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79화 - 유민(流民) (2) >
형무소에서 일하는 이들은 실력이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각기 재주를 가진 장인(匠人)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였으며 형무소는 그저 녹봉을 받고 일하는 일종의 휴식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장인들이 모든 힘을 기울여서 자신의 재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조선의 장인이 대나무를 잘라 가지런히 쥘부채의 형상을 만들고. 다듬어서 뒷면에 한지를 붙인 다음 붓을 들어 난초를 그려넣어 마무리했다.
반면에 명나라에서 온 유민은 화로를 가져오더니 인두를 달궈 천천히 반대편의 대나무 살에 문양을 새겨나갔다. 처음 선보이는 낙죽(烙竹)에 조선 장인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이걸 어떻게. 어찌하여 밋밋한 대나무에 이런 회화를 새길 수 있나.”
“오동나무를 지져서 결을 살리는 일이면 들어보았지. 하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가지고 저렇게 세밀하게 움직인다고?”
“저렇게 하면 종이를 바꿔 붙여도 그을려진 자국은 사라질 일이 없지 않은가.”
장인 두 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나무 쥘부채를 이리 저리 살펴본 성삼문은 결론을 내렸다. 대나무를 깎는 기술도 동일하고 붙여 넣은 한지의 질이 동일하면 대나무를 지져 문양을 만든 유민의 손을 들어야 한다.
“쥘부채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명국에서 건너온 이의 것을 쓰겠소. 이의 있소?”
“없습니다. 저런 재주는 꼭 배우고 싶군요.”
이글거리는 인두를 화로 안에 던져 넣은 남자가 기지개를 펴면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손을 마음대로 놀리니 기분이 좋다 못해 날아갈 것 같은 눈치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장인들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성삼문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조선에서 모르는 방법으로 이겼으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구려.”
“그러하니 재주를 많이 겨뤄 보면 서로의 실력을 명확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왕 조선으로 온 몸이니 조선의 기술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하다면. 다음은 갖바치끼리 겨뤄봄이 어떻소? 서피이엄(鼠皮耳掩 - 가죽으로 만든 귀마개)로 하겠소.”
이엄이라는 말이 나오자 조선의 장인이 기세 좋게 나와서 손가락을 풀었다. 반면 명나라 유민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한 명이 나섰다. 제법 늙은 장인이었다.
“서피라 하였는데 정말 서피(鼠皮 - 쥐가죽)란 말인가? 초피(貂皮 - 담비가죽)라면 만져 본 적이 있어도 이런 얇은 가죽이라니.”
“그렇다면 시작하시오!”
두 번째 대결은 명나라 장인의 패배로 끝났다. 부채면 모두 같은 부채지만 이엄과 같은 방한도구는 화남 일대에 살고 있던 이들이 경험한 적 없는 물건이었으니 형태도 어설프고 기능도 온전하지 못했다.
이쯤에서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성삼문의 생각과 다르게 명나라의 유민들이 식어가는 분위기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간만에 손을 놀리니 그들도 흥이 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희가 살던 화남은 따스한 곳이니 이엄은 모르는 물건이었습니다. 이는 형평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형태가 온전치 않으니 실패한 일이 아니겠소.”
“제아무리 명국 장인이라 해도 모든 일을 잘 하는 것은 아니라니까!”
“한 번 이겨가지고 되겠나? 이번에는 철물을 다루는 이를 불러 주십시오.”
이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서로 눈에 불이 붙어서 노려볼 지경에 이르렀다. 성삼문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장인들이 실력을 뽐내며 서로의 기술을 비교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흘이 지나고 형무소의 장인들과 유민 출신 장인들의 기물이 탁자 가득 놓여 있었다. 하나하나를 살펴본 성삼문이 결론을 내렸다.
“도공(陶工 - 도자기 장인)은 명국에서 오지 않아 비교할 이가 없으니 결론을 내리겠소. 명의 유민들이 실력이 더 빼어나구려.”
간혹 조선의 장인들이 이길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실력은 명의 유민들이 한 수 위였다. 설령 이기는 일이 있어도 다시금 비교할수록 격차가 확실히 드러났다. 그렇지만 성삼문이 보기에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껏 장인들이 의욕을 가졌지만 유민들은 두 달 뒤에는 한양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시일이 지나면 열정이 사라질까 염려한 성삼문이 한숨을 쉬고 있으니 얼굴이 푸석푸석한 상인이 말을 걸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까?”
“기껏 아국의 장인들이 의욕을 가지고 있건만. 조만간 한양으로 옮길 것이니 다시금 의욕이 사라지겠구려.”
“하지만 한양에서 일하여도 좋은 물건을 만들기는 힘든 일입니다.”
“장인이라 하면 좋은 물건을……. 그렇군, 명국의 물건과 같은 것들이 저자거리에 마구 돌아다니면 큰일이 아닐 수 없소.”
공인들이 명나라에서나 만들어지던 사치품을 만들어 내면 조정 대신들은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다. 지난 두 번의 전쟁으로 조정에서 친명파 대신들의 힘이 약해지다 못해 사라지다 시피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신이 왕래하는 일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명나라의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물품이 명나라 사신의 손에 들어간다면? 출처를 물을 것이고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계속 속일 방법은 없었다.
결국 도성에서 일하는 장인이라 하여도 자신이 가진 기술을 온전히 자랑할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밖으로 유출 되지 않는 궁궐의 물건이나 만들면서 살아야 하리라. 그런 생각을 마친 성삼문이 놀란 눈으로 상인을 바라보았다.
“장인들이 어찌하여 조선 장인들의 기술을 눈으로 훔치려 하였겠습니까?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재주를 모두 드러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수들과 장인들의 의욕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소?”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명분으로 삼아 접근할 생각이었지요. 하온데 제가 상재(商材)가 있는지라 좋은 방안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방안이라니.”
상인은 다른 관원들이 들을까 염려되어 성삼문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나무를 숲에 숨기듯이. 장인을 숨기려면 장인 사이에 숨기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스승이 제자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명나라 유민들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재주를 온전히 뽐낼 수 없다. 그렇다면 서로 배워서 다른 물건을 만들어 내면 충분한 일이 아닐까. 성삼문이 생각에 잠겨있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유민을 형무소 인근에 두어 명장(名匠)으로 칭하고. 보통 장인들을 아래에서 일하는 이들로 둔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밖에서는 서로의 기술을 배우고 안에서는 죄수들을 가르치면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만 손을 쓰면 죄수들을 가르치는 일을 수월히 하겠지요.”
듣고 보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조선의 양식과 명나라의 양식이 모두 담긴 물건을 만들면 사신들이 알아차리기 힘든 일이니까. 하지만 성삼문은 좋은 말에 담겨있는 의도를 알아 차렸다.
“서로 간에 기술을 전수하는 일에서 좋은 물산들이 생겨남은 당연한 일이고. 그러한 물산은 익숙한 이들에게 팔려 하겠군. 그렇다면 이러한 자리에 끼어 이문을 챙기겠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원하면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몸이 되었으니 사욕을 부리더라도 너무 많이 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뜻은 주상전하께서 정하는 일이라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어떻게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성삼문은 조정으로 보내는 서한을 작성해 나갔다. 그가 알고 있는 조정의 사람들이라면 상인의 돈벌이가 아닌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만들어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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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명을 내리자마자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연희당은 80명가량을 수용 가능한 커다란 장소이며 당연히 일하는 하인들을 위한 고직사와 입신체비장은 제외한 인원이었다. 하지만 단번에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이고 바쁘다 바빠! 솥 충분해?”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큰 솥으로 가져올걸!”
주방은 미어터졌고 파놓은 우물은 매일 물을 채워놓아야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집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모조리 달려와서 일을 도왔다. 여기에 유민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먹는 일에 열중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여국강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연희당으로 자리를 옮긴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사람들은 굶주렸던 경험을 잊지 못하는지 필사적으로 먹고 또 먹었다. 급체(急滯)를 당한 사람이 열흘 동안 스무 명에 이르렀다.
“조선에 당도하기 전에는 겨우 주린 배를 채우던 이들입니다. 그러하니 이런 결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린 배를 겨우 채웠다 하였소? 하지만 요동 총병관이 식량을 지급하지 않소.”
“저희가 채소를 기르는 농부도 아니니 그저 노역으로 주는 것만 받아먹어야 하였지요. 그렇게 배를 곪으니 제 손자는 요동에 있는 내내 자라지를 않았습니다.”
서유정이 얼마나 생각이 없는지 다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품삯을 매기더라도 어느 정도 융통성을 두어야지. 일을 못하면 식량 배급을 끊는다면 노동 효율은 떨어지고 이렇게 유민이 생겨나니까.
하지만 이런 일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의서를 작성하는데 꼭 필요한 항목이다. 내가 아무리 현대 지식을 늘어놓아도 사례가 있어야 설득이 가능하니 모두 받아 적고 있었다.
“혹여나 요동에 있을 적의 식사는 어떠하였소?”
“기껏해야 절인 무에 잡곡밥이 전부이며 가끔 콩을 모아서 두부나 쑤어 먹었지요. 술은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고생이 많았겠소. 그렇다면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조선의 글을 배우도록 하자!”
오전에는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한다. 제생원으로 자리를 옮겨 정음 교재를 펴놓게 한 다음 칠판에 하나하나 글자를 써내려갔다. 처음 보는 훈민정음의 모습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이게 글자인가요? 조선에서는 한자를 쓴다고 하였는데요?”
“조선에 왔으니 조선의 글을 배우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발음이 다르고 쓰임이 다르지만 조선에서 살고자 하면 이러한 글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남아 여아 상관없이 4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혼자서 가르친다 하면 이 시대의 유생들 모두가 혀를 내두르리라. 그렇게 정신없는 수업이 끝나면 오후 일과의 시작이다.
내가 담당한 일은 도성에서 일하는 재활의들과 함께 노인들의 부상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노역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자들의 몸이 멀쩡할 이유는 없었다. 관절 부상은 기본이고 심한 자는 걷지도 못 할 지경이었다.
“저는 무릎이 아픕니다. 노역을 행할 적에 무릎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매일 칼로 찌르는 듯 아프더군요.”
“그러하면 하지의 근력을 강화하여 봅시다. 각굴(런지)을 시작으로 하여 관절이 보해지면 충분히 효험이 있을 것이오.”
“정말로 감사합니다! 왕제(王弟)이신 분이라 하였는데 대단하십니다.”
물리 치료는 단조롭고 시일도 오래 걸리는 일이다. 냉찜질과 온찜질을 손수 해주면서 노인들을 하나하나 돌보고 있었는데 옆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여름에도 기침과 가래가 끊이지 않으니 이는 폐부에 습기가 순환하지 않은 것이오. 그러니 잉어를 회로 만들어 생강과 식초 그리고 마늘을 버무려 섭취하면 기침이 멎을 거요.”
잉어를 잡아다 회로 먹어?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현대에서도 민물고기를 생으로 먹으면 디스토마 감염을 걱정해야 하는데 이 시대에 잉어를?
“잠시만 기다리시오. 나이가 많은 자이니 회로 먹으면 섭생이 거북해지지 않소. 그러하니 잉어를 고아 찜으로 만들면 충분하지 않겠소.”
전순의가 나를 노려보다가 잠자코 눈을 내렸다. 궁궐에서 어의를 파견했다 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전순의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내 속을 박박 긁고 있었다.
윤씨 부인의 치료를 할 때에도 탕약의 처방을 바꾸지 않는 독선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같이 지내보니 정말로 독선적이다 못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 대군인 내가 나서도 어떻게든 근거를 제시하고 받아치지 않으면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임산부에게 쓰이는 처방인데 옳지 않습니다.”
“혹여나 일이 잘못될지 염려되지 않소. 쇠약한 이이니 안전한 길이 옳은 법이오. 잉어를 고아 먹여도 듣지 않으면 회로 바꿉시다.”
“그렇다면 무를 충분히 넣으면 좋겠군요. 모든 질병은 식품으로 먼저 치료하고 그 다음에 약을 쓰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의서에는 내가 물고기 배를 해부해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기생충 관련 항목은 추가할거다. 그렇지 않으면 전순의 같은 의원 덕분에 디스토마 감염자가 속출할 것이 분명하니까!
오죽 답답했으면 원래 역사에서의 전순의에 대한 일이 떠올랐겠는가. 이 사람은 명의로 칭송받다가 형님의 몸에 난 종기를 엉망으로 치료하는 바람에 청지기로 좌천당한 사람이었다. 역사가 변해도 사람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당연한 말이지만 노인들 모두가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런 자들을 위해서 입신체비를 가르치려 하였으니 이걸 담당한 사람이 보직을 변경한 한명회였다.
“자! 어르신! 팔의 힘을 조금만 빼십시오. 옳지 좋습니다! 좀 더!”
“끄어이구! 이러다가 죽겠군!”
“죽겠다니요! 제가 멀쩡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한명회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한명회는 권력과 돈에 미친 인물이었는데 이런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고?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일이지만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내 손자가 올해 여섯 살인데 자네 딸과 혼사를 추진하고 싶군.”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여섯 번이 아니고 네 번째입니다. 앞으로 여섯 번 더!”
“여섯 번 더? 천축 정도야 여섯 번이라도 같이 오가겠네.”
“천축봉이요? 그건 어르신께서는 아직 행하지 못할 물건입니다.”
둘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한자어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나중에는 인연을 맺은 여국강이 한명회와 사돈을 맺고 천축으로 보낼 일 같지만 나의 일이 아니니까 넘어가자.
“오늘도 고생이 많았소.”
“저 또한 배움이 많았습니다. 그러하면 의서는 이틀 뒤에 논의하는 일로 하지요.”
전순의를 비롯한 의사들도 돌아가고 이제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루를 마치는 입신체비를 위해 역기를 잡고 가볍게 공좌(스쿼트)를 시작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야, 옆집의 사람을 다른 곳으로 이사 보냈으니 스무 명 정도는 거처를 옮겨도 되겠구나.”
“숙부님께서 힘을 쓰신 덕분에 일이 편해졌습니다.”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 숙부가 힘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일은 연희당에서 사람을 옮기는 일을 숙부님들이 담당한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택의 주인들을 설득해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노인들의 치료도 차츰차츰 진행되고 있으니 앞으로 열흘 정도만 고생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숙부님을 배웅하는데 난데없이 궐에서 사람이 왔다.
“대군어른! 주상전하의 명입니다!”
“명이라 하면 또 무엇이냐?”
서둘러 달려가 형님의 명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꺼려하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명국의 사신이 의주에 도달하였다. 조만간 도성으로 올라올 것이니 유민들을 남한산에 있는 도감군의 숙소로 이주시켜라.]
손에 힘이 들어가며 서한을 구겨버리던 찰나 힘이 풀렸다. 그토록 고생했는데 명나라에서 알아차리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니까. 병자를 옮기는 일도 한참 걸리니 지금 당장 시행할 일이다.
“내가 어쩌자고 연희당을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게 한탄해 보았자 주어진 일이 변하지 않는다. 벌써 궐에서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병사들이 도착했다. 병조판서 조극관 또한 얼굴을 붉히면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