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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146화 (146/573)

< 2장 84화 - 타요완 원정(3) >

타이야족 청년들이 잡담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만 아는 숲길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으로 싸움을 벌였을 때에는 자신들도 불벼락과 천둥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니 숲 밖으로 나가지 않고 불편한 생활을 이어왔다.

“하얀(조선인의 피부색을 보고 붙인 말) 놈들은 독하기도 하지. 이제는 숲을 그냥 밀어버리려고 하는데? 지난번에 산불을 놓았던 일 모르나?”

“그런데 비가 내려서 시도도 못하지 않나. 하나하나 베어나가자면 몇 년이 걸릴 일인데 그동안에 지쳐서 돌아가겠지.”

“평지에서만 싸우지 않으면 된다고. 그놈의 불 뿜는 막대기랑 불을 쏘는 수레를 쓰지 못하잖아?”

그러니 방법을 찾았다.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고 숲 속에서 자신들만이 아는 길을 따라 놈들의 뒤를 공격하고. 정찰을 나온 자들을 포위해서 급습하는 방식을 택하니 손해는 있었지만 싸우기는 편했다.

“예전에 다른 하얀 놈들이 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않았어?”

“아랫놈(평보족, 산이 아닌 지역에서 사는 원주민을 칭함)들이랑 어울리던 놈들? 옛날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돌아올 줄은 몰랐어.”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수십 년 전에도 물에서 건너온 하얀 사람들이 있었고 성질이 온순하고 싸움을 하지 못했다. 온건한 평보족과 어울린 자들도 있었지만 자신과 같은 고산족(高山族)과는 친해지지 못했다.

당연히 자신들과 다른 부족이니 목을 베어 성인식을 치렀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습격하니 견디지 못하고 물을 건너 도망가서 자취를 감췄다. 타이야족은 도망간 자들이 돌아온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요 며칠 조용하지 않아? 나무를 베러 오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니 수상한데.”

“더워서 그러는 거 아닐까? 더우면 옷을 벗을 것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수풀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자신이 내려왔던 길과 다른 수풀이 생겨나 있었다. 수풀 안에서 창날이 튀어나와 한 청년의 배에 박혔고.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타야이족 청년들은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지려고 하였다.

“지금이다! 모두 죽이고 한 놈만 살려둬라!”

신호와 동시에 사방에서 초록색으로 몸을 물들인 병사들이 튀어나와 타이야족의 정찰병을 순식간에 베어버렸다. 놀라서 벌벌 떨던 한 명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뭐야! 니들 뭐야!”

“말 알아듣지 못하니까 마을로 안내해라. 안 그러면 네놈을 발가락 끝부터 저며 버리겠다.”

눈앞을 메운 자들의 몸을 보자 숨이 막혀왔다. 옷을 벗고 있으니 자신 따위는 말린 나뭇가지로 보일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홍윤성의 미첨도가 내리 찍히며 손가락 세 개가 잘려나갔다.

“내 손! 말 알아듣지 못하니까 뭘 원해!”

홍윤성이 바닥에 집과 같은 형태를 그리자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대놓고 마을로 안내할 수 없었기에 사냥을 하는 골짜기로 안내하기로 마음먹고는 중간에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주변에서 사냥을 하던 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놀라서 달려왔다.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데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손은 또 무슨 일이야? 어디 놈들이 쳐들어왔어?”

“아니 하얀 놈들이 초록색이 되었는데 뒤에 없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지만 자신의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설마 마을로 향하는 길을 찾아냈다는 말인가?

“하얀 놈들이 초록색이 되었다는 말은 또 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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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엿을 먹이려고 해? 작은 길이야 구분을 못하지 바로 옆에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모를 줄 알았나봅니다?”

“지식이 없으면 얕은꾀를 쓰기에 마련이지.”

도감군의 어설픈 눈으로 보기에도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 많이 다닌 산길이 있기에 천천히 뒤로 빠져서 다른 길을 따라갔다. 그렇게 마을 근처에 와서는 초병(哨兵)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저게 마지막 한 놈인가 보군. 조를 이루지 않았으니 처리하기는 쉽지.”

“길을 이상하게 안내한 놈도 그렇고 초병들도 그렇고. 역시 제대로 배우지 않은 놈들은 쓸모가 없습니다.”

어설픈 초병 행세를 했지만 완벽한 위장을 갖춘 도감군을 발견할 방법은 없었다. 여기에 참가한 여진족들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마지막 초병이 튀어나온 여진족에게 목이 졸리고 배에 칼이 꽂혀서 바닥으로 무너졌다.

“고함친 놈은 없으니까 들키진 않았겠군. 이제 댁들도 방법을 배우시게나.”

“그런 일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요?”

“사람을 쑤셔 죽이는 일은 댁들이 더 잘 알지 않나? 서로 배우면서 사는 것이지.”

건주위 출신 여진족이 활에 활줄을 걸면서 말을 흐리자 홍윤성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감군 백 명에 여진족 오십 명이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일은 거의 끝났다.

“대략 일백호가 조금 넘습니다. 한 호마다 병사가 둘 정도 있다 하면 이백 정도가 뛰쳐나오겠군요.”

“놈들이 뭘 하고 있나?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보지.”

홍윤성이 천리경을 들어 살피자 화전을 일궈 거둬들인 곡식으로 죽을 쑤고, 사냥해온 산짐승을 해체하며 베틀을 돌려 옷감을 만드는 일이 정말로 평범한 마을처럼 보였다. 홍윤성은 그런 태연한 모습에 이를 갈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만히 살면 복속시켜서 혜택을 주려고 했는데. 저렇게 평범하게 살면서 그놈의 관습을 버리지 못해?”

먼저 복속을 청한다면 조선에서도 충분한 배려를 했으리라. 그러나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으니 지금 복속을 청해도 비참한 꼴이 되리라. 홍윤성은 뒤를 돌아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하달했다.

“다들 계획대로 조를 나눠서 짓쳐 들어가도록. 보총수는 없으니 경원부에서 온 분들이 활로 지원사격 좀 해주시오.”

“염려하지 말게. 마을 안에는 나무가 별로 없으니 충분히 쏠 수 있어.”

“각궁은 쓸모가 없어졌는데 댁들이 쓰는 활은 멀쩡할 줄 누가 알았겠소.”

병사들이 마을 사방을 포위하는 와중에도 청년들이 족장 앞에 모여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족장은 이틀 전에 베어온 목 두 개를 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상투를 밧줄로 꿰어 처마에 걸었다.

“하얀 놈들의 머리를 두 개나 베어왔으니 성년으로 인정해주마.”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놈들아, 저렇게 베어놓은 풀이 굴러다니게 두면 어떻게 하느냐!”

“풀을 베어왔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룩덜룩한 초록색의 덩어리들이 사방에서 움직였다. 족장의 늙은 눈으로 보니 덩어리가 굴러오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청년들의 눈에는 분명 사람의 형태로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청년이 손도끼를 뽑으며 외쳤다.

“초록색 놈들이다! 아니다! 하얀색 놈들이 쳐들어왔다!”

“밖에서 보초 서는 놈들은 뭐했어!”

근처의 마을 두 개가 습격당한 일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적들이 다가왔다면 맞서 싸우는 일 외에는 답이 없었다. 족장은 허둥거리는 청년들에게 고함을 쳤다.

“숫자도 얼마 안 되니까 도망 가지마라! 맞서 싸워!”

“하얀 놈들이 초록색으로 몸 칠했다고 강해질 줄 알았나!”

“여기는 주변 사람들 다 받아들여서 싸울 줄 아는 사람만 삼백이 넘는데!”

욕설을 내뱉으며 마을 구석구석에 있는 병장기들이 하나씩 손에 쥐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의 마을이 불탄 이들이 호기롭게 앞으로 나서 굴러 들어온 목을 베어버리려고 달려들었다.

마을을 공격하는 도감군과 여진족은 백 오십이 전부였지만 분노에 차서 달려들었다. 선두에 나선 병사가 상대를 원패로 두들기자 어설프게 만든 칼은 부러지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많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와 비명소리만 연신 들려왔다. 애초에 이들이 정면에서 싸워 도감군을 상대로 승산을 거두려면 다섯 배가 있어도 부족한 일이었다.

“화살 날아온다! 방패수 막아!”

“지금까지 숲속에 숨어서 화살을 피했지! 네놈들의 몸이 아주 훤하게 보이는구나!”

방패수가 앞으로 나서 화살을 막아내는 사이 협공이 들어왔다. 몇 명이 방패수의 비어있는 하반신을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장창수가 자연스럽게 창으로 찔러 죽였다. 사방에서 타이야족의 화살이 계속 날아왔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여진족들이 아니었다.

“저기 활 쏘는 놈들이 있소!”

“그딴 놈이 활이냐! 활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여진족 출신 병사가 활을 당겨 적의 궁수들을 노려 쏘았다. 조선에서 가져온 각궁은 습기에 아교가 풀려 못 쓸 물건이 되었지만 만주 특유의 거대한 활은 아교를 쓰지 않았기에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기껏해야 전열에 선 방패수에게 화살을 쏘아대던 타이야족 궁수들이 훨씬 멀리서 날아온 화살에 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을 끝으로 조직적인 저항이 사라지고 일방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빠지질 않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맞아라!”

도감군도 간혹 실수를 저질렀다. 휘두르던 환도가 집의 기둥에 박혀 빠지지 않자 원주민이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손도끼를 치켜들었지만 몸 자체가 흉기이기에 도감군은 당당히 어깨를 내세우면서 달려들었다.

말에 치인 듯이 날아간 원주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부상을 입은 자들은 집으로 숨어들었지만 놓칠 이유는 없었다. 밖에서는 저항하는 자가 없었으니 고참병은 여유를 부리면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 열어! 도감군이 왔다!”

문을 거세게 걷어차 부수자 입에서 피를 흘리는 타이야족 남성이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도감군 고참병은 주먹을 꺾으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초록색 괴물이다!”

“야 이 개놈의 새끼야! 어디서 집 안에 숨어! 너 같은 놈은 역차던지기(자이언트 스윙)를 당해야 쓰겠구나!”

철령 전투를 경험한 고참병은 수양대군이 했던 내수린을 떠올리면서 상대의 발목을 잡고 집 밖으로 끌고 나가서는 마구 돌리다 사정없이 던졌다. 상대적으로 비쩍 마른 타이야족 청년은 짐짝처럼 날아가 버렸다.

여유를 부리는 고참병의 모습에 다른 병사들도 흥미가 생겼는지 몇 번 정도 보아온 내수린의 기술을 따라해 봤다. 내수린을 행할 적에 말했던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마시오.’ 라는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것이 질식투(초크슬램)다!”

접수 개념도 모르며 단련된 몸을 가지지도 않은 자를 완력으로 사정없이 내리찍었으니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피를 토했다. 등골이 박살나 기절한 자를 보면서 도감군이 치를 떨었다.

“일전에 내수린을 보니 질식투 따위는 몇 번을 받아도 일어서는 이들이 있는데 역시 몸은 단련하고 볼 일이구나! 앞으로는 유생들의 입신체비도 행해야지.”

무언가 이상한 편견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남아 있는 자들이 끌려 나오고 포로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기 시작했는데 끌려오면서 계속 두들겨 맞는 자가 있었다.

“그만! 그만! 노인은 죽이지 마라! 우리가 피에 굶주린 놈들도 아니지 않느냐!”

“이 새끼가 족장 같습니다!”

홍윤성의 눈이 커지면서 끌려오는 노인을 보았다. 병사들이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자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던져놓았고. 복식이 제법 화려한 것이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나?”

“이놈 집의 처마에 목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럼 족장 맞네. 뭘 빌어 이 개새끼야! 사람을 죽이면 몰라도 목을 베어가서 쌓아놔? 왜구들도 달자들도 그런 미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냥 뒈져!”

홍윤성의 미첨도가 족장의 목을 그어버리고 몸통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홍윤성이 잠시 생각을 이어나가다 바닥에 침을 뱉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했다.

“지금 죽은 새끼들 다 꺼내 놔라. 이놈들은 목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니까 목을 떼어놓지 않으면 시체의 목을 들고 다른 놈들에게 찾아갈 놈들이 생길 것이다.”

“기왕 목을 따낼 것이면 팔다리도 베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놈들에게 경고의 의미를 전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흉측한 몰골이 좋지 않겠습니까?”

홍윤성도 생각해보지 못한 참신한 방법이었다. 광장에 장작이 쌓여 불이 올라오고 비어있는 집들에도 불이 붙었다. 혹시나 산불이 번질까 염려하였지만 삼일 걸러 하루마다 비가 오는 곳이니 별 문제는 없으리라.

그렇게 마을이 불타오르는 와중에 도감군의 길 안내를 하던 청년의 무리가 돌아왔다. 돌아오는 사이 이슬비가 내리면서 불이 꺼졌지만 마을의 풍경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은 불탄지 오래고 장작더미 안에는 두개골들이 쌓여 있었으며 주변에는 버섯이과 같이 팔다리들이 손과 발을 하늘로 올린 채 묻혀있었다. 주변을 살피니 유일하게 불에 타지 않은 집에서 고통에 겨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정신 차려! 지금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한 거야? 카발란 놈들인가?”

초크슬램을 당해 등골이 부서진 청년 한 명이 바닥을 뒹굴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이미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없었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하라고 놔둔 것이었다. 청년은 눈이 풀린 채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초록… 근육… 괴물…….”

“그게 뭔데!”

“배는 여섯 갈래… 초록… 몸은 거대한 근육에… 머리카락은 풀잎 요괴들이야……. 나를 한 손에 들고 등골을 부쉈어…….”

“그런 부족이 어디 있느냐고!”

그날 이후 조선군은 타이야족의 마을을 사방에서 두드렸다. 홍윤성과 도감군 고참병들의 지휘를 받고 여진족의 보조를 받은 분견대가 숲 속을 날뛰기 시작했다.

오늘도 홍윤성이 이끄는 부대가 마을 하나를 급습해서 박살내고 돌아왔다. 홍윤성이 몸에 바른 안료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그런 모습을 보던 고참병이 애써 말했다.

“이렇게 자주 행하시면 큰 일이 날 것 같습니다. 찧은 쑥은 매염을 행하는 물건인데 벌써 다섯 번이 아니십니까.”

“혹여나 일이 잘못될지 모르니 직접 나서야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이 방식을 뭐라고 한다고?”

“좌찬성께서 크게 웃으시며 쪽물을 몸에 바르는 것과 같으니 람보(藍輔 - 쪽풀을 바르게 하다)라고 칭하셨습니다.”

“람보라, 람보라 하였는가? 쑥보다는 쪽풀이 훨씬 좋겠지.”

열흘이 지나고 일방적으로 당하던 타이야족은 자신들의 거처인 숲에서도 돌아다니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견디지 못한 족장들은 복속을 청하며 스스로 산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서원에 임시로 세워진 관청 앞에서 김수연은 직접 나와 무릎을 꿇은 이들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 봤다. 통역으로 들어온 쿨론족 노인이 족장들의 말을 전했다.

“지금 이 놈들이 뭐라고 하는 건가?”

“말은 정확히 모르지만 항복하니 살려달라고 하는 뜻입니다.”

“기세 좋게 날뛰면서 사람을 죽이다가 태도를 바꾸는 것이 왜놈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구나. 늦게라도 복속을 청하였으니 이를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허튼 짓을 하면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 것이다!”

생각대로면 모두 죽여도 시원치 않았지만 복속을 청하였으니 노비나 다름없이 부려먹으면 충분하겠지. 일을 마친 김수연은 새로운 병법을 창안한 홍윤성을 찾아갔다.

“홍 섭호군, 거기 있는가?”

“죄송합니다! 아직 몸을 불리고 있던 참입니다!”

홍윤성은 김수연이 찾아오자 별 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욕조에서 일어나 복식을 갖췄다. 전신에 쑥을 비롯한 각종 염료를 다섯 번이나 칠한 덕분에 아직도 몸에 얼룩덜룩한 색이 남아있었다.

“아직도 몸에서 쑥물이 빠져나오지 않는 것인가? 모공 깊숙이 박혔다는 말은 들었네.”

“모공 주변으로 번지면서 옷을 물들이더군요. 석감도 효용이 없고 몸을 오래 불리고 석감을 바르면 조금은 빠집니다만 시일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다섯 번이나 행해서 아주 깊숙이 박힌 것이 분명하네. 람보를 두 번 정도 행한 이들은 물이 빠졌으니까. 그래서 좋은 물건을 가져왔네.”

김수연이 꺼내놓은 물건은 방금 전에 녹인 아교였다. 각궁에 쓰이는 아교는 아예 각궁을 쓰지 못할 기후에 온 덕분에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렇게 잘 녹인 아교를 보면서 김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내수린을 행하던 유생들이 액모(腋毛 - 겨드랑이 털)가 없으니 물어보았다네. 그들이 말하기를 ‘액모는 내수린을 행할 적에 불편하니 대군어른을 따라서 아교로 붙여 뽑아냈다.’ 라고 하더군.”

“그러니까 온몸에 아교를 바르고 털과 함께 쑥물을 뽑아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자네가 정할 일이네. 그리고 람보를 위한 복식인 람보복(藍輔服)을 임시로 만들었으니 앞으로는 자네처럼 고생할 이는 없겠군.”

김수연이 한숨을 내쉬면서 돌아가자 홍윤성은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듯한 아교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두루마기를 풀고 비명이 새어나오지 않게 입에 재갈을 끼웠다.

홍윤성의 숙소에서는 고통을 참는 소리와 고함이 끊이지 않았다. 다음 날 눈썹이 모두 사라진 채로 나온 홍윤성은 ‘털이 뽑힌다고 색이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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