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40화 (140/573)

< 2장 78화 - 유민(流民) (1) >

일찍이 조선에서 유민(流民 - 유랑민)이 있었던 일은 많았다. 건국 초기에는 여진족들의 귀부를 유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기근으로 식량을 찾기 위해 생겨난 유민도 제법 있었다.

유민을 오래 버려두면 집단을 형성하고 도적이 되는 일이 잦았으니 농토에 묶어 두기 위한 제도가 철저히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온 대규모의 이주민에 대한 경험은 없었으니 대소신료 모두가 이러한 일을 처리할 방법을 몰랐다.

당연하지만 나 또한 알 방법이 없었다. 대체 명나라에서 무슨 약을 먹었기에 유민이 생긴단 말이야? 조선으로 온 유민들은 명나라가 망할 무렵에 생긴 유민이 전부인데. 그 좋은 나라에서 왜 여기까지 왔지?

“정녕 명국의 유민들이란 말인가.”

“복식이 험하여도 명국의 것이며 물품 또한 명국의 것이 맞습니다.”

“혹여나 요동에서 아국이 백성을 납치하였다 오인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일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만에 하나의 일이지만 조선과 요동을 오가는 무역선을 통해 명나라의 어민들을 납치했다는 의혹을 받을 지도 몰랐다. 그러자 호조 판서인 이인손이 자신 있게 답했다.

“유민이 당도하였을 무렵에 아국의 첫 선단이 요동에 짐을 내렸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하오나 이들이 어떠한 해로를 타고 왔는지 의문이 듭니다.”

“평안도 감찰사 김연지가 경계를 소홀히 하여 평안도 일대의 해안에 유민이 오는 일을 몰랐으니 이를 엄중히 문책하여야 하옵니다.”

“문책하려 하여도 평안도에 수영(水營)이 없었으니 탐망에 나설 이가 없었다. 이러한 일을 함부로 정할 것이 아니니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 일러 두어라.”

대소신료 모두가 고개를 숙였지만 나도 그렇고 형님도 복잡한 심정이겠지. 만약 유민을 빙자한 도적이라고 판명나면 평안도에 수영을 신설하고. 해군 증강과 무역 활성화가 모두 엉망이 될 것이다. 모든 일을 할 만큼 예산과 명분이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었다. 바다 정 중앙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조선의 선단에 보이지 않았다면 어중간하게 먼 바다를 타고 내려왔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항해술을 보이는 이들이 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신 수양대군 아룁니다. 평양 일대에 다다른 명나라 유민들이 해안을 순시하는 병졸의 눈에 보이지 않음은 옳습니다. 하오나 바다를 오가는 선단에도 보이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이옵니다.”

“실로 의문이 드는구나. 그러한 일을 행하려면 큰 배가 다니지 않는 해안에서 거리를 두며 배를 몰아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러한 곳을 거니는 일은 배를 오래 몰아온 이들도 힘들다 하였다.”

질문이 적절했는지 형님이 호조판서 이인손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입이 열리면서 어떻게든 해답을 쥐어 짜냈다.

“유민들의 배가 작으니 물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면 불가한 일은 아닙니다. 하오나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하니 의심이 가는구나. 이러한 일은 삼남 일대를 괴롭힌 왜구(倭寇)가 아니면 불가한 일이다. 심지어 왜구와 같이 격군을 두지도 않은 돛단배라 하지 않았느냐.”

“만에 하나 거센 물살을 쉬이 가를 정도로 뛰어난 조함술(操艦術)을 가졌다면 배가 상하지 않게 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하오나 그 고난이 얼마나 될 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사옵니다.”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한 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말이야 쉽지 험한 겨울 바다에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유빙을 뚫는 일도 대단하고. 해안에 주둔한 병력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의 사이를 뚫는 일은 조선의 항해술로 상상조차 할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있었던 대마도 정벌도 거제도에서 하루거리에 있는 대마도를 커다란 병선으로 일제히 공격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동에서 평양까지 해안을 따라 오면 열흘은 걸리겠지.

결국 둘 중 하나다. 실패한 해적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엄청난 조함술을 가진 특수한 유민이거나. 모든 신료들이 침묵하자 결국 내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형님의 생각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나 하나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문책하여 어떠한 의도를 품고 아국으로 당도하였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취에 있어서는 의금부에서 관할하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 우의정은 유민들의 거취(居就)를 어떻게 하였는가.”

아직도 영의정에 자리에 있는 김종서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니라는 듯이 허리를 꼿꼿이 펴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젊은이들은 김연지가 정한 대로 형무소에 두었으며. 도성으로 올라온 이들이 노인과 아녀자이니 돈의문 남쪽에 백성들의 집을 빌려 임시로 기거하게 하였습니다.”

“옳은 일이다. 그렇다면 의금부에 하옥한 이들도 있다 하지 않았는가.”

“대장(大將 - 여기서의 의미는 대표)을 칭하는 이는 다른 자와 만나지 못하게 의금부에 임시로 하옥하였습니다.”

“궁궐로 들여라. 내 직접 일을 알아볼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의금부에 임시로 하옥되어 있던 노인 한 명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걸어 들어오더니 길게 읍하면서 형님에게 인사를 올렸다.

“조선의 국왕 폐…… 전하를 뵙습니다. 본디 화남에서 낙죽 일을 하던 여국강이라 합니다.”

“예법이 바르니 본디 관직에 있었던 이가 분명한 일이구나. 하지만 유민(流民)이라 하였는데 혹여나 사특한 마음을 품고 아국에 들어온 일이 아닐지 염려된다.”

“요동 총병관으로 있는 서유정은 옛 시대의 계손자(季孫子)와도 비견될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견딜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그리하여 살기 위해 조선으로 도망친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라 하였느냐. 계손자라 하면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를 뜻하겠구나.”

현대로 치면 너무 가혹한 일이 벌어져서 살 방법이 없었다는 뜻인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갑제(里甲制)와 위소제(衛所制)의 붕괴가 진행된 시점도 아닌 지금의 명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신료들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황당하다는 말을 늘어놓았고. 특히나 요동으로 몇 번이고 다녀온 금성대군은 앞으로 나서서 여국강을 꾸짖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 내 알기로 요동 일대에는 명국 전역에서 올라온 곡식을 보내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산야를 개간하는 고난을 겪어도 감내할 정도라 하였거늘.”

“그러한 일은 모두 겉을 보신 일입니다. 농민이 아닌 자들은 요하의 치수를 행하며 갖은 고난을 겪었으니 도저히 버틸 재주가 없었습니다.”

“요하를 어찌하여 치수한단 말인가? 늪과 수렁을 두어 험난함이 몇 배로 심할 것인데.”

“저도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조선으로 내려온 이들은 하나같이 공인과 상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던 이들인데 치수와 같은 중노동에 나서니 고난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공인과 상인을 최근에 들어서 농지가 생겨나는 요동에 보내봤자 할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상업이 발달할 이유도 없고 물품이야 나라에서 지급할 것이니. 분명 정통제가 백성을 생각한답시고 멍청한 일을 저질렀겠지.

그렇지만 요동 총병관으로 일하던 서유정 또한 멍청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을 사방으로 퍼트려 각지에서 개발을 하면 충분하지 굳이 치수와 같은 중노동을 시켰으니 견디지 못했겠지. 결국 형님이 본론에 들어갔다.

“궁금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 배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배는 눈대중으로 만들었습니다. 겨울 동안 손이 비니 마을 사람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드니 어설프게 여러 척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하면 험난한 바다는 어찌 넘어왔단 말인가.”

“제가 젊을 무렵에 천축을 넘어 대식국의 수도에서 검은 돌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바다를 경험하였는데 황해 바다라 하여도 앞마당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순간 환호성을 지르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대식국의 수도에서 검은 돌이라면 메카에 있는 이슬람의 유물인 검은 돌이다. 그렇다면 여국강은 정화의 함대에 소속된 귀중한 인재다.

형님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았는지 여국강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대전 안에 침묵이 감돌고 형님이 기쁜 얼굴을 숨기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하면 어찌 조선으로 온 것이냐. 그러한 조함술이면 강남조차도 한달음에 당도할 일이 아닌가.”

“조선의 배를 만드는 이가 제 벗인 방길주입니다. 하오나 뛰어난 자가 만든 배를 헛되이 사용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조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당장 선공감으로 가서 상호군 방길주를 들여와라.”

형님은 올라가는 입 꼬리를 억누르기 위하여 애쓰고 또 애썼다. 그렇지 않아도 물길을 아는 사람을 빌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전수하는 일에 시일을 들여야 하는데 문제가 거의 다 해결되고 있었으니까.

오랜 간만에 얼굴을 비춘 방길주는 형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여국강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방길주의 입이 열렸다.

“어디선가 낯이 익은데. 무엇을 하다 여기까지 왔소?”

“형님이 만든 배를 허투루 타는 멍청이들을 가르치려고 요동에서 예까지 왔소! 나 기억나지 않으시오? 형님이 만든 배를 탔던 자요!”

“여국강이 아닌가!”

조선의 관복을 입고 편안한 생활을 하던 방길주와 달리 아직도 빠진 손톱이 보이는 여국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조선에서 다시 만난 기쁨을 억누른 여국강은 무릎을 꿇고 형님에게 절을 올렸다.

“여국강, 머나먼 명국에서 살 길이 급급하여 유민이 되었으나 가진 재주는 뛰어나다 자신하옵니다. 그러하니 귀부를 허락하여 주시면 천축을 넘어 대식국까지 한달음에 오갈 수 있는 선원들을 키울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 기한은 얼마면 족하겠는가.”

“삼 년이면 족합니다.”

“급하여서 되는 일이 없으니 최선을 다하여라. 그러하면 이제 다른 유민들의 거취를 정할 차례구나.”

여국강 혼자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삼백 명이나 되면 따로 관리하기도 애매한 숫자이며 이들은 여진족과 같이 생활 능력이 뛰어난 자들도 아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형님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장성한 이들이 일백에 달하니 따로 두면 자기 마음대로 오갈 것이 분명하다. 이들을 개성과 한양에 나누어 집을 마련하되 거처를 온전히 만들기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형무소에 두는 것이 옳다.”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불편함이 있더라도 기껏해야 두 달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선택이다, 잘못해서 젊은 사람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명나라 사신과 만나면 국제적 문제가 커질 것이니. 그런데 형님이 나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노인과 아녀자는 연화당에 두는 것이 옳다. 연화당의 본래 목적은 고아들을 보호하는 일인데 지금은 종친들만 오가지 않더냐. 그러니 수양대군이 심혈을 기울여 이들을 대접하여라.”

“전하, 연화당에 둘 자들은 기껏해야 일백에 불과하옵니다. 하오나 유민은 이백에 달합니다.”

“주변의 사택을 빌리고 제생원의 건물을 빌리면 충분한 일이 아니겠느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곳에 둘 장소는 많은데 왜 나를! 하지만 형님은 이제 대놓고 웃으시면서 말했다.

“이들이 험난한 생활에 지쳐 몸이 상하였을 것인데 의술이 많이 필요할 것이며. 입신체비에 능한 수양대군이 있으니 좋은 일이구나.”

다른 신료 모두가 나를 보며 웃음을 짓는데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어느 관청에 소속되더라도 일감이 늘어나니 나 혼자서 독박을 쓰는 것이 나은 일이라 생각했겠지.

이런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논의가 끝나고 여국강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말을 늘어놓는다. 나는 식료찬요 편찬하는 일만 해도 산더미인데 이런 짐 덩어리 까지 끌어안게 생겼다고 여겼지만 귀중한 손님이니 말은 들어야 한다.

“이보시오. 신장이 작고 체격이 우람하며 생쥐 같은 수염을 지닌 관리를 아시오? 요동에서 본 자인데 혹시나 알고 계십니까.”

“그러한 자는 나도 모르겠, 내가 알고 있는 한명회라는 자요.”

신장이 작고 체격이 우람하며 생쥐 같은 수염을 가진 호조 관리는 한명회 하나지. 그런데 한명회라는 말을 하자마자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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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백 명에 달하는 명나라 유민들을 받아들인 성삼문은 난감해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장성한 남성들을 받아 들여도 형무소의 형벌에 투입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가둬두기만 해도 문제였다.

조정에서도 적게 잡아 두 달 동안 유민들을 형무소에 둘 것이라 하였으니 계속 가둬두면 난동을 부릴 지도 몰랐다. 다행이도 유민들은 형무소가 뭘 하는 장소인지는 알고 있었으니 잠자코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동거가 이어진 것이 보름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저 자들은 대체 뭐야?”

“몰라. 평양에서 잡아온 자들이라 하는데 그냥 거둘 곳이 없어서 여기에 두었다 하더라고.”

형무소에서 기술을 배우는이들. 정확히는 출소일이 3년 이하로 남은 죄수들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들 앞에 있는 장인들은 무심하게 일감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리 보아도 죄수가 아니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멀리서 뭐라 떠들지만 분명히 조선의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죄수의 머리에 회초리가 떨어졌다.

“이것아! 내가 나만 좋으라고 일을 가르쳐 주는 줄 알아? 똑바로 안 봐!?”

“죄송합니다.”

“기껏해야 삼 년 만에 일을 배운다고? 나라님도 무심하시지. 하여튼 녹봉이 꼬박꼬박 나오니 가르치는 것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한사코 거절하는 것인데.”

죄수들을 돌아보던 장인이 다시금 회초리를 들고 머리를 내리쳤다. 앞에 있는 죄수가 노리개의 연습용으로 쓰는 두꺼운 무명실을 제대로 꼬지 못했던 것이다.

“노리개가 우스워? 저자거리에서 쌀 석 되로 파는 값싼 놈 하나만 해도 손가락이 부르터서 지문이 닳아버릴 정도로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똑바로 할 것이지. 이 무명실만 해도 제법 비싼 녀석이니까 허투루 다루지 말라고. 이래서 이놈들을 언제 밥 벌어먹고 살게 만들지.”

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형기가 연장되지는 않지만 노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매듭을 이어나가는 장인의 손길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 가운데 한 명이 다가와 어깨를 잡은 것이다.

“당신 뭐요? 아니 말을 알아들을 길이 없는데 이 사람 뭐야?”

말이 통하지 않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서는 갈색으로 물들인 거위 깃털과 노리개에 장식으로 쓰일 놋쇠 조각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실을 끊는 용도로 쓰는 쪽가위로 능숙하게 깃털을 깎아 나갔다.

“당신도 장인이오? 그런데 어찌 손길이…… 이보시오! 그 놋쇠는 왜 부수는 것이오!”

“바닥에 뭐라 쓰는데요?”

“난 정음도 못 읽는데 이 한자는 뭐냐고! 저기 누구 계시오?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이는 와주시지 않겠소?”

급히 달려온 관원이 본 것은 停下, 가만히 있으라는 글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깃털과 놋쇠 조각을 다듬으니 깃털과 놋쇠는 하나로 어우러져 낙엽과 같은 모양으로 탈바꿈했다. 기지개를 편 남자는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놋쇠 조각을 두드리고 거위 깃털을 잘라 이런 물건을 만들다니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맞긴 하군요. 나리, 지금 저 사람이 뭐라 하고 있습니까?”

“점취(点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이 형편없으니 자신에게 점취를 배워보라 하는군.”

“지금 당신 뭐라고 했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르지만 깃털 만지는 일 하나로 누구를 가르치려 들어?”

“그렇다면 자신을 가르쳐 보라 하는걸.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죄수들을 가르치던 장인들이 몰려들었다. 바라만 보고 있던 명나라 유민들도 패를 이루어 나란히 섰으니 난동이 벌어질까 염려한 성삼문이 급히 달려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이들의 실력은 둘째 치고 일을 가르치는 것에 즐거움이 없으니 나서 보았습니다.”

“아무리 그러하여도 당신들 모두가 유민이 아니오? 편안히 쉬고 있으면 주상전하께서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이니 얌전히 계시오.”

“조선에 와서 고생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니 일을 가르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저 눈을 보십시오, 저렇게 맥이 없는 눈은 요동에서 보고 끝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또 보게 되는군요.”

죄수 한 명이 지목 당하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무런 배움도 없이 그저 눈앞의 손동작만 따라하고 있었으니 의욕이 있을 이유도 없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니라 생각하니 배울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가르치는 이도 마음이 없고 배우는 이도 마음이 없으면 장인(匠人)이 태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연유가 있습니까?”

“지금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손재주가 좋다고 핍박하는 일이 아닙니까? 저희가 나라에서 제일가는 장인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자들에게 뒤처지지는 않습니다.”

성삼문의 생각으로도 장인들의 수효가 부족하고 의욕이 없으니 죄수들을 가르치기 힘든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윽박질러서 될 일이 아니니 그저 잠자코 지켜보는 답답한 날이 이어졌다.

그러한 장인들의 자존심이 명나라에서 온 유민들에게 무너지고 있었다. 다들 자신 있게 나선 것을 보니 적어도 어느 하나 정도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리라. 고심하던 성삼문은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서로의 실력을 비교할 주제를 마련해야겠군. 조만간 날이 더워질 것이니 대나무로 만든 부채가 잘 팔릴 것이 분명하니 쥘부채를 하나씩 만들어 보시오.”

“하나라고 하셨습니까? 쥘부채라 하면 조선 물건이 최고지요.”

“쥘부채? 정말 쥘부채 하나로 판가름을 해야 한다니.”

두 장인은 자신의 도구를 정렬하고 대나무 토막을 붙잡았다. 잘 말려진 대나무 토막이 끌과 망치로 하나씩 분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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