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96화 - 수양대군, 케밥을 만나다(3) >
메흐메트 2세는 지난 며칠간 보여준 냉철하거나 권태로운 표정을 짓지 않고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기름과 모래에 범벅된 몸으로 인사를 올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몸을 씻으러 들어갔다.
조선에서 애매하게 만든 석감이 아니고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진짜 비누로 몸을 씻으니 기름기가 쉽사리 사라진다. 비누거품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역사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명나라는 보총을 얻고도 토목의 변이 그대로 일어났으니 큰 틀에서는 비슷하니 더욱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일이 터졌다. 수작을 부리기에 한껏 놀려먹었던 야먀나 소젠, 훗날 오닌의 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자가 내 행동으로 화병에 걸렸고 지금쯤이면 죽었을 거다. 이러한 나비효과가 얼마나 생겨날지 상상하면 소름이 돋는다.
조선의 이득을 최대화 하면서 역사의 변동을 줄이려 했다. 베트남의 레 왕조의 경우에는 보총을 얻어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 선심을 쓰는 척 넘겨줬다. 베트남의 중신들이 부패한 명의 군인에게 보총을 얻어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이용해야 하지만 가장 큰 요소인 서방세계의 변화는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내 실수 하나로 서구 문명의 발달도, 이슬람 세계의 몰락도 사라지면 훗날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어차피 접촉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고. 최대한 역사의 변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해야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시종이 흠칫 놀랐지만 개의치 않고 몸을 씻었다. 그렇게 몸을 수건으로 닦은 다음 메흐메트 2세의 수작을 되새겨 보았다.
냉혹하고 독선적인 반면 나라에 이득이 되면 무슨 일이라도 거리낌 없이 하는 인물이다. 예니체리가 훈련하는 장소에 사람을 보내 도감군의 상세를 알아내려는 행동만 봐도 답이 나왔다. 전략과 전술을 습득해서 자신의 군대를 강화시키려 하겠지.
명분이 생기니 홍윤성을 거둬들이려 하는 것만 봐도 느껴진다. 강한 자는 누구라도 받아들이고 싶겠지. 만약 내가 생각도 없이 시대를 뛰어넘은 최첨단 병기인 보총을 노출시키고 화기도감 병사들의 훈련 내용을 알려준다면?
몇 번의 시범운용을 거치면 효율성이 입증될 것이고. 이후에는 예니체리의 핸드캐논이 모두 보총, 적어도 칠십 년 뒤에 등장할 하프 머스킷으로 물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파티샤를 뵙습니다.”
메흐메트 2세가 아직도 놀란 눈을 한 채로 나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윽고 다른 관원들이 도열하자 걸맞지 않은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머나먼 이국에도 이러한 풍속이 있던가.”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아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름과 물이 섞인 구덩이에 수십 명이 몸싸움을 벌이는 것이 무슨 행동인지 차근차근 설명하여라.”
“먼저 결속력이 좋아지는 일은 당연합니다. 같은 부대에 속하는 이가 몸을 부대끼면 전우로 맞이할 수 있으며 신분도 출신도 관여치 않게 됩니다.”
메흐메트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니체리는 결속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같이 생활하게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는지 표정이 변하지 않기에 장점을 하나 더 말했다.
“시범을 보일 때에는 열 명씩 조를 이루어 싸웠습니다. 이렇게 적은 수를 동원하여도 전술이 생기고 승리하려고 애쓰는데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고 사람을 많이 동원하면 경험의 폭이 늘어나겠지요.”
“그러고 보니 네가 힘이 세었지만 별다른 효험을 보이지는 못하였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합을 맞춘 경험을 쌓는다면 실제 전투에서 효험을 보일 것입니다. 가장 힘든 것이 합을 맞추는 일이 아닙니까. 모의전을 벌인다고 얻어지는 경험이 아닙니다.”
홍윤성의 지시는 정확했다. 도감군 병사 셋이 나에게 달려든 덕분에 상대가 모조리 사라지고 나서야 힘을 쓸 수 있었으니까. 메흐메트 2세도 이런 점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충분한 효험이 있겠구나.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제외하고 오로지 잡아서 구덩이 밖으로 끌고 나가는 의미도 그것이겠구나.”
“그렇습니다. 몸이 상하는 일을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가까스로 메흐메트 2세가 납득했다. 애초에 예니체리 아홉이 줄줄이 박살나서 사기가 떨어진다는 명분을 내세웠었지.
그래서 사기와 결속력을 끌어올릴 방법 ‘만’ 찾아줬다. 참호격투를 통해서 결속력과 사기증진은 이뤄낼 수 있다. 하지만 실전에 적용하면? 약간의 효과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약간이다.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해도 맨손 격투와 병기를 부딪치는 실전은 다르다. 기껏 해야 분대 전술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전투력 향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훈련시간을 빼앗겨서 약해질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예니체리들이 설욕의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며칠 동안 쉰 다음 스물 대 스물로 겨뤄보도록 해라. 승리한 자는 궁정화가를 시켜 승리의 장면을 영구히 남길 것이다.”
나흘 뒤, 다시 구덩이 안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결사적으로 상대를 잡아끌고 몰아냈지만 예니체리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 좀 구해주게! 어서!”
“구하지 말고 이 놈들을 분열시켜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사지가 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예니체리들은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네 명이 조를 이루어서 뭉쳤다. 슬금슬금 접근하면서 빈틈을 보인 관원을 낚아채서 짊어지더니 바로 구덩이 밖으로 던져버렸다.
아니! 던지지 못했다. 들려가던 관원이 예니체리의 목을 팔로 감더니 갑자기 뒤로 넘어지면서 외쳤다.
“이것이 면직락(DDT)이다!”
목이 졸린 예니체리가 균형을 잃더니 관원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물속으로 고개를 박았다. 화려한 모습에 모두가 얼이 빠졌고 잠시 틈이 생겼기에 돌입해서 관원을 구출했다.
하지만 어설프긴 해도 목을 휘어감는 모습이 많이 보아온 솜씨이기에 궁금하기도 했다. 틈을 보아 잠시 관원에게 물어봤다.
“방금 전에 내수린의 기술인 면직락을 행했는데 대체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배재당에서 경연을 여는 일을 자주 보았기에 따라해 보았습니다. 대군어른이 계시지 않을 적에 몇 번이고 행했지만 부상자가 늘어나자 주상전하께서 어명을 내려 금지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입신체비사가 아닌 자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
“하오나 어명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주상전하께서 내린 어명은 서로 행하지 말라 하셨으나 이국의 사람들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서로 내수린을 행하는 일을 금지하는 명이면 외국인에게는 행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예니체리가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위축되어 있던 관원들이 급격하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보아온 내수린을 직접 하게 되어서 기쁘겠지. 사망자가 나오면 일이 틀어지니 나도 팔을 돌리면서 외쳤다.
“장승부수기(파일 드라이버)같은 커다란 기술은 사용하지 마라! 철저히 상대를 눕히는 일에 집중하고 무리하지 말거라!”
이런 일은 예상하지도 못했는지 예니체리들은 기겁을 하며 싸움을 피했고 차츰차츰 내수린 기술에 당해 쓰러지고 구덩이 밖으로 밀려났다.
“대군어른! 제가 팔을 잡겠습니다!”
“호흡이 착착 맞는군! 역시 자네라니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예니체리가 나와 홍윤성에게 사로잡혀 구덩이 밖으로 던져졌다. 처음으로 벌인 오일 레슬링, 아니 참호전투의 승자는 조선이 되었으니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보아라! 이것이 아바마마께서 내린 훌륭한 몸이다! 승리의 자세를 취하겠다!”
“대군어른께서는 또 다시 흑룡세를 행하십니까!”
“보게나. 오사만국의 군주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분위기에 취해 자랑스러운 빅토리 포즈. 흑룡세를 보여주자 메흐메트 2세는 만족스러운 듯이 박수를 치며 궁정화가를 불렀다. 자랑스럽게 자세를 취한 이들을 돌아보면서 메흐메트 2세의 입이 열렸다.
“무지몽매한 자들이 나를 남색가라고 칭하였다. 그렇다, 나는 남성의 몸을 좋아한다.”
소름이 돋아 오르면서 몸을 움츠리려고 했으나 화가가 근처에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떨결에 흑룡세를 유지하면서 메흐메트 2세의 말을 계속 듣게 되었다.
“남성의 몸을 좋아한다 하여도 이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련된 몸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남색 같은 일에는 관심조차 없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그렇다면 천만 다행이다. 그렇게 참호전투가 끝나고 이틀이 흘렀다. 다시 연회가 열리고 메흐메트 2세가 연회 와중에 넌저시 말을 걸었다.
“회화는 조만간 완성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훌륭한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지. 무엇을 원하느냐? 금이라면 얼마든지 있고 은도 충분히 있다. 청금석을 비롯한 금은보화를 원하느냐.”
이럴 때에는 귀금속을 원하면 멍청한 짓이다. 유럽과 아랍에서 구할 수 있는 자원은 동아시아 일대에도 충분히 산출된다. 귀금속? 우리가 줬던 물건의 가치만큼 돌려주겠지.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물건을 가져가자. 현재 상황에서 아랍 문화권이 가장 앞서있는 물건은? 다른 누구도 아닌 수학과 천문학자이다. 당장 칠정산만 해도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역법서를 바탕으로 했었다.
“아국은 아직도 천문에 해박하지 않아 많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 산학(算學)또한 부족함이 있으니 많은 어려움을 겪는 형편입니다.”
“천문학과 산학이라 하였는가. 짐의 휘하에 있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알 카샤니의 제자들이 있었지. 그러한 자들 다섯 정도면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기껏 해야 천문과 산학에 능한 자들이면 짐의 위엄을 함부로 논하기에 힘든 일이 아니겠느냐. 더욱 많은 것을 가져가야 하지 않겠느냐.”
정통제의 허락을 받고 명나라를 돌아다녔던 때와 같이 작물을 가져가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 어떤 작물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종자를 달라고 하면 무슨 종자를 줄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나갔다.
“잠시 도시를 돌아보며 무엇을 얻어갈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을 붙일 것이니 마음껏 돌아보도록 하여라.”
다음 날. 허가를 받고 예니체리 몇 명과 도시로 나왔다. 한때 콘스탄티노플이었던 도시는 차근차근 코스탄티니예로, 훗날의 이스탄불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랍인과 그리스인이 태연하게 거리를 돌아다녔고 흑인들도 제법 보였다. 생소한 풍경을 보던 신숙주가 훗날 작성할 기행문을 위해 세필을 들고 기록을 시작했다.
“오사만국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얽혀 있으니 아국과는 전혀 다르군요.”
“아국은 어찌 보면 밋밋하지 않은가. 외모가 다르고 피부의 색이 다른 이들이 하나로 뭉쳐 있으니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로군.”
“아국이 밋밋하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습니다.”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콘스탄티노플이지만 시장은 활기차다 못해 사람들로 넘쳐났다. 조선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갓 구운 빵의 냄새에 취했지만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서점은 어디에 있소?”
한동안 생각을 거듭했는데 서적 가격의 문제는 종이 가격과 직결되어 있다. 닥나무로 만드는 한지는 튼튼한 만큼 값이 비싸니까.
그렇다면 종이가 핵심이다. 서양의 서적이 두껍고 많은 내용을 담는 것은 활자의 차이도 있지만 종이가 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쇄기를 들여와도 한지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안내를 받은 서점으로 불쑥 들어가 제법 두꺼운 책을 한 권 집고 가격을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조선으로 치면 은으로 6냥인 서적이 12악체(Akçe), 무게로 따지면 조선 가격의 3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홀린 듯이 서적을 보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문자와 각종 도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혹시나 인쇄서적인줄 알고 계속 넘겨봤지만 필적으로 보아 필사본이 확실했다. 신숙주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국에서 이런 세필을 구사하는 이는 드뭅니다. 대군어른께서 창안한 세필(깃털펜)을 놀려도 쉬이 따라올 수 없겠지요. 이런 명필이 작성한 필사본인데 너무나 값이 쌉니다.”
“더군다나 오래 된 고서도 아니고 손때가 적게 묻은 새로운 서책이 아닌가. 이렇게 값싼 서적을 어떤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겠나.”
그리스인으로 보이는 서점 주인이 다른 서적도 몇 권 들고 왔다. 낡은 서적부터 새로운 서적까지 크기가 제각각이다. 그는 자랑스럽게 서적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요즘 인기 있는 자비르 이븐의 점성술 서적을 한 눈에 알아보시다니 식견이 대단하십니다. 이 서적은 에데르네(오스만 제국의 예전 수도)에서 필사된 서적이지요.”
“필사한 서적이 이렇게 값싼 이유가 있소? 다른 무엇을 떠나서 종이의 가격이 비싸지 않소.”
“종이요? 종이는 제법 값진 물건이지만 모든 가정에 기도서는 한 권이 있을 정도로 충분히 공급되고 있습니다.”
상인이 책들을 하나씩 펼치더니만 설명을 시작했다. 신숙주 또한 상인의 말을 믿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책을 뚫어져라 보았다.
“머나먼 이국에서 오신 분이라 하시니 설명해 드리지요. 어린 양의 가죽으로 만드는 가장 비싼 놈은 양피지입니다. 이 녀석은 고서에 사용된 파피루스입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녀석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녀석이…….”
한지와 다르게 약간 질기고 푹신한 느낌이 들며 결정적으로 섬유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무를 가공해 만드는 종이의 섬유질이 아닌 면사(綿絲) 같은 섬유질이다.
“가장 편하게 서적에 쓸 수 있는 리눔, 아니 카탄으로 만든 종이입니다. 이 녀석의 값이 저렴한지라 서적의 가격은 모두 저렴하지요.”
“카탄이라 하였소? 그건 대체 무엇이오?”
“카탄이요? 제가 입고 있는 옷이 카탄으로 만들어진 옷입니다.”
서점 주인이 태연하게 자신이 입은 하얀색 상의를 건드렸다. 어디서 본 놈이었는데 중세 관련 매체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리넨 옷감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는다. 바로 병사들에게 말을 해서 바로 인근의 농장으로 향했다.
벌판에 말라가는 카탄, 아마도 리넨인 물건들이 지천에 널려있었고 농부들이 작업에 열중하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공에 여념이 없는 카탄을 가리키면서 물어보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기르고 어떻게 가공하는 것인가.”
“습한 땅에 씨앗을 뿌리면 백 일이 지나 자연스럽게 자라납니다. 수십 년을 키워도 병충해가 일어나지 않더군요. 다 자라면 뽑아내서 보름 정도 삭히고 씨앗을 털어내면 됩니다.”
“그렇게 쉽고 편하게 자라난다니. 그렇다면 가공은 어떻게 하는가.”
“삭혀서 심지를 없앤 다음 쇠빗으로 빗어내면 옷감으로 변하지요. 끊어진 녀석들은 잘게 빻아 종이로 만들면 되고. 씨앗은 기름이 넘쳐나는 물건인지라 짜내서 요긴하게 씁니다.”
신숙주도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비어있는 땅에 씨앗을 뿌리면 옷감과 종이에 기름을 얻어낼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작물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마지(麻紙 - 삼베로 만든 종이)는 갈색에 질감이 거칠어 쉬이 쓰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카탄으로 만든 종이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병충해도 없고 백 일이면 자라는 흔한 작물이 이런 효험을 보인다니 믿기지가 않는군.”
이게 비밀이었다. 닥나무는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지만 십 년 이상을 육성해야 하고 결국 나무에 속한다. 하지만 카탄, 아마도 리넨은 그런 과정을 모두 무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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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하였느냐. 가장 흔한 작물인 카탄을 가져가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시장을 돌아보니 활기가 넘치고 물산이 풍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특히 종이가 넘쳐나니 정말로 부러운 일입니다.”
메흐메트 2세가 나를 만난 이후로 처음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 힘든 일이었는지 다른 이들도 안색이 변하며 메흐메트 2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금은보화를 원했으면 받은 만큼 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가장 값싼 것이며 가장 값진 것이 아니겠느냐. 짐이 가장 현명한 답을 들었구나.”
“서적은 지식을 전달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수단입니다. 좋은 서적은 같은 무게의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완벽한 대답이었는지 메흐메트 2세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재상인 자아노스를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내가 부탁할 엄두도 나지 않는 완벽한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부터 한 달 동안 제국 각지에 사람을 보내 작물의 종자를 거두고 이를 기를 농부들을 선발하라. 이주하는 이에게 충분한 보상을 내릴 것이라 전하라.”
기후의 차이는 상관없다. 열대작물이면 대양도(대만)에서 기르면 되고 온대작물이면 조선에서 기르면 되니까. 결과적으로 이번 원정의 가장 큰 소득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값싸게 종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마를 획득했으니 인쇄기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최초의 인쇄기를 만든 구텐베르크가 살아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 이럴 줄 알았으면 역사와 관련된 지식들도 적어둘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