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81화 - 원정 준비 >
암벽을 오르는 일은 워낙 고된 일인지라 잠시 쉴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새파란 동해바다를 내려 보니 의문이 들었다. 대체 한명회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충실하고 근면한 삶을 사는 것인가.
주변 인물들이야 젊은 시절부터 성격에 변화가 올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줬지만 한명회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더욱 의심스럽다. 한명회도 땀을 식히며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기에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네도 많이 변했어. 개성에서 잔꾀를 부릴 적에는 대성할 수 없겠다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올바른 사람이 되었으니.”
“그동안 배운 일이 많고 깨달은 것이 얼마인데 제가 변하지 않겠습니까. 대군어른을 만나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국강의 외손자와 사돈을 맺을 생각은 어째서 하게 되었나?”
“네?! 사돈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명회의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보는데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6개월 전에 여국강에게 입신체비를 가르치면서 혼사를 추진한다는 말을 받아 넘겼잖아. 그러고 보니 한명회가 명나라 말을 제대로 하던가?
“일전에 연희당에서 입신체비를 행할 적에 대체 무엇을 듣고 그렇게 좋아하였던 것인가?”
“저는 명국의 말을 잘 모르고 있기에 그저 입신체비를 행하는 법을 묻는 줄 알았습니다.”
“입신체비로 젊은 시절의 몸을 되찾은 사람이 자네에게만 친밀하게 굴지 않는가. 당시에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혼사를 추진한다고 허가를 내렸다네.”
한명회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더니만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한명회의 막내딸이 올해 열한 살이고 여국강의 외손자가 여섯 살이니 괜찮다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을까.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좋은 것이지요. 여 호군(護軍) 어르신과 사돈을 맺으면 충분한 보답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전에 주상전하께서 말씀하신 이주(대만) 정도야 다녀올 수 있지요.”
“그렇게 여긴다면 다행이군. 사돈지간에 오가는 정이야 말로 올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실로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숙질이신 좌찬성 어르신도 대군 어른과 사돈이 아닙니까. 좌찬성 어른께서 대군어른의 일을 도우니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사돈지간의 우정을 논하면서도 보답을 이야기 하는 걸 보니까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놈의 성실함과 근면함의 이면에는 성실하고 근면하게 남겨먹겠다는 의지가 숨겨져 있으니까.
그렇지만 일을 우습게 여기니까 오히려 다행이었다. 대만은 만만한 땅이 아니고 명나라도 관리를 포기할 정도로 난폭한 원주민들이 있는 곳이다. 당연히 나는 절대 갈 생각도 없다!
땀도 식었기에 천천히 암벽을 내려와 배로 향했다. 사방을 오가는 나룻배들로 보아 상륙과 탐색 훈련도 병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배 위에 올라서자 여국강이 사방을 돌아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대군어른께서 정하신 우산도는 참으로 좋은 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샘물이 하나 있으면 모든 일을 한 곳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아쉽습니다.”
“이러한 섬에 샘물이 없겠소? 분명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독도에는 바닷물이 섞이지만 샘물 하나가 있었지.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나가는데 멀리서 나룻배에 탄 선원이 급히 노를 저어오고는 말했다.
“탐색에 나선 이들이 물을 발견했습니다! 암벽 사이에서 맑은 물이 새어나오는데 약간 짠 맛이 느껴지지만 마시기에는 충분합니다.”
여국강의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독도를 좋아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물어봐야겠다.
“어찌하여 우산도가 좋은 섬이라 하는 거요? 연유를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구려.”
“항해라 하면 거센 파도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익숙해지는 일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동해는 모든 일을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지요.”
“그렇게 험하다는 말이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낸 일을 제외하면 동해를 직접 관통하는 항로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선원의 숙련도가 빠르게 증가한 것이겠지. 여국강은 내 말에 맞장구치듯 옆의 배가 출렁거리는 모습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말을 나누는 와중에도 파도가 거세지 않습니까. 제 실력으로도 더욱 북쪽으로 나아간다면 먼 바다에서 배를 다루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록에 따르면 칠백 년 전에 있었던 발해에서는 동해 바다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렀다고 하던데.”
“아마 절반은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하니 아주 충분한 훈련이 되겠지요.”
동해가 그렇게 험난한 바다였나?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삼남 지방에서 출발한 조운선도 모조리 해안을 따라 북상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시금 여국강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항구에 닿아 배를 정박하는 일 또한 중요하지만. 급한 일이 닥치면 배를 정박시키고 나룻배를 보내 사방을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우산도는 정말 좋은 섬이지요.”
“어찌하여 좋다고 하시오?”
“백사장에 상륙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암반 사이를 나룻배로 오가는 일은 험난하지만 익숙해지면 어떠한 땅이라도 나룻배를 보내 필요한 물자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선원들이 격류를 해치며 사방으로 나룻배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 선원들은 왜 모여서 몸을 마구 뒤흔들고 있지?
“가지어(加支漁 - 강치의 옛 명칭) 한 마리 잡았습니다!”
고함에 놀라서 천리경을 들어 보니 선원 독도 강치를 두들겨 패서 잡아버렸다. 주요 목적인 탐색훈련에는 맞는 일이지만 독도 강치는 멸종한 동물로 기억하고 있으니 뜯어 말려야겠다.
“이 또한 충분한 훈련이 아니겠습니까. 황해에 있던 가지어(점박이 물범)보다 튼실한 녀석이니 선원들이 배불리 먹겠습니다.”
“가지어가 많다고 하여 덮어놓고 잡다가는 씨가 마를지도 모를 일이군. 또한 가지어가 많다면 해산물도 많지 않겠소? 어부(漁夫)와 마찬가지로 여러 방법을 택하면 더욱 좋을 것이오.”
“대군어른의 혜안이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리 한다면 씨가 마를 일도 없고 선원들이 임무를 분담할 수 있겠군요.”
개인적인 욕심으로 무릉도를 오자고 하였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굉장하였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서야 도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처음 시행한 항해 훈련인지라 냉정한 평가가 시작되었다.
“한 번의 훈련으로 한 달을 허비하는 일이니 얼마나 좋은 훈련인지 궁금하군.”
“동해 바다는 험난하기가 적절하니 천축까지 나아갈 항로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난해한 곳입니다. 그러하니 선원들을 훈련하기가 아주 좋사옵니다.”
“그러하면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가?”
여국강이 손을 꼽으면서 대략적인 계산을 마쳤다. 예상보다 빠른지 여국강 또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벽란도에서 시작하여 우산도를 한 번 오가면 항해와 탐망(探望) 여기에 상륙까지 모든 훈련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왕복으로 두 번 정도를 반복한다면 대월국 까지는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사람의 수에 맞추어 일곱 척의 배를 계속 보낼 것이니 반복하여 행하라.”
여국강은 신이 나서 내가 만든 훈련 계획대로 선원들은 반복학습 시켰고 한명회가 이를 보조했다. 그와 동시에 궐에서는 논의를 시작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의 땅이 아니고 조선 사람이 건너가본 적도 없는 대만에 항구를 세울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대만에 대한 정보를 서적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만 너무나 빈약하였다.
수많은 이들이 각종 역사서를 뒤적여 보았으나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송나라 시절에는 중개 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섬의 크기, 기후, 기타 상세 등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물론 나야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자세히 말해볼 만 하지만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에 대한 추문을 받을 수 있다. 혹시나 몰라서 방길주를 데려왔는데 방길주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다.
“그러하니 어떠한 서책에도 이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말이오?”
“신 신숙주 아뢰옵니다. 송대의 기록과 원대의 기록을 되짚어보니 성정이 난폭하며 사람을 헤치기 좋아하는 야인들이 부락을 이루었다 하였사옵니다.”
“전하. 자칫 잘못하면 이주에 항구를 세우기 이전에 전쟁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명국에 알리시어 병부상서 우겸의 계획을 따름이 옳을 것이옵니다.”
점점 논의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실제로 대만의 원주민은 이 시기에는 10만이 조금 넘을 정도이며. 여러 부족으로 쪼개져서 내전을 하는 주제에 철기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걸 알지 못하는 관료들은 야만인이라고 하니 최소 여진족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방길주가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신 방길주 아뢰옵니다. 일전에 복주(福州 - 현 복건성 복주)에서 여러 일을 행하던 무렵에 어린 시절 이주에서 살았던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계속 말해 보시오.”
방길주가 발이 넓다 하였는데 정말 기억을 되새긴 것 같다. 방길주는 손가락을 더듬으면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적게 잡아도 남북으로 삼백 리에 달하는 넓이라 하였습니다.”
“그러하면 적어도 경기도와 비슷한 거대한 섬이라고 보아야겠군.”
의외로 상세한 정보가 나왔다. 아마 방길주가 만난 노인은 원나라 시절에 개척한 무역도시에서 살던 사람일거다. 이후 해금령이 시작되며 강제로 팽호 열도로 이주했겠지.
“야인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는데. 자신의 땅을 이주가 아닌 ‘다요완’ 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난폭하기 이를 데 없고 싸움을 주저하지 않으며 풍습이 잔학하였습니다.”
“풍습이 잔학하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성인이 되면 다른 부족을 습격하여 목을 베어 와야 성인으로 인정하였으며. 이를 빌미로 삼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목만 베어갔다 합니다.”
형님부터 우의정 정분, 좌찬성 한확, 신숙주를 비롯하여 기록을 수집한 집현전 학사들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위치만 보고 이주를 개척한다 하였는데 정작 살고 있는 놈들은 몇 만이나 되는 목 베어가는 귀신들이니까.
형님이 입을 우물쭈물 거리면서 말을 못하자 내가 나섰다. 실제로 싸우면 이합집산에 제대로 된 철기도 못 만드는 놈들이니 질 이유 따위는 없다. 그러니 여기서는 강하게 나서야 한다.
“그렇다 하면 궁금한 것이 있소. 그 노인은 어떻게 살아남았다 하였소?”
“해금령이 실시되고도 15년간 거주하였지만 사람이 점점 줄어가면서 야인들이 날뛰었고. 그렇게 험난한 삶을 살던 끝에 마지막으로 복주로 이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야인들이 그렇게나 많으면 기껏해야 한 줌에 불과한 명국의 사람들이 어찌 버틴 것이오. 여기에 해금령으로 인해 명국에서 군대를 보내서 보호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15년이나 머물지 않았소.”
겨우 흐름을 돌려놨다. 한 줌에 불과한데다가 제대로 된 군대도 없는 소수의 한족 피난민들이 버틴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냥 원주민들 수준이 흉포한 것이 전부니까 그렇다.
섬에서 치고받고 싸우면서 고만고만한 수준의 전쟁만 벌이니 강해질 이유가 없다. 마오리 족과 같이 외부 문물을 수입하면서 싸운다면 모르지만 지금의 대만 원주민은 아니다.
“신이 보기에는 이들이 풍습이 잔혹할 뿐이지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른 경험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북방의 야인의 반이라도 되었으면 명국으로 돌아온 이가 없었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듣고 보니 수양대군의 말이 맞도다. 명국의 사람들이 아무리 무장을 하여도 기껏해야 잡색군(雜色軍)과 비견해야 할 것인데 이들과 싸우기도 꺼려하지 않았느냐. 그러하니 세상이 돌아가는 순리를 알려주면 충분할 것이다.”
형님이 원하는 순리라는 것은 화포로 터트리고 신기전으로 박살내고 보총으로 바람구멍 뚫어주는 그런 순리겠죠.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잠자코 있었다.
오히려 대신들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까지의 정보였던 혼일강리역대국도에는 기껏해야 제주도보다 작은 땅이라 여겼지만 경기도 이상의 면적이면 챙겨올 이윤을 계산하기가 힘든 수준이니까.
“그러하면 명국이 이런 귀중한 섬을 할양하였으니 번국으로서 힘써 개척하고 야인들을 통솔하여 확고한 강역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실로 옳은 말씀이옵니다.”
의외의 인물인 친명파 대신의 수뇌인 한확이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조정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친명파 대신들 모두가 형님의 명분에 적극 찬성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명의 정책에 찬성하려면 수군 양성에 찬성해야 하며. 수군 양성에 찬성하려면 대만 개척을 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왕 나설 일이니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보기가 좋겠지.
“신에게 막중한 책무를 부과하여 주시면 간뇌를 쏟아 이주, 아니 다요완의 개척에 나설 것입니다. 부디 신이 졸하기 이전에 윤허하여 주십시오.”
“그러하면 내년 삼월에 출병하는 것으로 정하고 원정의 준비를 행할 것이니 이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이들은 퇴궐하여도 좋소.”
이후로도 논의는 계속하여 진행되었다. 형님은 소수 정예의 부대를 파견하여 단번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다른 이들도 의견에 동참하였다. 애초에 원정에 쓰일 선박이 30척에 불과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하면 훈련도감과 화기도감의 숙련병과 지휘관을 필두로 한 삼천의 병사. 여기에 정충렬을 비롯한 기병대 이천, 그리고 보인 오천.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구려.”
----------
훈련도감은 선임자의 경험을 신병들에게 전수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북방에서 뛰어난 전공을 보였던 홍윤성은 훈련도감 신병들을 가르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수레를 이러한 방식으로 모아 두면 충분한 방진이 된다. 안에서 창으로 찌르고 보총을 쏘아대면 큰 말을 탄 창기병이 아닌 이상 섣불리 다가설 방법조차 없지. 다들 대형을 만들어 보아라!”
굼뜨고 서툰 움직임으로 마차 방진을 만드는 모습을 보던 홍윤성은 혀를 끌끌 찼다. 다년간의 경험이 축적되어 과목이 하나하나 늘어났으니 일 년으로 늘어난 훈련 기간이 짧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거기! 판을 뽑을 적에는 방패수가 뽑아야 한다! 모두 보직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효용이 없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리고 비격뢰를 던질 적에는 똑바로 던져!”
“네 사직(司直)님!”
“그러다가 방진 무너지면 떼죽음이다! 여기서 연습해 두지 않으면 실전에서 무용지물이라고!”
몇 번이고 시범과 연습을 반복하자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홍윤성은 지친 어깨를 주무르면서 평상시와 같이 단련실로 향했다. 여전히 단련실을 지키고 있는 마일용은 허리를 굽히고 몸을 풀고 있었다.
“이거 홍 사직님 아니십니까.”
“마 참군(參軍)님은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 어찌 존대를 하십니까.”
“그러한가? 자네가 처음 왔을 적이 생각나는군. 그때는 정말 대단했지.”
“푸하하하하하핫! 요즘도 저와 같이 다른 이들을 끌고 오는 자들이 있습니까?”
마일용은 고개를 들어 생각을 이어나가다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있다네. 꼭 자네와 같이 마음을 먹은 자들은 언제나 있더군.”
“사람이 사는 일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홍윤성은 평소와 같이 천축퇴를 들고 힘을 주어 천천히 몸의 근육을 풀어나갔다. 자식도 여덟 살이고 훈련도감의 생활도 제법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한양의 추위를 생각하니 북방이 떠오르고 다시금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보직을 옮길 이들을 선발한다 하였는데 들었나? 주상전하께서 남쪽에 있는 섬으로 나아갈 이를 찾으시더군.”
“당연히 들었습니다. 훈련도감에서 팔 년 이상 근무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저는 십 년 차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당연히 신청하였습니다.”
“하긴 자네는 계속 북방에 머물렀으니 따듯한 남도가 그리울 것 같으이.”
홍윤성은 따스한 남도를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눈 정도야 가끔 내려도 좋다. 살을 에는 추위와 천막에 생기는 고드름을 상상하면 너무나 끔찍했다. 그렇게 훈련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 단련실의 문이 열리고 훈영절제사로 재직 중인 권절이 불쑥 들어왔다.
“홍 사직, 마침 잘 되었네.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셔서 특별히 예까지 찾아왔네.”
“어명이라 하셨습니까?”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다른 일도 아니고 어명이 직접 내려오다니. 북방에서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며 손조차도 떨려왔다. 교지를 받아들고 펼치자 더욱 끔찍한 말이 쓰여 있었다.
[홍윤성을 종 4품 섭호군(攝護軍)으로 임명하니 명을 받들어 머나먼 남방에 있는 이주의 원정에 참가하도록 명한다. 일전에 보직을 옮기기를 희망하였으니 이를 수용하였다.]
“축하하네. 이미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진급이 빠르군.”
“아니 이건……. 저기 제 뺨을 한 대 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상전하의 어명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알겠네.”
살가죽 부딪히는 소리가 단련실 안에 울렸다. 뺨을 맞은 홍윤성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하핫! 내가 섭호군? 주상전하께서 저를 정말로 아끼시니 이거 따스한 남도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북방에서 야인들이 인간백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머나먼 남방으로 내려가다니! 주상전하의 은혜가 하늘에 닿겠습니다!”
“저기 조금만 진정하게. 밖에서 들릴 지도 모르지 않는가.”
“훈영절제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한 교지를 직접 내려주신다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문을 박차고 나온 홍윤성은 광인처럼 한밤중의 남한산을 뛰어다니며 웃고 또 웃었다. 그의 입에서는 웃음이 나왔지만 눈에서는 그저 눈물만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