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76화 - 요동애가(遼東哀歌) >
매끄럽게 바다를 가로지른 선박들이 발해만을 지나 요동만(遼東灣)에 속한 영자구(營子口 - 현 요령성 영구시)에 도달하였다. 작은 어촌이었던 영자구는 사민으로 인한 물자가 들어오자 급속도로 늘어나는 물량에 신음하고 있었다.
“하이고 춥다. 이제 눈발이 날리고 있습니다.”
“입신체비를 열심히 행한 자들이 추위에 약하다던데 한 주부(注簿 - 종 6품 관직) 자네도 추위에 약한가 보군.”
“제가 입신체비를 익히기 전에도 원체 추위에 약한지라 버틸 재간이 없군요. 하지만 이번 항해가 올해의 마지막 항해가 아닙니까?”
“바다에 유빙(流氷)이 올라오니 내년 삼월 까지는 배를 다루지 못할 걸세. 배들이 너무 많으니 잠시 정선하도록 하지. 닻을 내려라!”
영자구에 수많은 선박들이 물자를 전달하고 있었다. 육로로 향한다면 북경을 거쳐야 하니 등주부(登州府 - 현 산동성 연태 일대)에서 해로를 통해 물자를 옮긴 덕분이었다.
정선한 틈을 타서 천리경을 통해 주변을 보던 한명회는 시선을 돌려 남동쪽의 해안을 바라보았다. 썰물이 한창인지라 드넓은 갯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기껏 해야 어부 몇이 그물을 널고 있었다.
“저기 보십시오. 저 간석지(干潟地)가 참으로 넓지 않습니까?”
“간석지라 하면 할 일이 많지. 어전을 두어도 좋고 둑을 쌓아 간척을 행해도 좋으니. 그런데 새로운 요동 총병관은 어찌 이런 일에 손을 들이지 않는지 모를 일이라네.”
조선에서 올라오는 선단을 대표하는 이는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의 정랑(正郎 - 정 5품 관직)인 김의정(金義精)이었으며 실무자는 호조의 속아문인 전함사(典艦司)에 속하는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천일염을 만든다면 벌이가 좋겠군. 어이쿠, 이거 홍길동 자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라네.”
“한 주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번 장사를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염려하지 말게. 명국은 천일염을 만드는 법을 모를 것이 분명하니 앞으로 몇 년은 일할 수 있을 걸세.”
지난 하르빈 전투에서 공을 세운 홍길동은 관직에 천거하려는 문종의 뜻을 단번에 거절하였다. 아직 적서차별이 만연한 상황에서 뜻을 강요할 방법도 없었기에 문종 또한 은자를 충분히 내리고 적서의 차별을 면하는 선에서 공을 치하하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항구를 넓히지 않다니. 이래서야 무역을 제대로 행할 수는 있겠나.”
“그러게 말입니다. 당장 아국의 선박 가운데 가장 큰 녀석은 곡식 이천오백 석을 너끈히 싣는 놈으로 스무 척이 넘지 않습니까.”
“내가 요동 총병관이었다면 당장에 항구를 확충하여 벽란도보다 월등하게 큰 녀석으로 만들 걸세. 그렇다면 일이 편해질 것인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조선의 배들이 가까스로 항구에 도착했지만 항구 안은 북새통이었다. 항구의 크기가 워낙 작으니 이전의 배가 내렸던 짐이 쌓여있었고 아침부터 노역한 잡부들이 힘에 겨워 짐을 옮길 뿐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한명회가 갓끈을 풀었다.
“비키게! 저 앞에서부터 짐이 쌓여 있으니 이렇게 늦는 일이 아닌가! 이대로 있다가는 물때를 놓쳐서 하루를 더 허비할 것이다! 제가 사람들을 다룰 것이니 정랑님께서 다른 일을 행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류를 작성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갓끈을 풀고 여느 잡부처럼 두건을 잡아맨 한명회를 보면서 김의정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언제나 앞서 움직이고 도량도 큰 인물이니 이런 말직에 오래 머물 사람은 아니었다.
“내 도저히 기다리다 참지 못하겠으니 직접 짐을 나르지.”
“체격도 작으신데 허리 다치십니다!”
“허리가 왜 다치나! 입신체비를 할 적에는 공좌(스쿼트)를 백십 근으로 무게를 두고 열 두 번이나 하는데!”
말릴 틈도 없이 쌀가마니를 짊어진 한명회는 가뿐하게 수레까지 옮겨놓기를 반복했다. 뒤를 이어 조선의 잡부들이 힘을 합쳤고. 조선의 관리가 스스로 일을 하니 지켜보던 명나라의 병사들도 일을 도왔다.
일손이 늘어나니 삽시간에 혼란한 항구가 정리되어 조선에서 수입한 말들이 움직였다. 한명회는 뻐근한 허리를 어루만지면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스스로 움직이면 일이 순탄하게 풀리는 법이다. 내가 조금 고생하니 다른 이들이 알아서 나서지 않았는가.”
“저는 알아서 나서다가 죽을 맛입니다.”
“자네는 젊은 사람이 그렇게 하면 못써! 나보다 체격도 좋지 않은가?”
너털웃음을 짓는 홍길동이 자신의 돈으로 구매한 천일염을 담은 수레를 바깥으로 옮겼다. 잠시 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멀리서 기쁜 얼굴로 달려왔다.
“아라합 족장님!”
“홍길동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말에 먹일 소금이 부족했던 참인데 많이 가져왔는가.”
“평소의 두 배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상행은 제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개성 일대의 상인들이 육로로 소금을 가져온다 하니 값이 오르겠군요.”
은자를 확인하던 홍길동은 아라합의 침울한 얼굴을 보고 놀랐다. 아라합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요동 총병관이 얼마 전에 갑자기 말하더군. 겨울 동안에는 초병의 일을 하지 않으니 급료를 절반으로 깎겠다고.”
“그러한 처사가 말이나 됩니까? 신의를 어기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내년 삼월부터 급료를 다시 올려준다 하였으니 돌아가기도 힘들고 남아있기도 힘들고. 겨우 내내 돈만 축내며 지내게 생겼어.”
앞으로 삼 년 동안 물건을 사들일 사람들인데 이런 일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홍길동은 생각을 거듭하다가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말을 많이 가져오셨을 것인데 가장 질이 나쁜 한 마리를 파시면 어떻겠습니까? 요동에서 여는 마시가 아니면 조선과 명국간의 가격 차이가 네 배나 납니다.”
“말을 함부로 팔면 안 된다고 요동 총병관이 명령을 내렸다네.”
서유정은 자신의 권한인 마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식 매매만 허용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평 인근에서 열리는 마시의 가격을 적용했으니 값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온전히 돌아가는 적이 있던가? 난처한 얼굴의 아라합과 달리 홍길동의 눈매가 휘더니만 손으로 벌판을 가리켰다.
“약속을 먼저 어긴 이는 요동 총병관입니다. 여기에 족장님께서도 거리낄 것이 없으니 제가 알기로는 건주 양위에 속하는 이들 가운데 일천 호가 넘는 자들이 요동에 남아 있다 합니다.”
“그렇지. 가끔 안면을 트고 있다네.”
“혹여나 문책을 당해도 건주 양위의 남은 이들이 팔았다고 하면 충분한 일 아닙니까? 족장님께서 심양에 마구간에 말을 두는 것도 아니고 따로 지내실 것이 분명한데요.”
서유정이 급료를 온전히 줬다면 아라합이 양심을 버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겨울 동안 급료가 절반으로 깎인 덕분에 홍길동의 제안은 점점 설득력이 높아졌다.
아라합은 셈이 느렸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족장답게 머리는 좋았다. 한번만 더 서유정에게 요청을 하고 끝까지 듣지 않는다면 몰래 말을 팔아서 수익을 거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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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서 잡곡을 가득 올린 나룻배가 내려와 영자구에 도착했다. 인근 마을에서 품삯을 받기 위한 노인들이 차례차례 모여서 나룻배에 쌓인 잡곡 더미를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오늘 옮겨야 하는 곡식만 이만 오천 섬이니 어서 움직여라!”
“저희는 기껏 해야 천 명인데 너무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힘이라도 쓰면 될 것이 아니냐.”
한 섬이면 장정이 짊어지고 힘겹게 움직일 무게이다. 장정은 어디까지나 농사를 짓고 익숙한 이들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나이가 쉰이 넘은 노인들은 쉽사리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감관은 퉁명스럽게 장부를 내밀었다.
“거기 너! 이름 적어 놓아라.”
“예예, 알겠습니다.”
묵은 쌀로 석 되를 줄 것이 분명하지만 급료는 급료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인 여국강(黎國强)을 명부에 적어놓고 셋이 힘을 합쳐 잡곡 가마니를 들어 옮겼다. 몇 번을 오가자 힘이 빠지고 몸에 땀이 올라왔다 그러자 감관이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끌어냈다.
“왜 이리 힘을 못 쓰나? 여기서 멍하니 있어봤자 일을 느리게 할 뿐이니 배로 가서 녹로(轆轤 - 도르래)를 돌려라!”
“예예 알겠습니다.”
어찌하여 관직에 나서지 않고, 어찌하여 모아둔 돈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단 말인가. 기껏 배운 낙죽(烙竹 - 대나무 가공)일은 대나무가 없는 요동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삐거덕 거리는 녹로를 힘을 다해 돌리니 머리가 핑핑 돌면서 온 몸의 기력이 빠져나왔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이 몸을 적셔 체온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윽고 몸의 힘이 풀리면서 넘어지려는 참이었다.
“어이쿠!”
“이보시오! 조심하란 말이오!”
마침 녹로의 옆에 서 있던 한명회가 넘어지던 여국강을 잡아채며 두터운 어깨 근육으로 풀려나가던 녹로를 멈췄다. 다른 인부가 달려와서 녹로에 달라붙었고. 한명회는 여국강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가 죽겠으니 잠시 쉬시구려.”
“급료를 받으려면 꾀를 부리면 안 됩니다. 저기 아래에 감관이 있지 않습니까.”
한명회가 어설픈 명나라의 말을 내뱉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되었다. 한명회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여국강의 말을 무시하면서 등을 떠밀었다.
“그렇다면 선창 아래로 내려가시오. 거기! 이 노인네 선창(船倉)에서 짐 좀 옮기게 하겠소!”
한명회는 배 위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면 재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노인을 선창으로 내려 보냈고. 잠시 숨을 돌릴 틈을 번 여국강은 어두컴컴한 선창 아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선창 아래에 익숙한 글귀가 보였다.
목재에 아로새겨진 글귀는 배를 설계한 인물과 상세. 건조 연도를 적은 상량문(上樑文)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자를 읽어나간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 방길주(房吉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쩐지 익숙하더니만!”
“이보쇼, 한 주부님께서 쉬라고 말했으면 좀 쉬시오. 뭘 그렇게 놀라는 것이오.”
장부를 작성하는 관리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어디서 본 배라고 생각했는데 선창에서 구석구석 살피니 옛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속들이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돛대에 매인 밧줄도 엉성했고 활수창(배의 하부의 균형을 잡는 물의 통로)을 열어놓지 않았으니 균형이 엉망일 것이 분명했다. 좋은 배를 몰고 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사고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자 한명회가 내려왔다.
“다 쉬었소? 내가 명나라의 말은 제대로 모르니 양해해 주시구려.”
“고맙습니다. 다만 배가 흔들릴 것이니 앞과 뒤의 활수창을 열어 주십시오. 바닥에 물이 통해서 배가 기우는 일이 적어질 것입니다.”
“창문을 열라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여국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분노한 감관(監官)의 호통이었다.
“댁 때문에 사고가 날 뻔 했으니 조선의 관리를 귀찮게 하지 않았소!”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태형만큼은 피하게 해주십시오.”
“명부를 보니 이름이 여국강이구려. 오늘의 급료를 마지막으로 나오지 마시오. 그렇게나 힘이 없으면 물고기라도 잡으란 말이오!”
낚시는 해 본 적은 있지만 낚시 도구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랐다. 여국강은 허탈한 마음으로 발을 질질 끌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냉기가 감도는 움집에는 사위가 손발에 박힌 흙을 씻어내면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오늘은 일을 서툴게 했다고 급료를 두 되로 깎아내더구나. 여기에 앞으로는 항구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망할 새끼들이.”
두 되라고 하지만 겨와 모래가 섞여있으니 골라내면 한 되가 조금 넘으리라.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지니 모아놓은 은자로 곡식이라도 사야 하리라.
아내는 요동까지 올라오면서 숨을 거뒀고 얼마 전에는 병을 앓던 딸이 숨을 거뒀다. 미처 친척집에 보내지 못한 다섯 살의 외손자와 사위 셋이 사는 집에는 적막함이 감돌고 있었다.
“할아부지. 왜 오랑캐라는 사람들은 그렇게 잘 사는 거야?”
“우리가 이런 곳에 왔으니 처음에는 오랑캐들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단다. 힘든 시일이 지나가면 해가 뜰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그럼 할아부지, 천축이야기 해줘. 전에 천축 너머에 대식국 가서 시커먼 돌도 봤다면서.”
천축이라, 방길주가 만든 배를 타고 천축으로 향한 일이 엊그제처럼 노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당시의 일을 잊을 방법이 있을까. 그렇게 손주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 고민을 하던 순간이었다.
“그래 천축, 그런 좋은 배를 가지고 왜 천축을 가지 못하나! 잠시 친구들을 보고 오겠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장인어른! 밤이 깊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던 사위와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는 외손자를 남겨 놓은 채 노인은 쏜살같이 몇 살 어린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조선의 배를 보았나?”
“에이 형님은, 나야 쉰이 안 되었으니 노역하고 있지 않소. 옆 마을에 있는 진(陳) 형님이면 모를까 항구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겠지.”
“그럼 모아오게. 예전에 태감 어르신의 함대를 타고 천축을 오간 이들을 모두 모아오면 충분할 거라네.”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어두컴컴한 움집 안에 두부 한 모와 잡곡으로 만든 탁주가 놓였다. 좁은 방안에 모인 일곱 노인들 가운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조선의 배를 보았나?”
“아무렴. 시커먼 색으로 칠했는데 참으로 크더군. 우리가 탔던 배와 비슷하지.”
“또 천축의 꿈을 꿨나? 추위에 시달리니 천축이 그리워지지?”
모인 이들 모두가 정화의 마지막 원정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여국강을 비롯한 셋은 본대에. 나머지 넷은 분견대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추억이 되살아난 것을 확인한 여국강의 입이 열렸다.
“조선의 배를 누가 만들었는지 아나? 내가 타고 갔던 배를 만들었던 방길주라네.”
“강남에서 잘 살던 사람이 어떻게 조선에 가서 배를 만들어?”
“전에 듣기로는 자식한테 사업을 물려주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말이 있던데.”
“중요한 일은 방길주가 만든 배를 조선에서 허투루 쓰고 있었다는 것이네. 어설픈 놈들이 좋은 배를 몰아봤자 뭘 하겠나. 그런 배면 천축 정도는 두 달이면 갈 수 있겠는데?”
배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명나라 전체를 따져도 자신들 보다 뛰어난 자들이 없으리라. 설령 있다 하더라도 죽음을 앞둔 환갑을 넘은 노인이겠지. 그렇게 노인들이 의견을 내놓았다.
“두 달? 그거야 태감 어르신의 휘하에 있던 자들이 계속 사람을 길러서 그러한 것이 아닌가. 아무 일도 모르는 놈들이면 월국(越國 - 베트남)까지 익숙해지는 것에 일 년, 다시 천축으로 가는 일에 일 년 걸리겠지.”
“나도 동의하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해서 뭐해? 요동은 시궁창인데.”
“탈출하자고.”
방 안에 흐르던 냉기가 삽시간에 열기로 바뀌었다. 서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여국강의 눈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하다 죽거나, 일을 끝마치고 병들어 죽거나 둘 중 하나지. 그리고 손자를 길러봤자 뭘 하나? 배우지도 못한 손자가 마적단이 되거나 일평생 잡부로 살다 죽으라고?”
“내 몸 하나는 빼낼 수 있는데 남겨질 사람을 생각해야지. 그리고 우리만 빠진다고 일이 되나? 옆 마을에서 한 가족이 도망쳤다고 모조리 두들겨 맞은 일은 잊었소?”
“그러니 겨울 동안 배를 만들면 어떻겠나. 우리가 배를 타 본 사람이니 어설픈 배를 만들지 못하겠나? 그래서 날이 풀리는 대로 아예 마을 전체가 도주하는 거라네.”
“가능은 하겠지. 내일부터 제방을 쌓지 않고. 요동은 삼월이 되어야지 가까스로 날이 풀리니까. 돛이야 안 입는 여름옷 엮어서 만들면 어떻게든 가능할거고.”
마을의 장정 모두가 힘을 합치면 작은 배 여러 척은 쉽게 만들 것이고. 상태가 좋은 녀석에 사람을 태우고 짐을 최소화 하면 충분할 것이다. 엉성하게 만든 배라고 해도 당장 무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행선지가 문제였다.
“가능은 하겠지만 도망쳐봤자 유민(流民)신세인데? 그게 요동에서 사는 일과 뭐가 다른지.”
“그러니 조선으로 가자고. 가서 조선의 왕에게 당신들은 배를 허투루 쓰고 있소. 우리들을 고용하면 이 년이면 천축으로 보내 줄 것이오. 이렇게 말하면 우리를 고용하지 않고 배기겠나?”
“하긴 산동으로 도망가는 일 보다는 가망성이 높긴 하겠소.”
한참의 생각을 거듭하던 노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바닥을 칼로 그어 여국강이 벗은 윗도리에 장인(掌印)을 박아 넣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차례이다.
“조심스럽게 전하게. 다들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먼저 손을 빌려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배를 만드는 재료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필요하다면 은자를 써서라도 구해야 하네.”
“염려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아도 작살로 잡은 옥판어(玉版魚 - 철갑상어)로 만든 아교가 쓸 곳이 없는데 배에 쓰면 충분하겠군.”
“내 사위가 철물을 만지는 사람이니 도구 정도야 어떻게든 만들 수 있겠지.”
“나이를 허투루 먹지는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행하게. 단 한 번에 성사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니까 확실하게 해야 하네.”
마을에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공인과 상인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가진 재주 하나씩은 있으며 어느 정도의 자금은 갖추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개 마을, 60호의 300여 명의 대탈출 계획은 천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