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50화 (150/573)

< 2장 88화 - 수양대군은 일을 만들어서 한다(3) >

1457년 8월, 한가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효령대군의 사저로 향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천축행을 논했는지 알 방법이 없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겠지.

“중부님! 제가 왔습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구나. 안으로 들어오너라.”

효령대군은 승려보다는 불교에 심취한 불학(佛學)자에 가깝다. 그렇게 방 안에 들어가니 언문으로 번역한 서적과 각종 불경 심지어 내가 찾아보지도 못한 고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중부님께서는 올해 진갑이신데 어찌 천축으로 가려 하시는지 알 겨를이 없습니다.”

“다른 일이 아니고 석씨(불교를 속되게 부르는 말)의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다.”

“아바마마께서도 중부님을 설득하셨다 하였습니다. 하오면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눈빛을 보니 천축으로 가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으니까 어명을 내려서 못을 박는 방법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효령대군도 형님도 모두 상처만 남는다. 다른 방법으로 말리자.

“아무리 새로운 선박인 대방선과 방패선이 크고 튼튼하다 하여도 험난한 바다를 건너 한 달이 넘게 항해하여야 될 일이 아닙니까.”

“네가 보기에는 내가 쉽사리 죽을 몸 같더냐? 어지간한 장정보다도 몸이 좋다 자신하고 있건만. 그리고 주상께서도 분명히 천축으로 나아가 교역을 행할 작정이 아니더냐.”

효령대군의 몸을 보자면 불가능하다고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여국강이 삼대 운동을 육백 근은 해야겠지. 그런데 굳이 천축이라고 말 한 것도 이상하다. 지금 천축에는 불교가 없잖아?

“제가 알기로는 신라 시대에 혜초(慧超)를 비롯한 승려 여럿이 다녀왔지만 이후로는 소식이 끊겼습니다. 중부님께서 천축으로 향하서도 잊힌 경전만 들추고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천축에는 불자가 없고 인도교(印度敎 - 힌두교)가 성한다 하였다. 그렇지만 근방에 불자가 성한 곳이 있지 않느냐.”

“근방에 달자가 성한 곳이라 하면 처음 들었습니다.”

설마 아닐 거야. 인도조차도 버거운 판국에 더욱 끔찍한 곳을 지목하지 않겠지. 억지로 모르는 척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효령대군에 입에서는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나왔다.

“토번(吐蕃 - 티베트)에서는 조선과 명나라와는 전혀 다른 불자들이 기거하고 있다 하였다.”

“그렇다 하여도 너무나 멉니다. 근방에서는 토번의 불경을 아는 이도 없는데 어찌하여 중부님께서 토번으로 향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토번의 불자들이 천지사방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당장 나의 사저에도 한 명 있고 북방에는 수도 없이 많다. 마심아 거기 있느냐?”

변발을 해서 아직 머리가 충분히 자라지 않은 장정 하나가 어설픈 상투를 두건으로 감싼 채 방으로 들어왔다. 왼눈에 안대를 두르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눈치를 살핀다.

“일전에 하르빈에서 포로로 잡아온 자인데 내 노비로 삼았다.”

“노비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와라부(오이라트)의 병사가 아닙니까?”

등에서 오싹하고 소름이 돋아 올라왔다. 여진족이 통속적인 불교를 믿는 것과 달리 몽골은 티베트 불교를 믿으니까. 오이라트라면 이슬람교를 믿겠지만 이 병사는 오이라트 세력권에 있는 몽골 병사임이 분명하다.

“주인님께서 어찌하여 저를 부르셨습니까?”

“네가 자주 하던 말이 있지 않느냐. 조선의 승려는 만다라(曼陀羅)를 그리는 일이 없고 불상의 형태도 다르며 그……. 무엇이더라? 종파가 뭐라 하였지?”

“겔룩빠입니다.”

인도만 다녀와도 험난한 여정인데 티베트 불교의 성지까지 찾아가려면 히말라야 산맥을 통과해야 한다! 현대로 따져도 미친 짓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정말 미친 짓이다.

“이는 나의 만용이 아니며 사소한 욕심도 아니다. 네가 훌륭한 불자이기에 나도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가 부끄러웠다. 만약 네가 나라의 일이 바쁘다면 나 혼자 보내도 족하다.”

종친의 큰 어른을 홀로 보낸다니 그게 말이나 되나! 여기에 내가 훌륭한 불자? 가만히 있기가 부끄러워?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방법이 없으니 물어나 보자.

“저는 그저 시주를 행하며 욕심을 억누를 뿐입니다. 중부님께서 이다지도 저를 아끼시니 제가 낯을 들 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아직도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이냐? 모든 일을 부처의 가르침대로 인연(因緣)으로 묶어주고 있지 않느냐.”

지금까지 사치도 부릴 마음이 들지 않아서 그냥 인맥이 닿은 절에 시주만 하고 불사만 해왔었다. 쌓여가는 재산을 합당하게 처분할 방법이 필요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연희당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나라의 일에 사유 재산을 사용해서 눈총을 받을 일이니까 여기저기에……. 내가 사찰 몇 개에 시주를 매년마다 보냈지?

“네가 시주하는 사찰만 하여도 열두 곳이 넘지 않느냐. 재산을 쌓기로 작정하였으면 궁궐을 만들어도 될 정도이거늘 한 해에 오백 석이 넘는 미곡을 보내지 않았느냐.”

“그, 그저 제 몸을 본뜬 사천왕상이 손상되지 않도록 애를 썼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만들 적에 값진 나무를 썼으니 이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철령 전투에서 정신적 충격을 심하게 받은 덕분에 한동안 전국의 사찰을 오가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많은 도움을 받아서 시주를 듬뿍듬뿍 했었지. 그리고 그냥 시주를 계속 해왔고!

“말 한번 잘했다. 불자들을 괴롭히려는 이들이 네 모습을 본뜬 사천왕상을 보고 뭐라 하는지 알더냐? 거유(巨儒 - 이름난 유학자)께서 인연을 맺은 곳이니 함부로 손 댈 수 없다면서 돌아간다더라.”

“정녕 사실입니까!”

“네가 사천왕상을 시주할 적에 고안한 기책(奇策)이 아니더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찰에서 웃옷을 벗어던지고 하루 종일 서 있는 기행을 생각 없이 했다고?”

난 정말 생각 없이 했다. 하지만 나를 본뜬 사천왕상이 어느 순간부터 불교를 수호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나의 사소한 행동으로 불교문화가 근육적으로 뒤틀려버릴 지경에 놓였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꾸자. 모든 일은 우연이며 내 의도가 들어가지 않았고 나는 적당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겸손하고 오만하지 않게.

“인연이라 하여도 스스로 움직인 일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신미는 자신의 재능으로 주상전하의 신임을 얻었으니 저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 전부입니다.”

“불공을 올리던 신미가 네 덕분에 왜국으로 나아가 공을 세웠다. 인(因 - 직접적인 힘)은 네가 만든 것이 아니겠느냐. 덕분에 신미가 무엇을 행했느냐.”

“경전을 정음으로 번역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상왕전하께서 계실 적에는 억불(抑佛)이 극에 달하여 공식적인 사찰이 36개만 남았다. 그런데 작금에 들어 신미를 시작으로 도성 출입이 허가된 승려가 몇 명이나 생겨났다.”

형님은 억불 같은 사소한 일에 힘을 쏟느니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던지 간에 나라의 일에 도움이 되면 적극적으로 지지했었고.

하지만 역사를 아는 나와는 달리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내 행동 하나하나가 불교의 숨통을 틔워주는 것으로 여기리라. 효령대군은 석보상절, 원래 역사에서는 수양대군이 집필하고 여기에서는 신미가 집필한 책을 들어보였다.

“이미 신미가 경전을 정음으로 언해(諺解)한 것이 북변으로 나아가 야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모르느냐. 덕분에 정음을 배워 불경을 읽으려는 야인들이 생겨나고 있다.”

“정음을 배워 불경을 읽는다고 하셨습니까?”

“야인들에게 그만큼 절박한 것이 불경이었느니라. 이미 흑룡사의 말사(末寺 - 분가하여 나온 절)가 다섯 개나 건립되었다.

흑룡사에 말사가 생기고 불경을 통해 정음을 가르친다고? 이게 무슨 종교를 통한 민족흡수인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자 효령대군이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다.

“어느 누가 북변까지 나아가 불자들을 아끼려는 마음을 가지겠느냐. 나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네가 과감하게 나서서 주상을 설득한 것이다.”

“흑룡사의 설립은 그저 옛 사람의 일을 따라서 행한 것입니다.”

“흑룡사의 이야기가 나오니 잘 되었구나. 천 년 가까이 묻혀있다 세상에 나온 영험한 불상인지라 강 건너의 달자들도 불공을 드리고 돌아간다 하더구나.”

나는 그저 해서여진의 정신적 통합과 주변 안정을 위해서 위패를 봉안할 시설을 만들었을 뿐인데 어느새 국제적인 사찰이 되었다!

“그렇다면 흑룡사에서는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설마 달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경을 논한다 하였는지요.”

“그렇다. 본래 나라에서 일을 하는 신미에게 자문(諮問)을 청하였는데 신미도 모르는 일이었고. 가장 많은 서적을 읽은 나에게 넘어왔다가 일을 알게 된 것이다. 다른 일은 몰라도 마심이의 말을 들으니 분명해 보이는구나.”

효령대군의 생각도 이해는 간다. 조카가 수많은 사찰에 시주를 올리고 사찰을 암묵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불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시킨 위업을 만들었다. 여기에 사찰도 세웠지.

더 이상 조선 팔도에 건립이 불가능한 사찰을 세웠으니 억불의 시대에 숨통을 틔워준 위인이었다. 유학자들이 공격하지 않는 이유? 입신체비서로 근육을 퍼트리고 있으니 공격해봤자 근육적으로 반격당해서 그렇지!

표정이 일그러지다 못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데 효령대군이 내 어께에 손을 올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야, 네가 지금까지 불자로서 행한 일은 세상 어느 누구라 하여도 쉽사리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이 중부에게는 숨기지 않고 낱낱이 말하여도 좋을 일이구나.”

“이 모든 일이 인과와 인연에 따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느닷없이 골수 불교도가 되어버려서 황당하다 못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으니 효령대군이 본론을 말했다.

“나의 욕심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토번의 남쪽에 있는 천축으로 향하여 가르침을 받고 승려 가운데 몇 분을 조선으로 들이고 싶구나. 그리하면 달자들도 아국을 함부로 여기지 못할 것이다.”

“중부님 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종친 가운데서도 으뜸이나 다름없으신 분이 제자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예끼! 제자가 아니고 배움이다. 내가 언제 출가(出家)를 논한 적이 있더냐? 그저 학자의 마음으로 배우고 가르침을 전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지.”

가만히 생각해 봤다.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도착은 효령대군의 체력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소모기간은 인도 왕복과 효령대군이 배우고 사람을 찾는 일을 합쳐서 1년 정도 걸리겠지.

장점도 충분하다. 티베트 불교가 있다면 몽골인의 호감을 얻을 수도 있고 마찰도 방지할 수 있으며. 훗날에 뛰어난 칸이 나타나 몽골을 통합한다 하여도 종교적 명분을 선점할 수 있으니까.

“그러하면 언어가 문제입니다. 기껏 토번까지 가셨는데 말이 통해야 하지 않습니까.”

“범어(산스크리트어) 정도는 쉽사리 읽고 쓸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논리적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고 물리적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정했다.

“중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머나먼 일이 될 것이고 오롯이 토번에만 들린다면 소득이 없을 것이 분명하니 중간에 헤어져야 할 일이지만 방도가 없습니다.”

“내 고집이 너를 움직인 것이니 불편한 일 정도는 참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종교적으로 설득당하고 말았으니 형님에게 말을 꺼내야겠다. 궐로 돌아가 형님과 입신체비를 빙자한 면담을 시작하자 형님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들어 상소문이 몇 번 올라오긴 하였지만 모두 되돌려 보냈느니라.”

“상소문이라 하면 제 행실에 대하여 논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사찰의 사천왕상이 모두 종친의 몸을 본떠 만들었으니 벌을 내리라는 내용이 있었지만 함부로 산사(山寺)를 찾아가는 일이 그릇된 것이라 하였지.”

형님도 내가 독실한 불교도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 덕분에 효령대군이 이렇게 행동해 버렸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렇게 독실한 불자가 아닙니다.”

“물론 알고 있다. 내가 불자들을 다루는 일은 모두 네 행실을 보고 배운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하지만 세상일은 남의 시선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제가 입신체비서를 만들었지만 세상 사람들이 저를 불자로 여긴다니 우스운 노릇입니다.”

“괜찮다. 그러고 보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여겨지는구나. 대식국이라 하면 듣기로는 강성한 곳이라 하였는데 연을 맺는 것도 괜찮겠지.”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대식국? 하긴 인도까지 항해한 입장에서는 별로 먼 거리도 아니긴 하지. 생각해 보니 티베트에서 효령대군이 지식을 쌓는 동안 따로 할 일도 없다.

“여국강은 본래 대식국(아라비아)까지 항해를 해본 경험이 있으니 효령대군을 토번으로 보내 배우게 하고 남은 시일을 대식국까지 오가면 충분할 것이다.”

“하오면 제가 효령대군과 함께 토번으로 다녀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은 방도가 없지 않느냐. 네가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결국 천축행 확정, 히말라야 산맥 종단 확정, 티베트 왕복 확정, 아라비아 반도 도착 확정이다. 그러고 보니 흑우 고향이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제법 가까운 동네던가.

“그렇다면 행로를 정하고 타요완 일대를 오가던 선박 가운데 일부에 호위를 붙여 대월국(베트남)과 교역을 행하는 일이 급선무이가 아니겠느냐.”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하면 설마 대월국에도 제가 가는 겁니까?”

“아니다. 대월국에 네가 갈 일은 없으니 안심하여라. 이미 새로운 인재들이 차고 넘치는 실정이니 서적을 구해 훗날 행할 일을 준비하여라.”

천만 다행이도 베트남까지 항해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천축행은 아니다. 그렇게 형님이 일정을 잡아나가는 도중에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로마의 후예라 자칭하면서 코스탄티니예로 만든 시기가 아마 이 시기일 것이다! 사신이라 하면 지방 도시에 찔끔 나타나서 편지만 전하고 사라지는 무례는 범할 수 없다.

“아……. 안 돼! 이스탄불까지 가야하다니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효령대군이 나에게 신선하고 거대하며 절대 떼어낼 수 없는 거대한 엿을 먹였다. 졸지에 천축까지 갔다가 이스탄불을 찍고 돌아오게 생겼다. 이건 절대 안 된다! 결사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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