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77화 - 식료찬요(食療纂要) >
신숙주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정보가 많이 필요했는데 이어진 신숙주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오 년 전부터 말씀드리면 일곱째인 형(泂)이를 낳고 잠시 일이 바빠 이 년 뒤에 여덟째인 필(泌)이와 막내딸인 연(練)이를 낳았습니다.”
“자식이 아들 여덟에 딸 하나라고 하였는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본래 출산하고 사흘 뒤에는 일어설 정도로 쇠함을 몰랐는데 갑자기 습곽란(濕霍亂 - 구토 및 설사증상)이 일어났지요.”
신숙주는 바보가 아니다. 당연히 아내가 몸이 쇠약하다면 절제력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니까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몸이 약해졌다는 말이 사실이겠지. 신숙주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진다.
“백약이 무효하다 하였으면 의원들을 불렀을 것인데.”
“이전부터 아내를 간병하던 의원 대신 은퇴한 양홍수 대감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기력이 쇠하는 원인을 찾아낼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하다면 내가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네.”
냉정한 답변이지만 나 또한 확신을 가질 수 없으니 일에 나설 수 없었다. 신숙주의 부인은 무슨 이유로 몸이 쇠약했는지 원인이 불명확하다. 만에 하나 이 시대 기준으로 불치병이면 입신체비고 뭐고 간에 헛수고가 된다.
“제 안사람이 기식엄엄(氣息奄奄)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행해야 알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입신체비라 하여도 많은 기대는 하지 말게. 정말로 중병을 앓는다면 내가 손을 쓸 방도가 없으니.”
“많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 길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신숙주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뭔가 해야겠다. 변절의 화신으로 알려진 신숙주가 아니고 명나라와 일본을 함께 다녀온 이 시대에서 사귄 친구가 아니겠는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간단한 설명을 마치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양홍수 대감이면 어의를 제외하면 도성 제일의 명의가 아닙니까.”
“하지만 의원의 시선과 입신체비를 행하던 시선은 다르지 않소.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무어라도 행해 봄이 좋지 않겠소.”
“하오나 배움이 부족하니 행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희현당(希賢堂 - 신숙주의 호) 또한 윤씨 부인이 쾌차하는 일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고 있소. 그저 벗을 생각하여 한번 나서보지 않겠소.”
손을 대서 도저히 답이 없으면 포기해도 좋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아내의 입이 열렸다.
“윤씨 부인이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렸는데 오히려 적은 배움으로 몸을 쇠하게 할지 염려되지만 나서 보겠습니다. 그런데 윤씨 부인이 이러한 곳에 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는지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신숙주의 부인이 내 집에 와서 병을 치료한다? 그건 심각한 결례다. 반대로 아내가 신숙주의 집에 가서 병을 치료해준다? 더더욱 결례다. 이런 난감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좋은 수가 떠올랐다.
“연화당은 사람이 없고 기거할 곳이 충분하오. 아이들을 잠시 다른 곳으로 보내 자리를 비우면 머무르기에 충분할 것이오.”
형님에게 이야기를 하자 잠시 고민하다 허락해 주셨다. 형님도 신숙주를 중요하게 쓸 생각이었는지 사람을 따로 보내려나 보다. 며칠이 지나고 윤씨 부인이 도착하고 신숙주의 집에서 쓰이던 물건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가끔 보아오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의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소.”
“주상전하께서 명하신 바도 있지만 명의로 손꼽힌 양홍수 대감이 치유하지 못한 이가 아닙니까.”
형님이 보낸 사람은 어의인 전순의이다. 본래 왕과 종친을 제외한 이들은 어의가 치료하는 일이 없다. 그만큼 신숙주에 대해 막중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어떤 임무를 줄까? 설마 몽골에 보내서 외교관으로 쓰려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윤씨 부인의 몸이 어느 정도 차도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방문했다. 마침 전순의가 진맥을 마쳤는지 식은땀을 훔치면서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떻소.”
“양홍수 대감의 처방도 옳았으며 시침 또한 정확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하다는 듯이 점심이 지나면 곽란에 시달리니 알 길이 없더군요.”
“하오면 탕약의 처방을 바꿔 보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신숙주가 끼어들자 전순의도 처방을 되짚어 보았다. 만에 하나지만 약의 처방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전순의는 오히려 탄식을 뱉으면서 말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물탕(四物湯)으로 보혈을 행하였으며 다음에는 대보탕(大補湯)을 사용하였으며. 약한 몸을 위하여 숙지황을 하수오로 바꾸고 복령을 진피로 바꾸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처방이 있겠소.”
“죄송합니다. 안사람의 차도가 없는지라 대감께 폐를 끼쳤습니다.”
“며칠 더 두고 봅시다. 섭생도 온전치 아니한데 백약이 있어봤자 효험이 있겠습니까.”
전순의도 마음이 답답했는지 일부러 팔을 휘적휘적 놀리면서 돌아갔다. 의원의 입장에서 저렇게 고생하는 환자를 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하지만 신숙주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거……거기 대야를 가져오너라.”
“부인?! 괜찮소?”
침을 놓고 탕약을 마신 보람도 없이 방 안에서 헛구역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어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신숙주가 허탈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고 더 이상은 이야기하기도 지쳤는지 건넌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내와 군부인 한씨가 방으로 들어가 몸을 확인했는데 둘 다 안색이 창백해져서 나왔다.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아내가 손사래를 치면서 입을 열었다.
“산후 조리를 행하지 못하여 몸이 엉망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지의 관절이 틀어져 있고 피골이 상접하다 못해 혈맥이 비쳐 보입니다. 여기에 등골이 조금 휘어있더군요.”
“등골이 휘어있다 하였소?”
“물론입니다. 혹여나 등창이 염려된다고 등을 보았지만 조금 옆으로 휘어 있었습니다.”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나이 많은 회원님들은 척추 측만증이 골다공증과 같이 온다고 했었으니까. 그렇다면 군부인 한씨의 의견도 들어보자.
“다른 일은 제 배움이 부족하여 모를 일이며 치아가 상한 것으로 보아서 오랜 기간 곽란에 시달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식사는 어찌 행하더냐. 사람이 살고자 하면 음식을 목으로 넘겨야 하지 않겠더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고 점심나절이 되면 속이 뒤틀리면서 밤이 깊어서야 겨우 식사를 한다 하였습니다. 식사라 하여도 쌀 두 홉으로 쑨 죽이 전부였습니다.”
핵심은 그놈의 토사곽란이다. 점심 무렵부터 시작되니 아침 점심이 모조리 헛수고가 되고 약도 효과가 없어지니까. 부인과 군부인 한씨 둘 다 내 눈만 바라보고 있으니 한숨을 쉬려다가 참았다.
“연화당으로 거처를 옮겨서 몹시 피곤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관절을 바로잡는 처방을 내릴 수 있겠소?”
“하반신의 모든 관절과 등골이 휘어 있으니 험난한 일입니다.”
“조금이라도 행해 주시오.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넘어가겠소.”
다음날,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보니 새벽이 밝아오기는커녕 별이 총총한 밤이었다. 할 일도 없으니 연화당에 들리려고 다가가니 하인 두 명이 연화당으로 꾸러미를 들고 들어가려고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연화당에 무슨 일이더냐.”
“주상전하께서 명하신 물건입니다. 하온데 수양대군 어른이 아니십니까?”
“가만, 너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너희가 보내는 물건이 대체 무엇인 것이냐.”
하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꾸러미를 줬고.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녀석은 한 되 정도의 우유였다. 이런 귀한 물건을 왜 전해준단 말인가?
“주상전하께서 낙산(駱山)에서 짜낸 신선한 우유를 이틀에 한 번씩 신 참의님의 집으로 보내라 하셨습니다. 연화당에 있으니 연화당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유를 신 참의가 마시는 건가?”
“아닙니다. 듣자하니 작년부터 부인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보양을 위하여 타락죽을! 아이쿠! 이 귀한 물건을 어찌하여 쏟으셨습니까!”
타락죽이라는 말을 듣고 손에 힘이 풀리며 우유를 바닥으로 쏟아버렸다. 신숙주의 아내는 작년부터 몸이 쇠했다 하였으며 그때부터 타락죽을 아침마다 먹었다. 우유가 보양식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양홍수의 처방은 옳은 처방이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현대에서 보충제를 우유에 타 먹었다가 유당불내증에 시달려 고생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원인이 유당불내증일지도 모른다. 내 눈빛을 보던 하인이 겁에 질려있으니 지시를 내렸다.
“당장 시전으로 나아가 두부를 만들 콩을 사오게! 난전이던 상관하지 말고 삶은 콩이면 충분할 것이네? 아니 나와 같이 가지!”
“대군어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숨넘어가시겠습니다!”
더 이상은 지체할 방법이 없었다. 두부를 만들기 전의 삶은 콩을 됫박 가득 사서 가져오고. 바로 맷돌로 갈아서 두유를 만들기 시작했다.
두유라면 환자의 영양식으로 안성맞춤이고 콩 알레르기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면서 콩 요리를 먹은 적도 없겠지. 여기에 영양성분만 따져도 골다공증에 충분히 좋다. 신숙주가 내 모습을 보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토사곽란의 원인을 찾았네. 아무래도 타락죽일지도 모르겠네.”
“타락죽이라 하셨습니까?”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유당불내증 같은 개념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신숙주 또한 날 보면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조선 팔도에서 나만큼 유청을 많이 먹어본 이도 없을 거라네. 하지만 단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설사가 나오기 일쑤였지. 그렇게 생각하여 보면 타락죽에도 유청의 원료인 우유가 들어가지 않는가.”
“사리에는 맞는 말씀입니다만 콩을 짜내서 만드는 것이 효험이 있겠습니까?”
“내가 아는 한 가장 소화가 잘 되는 식사라네.”
솔직하게 말해서 유당불내증도 아니면 그냥 포기하려고 했다. 그렇게 소금이 약간 들어간 두유가 아침 식사로 들어갔고. 며칠 동안은 헛구역질이 이어졌지만 사흘이 지나자 구역질이 나오지 않았다. 아내 또한 극적인 변화에 놀란 눈치다.
“몸에 살이 돌아오고 기력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관절을 다스리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지만 지압을 행하면 충분히 효험을 보일 것입니다.”
“몸을 움직인다 하여서 너무 과한 입신체비를 행하지 못하게 하시오.”
“물론입니다. 새아가가 다듬이 방망이로 팔을 다루는 법을 창안하였으니 쉬운 일이지요.”
순간 천축봉(인디언 클럽)같은 무식한 체력 단련법을 착안했는지 의심이 갔지만 군부인 한씨가 작은 다듬이 방망이를 꺼냈다. 작은 곤봉이면 팔 근육을 강화하기에 충분한 부하를 줄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꾸준히 행해 주시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천천히 행하되 사람이 기력을 찾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행하면 충분할 거요.”
치료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던 윤씨 부인은 천천히 걷기 시작하였으며. 차츰차츰 몸이 풀려나가는지 내가 없는 사이에는 마당으로 나와 간단한 도수체조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열흘 가량이 지나자 소식을 들은 전순의가 진맥을 하러 돌아왔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와 신숙주에게 달려와서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기력이 속속들이 돌아오고 있으니 앞으로 여섯 달 정도면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입신체비를 행하고 진맥을 하면 몸의 기력이 다시금 솟구치니 넉 달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대감께서 시침과 탕약을 적절히 처방하였기에 기력이 보해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타락죽에 들어가는 우유가 토사곽란의 원인이라니. 저의 배움이 깊지 못했습니다. 이래서야 의서를 쓸 엄두가 나질 않으니 배움이 부족하군요.”
그런 말을 하지만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혹시나 유당불내증이 아니면 손을 쓸 방법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의서를 쓰고 있었다고? 동의보감 이전에 의서가 있었나?
“입신체비를 행하던 적에 유청을 많이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되지 않았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으니. 그런데 의서라 하면 무엇을 쓰고 있소이까?”
“사람이 세상을 사는 일에 음식이 으뜸이라 여기고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오나 대군어른에게 중요한 일을 배웠으니 저의 배움은 아직 깊지 않습니다.”
식이요법서를 작성한다면 내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식품영양학과 대학원을 나왔을 당시의 기억은 거의 다 잊혀 졌지만 집에 감춰둔 책에 상당수를 휘갈겨 써 뒀었다. 다시 읽으면 어느 정도 기억은 나겠지.
앞으로 동남아시아를 시작으로 무역 활동에 나설 것인데. 선원들의 괴혈병 문제부터 각지에 있는 채소와 과일들의 수입. 외국 품종의 수입을 생각하면 이런 지식을 함부로 감춰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반색하는 전순의의 손을 맞잡았다.
“그 의서를 저술하는 것에 나 또한 힘을 더하겠소. 섭생이라 하면 입신체비를 행하는 이가 가장 잘 하는 것이고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 않소.”
“그렇습니까? 대군 어른께서 저를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아니오. 그저 서로 힘을 합쳐서 좋은 의서를 만듭시다. 나 또한 부족한 점이 많으니 힘써 보겠소.”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나의 지식을 퍼부을 좋은 소재를 찾아냈다. 당장 형님에게 보고해서 저술을 시작해야지. 그러고 보면 나의 지식을 조선시대에 어떻게 융합시켜야 할까. 당장 비타민부터 문제인데.
----------
1456년 3월, 평양 남서쪽의 삼화현(三和 - 현 평안남도 용강)의 해안은 따스한 봄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훈련도감 7기이며 북방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김 정교(正校)는 부하들을 인솔하여 해안을 순찰하고 있었다.
“저건 배입니까? 아니면 유목입니까?”
“저건 배가 아닌가? 썰물을 모르고 배를 깊숙이 대었군.”
“그런데 돛대가 조금 이상합니다.”
“어디 보자. 뭐 저렇게 이상한지 모르겠군. 이 근방에서는 쓰이지 않는 배인데.”
해안가로 밀려온 여느 고기잡이배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근방의 어부들은 물때를 알고 있으니 해안으로 배를 올려놓지는 않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배의 형태가 달랐다.
병사들이 천천히 접근하자 배 근처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던 사람들이 모조리 일어났다. 김 정교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옆의 병사의 어깨를 쳤다.
“빨리 현감님에게 알려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저들은 적게 잡아도 오십 명은 되어 보입니다.”
“도망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사들이 당황할 만 하였다. 오십 정도의 도적이면 삼화현 일대를 뒤엎고도 남으니까. 입술을 짓씹던 김 정교는 결론을 내렸다.
“헛된 마음을 먹었으면 우리를 본 순간에 도망치거나 덮쳤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왕좌왕 하고 있으니 그러한 자들은 아니겠지.”
“도적은 아니라 하면 유민(流民)입니까? 하지만 배를 타고 온 유민이 저렇게 많다니요.”
“가서 물어나 보자. 혹여나 내가 당한다면 당장 관아로 달려가서 사람을 불러라.”
진급이 얼마 남지 않은 김 정교는 들고 있던 원패와 환도를 고쳐 잡고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자 배 근처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이들이 병장기를 확인하고는 오히려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뭐라 말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답답한 마음에 노인 한 명이 이런 저런 글을 썼지만 알아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 정교님은 글을 아시지 않습니까?”
“나야 정음 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한자는 하나도 모른다고. 일단 오라로 묶어서 현으로 보내야지.”
“노약자에 아녀자들도 있습니다.”
“젊은 놈들만 묶어!”
며칠 뒤, 평안도 관찰사 김연지(金連枝)는 사방에서 전해진 보고에 정신을 놓았다.
“삼화현, 강서현, 용강, 대동강 하구 일대에 명나라의 유민들이 당도했다고?”
“그렇습니다. 적게 잡아도 수효가 이백 이상에 이르며 삼백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도대체 순시를 돌던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해상에서 막아서지 못했단 말인가.”
“일대에 수영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벽란도의 수병들은 무역선을 호위하지 않습니까.”
황해수영(黃海水營)이 설치되기 이전 시대였으니 가장 북쪽에 있는 수영은 경기도 남양(현 화성시 인근)에 있었을 뿐이었다. 김연지는 한숨을 내쉬면서 붓을 들었다. 아무리 유민들이라 해도 경계를 실패한 일은 관찰사로서 책임 져야 마땅한 일이니까.
“노인과 어린아이, 그리고 명국에서 관직을 하였던 이들은 도성으로 올려 보내라. 하지만 젊은이들은 혹여나 나쁜 마음을 먹었을지 모르니 형무소에 임시로 수감하면 될 것이다.”
“형무소라고 하셨습니까?”
“임시로 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백이 넘는 장정들을 한 곳에 모아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면 무엇이 가장 좋겠는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부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던 김연지는 서한을 작성해갔다. 하나는 도성에 알리기 위하여. 다른 하나는 형무소의 책임자인 성삼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