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97화 - 안평대군은 언제나 바쁘다(1) (1125 02:00 수정) >
안평대군과 관원을 태운 오스만 제국의 함선은 모레아 공국에 도착하고. 다시 모레아 공국에서 메시나 해협을 건너기 전 시칠리아에 들려 검문을 받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로마에 다다른 것은 1458년 9월 초였다.
안평대군은 배 위에서 오스만 제국의 관료와의 대화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고서에서 얼핏 보았던 대진국의 강역을 획득한 것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대진국으로 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철저한 검문과 검사도 확고한 적국이며 침공 의사를 보이는 오스만 제국에서 온 배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로마의 항구인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에 도착하고도 문제가 이어졌다.
“나는 머나먼 동쪽 조선에서 건너온 왕족이며, 도중에 허가를 내린 오사만국을 넘어 대진국(大秦國 - 신성로마제국)의 군주인 보르자라는 분에게 예물을 보내고자 이곳에 왔소.”
“보르자라면 카탈루냐(스페인 지방)의 말인데 아마 보르지아(Borgia) 가문을 의미할 것이고. 그 가문은 구성원이 수백 명은 넘습니다.”
“오사만국의 군주가 군대를 모집하라고 하였으나 군주가 아닌 것이오? 그렇다면 가문의 가주(家主)를 찾으면 되겠구려.”
“가문의 가주라 하면 교황이신 갈리스토 3세이신데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안평대군의 눈가에 짜증이 맴돌았다. 형님이 저지른 일로 다시 먼 곳으로 왔는데 군주가 갑자기 죽어버렸으니 일이 꼬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가문을 이어나간 자를 찾으려 했는데 항구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교황성하를 찾아오신 이국의 왕족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교황 비오 2세께서 뵙고자 하시니 어서 로마로 향하시지요.”
“갈리스토라는 분은 어떻게 되고 비오라는 분이 왕이 된 것이오?”
“상세한 일은 만나서 알아보시면 될 것입니다.”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초대하는 상대가 있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안평대군과 관원들, 그리고 예물을 올린 마차가 로마로 향했다.
로마 시내로 접어든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고 병사들이 도열하여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의 한복판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종루를 바라본 안평대군은 감탄하며 말을 내뱉었다.
“돌을 쪼아 저런 거대한 건물을 만들다니 콘스탄티노플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겠군.”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단어가 안평대군의 입에서 나오자 주변 사람들이 흠칫하면서 놀랐다. 머나먼 동방에서 건너온 이가 이미 사라진 도시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 이윽고 수군덕거리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섰다.
“콘스탄티노플이라 하셨습니까? 그 잊힌 이름을 어찌 알았단 말입니까.”
“나도 모르고 형님이 알려준 것이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누구시오?”
“발렌시아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재직 중인 로데릭 보르자(Roderic Borja – 로드리고 보르지아)라고 합니다. 만나 뵙고자 하신 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저의 삼촌이셨지요.”
가볍게 악수를 청하는 로데릭 보르자, 훗날의 알렉산데르 6세의 손을 맞잡은 안평대군은 소름이 돋아 올랐다. 훤한 미소와 가볍게 허리를 숙이는 태도는 바람직하지만 지금 여기는 일국의 군주를 만나는 곳이었다.
추기경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기껏해야 조선의 정승 정도의 직위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젊은 자가 군주보다 먼저 나선다면 권력의 핵심부에 서 있는 자이리라. 그렇게 성가가 울리고 교황인 비오 2세가 노쇠한 몸을 이끌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얼마 전에 콘클라베(교황 선출 선거)를 통하여 제 분수에 걸맞지 않은 자리에 오른 베드로의 제자이자 주님의 종이 이국의 왕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선에서 찾아온 안평대군입니다. 오사만국의 군주가 십자군을 만드는 일에 도움을 주라고 예물을 보내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안평대군의 설명이 이어졌고 십자군을 준비하라는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어깨를 떨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놈의 예물이 문제였다.
메흐메트 2세가 교황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보르자라고 칭하였으니 이를 개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교황이라는 직위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자 로드리고 보르지아가 앞으로 나섰다.
“메흐메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혹여나 교회를 분열시킬 사악한 계략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국의 왕족을 통해 전했을지도 모르지요.”
“발렌시아 대주교의 말도 일리가 있소. 그러하면 예물을 셋으로 나누도록 할 것이니 하나는 황제에게, 하나는 교황령으로, 나머지는 발렌시아 대주교가 분배하도록 하시오.”
“교황성하께서 말씀하신 바를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안평대군의 눈매가 찌푸려지면서 로드리고 보르지아에게 향했다. 말로는 분배라고 하지만 저렇게 권력을 가진 신하의 손에서 마음대로 오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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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2세는 검소하며, 신심이 깊고, 문학자의 자질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치를 기피하였으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또한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악마의 현신이나 다름없는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머나먼 동방에서 건너온 사람을 소개하였고. 동방의 신비한 약재를 가져온 일을 일종의 계시이자 예언으로 생각하였다. 그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일을 실천하였다.
그것은 조선에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의 위대한 모습을 소개하여 오스만 제국을 물리칠 동방의 동맹으로 조선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다른 이들은 가능성이 없다 여겼지만 비오 2세는 막무가내로 임했다.
안평대군은 그러한 말을 듣고도 아무런 내색이 없이 가볍게 웃기만 했다. 조선은 너무나 먼 곳에 있고 동맹을 맺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비오 2세가 베풀어주는 호의를 누릴 뿐이었다.
그렇게 열흘 동안 로마의 모든 장소를 돌아보고 마침내 마지막 장소인 성 베드로 대성당에 방문했다. 비오 2세는 자랑스럽게 대성당의 회랑에 서서 성호를 그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곳이 산 피에트로 대성당입니다. 천사백 년 전에 3대 교황이신 아나클레토께서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작은 성당을 지었으며, 이후 천백 년 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새로운 성당을 만들게 하였지요.”
“그러하면 이 주춧돌이 정녕 천 년이 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민족들이 로마를 할퀴고 지나갈 때에도 성당은 굳건히 서 있었으며 스물세 명의 황제가 대관식을 거행한 곳이지요.”
거대한 회랑은 조선에서 보지 못한 풍경이기에 안평대군의 눈이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이윽고 안평대군의 눈에 회랑의 기둥들이 기울어 있는 모습이 보였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나면서 건물이 낡은 모양입니다. 조만간 개축(改築)을 행해야 하겠군요.”
“잘 만든 죔쇠와 구리 끈으로 건물을 보호하고 있지만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드러운 대리석과 석회석으로 건물을 지었다는 점입니다. 아국은 대부분 화강석인지라 정으로 쪼아내는 일이 고난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현대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과거의 베드로 대성당은 그렇게 위태로운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비오 2세는 천천히 제단으로 나아가 기도를 올리기 위해 성서와 기도서를 펼쳤다.
“잠시 이곳에서 영면(永眠)하시는 교황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니 성화들을 보면서 눈을 즐겁게 하시지요.”
안평대군은 조심스럽게 회랑을 돌며 과거에 만들어진 프레스코화를 돌아보았다. 조선으로 돌아가서 이런 방식으로 회화를 남기면 쓸모가 있으리라. 다시 자리로 돌아온 안평대군이 성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십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너무나 귀한 것이기에 대부분 종이조차 아니고 진귀한 송아지 가죽으로 제작되어 있다던가. 하지만 비오 2세의 손에 들린 성경은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게 성경을 바라보던 안평대군의 시선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이국의 문자는 몰라도 같은 형태의 문자는 인쇄한 것처럼 정교하고 치우침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기에 갑자기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서책은 인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필사한 것입니까?”
“글자들의 차이가 없는 것을 찾아내시다니 식견이 대단하십니다. 금속 활자로 인쇄한 서책에 문양을 덧쓴 것으로 요하네스라는 자가 만든 물건이지요. 180부를 인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값진 물건이겠군요. 금속 활자를 사용하면 오백 부는 인쇄하여야 효율이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요하네스의 성경을 사용하는 이유는 검소함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값이 기존 판본의 이 할에도 미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지요.”
안평대군의 머릿속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조선에서 금속 활자를 사용하면 수천 개의 활자를 조합하고 간혹 모자란 활자를 즉석에서 찍어내 한 장을 만든다.
지방에서 소량을 인쇄할 때에는 여전히 목판을 사용했다. 궁궐에서 많은 책을 인쇄할 때에만 금속 활자를 만드니 많은 양을 인쇄할 경우에만 금속 활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안평대군은 생각을 거듭하다 입을 열었다.
“요하네스라는 자를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중요한 직책을 담당한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듣기에는 마인츠에 칩거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시일이 걸리겠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보름 뒤, 로마의 한 접견실에는 안평대군과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훗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고 불리는 자가 마주하게 되었다.
교황이 내어준 것인지 화려한 복식을 갖춘 요하네스는 안평대군에게 인사를 올리고 기대하는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머나먼 동방에서 오신 분이라 하셨습니까. 혹여나 백만의 마르코가 보았다던 황금으로 가득한 지팡구에서 오신 분이기라도 합니까.”
“지팡구라, 아무리 보아도 백만의 마르코라는 자는 왜국(倭國)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술한 것이 분명하구려. 몇 번이나 가본 고장이지만 은이라면 몰라도 금은 없소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군요.”
요하네스를 가만히 훑어본 안평대군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교황이 부르는 자리이니 나름 값진 옷을 입고 나왔지만 온몸에 찌든 피폐함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황금을 언급한 이유도 자신이 갑부라 여기는 것이 분명하리라. 설득하고자 마음을 먹었으니 물욕을 보이면 좋은 일이리라. 안평대군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듣자 하니 서책을 만들 때에 당신이 설계한 인쇄기라는 물건을 사용했다 하였소. 그 기계를 만든 것이 당신이오? 혹여나 하나를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소.”
“저에게는 인쇄기가 없습니다. 모두 푸스트 놈의 손으로 들어갔지요. 성경을 인쇄하는 기계가 잡다한 서적을 만드는 일에 쓰이고 있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다른 이에게 넘어갔는지 알 수 있겠소?”
“인쇄기를 만들려고 하다 재산이 바닥나서 모든 일을 포기하려던 차에 푸스트라는 부호가 도움을 주었지요. 하지만 훗날이 되어 인쇄기를 완성하자 도움이 아니고 채무라 하며 소송을 걸었습니다.”
한숨을 내쉬는 요하네스를 보면서 안평대군이 실망한 눈초리를 보였다. 분명 계약서를 작성했을 것이며 증거가 남아있으리라. 결국 죽 쒀서 개 준 꼴이나 다름없이 되었으니 피폐함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도 물욕을 보이니 금전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았다. 구텐베르크의 남은 채무가 얼마인지는 모르나 안평대군이 사적으로 챙겨온 것은 홍삼 두 근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채무가 얼마나 남은 거요. 인쇄기를 압수당할 지경이면 가족들이 고생을 겪고 있겠소.”
“처음에는 2,026굴덴(gulden – 1굴덴은 금으로 약 3.53그램)의 채무였지만 지금은 300굴덴의 채무가 있습니다. 금으로 따지면 2푼트(Pfund - 약 480그램)가 넘지요. 가까스로 끼니를 이어나가니 푸스트도 독촉을 하지 않습니다.”
안평대군의 기억으로도 금화나 은화의 가치는 조선과 아주 큰 차이는 없었다. 금화 1개면 은화 12개의 값과 대등한 정도였으니 대략적인 계산이 되었다.
그렇다면 요하네스가 짊어진 채무는 은으로 따지면 150근이 넘어갔고 지금도 은 20근에 해당된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무에 안평대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안이 있소. 만약 아국으로 이주하면 모든 채무를 갚도록 도움을 줄 것이며, 남은 가족들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게 하겠소.”
“대체 어떻게 채무를 갚아주신다는 겁니까. 그리고 이 늙은 몸이 여행의 고난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순이 넘으신 중부님도 여행길을 다녀오셨으니 염려 마시오. 채무를 변제하는 비용으로 동방에서 가져온 약재인 홍삼을 드리겠소. 변제하는 일에 쓰이고도 남아 가족들에게 보탬이 될 것이오.”
안평대군은 비단 보자기로 싸놓은 홍삼이 담긴 백자를 요하네스에게 건네줬다. 도자기는 은보다 비싼 귀중품이며 홍삼은 금보다 값지다 하던가. 요하네스는 안평대군의 눈치를 살피며 되물었다.
“혹여나 제가 머나먼 동방으로 이주한 뒤에 인쇄기를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것이오. 그리고 아국의 문자는 여기에서 쓰이는 불가타와 완전히 다른 것이니 미리 물어볼 것이 있소. 아국의 문자를 당신이 만든 인쇄기로 인쇄할 수 있겠소.”
“직접 보기 전에는 모를 일입니다.”
안평대군은 탁자 위에 한지를 올려놓고 사자소학의 첫 글귀를 정자체로 적어 내려갔다. 요하네스는 신묘한 붓놀림을 보며 감탄하다가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게 무엇입니까. 머나먼 동방의 글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32자 가운데 단 3개만 모양이 같지 않습니까.”
“아국에서 서책을 인쇄할 적에는 수천 개의 활자를 만들어 판에 올려 조합하는 것이 기본이오. 당신이 만들었던 인쇄기에 이 글자를 사용할 수 있겠소?”
“필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불가타는 각종 표기를 더하여도 사십 자가 넘지 않아 활자를 계속 만들며 채워나갈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요. 하지만 문자가 수천 자가 넘으면 손이 너무 많이 듭니다.”
“그렇소. 아국에서도 같은 고난을 겪고 있으니 그런 것이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떻소?”
안평대군도 생각했던 일이었으니 다시 붓을 놀렸다. 이번에는 정음이 정자체로 차근차근 써 내려졌고 요하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훈민정음을 보았다.
“새로운 글자이군요. 이전의 글자보다 조금은 좋지만 그래도 활자를 계속 만들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글자들은 모두 합자(合字)로 이루어진 것이오.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문자인데 초성, 중성, 종성을 합쳐서 하나의 글로 만드는 것이지. 하나하나 풀이하자면 이렇지.”
총 28자의 훈민정음의 자모와 합쳐서 만든 자모들이 기록되었다. 구텐베르크는 천천히 정차체로 기록된 훈민정음과 자모를 보더니만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얼핏 보면 쉬운 일이지만 세 글자를 합하면 모든 일은 곱셈이 됩니다. 적게 보아도 일만 자가 넘는······ 생각하여 보면 형태를 뒤틀어 버리면 충분히 가망성이 있습니다.”
“형태를 틀어버린다 하였소?”
“활자는 형태가 뒤틀려 있어도 뜻이 통하면 됩니다. 자세히 보니 모든 글자가 규정된 위치를 지키고 있으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찰흙 한 덩어리를 가져온 요하네스는 찰흙을 주물러 네모난 판으로 만들고 작은 칼로 썰어냈다. 그리고 각자의 조각에 훈민정음의 초성, 중성, 종성을 기입하였다.
“어떤 음인지는 모르나 형태를 보니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 ‘줜’이라는 글자는 맨 위의 ‘ㅈ’과 중간의 ‘ㅝ’와 아래의 ‘ㄴ’이 합쳐진 결과물이 아닙니까.”
“바로 그렇소. 하지만 형태가 참으로 괴상하구려.”
“어쩔 수 없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활자를 만들고자 하면 일만 개가 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 60개 이하로 줄여나갈 수 있겠지요. 이러한 방식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훈민정음의 합자 구조상 자음과 모음의 위치는 조금씩 변형된다. 그러나 요하네스가 만든 활자의 방식은 고정된 활자를 조합하니 축이 어긋나고 한눈에 보아도 불안한 형태였다.
안평대군의 눈이 아니고 다른 어느 누가 보아도 만족할 수 없으리라. 생각을 거듭하던 안평대군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글이라 하여도 모든 이에게 읽히지 못한다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공증인으로 교황님을 불러 계약서를 작성하면 좋겠소. 머나먼 조선으로 이주하여 인쇄기를 만드는 것에 힘을 쓰시고. 가급적이면 원본을 하나 가져가면 좋을 것이오.”
“교황성하께서 공증인을 서신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오고 가는 시일과 신변을 정리할 시일이 한 달가량 걸리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다음 날, 비오 2세의 공증 하에 계약서가 작성되었고 구텐베르크는 신변을 정리하기 위해 마인츠로 돌아갔다. 다시 이틀이 지났을 무렵에 안평대군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발렌시아 대주교께서 소개하신 분입니다. 야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 라는 분이 머나먼 이국에서 오신 분을 회화로 남기고자 하여 뵙고자 합니다.”
한창 로마의 풍경을 회화로 남기고, 풍속을 서책으로 정리하던 안평대군에게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훗날의 알렉산데르 6세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회화가 한자리에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