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57화 (157/573)

< 2장 95화 - 수양대군, 케밥을 만나다(2) >

급작스럽게 일이 정해졌는지 메흐메트 2세는 자아노스를 불러서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더니만 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탄을 하듯이 울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여나 살집만 넘쳐나는 몸인 줄 알았는데 돌과 같이 단단한 근육이 몸을 휘감는구나. 짐의 휘하에 수많은 병사들이 있으나 이러한 몸을 가진 이는 없을 것이다.”

“저의 조상님께서 물려주신 것을 가꾸었을 뿐입니다. 좋은 벌판이 있으니 어설픈 농부라 하여도 많은 소출을 거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벌판에 뛰어난 농부가 있는 것이겠지. 앞으로 연회가 이어질 것이니 여독을 풀고 푹 쉬도록 하여라.”

연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 논의를 시작했다. 다들 여행과 연회의 피로가 몰려왔지만 술을 마시지 않은 덕분에 잠을 청하는 자는 없었다. 먼저 안평대군을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용(안평대군)이 에겐 미안하지만 네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이역만리인 오사만국(오스만 제국)에 와서 다시 먼 길을 떠나라 하시니 형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일을 정하신 것입니까.”

“네가 보기에는 오사만국의 군주가 호락호락한 상대로 보이더냐?”

안평대군은 우물쭈물 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야 역사적 지식이 있으니 어느 정도 메흐메트 2세의 성향을 알고 있지만 안평대군이 상대하기엔 너무 힘든 놈이다.

차라리 나 혼자서 모든 상황을 풀어나가면 편해진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상대하면 메흐메트 2세가 정보를 얻어내거나 허점을 찾아내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안평대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사만국의 군주는 철두철미한 자이며 빈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형님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하시자니 너무 불안하지 않습니까.”

“호위병을 일백 명을 데려오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해안에 도열한 병사들을 보면서 짐작이 가더구나. 조만간 아국의 병사들을 조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려 할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습니까. 아무리 대범한 자라 하여도 아국의 병사들을 스승이나 다름없이 본다는 말씀이십니까. 병사를 조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이렇게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니 갈수록 일이 틀어지지 않겠느냐.”

메흐메트 2세는 그런 놈이니까 문제다. 국익과 자신의 권력을 위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고 행동하는 자이며 어떤 일이라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결단력도 있다. 안평대군에겐 너무나 힘든 상대이다.

“형님의 뜻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견문을 넓히고자 하였는데 많은 소득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네가 고생이 많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아바마마께서 무(武)가 아닌 다른 것을 얻어오라 하셨는데 이를 마음 깊이 새기고 행동하여라.”

사흘 뒤. 안평대군이 떠나고 예상했던 대로 메흐메트 2세의 요청이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나를 부르더니 아주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병사들을 일백 명을 데려왔는데 이들의 몸을 움직이지 않아 녹슬까 염려되는구나. 모든 병장기를 제공할 것이고 충분한 훈련장을 제공할 것이니 몸을 풀게 하여라.”

몸을 푸는 훈련이라 했지만 실질적으로 감시당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변에 시종 복장을 한 덩치가 큰 자들은 아무래도 예니체리의 부대장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겠지.

“좌로 돌아! 앞으로 삼십 보 전진! 방진 구성!”

무더운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의 옆에 있는 자아노스 파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병사들이 절도가 있고 동작이 틀에 맞춘 듯이 일정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나먼 이국으로 방문하는 호위병은 아국의 최정예를 선발하였소. 그런 칭찬은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니요.”

“아닙니다. 가장 정예인 베이릭 예니체리도 같은 수로 싸운다면 절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무장은 조금 가벼운 편이니 조선군의 손해도 크겠지요.”

갑사를 데려오려 했지만 바닷바람에 갑옷이 상하고 혹시나 물에 빠지면 말 그대로 심해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그렇게 화포 시연이 이어졌고 거기서부터 하나씩 헝클어진 모습이 보였다.

자아노스 파샤도 총통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관심이 없다는 듯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만약 보총을 쏴댔으면 신병기를 얻어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

모든 훈련이 끝나고 병장기를 반납하였다. 땀에 범벅이 된 홍윤성이 마무리 점검을 마치고 병기고를 담당하는 예니체리와 인사를 나눈 다음 돌아왔다.

“어떠한가?”

“오사만국이 제법 덥다 하여도 대양도의 기후에 비하면 아무런 것도 아닙니다. 다만 조금 걸리는 일이 있군요.”

조금 걸리는 일이라 했지만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으니 잠자코 있어야겠다. 그렇게 첫 일정은 조용히 마무리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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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눈썹은 언제쯤 다시 돋아나는지 알 길이 없네.”

홍윤성이 투덜거리면서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유리의 뒷면에 은을 발라 만드는 거울은 값진 물건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왕궁이라면. 그것도 조선에서 온 귀한 사신들이 머무는 장소면 하나 정도는 있었으니까.

동경(銅鏡)과 달리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이니 처참한 몰골이 더욱 돋보였다. 손거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휑하니 비어있는 눈썹에 먹물을 찍어 바르고 있으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홍 섭호군님! 대군어른께서 찾으십니다! 당장은 아니시고 점심을 드시기 전에 방문하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라 하시더냐.”

급히 탁자에 내려놓은 손거울이 무게중심을 잃고 떨어지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홍윤성은 놀란 눈으로 거울을 보았지만 유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급 받을 때에 같은 무게의 금 가격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게 내 팔자지. 잠시 일을 마치고 대군어른을 찾아뵙는다 하여라.”

홍윤성은 은경(銀鏡 - 유리거울의 초기 명칭) 나눠 준 일을 기억했으니 창고를 찾았다. 시종 한 명을 데리고 보급고로 향하는데 홍윤성의 앞을 병사들이 가로 막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군. 여기 은경을 부쉈으니 어떻게든 변상할 것이네. 이를 미리 알리러 왔으니 양해를 구하겠네.”

시종이 부서진 거울을 들고 역관과 같이 창고 안으로 향했다. 변상금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 홍윤성은 조용히 복도 구석에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홍윤성의 앞에 있는 예니체리들은 낄낄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윽고 병사들이 손가락으로 홍윤성의 눈을, 정확히는 눈썹을 가리켰다.

“지금 무례하게 뭘 하는 것인가! 사람을 함부로 가리키다니 자네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가!”

하지만 한 명의 병사가 자신의 두꺼운 눈썹을 자랑하듯이 드러내 보이고 홍윤성을 보면서 웃어댔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놀리는 명백한 뜻을 알아차린 홍윤성은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당시에 땀이 흘러 눈썹에 바른 먹물이 모조리 흘러내렸던 것이다. 이후 예니체리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홍윤성은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만 앞에서 낄낄거리는 사람의 턱을 후려쳤다.

“크윽!”

“자네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 있다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람보를 행한 자들과 싸워본 적 있나?”

홍윤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훈련장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훈련장에서는 홍윤성의 고함과 사지가 부러진 예니체리들의 고통에 겨운 신음이 이어지고 사방으로 소란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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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섭호군! 자네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싸우고자 하여서 남자답게 싸웠습니다.”

메흐메트2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예니체리들 가운데서 최정예인 베이릭 예니체리. 술탄의 직속부대에 속하는 아홉 명이 피를 흘리고 사지가 꺾인 채 훈련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홍윤성이 들고 있는 할버드가 나무로 만들어진 훈련용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토막살해당한 아홉 명이 있었겠지. 하지만 싸우자는 말을 전했다고?

“말이 통한다는 말인가? 자네에게 역관이 배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나?”

“제가 멍청이도 아니고 눈썹을 가리키면서 웃어대기에 교육을 하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없앤 눈썹이 아닙니까! 이는 주상전하를 모욕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놀려댄 이들만 상대하면 될 일이지!”

사건이 보고되었는지 메흐메트 2세도 병사들과 함께 훈련장으로 나왔다. 난처한 상황인지라 나도 어찌할 줄 몰랐는데 메흐메트 2세가 사방을 둘러보더니 분노를 섞은 명령을 내렸다.

“저 머저리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지금 짐의 휘하에서 코스탄티니예를 수호하는 자들이 아홉이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니! 싸워서 패배하여도 좋지만 패배한 놈들이 바닥을 기어 다녀!”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던 예니체리들이 부러진 사지를 휘청거리며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일어난 자도 고작 셋에 불과했다. 메흐메트 2세는 그런 모습을 보더니 지휘관을 불러서 바로 뺨을 때렸다.

“아홉이 모조리 달려들었나?”

“아닙니다! 한 명씩 순서대로 상대하였고 마지막 두 명만 동시에 덮쳤다 하였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땐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습니다.”

“머저리들은 세크반(봉급이 없는 부대, 추격대)으로 보내라. 놈들이 소속된 오르타(이슬람의 편제)의 봉급을 일 년간 절반으로 줄이며 마지막에 둘이 덤빈 놈들은 즉시 목을 베어 들개의 밥으로 주어라!”

명령은 즉시 이행되었다. 예니체리 두 명은 애원하다가 목이 잘리고 나머지 일곱은 병장기를 빼앗기고 치료를 위해 이송되었으니까. 메흐메트 2세는 홍윤성을 노려보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눈썹은 어찌하다 그렇게 상했는가.”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명령을 완수하기 위하여 손상시켰습니다.”

“눈썹은 중요한 것이다. 사도(선지자 무함마드)께서 말씀하셨다. 눈썹은 귀중한 것이니 절대 헛되이 다루지 말라 하였으며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남겨두라 하셨지.”

이슬람 율법에 그런 것이 있었나. 그렇다면 홍윤성의 몰골을 보고 예니체리들이 우습게 본 것은 당연하다.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눈썹이 사라졌으니 남자도 아니라는 편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머나먼 이국에 그런 관습이 있을 이유는 없다. 조선에서 온 자의 훼손된 눈썹은 남자다움을 버린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라 하여도 완수하는 굳은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홍윤성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과 메흐메트 2세의 칭찬에 마음이 풀렸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는가 싶었다. 갑자기 메흐메트 2세가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너와 할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메흐메트 2세를 따라 다른 방에 들어가니 울화통이 터지는 듯이 탁자를 내리 찍었다.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입이 열렸다.

“고작 한 명에게 아홉이 당했어! 쓰러트리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나. 당장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인데 이를 메울 방법이 없군.”

“사기가 떨어진다 하여도 금방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배우는 것이 있어서 더욱 강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홍윤성이라는 자를 아국의 지휘관으로 삼을 것이니 넘기도록 하라. 충분한 자리를 약속할 것이며, 설령 가족이 있다 하여도 새로운 가정을 찾아 꾸릴 수 있게 할 것이다.”

홍윤성을 넘겨? 조만간 훈련도감을 지휘할 인재를? 인간백정이 아니고 올바른 성품을 가진 제대로 된 인재를? 그렇지만 메흐메트 2세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율법에 따르면 다른 이를 손상시킨 자는 손목을 자르라고 하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짐의 명령이 떨어지면 홍윤성이라는 자의 손목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를 어찌 생각하는가.”

자신의 자랑거리를 짓밟은 자를 받아들이거나 폐품으로 만들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아니 셋 중 하나지?

“그러하면 다른 방책도 있습니다. 병사들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사기를 끌어올릴 방안을 모색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한 방법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잠시만 생각할 틈을 주십시오.”

그놈의 훈련을 다각도에서 분석하고 배울 점을 찾으려는 수작이 보인다. 언젠가 나에게 수작을 부리려고 했는데 명분이 생겼으니 기회를 노려서 확실히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훈련도감의 기초 훈련법을 전수하면 충분한 일이다. 한 달 정도 사람들을 가르치면 확실한 성과가 나오니 메흐메트 2세도 만족하겠지. 하지만 훗날의 나비효과가 두렵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사람 여럿이 드잡이 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씨름과 비슷하면서 어딘가 어색한 면이 보인다. 그렇게 밖을 보고 있자니 메흐메트 2세가 조용히 말했다.

“저들은 크르크프나르(오일 레슬링)를 대비하여 훈련하는 페흘리반(레슬링 선수)들이다. 조만간 크르크프나르 대회가 열리지.”

“크르크프나르는 무엇입니까?”

메흐메트 2세가 손짓을 하자 시종이 따라붙어 궁궐 한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은 말 그대로 땀과 근육이. 아니 근육이 없어! 그냥 살덩어리야! 그런 모습을 보고 시종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크르크프나르의 기원은 백여 년 전입니다. 당시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심심풀이로 시작한 우격다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흥에 겨운 젊은이들이었는지라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경기가 계속되었지요.”

“설마 40명 모두가 목숨을 달리했는가?”

“아닙니다. 두 명의 병사가 사투를 벌이다 명을 달리하였고. 이후 샘물이 솟아났다 하였습니다. 이후 병사들의 뜻을 기리며 추모하는 행사가 시작되었으며 파티샤께서도 이를 좋아 하십니다.”

설명을 들으니 기억이 떠올랐다. 현대에서는 기름을 듬뿍 바르고 두꺼운 가죽바지를 입는 방식이지만 이 시기에는 부상 방지용 기름을 살짝 바르는 정도로 끝난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발칙할 상상력. 역사 능멸 내수린 하나로 만족하겠는가? 아니다! 머릿속이 맹렬히 돌아가면서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조선에서는 위생 문제로 차마 시험조차 하지 못했던 훈련 과정이 있었다. 현대에도 봉와직염이 속출하고 부스럼이 돋는 그 훈련이 오일 레슬링과 결합한다면?

“파티샤께 말씀을 올리게. 아주 좋은 방안이 떠올랐으니 인부를 동원하고 기름을 사용하여도 좋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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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동안 공사를 지휘하고 물품을 주문했다. 메흐메트 2세는 궁정 한 귀퉁이에 파여진 허리 깊이의 거대한 구덩이에 물을 붓고. 물 위에 올리브유를 부어넣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속을 강화시키고 사기를 끌어올리라 하였는데 지금 아이들의 장난을 보는 것 같군.”

“결속이라 하면 무엇입니까? 서로 몸을 부대끼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몸을 부대낀다고? 그렇다면 이런 곳을 어찌 하여 만들었는가? 모의전을 치루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모의전은 서로의 결속이 다져지지 않습니다. 싸우는 이도 주변에 있는 이와 결속을 다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창안한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먼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신호를 내리자 주변에 도열한 사람들이 웃옷을 훌러덩 벗어 던졌다. 그렇게 입신체비복과 소가죽으로 만든 하의만 입은 사람들이 천천히 구덩이로 들어갔다.

나도 복장을 갖추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미끄러져도 다치지 않게 모래를 깔아놨는데 사각사각하는 기분이 들면서 참호격투가 생각나서 영 찝찝하다.

시일이 지나면 기름과 물이 썩어 참호격투의 구정물처럼 변하겠지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징소리가 들리자 마자 가장 앞에 서서 돌격했다.

“보한재! 먼저 자네라네!”

“대군어른! 저도 봐드리지 않을 것입……. 으아아악!”

가장 먼저 목표로 삼은 자는 신숙주다. 징소리와 동시에 뛰어나가 신숙주의 입신체비복을 붙잡고 메쳤는데 풍덩 소리가 나면서 물속에 잠겼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는지 벌떡 일어났다.

신숙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서 다시 달려들었는데 허리가 단단한 손에 잡혀서 몸이 들렸다. 그렇게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일어서니 홍윤성이 다른 네 명과 달려들었다.

“홍 섭호군! 자네 너무한 것 아닌가!”

“웃기지 마십쇼. 다들 대군어른을 노려라! 사지를 잡는다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머나먼 오스만 제국까지 여행한 원망을 이 자리에서 풀어내려 하는지 사람들이 내 사지를 잡았고 나머지는 나를 구조하지 못하게 사방에서 막아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끼요오오오오오옷!”

“역시 대군어른! 너무 강하다!”

기름으로 마찰력이 감소한 덕분에 팔다리를 잡던 손이 모조리 풀렸다. 잠시의 틈을 노려 나를 구조하기 위한 자들이 진영을 돌파해서 주변을 에워쌌다. 숨을 돌리고 홍윤성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다시 시작하자고! 홍 섭호군 자네는 이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야!”

“저도 내수린으로 다져진 몸이니 염려 하지 마십시오! 대군 어른을 상대할 때에는 세 명 이상이 달라붙어라!”

사람이 날아가고 뒤집히며 질질 끌려간다. 모두가 기름범벅이 되어 직급과 혈통 따위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즐거운 싸움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상대편의 마지막 생존자인 홍윤성이 팔다리를 잡혀서 구덩이 밖으로 끌려 나갔다.

“아국에 돌아가서도 반드시 다시 하셔야 합니다! 이런 즐거운 일은 세상에 더는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몸이나 씻게. 다시 기름 범벅이 되었으니 석감을 많이 사용해야 할 것이야.”

피로가 몰려오지만 고개를 들어 메흐메트 2세를 보았다. 주문한대로 결속을 끌어올리고 사기를 강화하는데 가장 좋은 훈련을 알려줬으니까 무슨 보상을 내릴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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