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94화 - 수양대군, 케밥을 만나다(1) >
한 달의 기나긴 항해라고 해도 마흐무드 샤의 접대는 이어졌다. 우리의 선단이 출발하기 전에 치타공을 출발한 선단을 이용해 보급을 유지했으니까. 그렇게 사용된 다우선만 해도 수백 척이 넘어갈 것이다.
대장선에 나와 같이 타고 있는 벵갈 술탄국의 관료는 멋쩍게 웃으면서 마지막 보급선으로 가져온 비단 조각을 나눠줬다. 서서히 모래바람이 불어오니 입을 가리라는 용도겠지.
“이제 조선에서 말씀하시는 대식국의 영역에 다다랐습니다. 자신들을 부르지 왕조라고 칭하지만 실지로는 맘루크, 조선에서 말하는 노비라고 부르시면 될 것입니다.”
“노비가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오?”
“나라의 시작이 칼리파. 조선식으로 말하면 후인(後人)이며 알라의 대리인 무함마드를 군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권을 상실하고 노예 출신의 군인을 해방하여 술탄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듣는 사람 모두가 찜찜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비슷한 나라인 일본을 돌아다녔던 안평대군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으니.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마지막 선단을 가리키면서 애써서 말했다.
“사람을 보내는 노임과 사용하는 미곡만 하여도 어마어마한 양일 것인데 아국의 보급마저 담당하다니. 술탄께서 아국과 교역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소.”
“조선에서 보내온 물산만 하여도 명나라와의 교역을 반 년 동안 행한 것보다 좋고. 한 번의 무역으로 일 년의 수익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약조하신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소이다. 천축 일대의 다른 국가와 교역을 할 적에 맹가납국(벵갈 술탄국)과 같은 대접을 한다는 약조를 맺었으니 더욱 그렇지.”
세력권으로 따지면 벵갈 술탄국은 인도 일대의 수많은 국가 가운데 가장 약한 축에 속한다. 엄밀히 따지면 아랍과 동양의 중간 연결망을 담당하는 지역이지만 군사력이 취약하다.
그래서 인도 전역에 존재하는 5개의 국가들을 대등하게 대접하기로 약속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가까운 지역에 우리가 다루기 쉬운 우방이 생기는 것이고 벵갈 술탄국 입장에서는 귀한 거래상대를 만났으니 서로 좋아할 일이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삼십 년 전에 명나라에서 보내온 장식품과 비슷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명나라에서는 한 바구니를 보내왔는데 조선에서는 이렇게 많이 보내오시다니 방법이 궁금합니다.”
“별 일은 아니오. 그저 사람을 값싸게 부릴 방법이 있다는 것만 알아 두면 좋을 일이지.”
“비결은 함부로 묻는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값싸게 구하면 좋을 일이지요.”
형무소에서 생산하는 물품은 명나라 방식이면 수출용, 조선 방식이면 내수용으로 분류되어 사용된다. 당연히 품질이 좋을 수밖에. 그렇게 메카 근처에 도착했으니 확인할 것이 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아국의 회회교인(이슬람교도)들의 말이 오사만국(奧斯滿國 - 오스만 제국)에서 통할 것 같소? 한 달 동안 발음을 교정하지 않았소.”
“조금 부족한 면이 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저 또한 코스탄티니예까지 향할 일이 걱정이었는데 마음을 놓았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항해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인 언어 문제를 해결했다. 신숙주가 제법 많은 나라의 언어를 알지만 아랍어는 없었다. 기껏해야 돌궐어(투르크어)를 안다고 했지만 통용될 가능성이 적었다.
그래서 이슬람인의 후예. 원나라 시절에 고려로 건너왔던 자들의 후손을 이번 원정의 하급 관원과 잡부로 고용했다. 세종대왕님이 회회교의 풍속을 중단시켰지만 집안에서 알음알음 전해오는 일들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쿠란은 어느 인종이건 가리지 않고 아랍어로 읽어야 한다. 조선에 있는 이슬람교도 가운데 가풍으로 종교를 이어가는 자는 아랍어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예상했었지. 벵갈 술탄국에서 따라온 관료가 장년의 남성 한 명을 불러왔다.
“한 달 동안 외교에 쓰이는 어휘와 발음을 교정하는 일에 힘을 다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대화를 나눠볼 것이니 마지막으로 점검에 나서겠습니다.”
아랍백어(阿拉伯語)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신숙주가 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장기 가운데 하나인 위구르어를 아는 자가 없었으니 애석한 것일까.
그렇게 한동안 대화가 이어지고 양 볼에 입맞춤을 하는 아랍 특유의 인사 예절이 끝난 다음 마무리 인사가 오고 갔다. 만족한 벵갈 술탄국의 관료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머나먼 곳에서 왔는데 약간의 발음 정도야 틀려도 무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사란 법(伊斯蘭法 - 사리야, 이슬람의 율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가 아니면 흠을 잡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소. 말만 들어도 엄숙함이 묻어 나오던데 무슨 대화를 나눈 거요?”
“다른 일은 아니고 다섯 의무 가운데 하나인 메카의 순례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들을 가르친 방법이 배움이 부족하면 순례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 거라 하였으니까요.”
그래서 저렇게 열의를 보였군. 이윽고 제다, 아라비아 반도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메카 인근의 항구인 제다에 다가서자 이미 전령이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맘루크 술탄국의 관료가 배 주변으로 다가오더니 한동안 말싸움을 시작했다. 그렇게 말싸움이 끝나고 벵갈 술탄국의 관료가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 까히라에서는 페스트가 돌고 있으니 자칫 잘못하면 큰 해를 입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하니 맘루크의 선박의 인도를 받아 알 아카바(아카바) 인근으로 향하시면 됩니다. 이후로는 인솔하는 자를 따라 육로로 향하십시오.”
“그렇다면 예물은 따로 보내면 될 일이군. 하지만 육로로 향하면 이후로는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오?”
“전령을 보내 코스탄티니예에서 함대를 파견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일에 약간의 정성을 들여도 충분하겠지요.”
일주일 정도는 메카를 순례하는 회회교의 후손들을 맞이하고 약간의 예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지루한 항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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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년 6월. 맘루크 제국의 병사들의 인솔을 받아 야파라는 항구에 머물렀는데 잠시 생각해 보니 예루살렘 근처인 것 같다. 수많은 순례객들이 우리 행렬을 지나쳐 어디론가 사라졌으니까.
작은 항구인 야파를 가득 메운 수십 척의 선단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대부분이 갤리선이며 간혹 작은 범선이 있었지만 조선의 배로 따지면 예전에나 쓰였던 조운선과 비슷한 크기겠지. 대체 무슨 일인지 예측도 되지 않았다.
이윽고 가장 거대한 선박이 다가오고 판자가 내려졌다. 이윽고 병사들이 도열하더니 제법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천천히 내려와서 인사를 올렸다. 별로 보아오지 못하던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었으니 고위 관료가 아닐까.
“조선이라는 머나먼 나라에서 왔는데 대화가 통한다니.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오사만국에서 오신 분이시오? 기껏 해야 사신이 왔는데 이렇게 많은 선박을 동원하다니. 대체 영문을 알 길이 없소.”
“파티샤께서는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사소한 것들이 들러붙을 수 있으니 안전은 중요한 일이지요. 저는 얼마 전에 신임 재상으로 올라온 자아노스 파샤입니다.”
메흐메트 2세의 측근이자 재상이며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참전자인 자아노스가 우리를 맞이했다. 재상을 보낼 정도면 메흐메트 2세가 얼마나 관심을 보이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애써 놀라움을 감추고 말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아국의 병사들을 얼마나 데려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구려.”
“호위병이 너무 많으면 경계심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니 병종마다 합쳐 일백 명을 들이라 하셨습니다.”
“일백 명이라. 나머지 관원들은 돌려보내도 괜찮겠소?”
“염려하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길에는 제다까지 사람을 동원해 안전하게 모실 것입니다.”
굳이 병종을 합쳐 일백 명이라 했으니 수작이 뻔하게 보인다. 머나먼 이국의 호위병이면 정예병력일거고. 그런 병사들에게 이런 저런 배움을 얻으려는 수작이겠지.
하지만 지금 데려온 화기도감 병사들은 보총이 아닌 총통으로 무장하고 있다. 태연하게 병사들을 골라 일행에 합류시키고 나머지는 함선으로 돌려보냈다. 만에 하나 보총이 노출되었다면 앞으로의 역사가 크게 변할지도 몰랐지만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후 항해는 열흘 가까이 이어졌다. 지루한 항해 와중에도 자아노스 파샤는 말이 통한다는 점이 좋았는지 자신들의 역사를 늘어놓으면서 자랑에 자랑을 거듭했다.
그렇게 콘스탄티노플. 훗날의 이스탄불까지 도착하자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다들 웅장한 모습에 아무런 말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으나 홍윤성이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것이……. 무엇입니까?”
조선 사신단에게 위엄을 보여주려는 목적인지 수많은 병사들과 선박들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삼중성벽을 주변으로 하여 육군과 해군이 모두 도열하여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도대체 오사만국은 많은 병사를 가진 것입니까. 아무리 한 나라의 수도라 하여도 족히 일만이 넘을 병사들이 도열해 있지 않습니까.”
“모두 위대하신 정복자이자 파티샤이신 메메트 2세께서 소유하신 병사가 맞습니다. 복식을 보니 정예병인 예니체리인데 최대한 동원한다면 오만에 달합니다.”
“저런 무장을 가진 이들을 오만이나 동원한다는 말입니까?”
홍윤성이 감탄할 정도고 나 또한 제법 쓸만한 병사들이라 여겼다. 굳이 조선의 병사와 비교하자면 철령 전투 이전의 갑사들과 수준이 비슷하겠지. 홍윤성은 성벽을 보면서 감탄을 내뱉었다.
“자세히 보니 성벽이 삼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문이 엇갈려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도시를 어떻게 함락한 것입니까? 정공법으로 함락하려 하자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르반이라는 자가 만든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 한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정예병을 계속 돌입시켜 승기를 굳혔지요. 적들이 손실이 큰 덕분에 다른 문을 노려서 침입할 수 있었습니다.”
“화포가 성벽을 무너트린다니. 저토록 견고한 성벽이 어떻게 화포로 무너진단 말입니까.”
“조금 있으면 어떠한 화포인지 보실 수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홍윤성이 아쉬움을 감추려는 사이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화들짝 놀랐지만 자아노스 파샤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호탕하게 외쳤다.
“저것이 우르반 거포의 포성입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거대한 화포를 여럿 두어 성벽을 두들겼으니 무너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다만 오늘은 조선에서 오신 분들을 위한 축포로 사용되었군요.”
“축포라 하였소?”
“파티샤께서는 호탕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위대한 성전을 이어나가기 위한 신호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슬람 역사에 대해 많은 일을 기억하지 못하나 아마 왈라키아를 공격하겠지. 드라큘라의 모델인 블라드 가시공을 만날 방법은 없어지겠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메흐메트 2세가 이번 사신 방문에 대한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껏 해야 스물여섯의 나이라지만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황제이며 앞으로 이십 년은 정복활동을 이어나갈 자를 만나야 하다니.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런, 남쪽에 있는 항구로 진입하지 않는군요. 황제께서 더욱 많은 일을 즐기라 하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항구로 진입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 한다는 말이오.”
“할라치(금각만, 金角橋)로 진입하게 하려나 봅니다. 진귀한 볼 것이 너무나 많으니 참으로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그래 진귀한 볼 것이 많겠지. 금각만으로 진입한 다음 지시하는 대로 남쪽을 보니 십자가가 뜯어지고 모스크로 개조당한 소피아 대성당의 모습이 보이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반면 자아노스는 자랑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북쪽에 있는 성벽을 보십시오. 전투를 벌일 때에 금각만의 입구를 사람 허벅지 두께의 쇠사슬로 봉쇄하여 배가 오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배를 밧줄로 엮어 당기는 방법으로 언덕을 넘어섰지요.”
“배를 사람이 끌어당길 수 있다 하였소? 아국에서 쓰이는…….”
“작은 선박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구려. 그렇지 않았으면 옮길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네.”
군사 관련된 정보는 넘기지 않으려는 판단으로 홍윤성의 말을 끊었다. 다행이도 통역을 담당한 사람이 홍윤성의 말을 전달하지 않았고 자아노스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한동안 접견이 이어지고 물품이 하역되었다. 병사들이 도열해서 우리의 병력을 맞이하였고 아무리 도감군이라지만 적국의 수도에서 주눅이 들지 않을 병사는 없었다.
특히 홍윤성은 상대방의 눈썹을 돌아보더니 아랍인 특유의 두꺼운 눈썹을 보자 짜증이 솟구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가리라고 줬던 두건을 머리에 둘렀다. 그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궁전으로 향했다.
“위대한 정복자이자, 술탄이시며, 파티샤이고, 카이셰리 롬이자 정당한 로마 제국의 후계자인 메메트 2세께 인사를 올리십시오.”
옥좌 위에는 권태로운 표정의 청년이 있었다. 눈가에는 주름이 있고 살집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자연스러운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정통제는 황제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못난 놈이었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누가 보아도 황제의 위엄이 묻어나오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시작하였다.
“머나먼 조선에서 오사만국을 방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예물을 보내며 왕의 동생을 시작으로 하여 사신을 보내니 이를 대표하여 인사를 올리옵니다.”
명나라와 같은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는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상국에 하는 예절이니 큰 절 이후에 목례를 해야지. 서양의 풍속에서 이런 짓은 절대 군주에게 하는 일이지만 동양에서는 다른 나라의 임금에게 당연히 하는 일이다.
이런 예절에 대한 논의가 오고갔지만 내가 패배했다. 지금까지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지만 오스만 제국은 따지고 보면 상국(上國)이니 최소한의 예절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너무 많았다.
천천히 몸을 숙여 큰 절을 올렸다. 다시 목례를 마치자 궁정에 있던 병사들과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훗날에는 예의가 아니라고 말해 고칠 일이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다.
메흐메트 2세의 소개를 카이셰리 롬이자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 하는 시점에서 화가 올라왔지만 억눌러 참는 수 외엔 방법이 없다. 고개를 들자 메흐메트 2세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머나먼 이국에서 위대한 도시를 방문한 일이라 하여도 비범하기 짝이 없는데. 어찌하여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국의 예절이며 관례입니다. 머나먼 이국에 왔으니 최고의 예의를 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메흐메트 2세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나의 몸을 슬쩍 훑어보고 다른 사신단 일원의 몸을 훑어보더니 혀를 차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왕족임은 알고 있다. 또한 보통 왕족도 아니고 왕제라 하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먼 곳을 오게 되었느냐. 네 몸을 보건데 군문의 일에 능한 장수라 생각하거늘.”
“제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몸을 가꾸었을 뿐이고 군문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아국의 왕족들은 무예 가운데 궁시(弓矢)외에는 배우는 일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궁시 외에는 배우는 일을 금하였다? 네 상체를 보니 궁시에 능할 것 같으니 나중에 시연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들 체격이 듬직하니 병사들을 보낸 것이더냐?”
“아닙니다. 체격이 좋은 관료를 선발하여 여섯 달 동안 산야를 뛰어다니며 몸을 가꾸게 만들었습니다. 호위를 위한 병사는 일백 명에 불과합니다.”
메흐메트 2세는 관심이 급격하게 식어버렸는지 다시 옥좌에 털썩 주저앉아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예물들이 들어오고 하나씩 옥좌 앞에 늘어놓아졌다.
“알 카지프(도자기) 따위는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것인데 귀중한 물건을 가져온 것이냐.”
“아국의 특산물인 인삼을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려 만든 홍삼이 들어있습니다. 아국에서 팔릴 적에 같은 무게의 은의 값어치를 하는 약재입니다.”
“효능이 무엇이더냐.”
“피를 몸 사방으로 돌리며, 삿된 기운을 몰아내고, 사방에 돋아난 응어리를 해소하며, 피로를 누그러트립니다. 다만 먼 길을 건너오느라 상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메흐메트 2세가 손짓을 하자 도자기의 뚜껑이 열리고 홍삼 하나가 시종의 입으로 들어갔다. 시종은 꿀에 절여진 홍삼의 맛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꼭꼭 씹어 넘겼고 잠시 뒤에 메흐메트 2세의 입으로도 홍삼이 들어갔다.
“쓰고 떫으며 꿀에 절인 단맛이라. 머나먼 곳에서 같은 무게의 은과 같은 값이라 하였느냐. 효험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한 값어치만 하여도 금보다 몇 배는 비쌀 것이다.”
“과찬이시옵니다.”
갑자기 차를 가져와 들이켠 메흐메트 2세는 옥좌에서 다시 일어나더니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러더니 어깨를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진귀한 약재라 하였는데 벌써 온 몸에 활력이 돌고 지루함이 사라졌도다. 이러한 약재를 어찌 하면 좋겠느냐.”
“파티샤께서 소유한 것이니 파티샤의 뜻이 모든 일을 결정할 것입니다.”
“영주들에게 홍삼이 들어있는 알 카지프를 하나씩 나눠줄 것이다. 그리고 보르하(Borja)에게는 십자군을 모집할 수 있게 스무 개를 전해주거라. 이런 귀한 물건이면 십자군을 상대할 수 있겠구나.”
보르하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십자군을 모집한다는 말에 촉이 왔다. 십자군을 모집하는 권리는 교황에게 있으니 메흐메트 2세는 기분 전환을 위해 인삼을 교황에게 보낸다는 말인가.
하지만 교황에게 내가 직접 찾아가면 심각한 결례다. 적어도 이스탄불에 몇 달은 머물면서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하니 일정이 너무 미뤄지겠지.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껏 들떠있는 메흐메트 2세에게 말했다.
“청이 있습니다. 아국이 다시금 연을 맺을 수 있게 도움을 주십시오. 제 동생이 보르하라는 자에게 찾아간다면 파티샤의 대범함을 다시금 칭송할 것입니다.”
“대범함이라? 그렇다면 좋구나. 네 동생이 찾아갈 보르하는 적이 많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음험한 놈이다. 그놈이 자랑할 일이라도 만들어 줘야겠으니 예물의 오분지 일을 로마로 보내면 될 일이다.”
갑자기 이야기가 진행되자 안평대군은 나를 노려봤다. 그렇지만 뭘 어쩌겠어. 한 곳에 종친 두 명이 있어봤자 어색해지고 빈틈만 생긴다고. 차라리 내가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좋지.
이런 음험한 궁전에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로마에 가서 눈길도 좀 비추고 아직 르네상스 이전이니 부족한 회화도 많이 채워주고 그러는 편이 좋지. 그렇게 한 눈을 찡긋하자 안평대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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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2세가 말한 보르하는 현 교황인 갈리스토 3세, 알폰소 데 보르하를 뜻합니다. 메흐메트 2세는 종교 지도자로 여기지 않고 어리숙한 상대로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