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91화 - 대식국 원정(1) >
1458년 1월, 배재당에서 간만에 주연이 열렸다. 이 시대의 주연은 잔뜩 먹고 마시며 취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주안상에는 삭막한 안주만이 놓여 있었다.
나물 무침과 기름을 적게 사용한 메밀부침이 안주의 모든 것이었고. 소주도 기껏해야 한 병만 있으니 첫 순배(巡杯)에서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마시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유제학의 자리에 있는 김반은 한명회에게 술을 채워줬다.
“참으로 대단하네. 나라의 일에 이다지도 도움을 주다니. 주상전하께서 자네를 보시고 얼마나 칭찬을 하였는지 아는가?”
“대군어른께서 혜안을 보이시기에 일이 순탄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제학께서도 이 홍삼이라는 물건을 한 번 드셔 보시지요.”
술잔을 들이켠 한명회가 소매에서 기름종이에 곱게 싸인 물건을 꺼냈다. 붉다 못해 시커먼 색이며 꾸덕꾸덕하게 마른 홍삼을 집어든 김반은 천천히 씹어 넘기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쓴 맛은 줄어들고 달달한 맛이 느껴지니 꿀에 절이면 곶감이라 하여도 모를 것일세. 참으로 오묘한 물건이군.”
“저도 처음 접하고 놀랐습니다. 이미 개성에서는 알음알음 장뇌삼을 쪄서 홍삼으로 바꾸어 팔아대고 있었는데 제가 조금 나서 보았습니다.”
“자네는 호조에 소속된 관리가 아닌가. 개성에서 함부로 움직이기에는 곤란했을 것인데.”
한명회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비록 호조의 관리였지만 상재(商材)를 가진 홍길동과 함께 하니 자신의 재능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리라. 대충 눈치 챈 김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염려하지 말게. 자네가 상재를 보인다 하여도 축재(蓄財)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나라의 일에 도움을 주려 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서 이야기 하여 보게.”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유제학께서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 개성 사람들이 홍삼을 만들 적에는 약재를 증포(蒸包) 하는 찜통의 맨 위에 두어 열기를 적게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홍삼이 널리 퍼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겠군. 단번에 쪄내면 습기를 머금어 숙삼(삶은 인삼)이 될 거라네. 기껏 해야 약재상이 남는 인삼을 비축하는 방도로 쓰였겠지.”
인삼을 숙삼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방법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삶고 물기를 뺀 다음 말리는 과정에 약효가 떨어지니 돈이 부족할 때에 인삼 대용으로 쓰는 정도였다. 한명회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홍길동이라는 상인이 재주를 부렸습니다. 찜통의 중간에 놋쇠로 만든 피리와 비슷한 녀석을 끼워 넣어 피리 안의 물이 끓으면 불을 줄이고 물이 끓지 않으면 불을 세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도술(道術)이나 다름이 없군. 증포라 하여도 오묘한 정도에서 불을 조절한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개성이라 하면 아직도 조정에 역심(逆心)을 품은 고장인데 안 될 일일세.”
김반의 염려와는 달리 한명회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한 생각을 했었지만 의외의 해결책이 등장했으니까.
“작금에 들어 조선 팔도에서 주상전하보다 많은 인삼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조정에서 재배하는 인삼만 하여도 풍년이면 이천 근이 넘어서며 사사로이 재배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인삼이 이천 근이 넘는다 하였는가? 그렇다면 그 많은 인삼을 어디에 쓰는가.”
“명국으로 조공을 바치기도 하며, 왜국에 넘겨 구리를 받아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삼을 홍삼으로 만드는 일을 주상전하께서 송상(松商)에게 일임하셨습니다.”
김반이 상상하지도 못한 이야기이며 유생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무게에 은과 비교해야 할 인삼이 개성의 사람들, 하물며 상인들에게 넘어가다니. 그렇지만 한명회의 말이 이어졌다.
“주상전하께서는 관리를 보내고 증포소(蒸包所)를 만들어 인삼을 쪄내는 과정을 철저히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홍길동이라는 상인이 증포소를 관리하게 되었지요.”
“그러하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군. 기껏 신묘한 비책을 만들었는데 나라의 일이 되다니. 그렇다면 상인들에게 녹봉을 주어 일을 시킨다는 말인가?”
“녹봉 대신 증포를 하면서 끊어지는 잔뿌리나 증포 후에 생기는 진액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귀한 물건이니 송상 모두가 앞을 다투어 증포소에 연줄을 넣으려 하였지요.”
“주상전하께서는 혜안을 보이시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 순배를 돌리고 이만 들어가세! 내일 입신체비를 행하려면 더는 마시면 아니 된다네!”
마지막으로 청주를 들이켠 유생들은 하나하나 숙소로 들어갔다. 그렇게 배재당의 마당에서 뿌듯한 마음에 젖은 한명회의 뒤로 김시습이 다가왔다.
“압구 형님께서 이렇게 모범을 보이시니 제 모습이 하찮게 보입니다.”
“그러한 말은 함부로 하는 일이 아니네. 자네야 말로 송화강을 오가며 연일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어 야인들을 교화하지 않는가.”
“주상전하의 뜻과 다르게 외도(外道 - 바르지 않은 길)를 걷고 있습니다. 야인들에게 유학을 설파하는 일이 불가하니 인근의 설화(屑話)를 모아 불경과 연관지어 강연(講演)을 하지요.”
“그리 하여도 배움이 부족한 야인들에게는 강연(講筵 - 임금이나 세자에게 강론함)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조만간 송화강 일대로 내려갈 날이 되었군.”
김시습이 몸서리를 치면서 주변에 쌓인 눈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해는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2월이 되어 날이 풀리면 다시 송화강으로 올라가야 하니 기분이 좋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호조에 출근한 한명회의 앞으로 호조판서 이인손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인손의 눈 아래가 시커멓게 죽어 있으니 어제 밤을 꼬박 지낸 것이 분명했다.
“혹여나 자네에게 우환(憂患)이 있는가 묻고 싶은데 최근에 집안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어찌하여 제 우환을 물어 보시는지 연유를 알지 못하겠지만 작금에 벌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혼사야 몇 년 뒤에 추진할 일이니 충분한 일입니다.”
한명회의 부모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으니 집안에 우환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이인손은 말을 다 듣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서를 내밀었다.
“이게……. 대식국(大食國 - 아라비아)에 보낼 물품을 준비하라 하다니 연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제가 대월국과의 교역 물품을 준비한 일은 있지만 여섯 나라라 적혀있습니다.”
“예조판서께서 도대체 무슨 연유로 자네를 찾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자네가 좋아할 일이니 자네가 해야 하지 않겠나.”
한명회가 서류를 읽으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대월국은 그렇다 하여도 만랄가(말라카), 천축, 토번, 첩목아국(帖木兒國 - 티무르 제국) 그리고 대식국까지 보낼 품목이 어마어마했다.
“백자 삼백 개, 만화방석(滿花方席) 및 화문석(花紋席) 이백오십 장, 점취(点翠)는 또 뭐고? 여기에 백지와 저포(苧布)라니. 명국으로 보내는 사행품과 비교하여도…….”
“그러니 호조 관원 모두가 며칠 동안 퇴청할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네.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우선 홍삼 일천 근을 만드는 것이 시작일세.”
“홍삼 일천 근이라 하시면 한 해에 소출되는 홍삼의 절반이 아닙니까!”
“어서 움직이게! 또한 평양 형무소에도 다녀와서 품목을 전달하도록 하고! 그리고 홍삼을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꿀에 절여두게!”
바쁘게 움직이는 한명회의 모습을 보던 이인손은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움켜쥐면서 의자가 부서져라 주저앉았다. 예조판서가 말하기를 한명회의 말 때문에 이런 고된 일을 행해야 한다던가.
“저놈은 반드시 대식국으로 보내고 만다.”
물품의 관리를 위해 호조 관원이 반드시 동승하라는 명이 있었다. 진급이 빨라져도 상관이 없으니 저 놈 하나만큼은 반드시 보내리라. 그렇게 호조의 모든 관원들은 한명회의 대식국행을 절실히 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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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준비를 위한 식자재 관련 업무는 나에게 일임되었다. 영양학적 균형이 맞아 떨어지도록 하나하나 품목을 준비하고 가급적 풍토병의 위험이 없도록 모든 일에 안전을 기해야 한다.
그래서 곡식과 같은 주식을 제외한 부식들은 제법 많이 준비했다. 여기에 비상식량으로 사용될 보존식품도 반드시 필요하다.
“대군어른! 미숫가루에는 콩을 잔뜩 넣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염려하지 말고 많이 만들게! 육포는 훈련도감에서 쓰인 육포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되 볕에 잘 말린 다음 대나무 통 속에 넣고 밀랍으로 메워두게나!”
그래서 예전에 만든 페미컨, 훈련도감에서 전투식량으로 시험 지급했던 녀석을 다시 꺼내들었다. 맛은 정말 별로지만 표류와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이거라도 먹으면서 버텨야 한다. 품목도 거의 다 정리되었는데 사람이 뛰어온다.
“대군어른! 상왕전하께서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세종대왕님은 또 무슨 일일까. 일은 거의 다 마무리 되었으니 별궁으로 나아가 오랜 간만에 세종대왕님께 인사를 올렸다.
“나라의 일이 참으로 바쁜 모양이더구나. 네 중부를 이렇게 아끼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토번(티베트)에는 설표가 산다 하였는데 설표는 장백산(백두산)보다 높은 봉우리에 사는 짐승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산을 오르실 중부님과 구(임영대군)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눈치를 보니 효령대군이 세종대왕님을 찾아와서 하소연을 한 모양이었다. 세종대왕님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연못을 바라보았다.
“효령대군의 욕심이 이러한 일을 불러왔지만 네 행실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러니 주상을 보좌하여 아국을 널리 알리고 나라의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여라.”
“대식국으로 나아가 교역을 행하자 하시니 제가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상을 살며 머나먼 나라를 오가니 고난보다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당장 세종대왕님의 배다른 형제들, 내 숙부님들이 외교를 위해 명나라를 수도 없이 오갔었지.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세종대왕님이 폭탄 같은 말을 시작했다.
“그렇다 하여도 작금의 주상은 너무나 이문에 얽매여 있다. 이를 직접 말하면 주상의 뜻을 어지럽히는 일이니 도저히 말할 수 없구나.”
“이문에 얽매여 있다 하셨사옵니까. 아바마마의 뜻은…….”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왜구를 토벌하고, 총통을 비롯한 병기를 만든 일을 이어나가는 것과 같지 않느냐. 이러한 일이 계속되면 중요한 일을 놓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소름이 돋았다. 형님의 치적 가운데 사회 구조의 혁파나 각종 법률 제정 등의 공공(公共)의 일을 제외한다면 문(文)보다는 무(武)에 비중이 높으며 최근에 들어서 더욱 심해졌다.
세종대왕님은 비록 군사에 치중하였지만 수많은 제도를 정비하고 모든 측면에서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형님의 정책을 세종대왕님의 눈으로 보면 부족한 측면이 많겠지. 그렇게 세종대왕님이 훈민정음을 들어올렸다.
“정음은 나와 종친들이 힘을 써서 만든 글이니라. 네가 말하기로는 나라가 쇠하고 천 년이 지나가도 남을 것이라 하였으나 정음이 퍼지지 않으니 한스러운 노릇이구나.”
“정음은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북방의 야인들도 정음으로 불경을 배우지 않습니까.”
“이미 그러한 말은 들었다. 김시습이라는 젊은이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서책이 너무나 비싼지라 책을 다섯으로 나누어 다섯 명이 돌려 보게 하여도 부족하다 하더구나.”
그렇지. 인쇄술이 발달하면 뭘 하나 종이의 가격이 비싸다 못해 하늘을 찌를 정도인데. 먹물을 머금을 수 있는 질 좋은 한지로 만든 서적은 한 권에 쌀 세 말 가격이 넘어간다.
지금까지 편하게 살아와서 상상하지도 못했다. 종이가 필요하면 필요한대로 사용하고 버리는 일이 잦았는데 현실은 다르다. 다시 세종대왕님의 말이 이어졌다.
“너를 시작으로 하여 이 나라의 관료와 백성 모두가 머나먼 이국(異國)과 교류를 하는 일은 좋다. 하지만 이를 축재와 무력에 사용한다면 성한 나라가 될 수 없느니라.”
하나하나가 뼛속 깊숙이 박히는 말이다. 처음 입신체비서를 만들고 도입시킬 시절에는 사상을 변화시키고 조금이라도 더 실용적인 면모를 보이려고 했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어느 순간부터 만족하고 무력에 치중하고 있던 나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것과 같았다. 그만큼 세종대왕님이 형님과 나에게 거는 기대는 엄청나다.
“아국은 이미 달자를 몰아내 북방의 영토를 굳건히 지켜냈으며, 왜국과의 통교를 이어나가 한동안 평안할 것이다. 그러하니 부족한 점이 있다면 네가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세상 여러 나라를 돌아보며 아국의 부족한 점을 채울 것을 마련하겠사옵니다.”
인사를 올리고 돌아왔다. 원정이 코앞에 닥쳐왔는데 세종대왕님을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형님에게도 말하기 힘든 것이니 내가 해결해야 하리라.
결국 출항일이 다가왔다. 1458년 2월 25일은 아마 조선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서역 방문의 시작점이 되리라. 형님은 마지막으로 관원들을 돌아보며 하나하나 손을 잡아줬고 얼떨떨한 모습의 한명회도 보인다.
“방패선은 먼저 출항하였소?”
“그렇습니다. 관찰사로 임명된 훈련도감과 화기도감 병사들을 대양도(大陽島)로 수송하고 혹여나 원하는 이가 있다면 대양도에서 노련한 병사를 사행에 포함하여 데려갈 예정이니 말입니다.”
대만의 새 이름은 대양도로 정해졌다. 형님이 이름을 지어놓고 이미 연락을 보내 모든 물자를 준비했으니 첫 일정은 쉽고 편안하리라. 그렇게 방길주와 함께 함대를 보고 있으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함대가 스물다섯 척이라니 태감 정화의 분견대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겠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방패선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함선입니다. 짐작하건데 당시에 쓰인 호위선 두 척이 덤벼도 쉽사리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급적 전투는 피해야 하지 않겠소. 도감군이 아무리 강대하여도 천 명에 불과하니 일이 틀어지면 곤욕을 치룰 것이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해구(海寇)가 강성하다 하여도 조운선보다 못한 배가 전부이니 화포를 끼얹어 주면 충분할 것입니다.”
무력 측면에서는 방패선 열 척이면 차고 넘친다. 오십 년 뒤에 일어나는 디우 해전에서 맘루크 술탄국의 함대의 전투선은 지금 대방선보다 훨씬 부족한 카락과 캐러벨에 무참히 학살당했던가.
화포도 장착하지 못하는 놈들이 활이나 쏘고 배로 난입하려 하겠지만 접근했을 때 불붙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던져 넣으면 그걸로 끝이다. 물론 이건 해상전의 이야기고 육지에서 싸우면 수적 열세로 전투도 벌이지 못하겠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던 소리가 멈추고 형님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이번 원정에 종친 네 명이 끼어들어 여섯 개의 나라를 방문하니 거국적인 일이 따로 없지.
“오래 전, 전조 고려는 대식국과 천축을 비롯한 수많은 이국(異國)과 교류하고 풍속을 나누게 되었다. 이러한 흔적이 아국에도 남아 있으니 회회교(回回敎 - 이슬람교)를 비롯한 이들이 아니겠느냐.”
엄밀히 따지면 원나라 시절에 흘러 들어와 조선에 머물게 된 아랍인들의 후손이지만 별 상관이 없었다. 실제로 조정에서 일하는 이슬람교 출신들은 모두 메카 방문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아국은 상국인 명나라에게 왜구를 소탕하고 주변을 평안하게 함선을 만들고 병사를 양성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렇게 대양도와 대월국을 오갈 길이 열렸으니 이러한 길은 전조 시절에도 열렸던 길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실제로는 아랍인들이 무역을 위해 몇 번 오고 간 것이 전부지만 그런 일을 상세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축재(蓄財)를 목적으로 하면 상인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종친을 시작으로 하여 전조의 혼란한 시절에 끊어진 흐름을 되돌리고. 아국이 머나먼 대식국과 통교(通交)하는 일을 원하고 있노라. 수양대군은 명을 받들라!”
형님에게 절을 올린 다음 함선에 올랐다. 혹시나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종친들 모두가 나눠서 함선에 올라탔다.
그렇게 벽란도를 떠나 대만으로 향하는 일정은 매우 쉬웠다. 그냥 중국 연안을 따라 함대가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8일의 항해를 마치니 대만이다.
현대에서 타이베이로 여행을 온 경험이 있었지만 나를 맞이하는 것은 수많은 원시림과 이곳저곳에 만들어진 논과 밭, 그리고 관찰사로 일하는 김수연이었다.
“식량은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배 위에서 물을 끓이기 번거로우시니 찐 쌀과 찐 보리를 준비해 두었으니 어서 선적하시지요.”
“참으로 훌륭하구려. 그러고 보니 섭호군 홍윤성은 있소?”
“홍윤성은 병사의 조련에 한창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형님이 그렇게나 아끼는 인재가 홍윤성이다. 홍윤성을 오랜 간만에 뵈니 나와 사이가 소원했던 것도 무색하게 양 팔을 휘적거리면서 뛰어왔다.
“대군어른을 오랜 간만에 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뵙고자 하였으나 나라의 일이 바쁜지라 도통 돌아갈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네 눈썹은 어떻게 된 건가.”
“나라를 위해 없애버렸습니다.”
홍윤성의 눈썹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굵고 두터운 눈썹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벌레가 갉아먹은 마냥 얇고 이곳저곳이 사라진 눈썹에 먹을 바른 흔적이 역력했다.
제발 묻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기에 본론으로 돌아갔다. 화상자국은 없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문제는 아니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셨네.”
“명이라 하셨습니까!”
“아이고 깜짝이야! 자네 뭐 잘못 먹었나? 뭐 이리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웃는 것인가?”
우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 꼬리가 올라가는 홍윤성의 모습을 보자 소름이 돋아왔지만 형님의 명은 명이니까 전달해야지. 그렇게 교지(敎旨)의 봉인을 풀고 전달했다.
“주상전하의 명은 대군어른을 호위하여 대식국으로 다녀오면 권절 대감의 뒤를 이어 훈영절제사로 임명할 것이며. 원하지 않으면 대양도에 삼 년간 머물게 된다는 명이십니다.”
“그러하다네. 훈련원(訓鍊院)휘하의 훈련도감과 화기도감이 있으니 권절은 훈련원 지사(知事 - 정2품 관직)로 부임하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절제사가 되면 국난(國難)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전선에 나갈 일이 없으며 달자들은 내전을 벌이니 변방으로 나설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 예상대로면 일본과 한 번 싸울 것 같기는 한데 그걸 지금 말해줄 이유는 없다. 홍윤성은 전설적인 훈련도감 1기생이며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전선을 뛰어다니는 인간백정이니까. 원정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껏해야 배를 타고 외국을 돌아보다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 같이 나일 강도 보고 피라미드도 보고 콘스탄티노플도 보고 메흐메트 2세도 만나고 오자고. 그렇게 홍윤성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러하면 잘 부탁하네. 다른 일은 모르겠고 대식국까지 나아가는 길에 목숨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군어른을 모시고 대식국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하온데 기한은 어느 정도가 걸리겠습니까?”
“일 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라네.”
일 년 조금 더 걸리겠지. 그러나 웃고 있는 홍윤성에게 해 줄 말이 없었기에 잠자코 일행에 합류시켰다. 나중에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