지니 대차게 뱉어내고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고구마는 남미의 작물이다. 하지만 한명회가 다녀온 고장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다. 더욱 멀리 표류했다고 해봤자 호주와 파푸아 뉴기니가 전부이다.

“한명회는 도대체 어디를 다녀온 것이야?”

“아버지께서 이렇게 놀라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기껏 하여야 메꽃의 일종이 아닙니까.”

왕복에 쓰이는 시간을 고려하면 미 대륙에 다녀온 것은 아니고 직접 물어봐야 한다. 다른 일은 몰라도 지금 조선에 필요한 작물을 꼽자면 감자가 1순위고 고구마가 2순위다. 그만큼 중요한 작물이 고구마니까.

고구마는 추운 만주지방에서 절대 자라지 못하고 기껏 해야 중부지방에서 자라는 것이 한계이다. 하지만 감자와 다르게 입신체비에 쓰이는 곡분, 탄수화물의 꽃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고구마다. 감자? 혈당지수가 너무 높으니까 쓸모가 없어!

“메꽃이 고작 석 달 만에 뿌리가 이렇게 솟아난다면 제대로 기르면 어떻게 되겠느냐. 당장 한명회에게 다녀와야겠구나. 도대체 이 작물을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 정녕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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