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99화 - 크나큰 소득(1) >
1458년 10월, 궁정의 암투나 권력투쟁은 머나먼 이국의 왕족인 나에게는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정확히는 있었다가 사라졌지만. 날이 밝으면 몸을 씻고 의복을 갖춰 입고 메흐메트 2세의 집무실로 향했다.
메흐메트 2세는 평소에 집무에 열정을 보이지만 역사와 전 세계의 지식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 자에게 나와 같이 머나먼 이국의 왕족은 좋은 역사 교사이다. 오늘도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하면 명나라에서는 그만큼 끔찍한 패배를 겪고도 여전히 백만 이상의 병사를 거느린 거대한 제국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마 인구는 일억이 넘어갈 것이며 이 또한 전력을 다 한 일이 아닙니다. 전성기 때는 오십 만에 해당하는 병사와 보인들을 데리고 몽골 일대를 휩쓸고 다녔습니다.”
“키타이(거란, 여기서는 원나라를 뜻함)를 물리치고 만들어진 제국이라 하였지. 그러한 나라이니 수십만을 손해 본다고 심각한 타격으로 여기지 않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한 달 동안 동양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니 토목의 변까지 근래에 일어난 일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시 집무를 시작한 메흐메트 2세에게 인사를 마친 다음 나간 곳은 훈련장이다.
훈련장에는 조선의 관원들과 훈련도감 병사들 모두가 도열해 있었다. 몸을 가볍게 풀면서 옆에 있는 신숙주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왕제라 하여 역모를 꾀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던 일이 엊그제 같군. 이렇게 한 순간에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니 우스운 일이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왕제라는 신분으로 머나먼 고장에 왔으면 불만을 품었거나 야욕을 담고 있다 여길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정말로 싸우는 법을 모르는데 언제 거짓을 논했다 하였나.”
“대군어른은 싸우는 법을 모른다 하여도 몸 자체가 흉기이십니다.”
신숙주는 말을 하다 말고 웃음을 참아댔지만 모두 끝난 일이니 넘어갔다. 메흐메트 2세는 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으로 합당한 편견이었다.
‘거대한 체격에 군더더기가 없는 몸을 지녔으며 예물을 가져왔으니 이국의 왕족이 분명하구나. 하지만 짐이게 처음부터 거짓을 논하였으니 믿을 수 없는 자가 분명하다.’
다른 거짓말도 아니고 정말 억울한 일이다. 활을 제외한 병장기 사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진실을 말했는데 메흐메트 2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의심이 이어지니 내가 원하는 것은 오스만 제국과 외교를 맺는 것이 아니고 업적을 세우고 자신의 세력을 불려서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점차 많은 정보가 오스만 제국으로 흘러들어왔다. 오스만 제국으로 향한 사신 외에도 적대관계인 티무르 제국에 조선의 사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여기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이번 사신행이 나 혼자의 일이 아니고 국책사업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으니 의심이 천천히 누그러졌고 결정타를 날린 것이 농작물을 달라는 청원이었다.
‘네가 야욕을 담아두고 낯빛을 숨기며 교묘한 혀를 놀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녕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쏟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일주일 뒤에 저 말을 시작으로 나에 대한 대우가 완전히 변했고. 결국 머나먼 동방의 역사를 전해달라 청하였으며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얻은 수확 가운데 하나는 주룩하네, 바르제쉬에 바스타니의 원형을 찾아낸 것이다.
쿠란의 암송을 마치고 병사들이 가볍게 훈련장을 뛴 다음 병장기를 하나씩 들며 몸을 풀었다. 배운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예니체리의 부대장이 나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국의 법도에 의해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 아쉬운 일이구려.”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오신 분의 몸으로 이러한 훈련을 하시니 위엄이 넘치십니다. 어디까지나 몸을 단련하는 방식이지 않습니까.”
“과찬은 그만 두시오. 그저 부모님께서 베풀어 주신 몸이 돋보일 뿐이니 언제나 겸손해야 하지 않소.”
주룩하네의 원산지는 이란 일대다. 현재는 티무르 제국의 영토에서 발전하는 단련법이겠지. 하지만 원류가 되는 단련법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고대의 운동이라 칭하는 이 단련법은 나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훈련도감의 단련법보다 다채롭고 과격했다.
“단련법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고대의 운동이라 칭한다니. 역사가 얼마나 깊은 것이오?”
“오래 전 셀주크 시대에 정형화된 단련법이며 그 기원이 키루스 대제까지 거슬러 온다 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이렇게 장엄한 몸으로 고대의 운동을 행할 것이라 예상하였겠습니까.”
“키루스 대제라는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비범한 이가 분명하구려.”
역사 따위는 집어치우자. 내가 천축봉이라 이름 붙인 인디언 밀 대신 정말로 무쇠로 만든 곤봉을 사용하고. 방패는 실전성이 있는 나무 방패를 사용한다.
당연히 실전성이 살아있으니 사소한 병장기를 다루는 방식을 모조리 훈련에 채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훈련강도가 변하지 않고 규정된 횟수를 채우는 일을 우선시 하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자세가 풀린다! 조선의 왕족에게 무슨 결례더냐!”
“이런 젠장! 하필 이런 놈이 걸려서!”
예니체리 한 명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체격에 맞지 않는 거대한 인디언 밀을 돌리고 있었다. 훈련도감 병사들은 서로 체격에 맞춰 도구를 바꾸지만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저렇게 되면 어깨 근육이 순식간에 망가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훈련이 끝났지만 도감군 병사들이 모두 쉬는 것은 아니다. 관원들은 쉴지 몰라도 도감군 병사들은 예니체리와 전투 방식을 의논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찾아 보완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홍윤성을 비롯한 도감군의 장검수, 미첨도를 사용하는 병사들은 새로운 병기의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신숙주도 그런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유사한 형태인 월극(鉞戟)보다 실전성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병기의 이름이 알무…….”
“미늘창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이네. 조만간 도감군에 속한 장검수의 병기가 미첨도에서 미늘창으로 변하겠군.”
예니체리가 즐겨 사용하는 할버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할버드를 사용하는 예니체리를 홍윤성이 도끼로 쓰러트린 이유? 그냥 강해서다. 하지만 훈련도감군 장검수의 모의 대련에서 예니체리는 제법 높은 승률을 보여줬다.
할버드는 그만큼 좋은 병기다. 파괴력에 집중한 미첨도와 비교해도 파괴력이 뒤떨어지지 않고. 창의 기능은 당연히 갖췄으며 여기에 상대의 장창을 걸어 부수는 기능까지 더하였으니. 도감군 같은 최정예 병사에게 가장 좋은 병기이다.
예니체리에게는 준 것이 없었지만 조선군이 얻은 것은 많았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에 정리 운동을 하며 신숙주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용이(안평대군)가 돌아오면 귀환하도록 함세. 이제 배울 것은 모두 배웠고 얻을 것은 모두 얻은 것 같으니 말이야.”
“얼마 전에 보내온 서한에 따르면 회화를 배우고자 하였으며 요하네스라는 이와 인쇄기라는 기물을 들여온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왕전하께서 명하신 일을 모두 완수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일세.”
세종대왕님이 원하는 일은 모두 이루어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개조가 필요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고. 이미 형무소에서 한지를 생산하고 있으니 아마를 통해 종이를 만들면 훨씬 많은 서적을 양산할 길이 열리겠지.
여기에 돌아가면서 챙길 것의 목록도 구해놔야 한다. 일단 인도에서 구할 물건은 정해놨는데 향신료 같은 사치품이 아니다. 내가 현대에서 대학원 졸업논문으로 작성했던 녀석을 찾으러 인도를 조금 돌아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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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고 메흐메트 2세에게 선물을 대접하기로 했다. 내가 원해서 만든 물건이지만 적잖이 사치스러운 물건이자 나 혼자 마셔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퍼트리고 싶은 녀석. 드립커피다.
이 시대의 커피는 몇 번이나 마셔봤지만 텁텁한 커피콩 분말, 지독한 쓴맛 그리고 단맛이 어우러지는 터키 커피이다. 다른 이들은 새로운 차를 접할 수 있다며 좋아했지만 내가 마시기에 좋지 않은 물건이니 개선할 마음을 먹었다.
“카흐베시(커피)를 조선의 방식으로 마신다 하였느냐.”
“조선의 방식이 아닌 제가 심사숙고하여 만든 방법입니다.”
“네가 지금 사용하는 카흐베시콩은 보통 마시는 양의 열 배인 사실을 알고 있느냐.”
“열 배라 하여도 향이 열 배가 될 것이며 맛은 오히려 연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메흐메트 2세는 내가 만든 도구들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그런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깔때기 형태로 만든 직물에 거칠게 부숴놓은 커피콩을 담았다.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마시는 에스프레소지만 에스프레소 기계를 만들 능력도 없으니 드립커피가 최선이지. 커피콩에 물을 붓고 뜸을 들이니 메흐메트 2세의 질문이 이어졌다.
“설마 뜨거운 물을 부어 천천히 우려낸다는 말이냐. 이 방식의 이름을 무어라 붙였느냐.”
“눈물을 더하다. 조선의 말로 발음하면 가누(加淚)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두음법칙에 의해 가루라 불려야 하지만 여하튼 가누다! 메흐메트 2세는 역관을 통해 전해진 말을 곱씹어 보더니 한 방울씩 떨어지는 드립커피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눈물을 더한다니.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카흐베시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눈물이 떠오르는구나. 참으로 알맞은 이름이로다.”
“그렇기에 눈물을 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스만 제국의 황제이지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있었는지 이런 사치스러운 일은 상상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시대를 뛰어넘은 드립커피 두 잔이 완성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향을 즐기더니 한 모금을 머금고 감탄을 늘어놓았다.
“맛이 연하고 기름기가 없으니 카흐베시가 아닌 것 같지만 향은 참으로 풍성하구나. 생각하여 보니 이러한 방식은 금지해야 함이 마땅하다.”
“너무 사치스러운 물건을 대접하였습니까.”
“치장을 좋아하고 사치를 일삼는 베네치아 놈들이 카흐베시를 보며 무어라 칭하는지는 아느냐? 악마의 음료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사들이지.”
이건 나도 알고 있는 일이다. 유럽은 커피 유행이 있었지만 이슬람의 음료라 하여 천대 하였다. 좋은 수출품의 판로가 막히니 메흐메트 2세도 여러 계획을 내세우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누를 금지하고 머나먼 동방의 방식이라고 알려준다면 놈들의 위선도 깨어질 것이 분명하다. 머나먼 이국의 신비로운 음료라면서 카흐베시를 사들여 가누라 칭하며 마시겠지.”
하나를 던지면 하나를 받아치니 참으로 대단한 상대이다. 그렇게 메흐메트 2세는 커피를 모두 마시고 양피지로 된 외교문서를 펴서 건네주었다. 라틴어로 쓰여 있으니 안평대군에 대한 소식이리라.
“네 동생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20일 뒤에 야파로 내려갈 것이라 하였으니 때를 맞춰 조선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지금껏 베풀어주신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하면 좋은 일이지. 그러고 보니 조선에서는 티무르 놈들과 교역 시행할 마음을 먹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일을 좌시할 수 없으니 어찌 하면 좋겠느냐.”
엄살을 부리는 메흐메트 2세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서방세계로 진출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티무르 제국은 예전에 오스만 제국에게 박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티무르 제국과의 교역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니면 티무르 제국의 견제를 부탁하는 뜻일까.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무언가가 들어있는 꾸러미를 내밀었다.
“짐 또한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후추가 아닙니까. 하지만 후추가 적색인 것은 처음 봅니다.”
“그건 종자로 쓰일 물건이다. 참으로 귀중한 물건이지.”
후추 종자는 구할 방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동남아와 인도 일대는 향신료의 유출을 막기 위해 종자를 모두 쪄서 죽인 다음 팔아치운다. 그렇다면 티무르 제국과 인도면 설마 메흐메트 2세는 훗날 일어날 일을 예측했단 말인가.
“인도가 첩목아국(티무르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말씀이십니까?”
“혼란을 통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 외에는 없지. 그렇다면 인도가 가장 좋은 장소이며. 조만간 조선에서 후추를 사들이면 모두 티무르 놈들에게 이윤이 돌아가지 않겠느냐.”
메흐메트 2세의 식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분명 티무르 제국의 붕괴와 동시에 황금씨족의 군주인 바부르가 인도를 공격하여 무굴 제국이 형성되었으니까.
물론 메흐메트 2세가 시기를 잘못 예측한 점은 있다. 티무르 제국은 한동안 혼란기를 겪다가 붕괴하니 약 50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그런 혼란까지 예상하긴 힘드니 오히려 주어진 정보로 정확히 예측한 것이리라.
“짐은 아직 젊다. 앞으로 이십 년은 족히 나라를 이끌어갈 것이니 머나먼 훗날의 일을 염두에 두고 싶구나. 그러니 티무르 놈들에게 한 점의 이득이라도 주고 싶지 않구나.”
“그렇사옵니다. 향신료를 아국이 생산할 수 있으면 천축에 들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홍삼을 더욱 많이 가져오너라. 듣자하니 신성하지도 않고 롬 카이셰리를 승계하지도 않은 껍데기 놈들은 홍삼에 미쳐 발악을 할 지경이라 하였다.”
메흐메트 2세의 뜻은 간단하다. 쓸데없는 일에 힘을 쓰지 말고 오스만 제국과의 인삼 교역을 이어나가자는 말이지.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나 또한 답례를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인삼 생산량이 나날이 늘어나니 가격 방어를 위해 활로를 개척해야겠다.
“한 해 오백 근을 보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홍삼을 담아온 항아리는 한 개당 한 근의 홍삼을 담아둘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좋구나. 이제 사방에서 농부들을 소집하였고 화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모두 짐을 꾸렸느니라.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더냐.”
“그들에게 질 좋은 옷을 입히고 온 몸을 말끔하게 씻겨 주시면 될 것입니다. 고작 농부에 불과한 이에게 그러한 대접을 하면 머나먼 동방까지 파티샤의 마음가짐이 퍼질 것입니다.”
메흐메트 2세가 잠시 생각에 잠기고 시종을 불렀다. 그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 여겼겠지.
하지만 내 속마음은 다른 것이 아니고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병 대책이다. 몸을 깨끗하게 씻고 옷을 완전히 갈아입으면 벼룩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되겠지.
그렇게 보름이 흐르고 귀환 길에 올랐다. 1458년 11월에 예루살렘 인근의 야파항에 도착하니 이미 대기하고 있던 로마의 함선들이 있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와 인쇄기 정도만 오는 일로 생각했는데 사람이 제법 많다?
“형님! 형님! 아주 좋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안평대군이 방정맞게 손을 흔들면서 나를 불렀으니 성큼성큼 걸어가서 앞에 섰다. 안평대군의 뒤에는 아무리 보아도 서양인으로 보이는 자가 스물. 아니 뒤에 도열한 하인으로 보이는 이들을 합치면 거의 백 명에 가까웠다.
“대체 누구를 데려온 것이냐.”
“피렌체라는 국가의 수장인 메디치 가문에서 사람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들 모두가 회화와 조각에 능한 자들이니 문파(門派)를 이루어 아국의 문물을 배울 것이라 하였습니다.”
“회화와 조각가라 하였느냐? 이렇게 귀한 이들을 어찌 데려온 것이냐.”
조선에서 회화를 논한다면 시, 서, 화에 능한 자들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미술, 건축에 통달한 자들이다. 현대로 따지면 저들 모두가 최소 건축학과 대학원생 혹은 부교수 정도의 직위이리라.
안평대군이 전해온 선물에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설득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 포기한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아국의 문물을 배운다고?
“용아. 잠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오스만 제국에서 보내온 이들은 모두 조선에 뼈를 묻기로 다짐하였다. 조선에 잔존한 이슬람교도들을 위한 토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문물을 배우고 돌아간다면 문제가 달라지지. 그런데 한 미술가가 나를 가리키면서 겁에 질렸다.
“저…… 저 분이 도나텔로님께서 기겁하신 근육의 덩어리입니까?”
“용아? 지금 도나텔로라는 이는 누구고 근육의 덩어리는 또 무엇이더냐.”
“그런 말은 형님에게 전하지 말라 하지 않았소. 잠시! 잠시! 형님 그런 일이 아니고!”
로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러 모로 알아볼 만한 뜻 깊은 여정이 될 것 같았다. 근육적으로 그렇고 학문적으로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