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80화 - 이주(夷洲) >
냉정하게 생각했다. 사신이 의주에 도달했다는 파발이 저녁에 도착했으니 한양으로 도착하는 시간은 6일 뒤이다. 그리고 북경에서 출발한 사신이 한양까지 오려면 28일 가량이 걸린다. 결국 22일 전에 출발한 사신이다.
유민들의 말로는 열흘 동안 배를 타고 왔으며 조선에서 보름 동안 있었다. 그렇다면 요동에서 사람이 사라진 일을 파악하고 장계를 올리고 다시 사신을 편성하는 기간을 생각해보면 지금 보고가 막 들어갔을 시점이다.
“소란을 멈추어라! 오늘 밤을 충분히 보내고 내일 아침에 옮겨도 될 일이다.”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이를 수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병조판서 조극관이 나를 보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괜히 소란을 부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옮겼다가 다시 되돌려 놓는 일은 귀찮지만 그런 귀찮음이야 감내해야지. 손가락을 꼽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시일을 따져 보니 유민과는 연관이 없소. 사신이 막 출발하였을 무렵에 유민들이 아국으로 향했을 것이니 보고가 들어가도 한참 후의 일이오.”
“격이 가장 높은 조서(詔書)입니다. 또한 평상시의 사행과 다른 것이 흠차내사 윤봉(尹鳳) 뿐만 아니고 병부상서 회양공 우겸이 같이 온다 합니다.”
“우겸? 와라부(오이라트)의 난이 일어날 때에 북경을 수호한 명장이 아닌가.”
회양공이라는 호칭은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평소의 사신과는 확실히 다르다. 본래 사신이 오더라도 상서는 올 필요도 없고 와봤자 조선에서 할 일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일이니 어서 궁궐로 향해야겠다.
“정황을 알 겨를이 없으니 주상전하를 뵙고자 하네. 바로 입궐하겠네.”
급히 궐로 들어가자 형님도 의정부의 관원들과 논의를 하였다. 평소에는 육조 직계제를 시행하려는 의사를 보였지만 명나라와 관련된 외교적 사항에서는 의정부의 경험 많은 신하들의 도움도 필요하였다.
“신 수양대군 입궐하였사옵니다.”
“마침 잘 되었다. 그런데 연희당의 유민들을 옮기는 일을 담당하지 않다니 어찌하여 입궐한 것이냐.”
“당도하는 시일로 보아 유민들과 관련된 일이 아니오며. 또한 조선의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유민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한낮에 시행할 것이옵니다.”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어명을 어긴 일이지만 유민을 다스리는 일은 나에게 일임하였으니 내가 유연하게 판단했다. 형님도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성급하였구나. 당도하는 시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요동 총병관이 사행에 나선 이들에게 고변 하였을 일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방법도 있었지. 서유정의 판단력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다. 이 때를 노렸다는 듯이 한확이 입을 열었다.
“좌찬성 한확 아뢰옵니다. 유민이 아무리 귀중한 이들이라 하나 명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니 유민들을 요동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옳을 것입니다.”
사돈인 한확은 친명파 대신의 입장을 보여주듯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다른 대신들이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누군가가 공격하기 전에 사돈을 적당히 두들겨야지 답이 있나.
“좌찬성께서 그렇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그런 신묘한 조함술을 가진 이들이 여럿 있었다는 일은 명국에서도 알 일이며 요동 총병관 또한 염두에 두었을 일입니다. 그러한 일을 숨기려 하여도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 아닙니까.”
“유민들은 요동에 있을 적에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저 삼십 호 단위로 마을을 만들고 노역을 시켰다 하더군요. 지나친 염려는 부족함보다 못합니다.”
한확은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보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는 눈치였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영의정으로 승진한 김종서를 대신하여 우의정의 자리에 올라온 정분이 말을 이어나갔다.
“요동 총병관으로 있는 서유정은 토목과 치수에 능하지만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사옵니다. 수양대군이 말한 대로 아무나 가리지 않고 노역에 쓴 것이 분명합니다.”
“우의정의 말이 옳구려. 기껏해야 거처와 신상을 제외한 상세한 일은 알 방도가 없겠군.”
“실로 옳은 말씀이옵니다. 명국에서 오는 이들이 요동 총병관에게 소식을 들었다 하여도 기껏해야 육로로 도주하였음을 경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회양공 우겸이 조선에 온단 말인가.”
나 또한 알 방법이 없었고 중신들 모두가 알 방법이 없었다. 결국 사신이 한양에 도착하였는데 대표는 언제나와 같이 조선 출신의 환관인 윤봉이었다. 그는 새로운 얼굴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내 앞에서 윤봉을 맞이한 사람은 홍위였다.
“조선의 왕세자가 아니십니까. 기골이 장대하시며 신수가 완연하시니 번국의 앞날이 밝을 것입니다.”
“과찬은 거둬 주십시오. 아직 나라의 일을 배우지도 않았으니 앞길이 막막합니다.”
홍위가 장성하였으니 공식적인 외교 석상에 나서게 되었다. 그렇게 기나긴 예식이 끝나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홍위는 윤봉과 어울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내 상대는 따로 있었다.
회양공 우겸. 원래 역사에서는 탈문의 변에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은 충신 중의 충신이 멀쩡히 살아서 조선에 오게 되었다. 예전에 왕진과 죽이 맞아 어울렸던 일이 떠올라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먼저 잔을 채워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양대군께서는 체격이 더욱 좋아지신 것 같은데 이 또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번국이 이렇게 강성하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회양공께서 아무 일도 모르는 자를 이렇게 칭찬하시니 부끄럽습니다. 그저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다시 술이 오가고 이런 저런 잡담이 오갔다. 홍위가 술에 절어 기절하다 시피 한 윤봉을 침소로 옮겨놓자 적막함이 이어졌다. 그런 적막함 속에서 우겸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요동을 오가는 조선의 선박이 빼어나다 못해 아국에서 배우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배는 본디 강남에서 일하던 자가 만든 물건이 아닙니까.”
“그렇소이다. 태상황께서 은혜를 내려주신 덕분에 기술자를 받아들여 조운과 무역에 두루 쓰이고 있으니 실로 흠복(欽服)할 일입니다.”
“하지만 점차 세상이 각박해지니 이 또한 힘든 일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유구국(오키나와)의 내란이 길어지며 왜구 또한 강남 일대에서 날뛰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나야 이유를 알고 있지만 대답할 방법은 없다. 인삼 씨앗 공급량이 늘어났으니 닥치는 대로 논밭에 인삼을 심고 있겠지. 결국 식량 부족을 겪던 영지에서는 식량이 더욱 부족해진다.
그러니 당연하다는 듯이 강남 일대를 털어서 식량을 보충했겠지. 조선으로 오지 않은 이유는 인삼 씨앗을 공급하는 물주니까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그런 사실을 알았지만 애써서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올해 초부터 왜구들의 간악함이 도를 넘어서니 강남 일대의 백성들이 살 길이 막막해질 지경입니다. 이러한 시국에도 조선과 왜국이 교류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국은 왜국과 교류를 행할 적에 인삼을 팔고 구리와 유황을 사들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북방을 막아내는 거점을 만들고 백성들을 사민하는 일에 쓰였습니다.”
우겸 또한 하르빈에서의 일전을 알고 있는지 더 이상은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연회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나오는 길에 홍위를 보았는데 윤봉을 접대하며 술을 많이 마셨는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숙부님께서는 병부상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강남 일대에 왜구들이 날뛰는데 어찌하여 왜국과의 무역을 하느냐고 한 소리를 하였다. 하지만 명분이 있으니 할 말이 따로 없어지더구나.”
“저는 윤봉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명국의 유민에 관련된 일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백이면 백 문책을 당하기 싫어서 일을 숨겨버린 것이 분명하다. 처음 벌어진 일에 대처가 이렇다면 앞으로 요동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탈주하던 간에 신경 쓸 일은 없다.
다른 방법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조선에 융화시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한 작업이지.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는 조서의 내용이 중요하다.
다음날이 되자 형님이 조서를 평소와 같이 읽어 내려갔다. 요약하면 ‘영덕제에게 양위한 경태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사방이 혼란하니 이를 애도하여라.’ 가 전부였다. 모든 일이 싱겁게 끝나려는 순간 가만히 있던 우겸이 앞으로 나섰다.
“황상께서 조선에 요청할 일이 있다 하였습니다.”
“상국에서 청할 일이 있다 하였소?”
“다름이 아니옵고 왜구가 사방을 넘나들며 강남을 헤집고 다녀 피해가 막심한데. 조선은 왜국과 교류하며 이문을 챙기고 있으니 번국으로서 행할 일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이를 황상께서 중히 여기시어 사방이 혼란하다 칭한 것입니다.”
왜구와 왜국은 별개의 존재다. 이러한 일을 뻔히 알고 있는데 조선에 화풀이하는 격이니 짜증이 밀려왔다. 형님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겨우 표정을 고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어찌 하면 좋겠소.”
“수군을 양성하여 탐라도 일대에 두어 강남으로 향하는 왜구들의 허리를 끊어 주십시오. 조선에서 쓰이는 무역선만 하여도 아국의 병선보다 크고 강하지 않겠습니까.”
“수군을 양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오.”
“하지만 북방 일대를 쉬이 방비한 조선의 힘이라면 몇 년 이내에 왜구를 소탕할 규모인 오십 척이 넘는 군함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겸이 온 이유가 드러났다. 다른 환관이면 그저 배를 만들어서 왜구를 소탕하라는 이야기 하나로 끝나겠지만 병조에 있는 사람이니 조선의 육군 규모와 상선 규모로 수군 잠재력을 역산한 것이 분명하였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손해가 막심하다. 본래 계획은 원양을 나서면서 무역을 행하고. 이후에 경험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원양 함대를 구성하는 방향이었다. 단순한 근해 수군은 돈 퍼먹는 기계다.
함선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을 넘어서기 힘들며. 전문 항해사에 각종 선원들 그리고 병사들의 봉급을 감안하면 예산이 빠듯하다. 형님도 허를 찔린 듯이 함대 규모를 줄이면서 애써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먼 훗날의 이야기이며 지금은 서른 척에 지나지 않소. 또한 강남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는 일이라 하면 보급이 문제요. 배를 강남까지 보내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하면 너무나 먼 거리요.”
“설령 보급이 문제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항주(杭州 - 현 절강성 항주) 일대의 항구에 조선의 군선이 정박함을 허가할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수군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조선의 수군이 반드시 머물러야 한다는 소리이다. 명나라는 토목의 변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 같이 보였지만 새로운 함대를 창설할 여력이 사라진 것이다.
당장 화중과 화남의 장정들이 소모되었고 여기에 요동 일대의 사민과 장성 축조를 더하면 국고가 바닥날 지경에 이르겠지. 그러니 돈이 많이 드는 수군은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고 조선을 윽박지르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당장에는 힘든 일이오.”
“당장의 일이 아닙니다. 도적이 들끓고 있는데 도적떼의 수뇌에게 인삼을 파는 것은 옳은 일이며. 도적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을 돕는 일은 그르다는 말씀이십니까?”
궁색한 말이긴 하지만 뼈가 들어있는 말이었다. 여기까지 깔아줬는데 들어오지 않으면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형님이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러하면 항주에서 머물 필요도 없소. 아국에게 이주(夷洲)에 항구를 설치하게 허락하여 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오.”
대신들 모두가 신음성을 내고 우겸 또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알아차렸다. 이주는 대만의 옛 명칭이며 여기를 거점으로 삼아 동남아 무역의 시작점을 만들 계획이다.
“이주라 하면 야만인들이 기거하는 섬인데 조선이 어찌하여 그런 곳에 항구를…….”
“유구의 내란으로 인하여 설탕이 아국으로 들어오지 않는 참이라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였소. 이주에 항구를 두어 밭을 일구고 설탕을 제배한다면 이문을 챙길 것이 아니겠소.”
“이주는 본디…… 아닙니다, 황상께서 아주 좋아하실 주제입니다. 이주와 조선을 오가는 경로와 왜구들이 들어오는 길을 가로지르니 바람직한 일이군요.”
우겸은 분명 대만을 개척하는 험난함과 멀어진 항로로 인한 조선의 피해를 감안하면서 저울질을 하겠지. 어차피 해금령 이전에도 대만의 개척은 해안 일부에 그쳤으며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을 것이다.
제대로 된 글도 모르는 부족들이 닥치는 대로 습격하는 험난한 섬에 항구를 세운다면 조선이 입을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형님이 좋아할 일이다. 원래 계획한 중간 기착지는 팽호열도(澎湖諸島) 였으니까.
“이주를 오가는 함선을 만드는 일, 여기에 병졸들을 훈련시키고 무장하는 일, 이주를 개척하는 일까지 감안하여 오 년은 소요될 것이오. 이후로는 이주와 아국을 오가며 왜구를 소탕하는 일에 힘쓰겠소.”
“분명 옳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혜안을 보이시니 조선의 앞날이 밝습니다.”
“부디 좋은 말씀을 전해주시오.”
명나라 사신들이 돌아가자 형님이 용상에 앉아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난데없는 명나라의 요구를 더더욱 깊숙이 받아들인 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모두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경들은 들으시오. 본디 왜국의 혼란이 가중될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아국은 대월국(베트남)으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할 일이었소. 이는 왜국과 유구를 통하여 전해지는 물자를 끊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오.”
“우의정 정분 아뢰옵니다. 명국이 포기한 이주가 아닌 명국에서 제안한 항주에 머무르면 충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항주에 머무르면 아국의 병사들을 윽박지르는 이들이 생길 것이며. 아국이 얼마나 많은 무역을 행하는지 알 것이 아니겠소. 그러한 일은 피해야 하는 것이오.”
이후로도 각종 의견이 오갔지만 형님의 의견은 확고하였다. 대신들 모두가 인도와 아라비아 반도를 오가는 무역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으니 반발은 있었지만 훗날을 대비하여 이주를 개척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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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9월. 동해 바다는 가을이 넘어가는 무렵인지라 거칠고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이런 바다 위에서 뭘 하냐고? 올해 말부터 오키나와로 나갈 수군을 훈련하고 있지.
“야 거기! 이 자라 같은 놈아! 돛대 밧줄 당겨! 어디서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바람이 어디냐! 서쪽으로 불고 있으면 배가 옆으로 넘어가잖아! 어서 바람 부는 방향을 받아내도록 감으라고! 자라가 아니고 남생이만도 못한 새끼야! 그건 반대야!”
거센 발길질이 선원의 옆구리에 쑤셔 박히자 선원이 바닥을 뒹굴었다. 여국강을 비롯한 정화의 함대에 소속된 자들은 지난 육 개월 사이에 입신체비를 행한 덕분에 젊은 시절의 몸을 되찾았다.
덕분에 젊은 시절의 거친 성격마저 부활해 버렸는지 지금도 난리법석이다. 어설픈 명나라 말과 조선말이 뒤섞인 욕설을 퍼붓고 옆으로 쓰러진 선원을 두들겨 패려는 참이었다.
“아이고 어르신!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그래? 하지만 이런 놈들은 좀 두들겨 패야 정신을 차린다고!”
“높은 직책에 있는 분이 경망스럽게 행동하시면 다른 이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그…….그런가?”
여국강의 분노는 자신의 팔을 잡고 뜯어 말리는 정5품 별좌(別坐)의 직책인 한명회를 보자 갑자기 푸근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는 애써 목을 가다듬으면서 손수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일을 잘 하라고! 봐라! 돛대 밧줄은 이렇게 당기는 거야! 뒤에는 뭘 하나! 항로를 북서 방향으로 틀어라!”
깃발이 펄럭거리면서 지시를 내렸고. 뒤에 있던 여섯 척의 배가 모조리 항로를 틀어 선두에 있는 함선을 따라왔다. 아직까지 모든 일이 서투르지만 여국강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여튼 배우는 일은 제법 빠르다니까. 대군 어른께서도 그렇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가르치는 이가 뛰어나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고 보니 우산도(于山島)는 언제쯤 당도할 것 같소?”
“지도가 정확하지 않아서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지남철(나침판)을 보면 방향은 그럭저럭 맞는 것 같군요.”
여국강의 교육은 확실하다 못해 화끈했다. 벽란도 일대에서 기본적인 조함술을 익힌 다음에는 바로 남해를 넘어 동래에 정박한 이후 육지가 아닌 섬에 단번에 찾아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가장 머나먼 섬인 독도를 택했다. 불행하게도 지도에 제대로 된 독도의 위치가 없어서 나흘 째 동해바다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탐망을 서던 사람이 고함을 쳤다.
“대군어른! 천리경에 바위가 보입니다! 두 쌍의 바위가 바다 위에 있습니다!”
“우산도가 맞구나! 항로는 어떻게 되느냐!”
“정북 방향입니다!”
독도에 다가서자 암초가 삐죽삐죽 드러났고. 선원들이 겁에 질렸지만 여국강은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라 생각했는지 신이 나서 사방을 뛰어다니며 지시를 내렸다.
“이런 험난한 바위에 배를 가까이 대면 안 된다! 그러니 자라새끼처럼 움츠려 있지 말고 똑바로 움직여라!”
“네! 알겠습니다!”
“타공을 천천히 꺾어라! 함부로 꺾으면 암초에 배가 긁히니까!”
더 이상 접근하기 힘든지 돛이 내려지고 배가 멈추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비석에는 정음과 한문을 반반씩 섞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니 확실한 역사적 증거가 될 거다.
[영덕 2년. 수양대군 이유가 주상전하의 명을 받아 전조의 충신 김유립(金柔立) 이후에 우산도에 올라와 비석을 세움]
“이 비석은 주상전하의 명을 받든 내가 직접 세울 것이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도 한 번 내려가 보지요.”
“압구 자네가? 마침 나 혼자서 들려 하니 버거운 물건인데 잘 되었군.”
낑낑거리면서 새똥을 밟고 바위를 타고 올랐다. 기억을 되새겨서 해군 초소가 있는 곳 근방의 약간 평평한 곳의 땅을 파내고 비석을 묻었다. 훗날이 되면 훼손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수백 년은 버텨줄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