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83화 - 타요완 원정(2) >
땅이 정해지자 조선군은 바쁘게 움직였다. 북방에서의 전훈 덕분에 깊은 해자와 얕은 토담으로 구성된 성벽을 쉽사리 쌓아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요새의 공사와 동시에 건물도 하나씩 올라갔다.
병사들이 거주할 숙소나 보인들 혹은 농사를 지을 노비들이 거주할 숙소는 생나무를 아무렇게나 베어서 만들었다.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 아름드리나무이니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심지어 조선인들이 굴론이라 불리는 쿨론족도 조선을 도왔다.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지만 모든 일이 순탄할 뿐이었다. 그렇게 5월 말이 되면서 개척이 어느 정도 완료되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논밭이야 처음 몇 년은 소득이 나지 않으니 가꾸면 충분할 일일 것입니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네. 그렇다면 이제 동쪽에 있는 탄산으로 향해야 하지 않겠나.”
탐욕이 묻어있는 한확의 말이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으로도 탄산(炭山 - 재산, 현대의 양명산)은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남쪽은 복속한 굴론족이 막아내지만 동쪽은 산을 내려오면 서원까지 고작 이십 리(8km)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도감군이 먼저 나아가 거점을 만들고. 설득을 해보되 응하지 않으면 정충렬을 비롯한 이들이 나서서 마을을 부수고 적들을 몰아내면 좋을 것일세.”
“도감군이 본진을 보호하고 공격에 나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산세가 험하지 않으니 말들이 쉬이 오갈 것입니다.”
논의가 모두 정해졌다. 한확은 일 년 조차 걸리지 않을 일에 만족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탄산 일대를 확고히 점거하고 동쪽 방면을 막아내면 아무리 토인들이 날뛰어도 쉽사리 막아낼 수 있을 것이네. 주상전하께서는 일 년을 말씀하셨지만 육 개월 이내에 마쳐 봄세.”
그러나 고산족(高山族)에 속하는 흉포한 타이야족의 영역으로 들어간 조선군들은 자연 그 자체를 터전으로 삼는 전술에 농락당하기 시작했다. 적들은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싸움 같은 싸움을 하지 않았다.
숲 속에서 사람 몇을 습격해 목을 베고 도망가니 화포를 쏠 틈조차 나지 않았으며 신기전은 뒤늦게 날아가 애꿎은 나무들을 부러트릴 뿐이었다. 보총의 사격은 별다른 효험이 없었으며 숙련된 사수의 운총만이 도망치는 적들을 쏘아 죽일 수 있었다.
병장기를 들고 추격한 도감군의 피해도 제법 컸다. 덤불 속에서 크고 튼튼한 병장기들은 휘두르기도 벅차다. 여기에 적들은 작은 무기를 들고 자신들이 유리한 거점에서 사방을 포위하고 덮치니 희생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가랑비에 옷깃이 젖어 들어가듯 15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긴 이후 도감군의 전략은 완전히 변하였다. 수풀과 삼림을 모조리 베어버리면서 길을 뚫는 단순하면서 과격한 해결책을 택했다. 그러나 탄산은 해발 1,000m가 넘는 활화산이었다.
또한 깊은 산으로 들어갈수록 타이야족의 대응 또한 심각해져서 피해는 점점 심각하게 누적되었다. 그렇게 7월 말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피해를 보고하라.”
“아직 집계가 되지 않았으나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난 홍윤성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숲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피해가 없기를 빌면서 자신의 장구를 점검하고 있으니 여지없이 보고가 들어왔다.
“초병 둘이 살해당했습니다. 한 명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도주하였으나 아직도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죽인 놈들은.”
“쏘아 죽인 놈이 일곱, 습격하였으나 역으로 죽인 놈이 둘. 도합 아홉을 베었습니다.”
또 다시 하나의 조가 습격당했다. 여태껏 벌어진 일로 인하여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땅 속으로 파묻혀 있으리라. 홍윤성이 그렇게 일어난 피해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김수연이 들어왔다.
김수연 또한 누적되는 피해 보고에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처음의 전투처럼 압도적인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들은 조선군의 장기인 수비전과 화력전을 철저히 피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군.”
“별 일은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츰 피해가 줄어들고 있으니 조만간 토인들을 토벌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주상전하께서 보신다면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길 것이라네.”
홍윤성의 가슴이 찔려왔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사람을 동원해서 숲을 밀어버리는 무식한 방법이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찌는 여름 더위가 시작되어서 체력이 급격히 고갈되었고 사기는 더더욱 추락했다. 심지어 상주에서 올라온 장병조차도 학을 뗄 더위니 탈수로 쓰러지는 이들이 하루에도 네댓 명씩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더 와도 피해만 커질 뿐이었다.
“사람을 더 보낸다 하셔도 시일이 걸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죽는 이들 태반이 신병인데 숙련병을 차출하면 일이 틀어질 가망성이 높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오 년이 지나도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할 걸세. 이대로 방치해두면 놈들이 맛이 들렸으니 사방에서 몰려들어 서원(西原) 일대를 공격할 것이 자명하네.”
오 년 이라는 말에 홍윤성의 가슴이 다시금 아파왔다. 9년 전에 함흥에서 혼인한 아내는 경직(수도 근무)으로 발령받자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기뻐했으니까.
아들이 여덟 살인데 이대로 여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는 잘못하면 아비를 따라서 험난한 남방으로 내려올지도 몰랐다. 시시각각 위태로워지는 홍윤성의 표정을 보았는지 김수연 또한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어디까지나 주상전하가 보시기에는 다를 수도 있다네. 날이 더워 기력이 떨어진 것이 느껴지니 오늘은 술과 고기를 내릴 것이네.”
어떻게든 무마하려는 김수연의 모습을 보면서 홍윤성도 점점 답답해졌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주연이 열렸다. 술을 마시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위화감이 느껴졌다.
평소와 같은 절제와 훈련된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나아지지 않는 전황과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로 인해 조만간 사고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거센 손길이 홍윤성의 등을 내리쳤다.
“이거 섭호군 아닌가?”
“상만호(上萬戶 - 종3품 토관용 무반직)님이 예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고 너무나 울적해서 그런다네. 자네가 술을 잘 마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랫놈들은 물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것이 있다네.”
홍윤성은 예전부터 주량 하나는 대단하였다. 정신없이 술을 마시면 고래와 같다 하여서 한때 경음당(鯨飮堂)이라는 호가 붙었던 인물이었으나 훈련도감에 힘에 벅찬 나머지 술을 줄여서 마셨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조금 풀어져도 괜찮으리라. 상대로 나온 정충렬 또한 말술을 자처하였으니 둘만 앉은 주안상에 탁주 한 동이가 앞에 놓여졌다.
서로 돼지 족발을 크게 깨물고 탁주로 흘려보내는 와중에 정충렬이 탄식을 내뱉으면서 얼굴을 매만졌다. 눈에 띄게 홀쭉해진 얼굴과 피로에 지친 눈이 술기운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네들이 왜 잘 싸워왔는지 아는가?”
“그것이야 이전부터 싸워왔으니 그런 것이 아닙니까.”
“자네들은 오로지 북방을 전전하면서 말 탄 놈들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 그러니까 이런 남방에 와서 힘을 못 쓰는 것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상만호님께서 대체 어떠한 싸움을 하시기에 그러십니까.”
아예 탁주를 들이 붓다 들이켠 정충렬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또한 평소와 다른 환경에 고통을 받았으나 아무에게도 화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북방이면 풀도 제대로 자라지 않지. 초목이 우거져도 여름 한 철이고 겨울이 되면 모조리 시들어 말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네. 그런데 여기는 겨울이 없잖나.”
“그렇다 하여도 말을 타고 산길을 오르내리면 쉬운 일이 아닙니까.”
“그 새끼들이 풀숲에 숨어서 말 다리를 노리는데 어쩌란 말이야!”
정충렬은 조선에 귀부한 건주위 여진족이었지만 부족민들을 이끌고 제한적이지만 독자적인 군사력을 휘두르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원정에서 소득을 거둘 욕심으로 출정하였던 것이다.
병사의 손해는 부족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며 나날이 떨어지는 사기는 자신이 부족장이자 상만호의 자리를 유지할 자격이 없다는 말과 같다. 정충렬은 주먹을 내리치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나는 도감군이 주변에 요새를 만드는 동안 말을 타고 산을 헤집으면서 토인들의 마을을 찾아냈지. 오십 호 규모의 마을 둘을 불태우고 병사 칠십이 죽고 말은 백 필이 넘게 죽었어.”
“토인들은 기껏해야 가죽옷을 입고 팔뚝만한 칼을 쓰지 않습니까?”
“달릴만한 곳에서는 싸우지 않으며 숲 사이사이에서 화살을 날리고. 으슥한 곳에서는 수풀에 숨어 말의 배를 찔러버리고 내빼서 열을 흐트러트리고! 그러다가 죽으면 목만 슬쩍 뜯어가 버리지!”
처음 당하는 전략에 허를 찔린 여진족들 또한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었다. 환경도 지형도 모두 자신들의 편이 아니니 더더욱 그랬다. 정충렬의 분노를 보다 못한 홍윤성은 주제를 돌리려고 애썼다.
“그러고 보니 저희도 오늘 습격당해서 둘이 죽었습니다.”
“저런, 자네들 초병을 보내면 최소 셋을 보내지 않나?”
“그렇지요. 그런데 살아남은 한 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 있느냐? 오늘 습격당했다가 살아남은 이에게 술 한 잔을 내리고 싶으니 불러오너라!”
잠시 뒤에 아직도 안색이 창백한 도감군 병사 한 명이 왔다. 홍윤성이 가르쳤던 기억이 나는 자이니 올해 처음 입영한 신병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한 잔 받게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일이 제일이지.”
“아이고. 세상에 몸이 얼마나 튼실한지 어깨가 자네보다 넓군! 이런 자들이 죽었다면 스무 명이 사방에서 둘러싸서 공격했겠는데 맞는가?”
그런데 병사에게 술을 내려준 홍윤성은 몸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토인들과 싸워서 셋 중 둘이 죽었는데 상처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네 몸을 보니 이상하구나. 어찌하여 너와 같이 탐망에 나서던 이 둘이 죽었는데 네 몸에는 상처가 하나도 없는 것이냐.”
보통 전투를 벌여도 적어도 다섯 정도는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며. 가까스로 도주를 택해도 사방에 상처가 가득한 것이 도감군이었다. 그러나 이 병사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른 일이 아니고 제가 변을 누는 사이에 동료들이 당하였습니다.”
“거짓을 논하지 말렸다! 네가 개구리도 아니고 어찌 풀숲에 앉아있다고 네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냐. 지급하는 피갑이 진한 갈색으로 되어 있으니 대번에 눈에 띄었을 것이다!”
“너무 더운 지라 피갑을 입지 않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쑥색 철릭을 입고 투구를 벗은 채 앉아있으니 제 옆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규정을 어겼기에 애꿎은 목숨 둘이 사라졌다. 갑옷을 벗고 투구를 벗는다면 대변을 보더라도 멀리 떨어져서 봤을 것이며. 정탐에 구멍이 생긴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경계에 나서며 갑옷을 벗은 죄만 하여도 크나큰 일이지만 아직 혼란한 와중이니 하옥할 것이다. 후일 좌찬성께 죄를 고할 것이니 어서 끌고 가거라!”
“개구리라. 그러고 보니 자네들 의복이 쑥색 철릭이었지? 그래 풀숲에 가만히 있는 개구리는 보이지도 않지.”
“기분을 푼다 하였는데 분통이 치밀어 오릅니다. 차라리 콱 죽어버렸으면 좋으련만.”
한편으로는 병사의 심정이 이해는 갔다. 겨울 추위도 어찌 막아내던 돼지가죽 두 겹으로 만든 피갑을 입으면 온 몸에 땀이 차오르고 철모 안은 찜통을 넘어서서 계란을 넣으면 익을 것 같았다.
토인들과 정면에서 싸우면 열 놈이던 스무 놈이던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갑옷을 입지 않으면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니. 그런데 왜 갑옷을 입어야 하지? 입지 않은 놈이 가만히 있으니 들키지 않았는데?
“토인 놈들이 풀숲에 숨어있다 하였습니까?”
“아예 작정을 하고 납작 엎드려 있는지라 찾아내기도 여간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야. 피부가 검은 편이어서 더욱 찾아내기가 어렵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술을 퍼마시는 홍윤성의 모습을 보면서 정충렬은 혀를 끌끌 차면서 같이 술을 퍼마셨다. 홍윤성은 꼭두새벽부터 야장들이 머무는 곳에 도감군에게 지급되는 투구를 들고 왔다.
“투구에 구멍을 열 군데를 뚫게. 아주 작은 구멍이고 나뭇가지를 꽂을 정도면 된다네.”
“네? 아니 이 잘 만들어진 투구에 어찌하여 구멍을 뚫습니까?”
“잔말 말고 당장 구멍을 뚫어놓게!”
왜인 대장장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망치를 놀려서 강철로 만든 투구에 구멍을 뚫는 사이 홍윤성은 매염을 위해 모아둔 찧은 쑥 한 바가지에 돼지기름도 한 바가지를 가져왔다.
“섭호군님이 대체 무엇을 하시는지 영문을 알 길이 없습니다.”
“당연히 알 길이 없지. 일전에 수양대군께서 행해보려다가 포기하신 일이니까 더욱 그렇지.”
훈련도감 1기, 정확히는 자신과 같이 여러 시험을 해본 이들의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는 녀석이 홍윤성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당시에는 예산 문제로 포기한 일이기에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본래 피갑도 여러 색으로 물들인 외피를 따로 두고, 철릭도 쑥색 한 가지 색이 아닌 여러 색으로 두려고 했다. 예를 들면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흰색 철릭과 흰색 피갑 외피를 입는 방식이었다. 적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방안이라고 하였던가.
다른 일을 떠나서 회색이면 몰라도 흰 색이 문제였다. 가죽을 흰 색으로 물들이려면 보통 수고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흰 색 철릭이면 조금만 뒹굴 어도 색이 바래니까. 하지만 이러한 기후라면 옷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투구가 왔군. 여기에 철릭 남는 놈을 이렇게 찢고…….”
“섭호군님?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뭔 일을 하던 효용이 있으면 쓸 일이다. 그러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뒤로 돌아 있어라. 그리고 내가 신호를 하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고.”
홍윤성의 행동은 광인(狂人)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옷을 모두 벗고 돼지기름과 섞은 쑥을 몸에 펴서 발라 몸을 진한 초록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발달한 대흉근도 튼실한 광배근도 모두가 초록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세상에 이렇게 초록색이 어디에 있던가? 재도 발라보고 흙도 발라보고 그래야 그럭저럭 괜찮지.”
“빠……빨리 사람 보내. 세상에 섭호군님이 온 몸에 이상한 물건을 바르고 계셔.”
“무엇보다도 알몸이시잖아! 입신체비 하는 선비들도 아니고 이게 뭐야!”
홍윤성은 속옷과 군화만 신은 채로 등에 낡은 철릭을 찢어 만든 도롱이 형태의 견폐(肩蔽 - 동양식 망토)를 목에 묶었다. 그러고는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잔뜩 쑤셔 박은 철모를 덮어쓰고는 채 진영 구석에 있는 수풀로 기어들어갔다.
“섭호군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광인이나 다름없는 짓을 행한단 말인가?”
“저희도 영문을 모를 일입니다!”
본영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처리하던 김수연은 영문을 모르고 병사들의 보고를 받아 홍윤성을 말리려고 왔었다. 이런 중요한 시일에 도감군을 이끄는 중핵이 광증을 보인다면 치명적이다.
“홍 섭호군! 어디에 있는가!”
“저기 수풀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수풀 안에 있다면 어서 나와 보게! 자네가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있어서야 되겠는가?”
기껏해야 가슴 높이의 수풀이지만 홍윤성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 여럿이 헤매고 있는데 수풀 중앙에서 홍윤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가득했다.
“보십시오! 수십 명의 사람이 보고 있는데도 제 모습을 찾아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흉한 몰골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온 몸에 쑥은 물론이고 재와 먹을 바르다니 당장 석감으로 몸을 씻게!”
“아닙니다! 토인들을 쳐 죽이기 위해서는 이런 모습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이제 놈들의 눈을 농락하고 산야를 뛰어다니며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습니다!”
몸에 뭘 칠하던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북방에서 인간백정으로 불리던 자이니 이번에는 초록색 나찰(羅刹)이 되면 충분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 병사들을 돌아본 홍윤성은 지시를 내렸다.
“백 명을 뽑겠다. 산으로 올라가 토인 놈들의 마을을 박살낼 이들은 거수(擧手)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