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69화 - 왕과 황제와 쇼군(1) >
19년 전부터 마련된 동궁의 서재, 지금은 입신체비를 행하는 곳에서는 이전처럼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경쾌한 마찰음이 입신체비 기구에 달린 도르래에서 새어나왔다.
단순한 입신체비 기구들이 아니었다. 틀은 공조의 기술자들이, 강철 역기봉은 왜인 기술자들이, 도르래와 같은 정교한 물건들은 명나라 출신 화포장들이 만들었으니 세 나라의 기술자들의 힘이 결집된 물건들이었다.
“부드럽다 못해 몸이 풀리는 기분이 드는군. 이 도르래들을 배재당과 수양대군이 있는 입신체비장에도 보내면 좋을 것일세.”
“전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문종의 모습을 보며 하위지가 천천히 사방을 돌았다. 거울도 없는 곳에서 혼자 입신체비를 하면 자세가 틀어질 염려가 있었으니 가급적 보조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조금 좌측으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알겠네. 역시나 입신체비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네.”
일본에서 건너온 장인들이 적응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질이 떨어지다 못해 조선에서는 쓰이지도 않을 사철로 질 좋은 검을 만든 일은 대단하지만. 평생 사철만 다뤘던 이들이니 충분한 연습이 필요하였다.
그렇기에 가장 단순한 형태이자 품질이 드러나는 역기봉을 만들라 명하였고. 이에 매진하니 성과가 있었다.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모두 능숙한 기술자가 되어서 각지의 관아와 군기시에서 병장기를 만들어 나갔다.
“다른 일은 몰라도 기분 나쁜 쇳소리가 줄어들었으니 다행이군.”
“명국의 기술자들은 그렇다 하여도 왜의 국왕인 종리의정이 실력이 빼어난 야장을 골라 보냈음이 분명하옵니다. 신의가 있는 자이니 여느 왜인들과는 다르지 않사옵니까.”
“신의는 아니지, 욕심을 부린 자이니 아국에도 대가를 달라 하지 않았는가.”
“대가라 하여도 험난한 일이 아니니 전하께서 혜안을 보이신 것이옵니다.”
모든 입신체비가 끝나고 정리운동을 할 차례였다. 문종은 거의 석 달 동안 하위지가 자신의 입신체비를 담당하니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서산군은 어떻게 되었나.”
“서산군 대감은 상심이 깊어 감모에 심하게 걸렸다가 겨우 일어났다 하옵니다.”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 맛있는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문종이 혀를 차면서 몸의 땀을 닦아냈다. 상주만 삼년상을 지내고 나머지 자식들은 상복을 입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 충분한 일이지만 마음의 상처가 큰 모양이었다.
“이대로 두면 몸이 상할 것이 분명하구나.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거라.”
상장(喪葬)은 복잡한 예식이기에 함부로 손을 댈 일도 아니다. 그렇게 문종은 옷을 갈아입고 대전이 아닌 금군이 거처하는 내금위로 향했다. 대신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미복잠행(微服潛行)을 나설 예정이었다.
문종은 미리 평복으로 갈아입고 내금위에서 연배가 비슷한 무관을 둘 골랐다. 예전에 수양대군과 함께 명에 다녀왔던 남빈과 강곤이 밀명을 받고 평복으로 갈아입었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전하, 백성들이 알아볼까 염려되옵니다. 신하들이 다녀도 충분한 일인데 일부러 행차하지 않으셔도 충분한 일이옵니다.”
“무엇이 충분하다는 말이더냐. 궁궐 안에서 어찌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안단 말이더냐.”
“하오나 주상전하께서 너무나 건장하시기에 백성들이 알아볼까 염려 됩니다.”
호위인 남빈과 강곤 모두가 무관이었지만 오히려 문종의 어깨가 더욱 넓었으며 우람한 대흉근이 옷깃을 부풀리고 있었다. 한동안 생각하던 문종은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함세. 나는 개성에서 수양대군의 제자로 입신체비를 배운 이 진사고. 그대들은 나의 벗인 남 사맹과 강 사맹일세.”
“다른 누구도 아닌 수양대군의 제자를 칭하신다니.”
“그럼 어떻게 하겠나? 배재당에 있는 훈도가 아니고서야 나보다 입신체비에 능한 자들도 없을 것이네. 그리고 수양대군에게 배웠으니 제자라 할 수도 있겠군.”
문종은 태연한 척 궐 밖으로 나섰지만 제법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거닐던 때와 다르게 길거리를 천천히 돌아보니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 보였다.
가장 큰 길인 육조 거리의 모습을 본 문종은 놀란 기색을 감추느라 애썼다. 어제 비가 내렸는데 진창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육조 거리에는 진탕이 가득하고 악취가 나는 곳이 있었네. 지금 보니 파인 곳에 자갈과 모래를 깔아 물이 스미지 못하게 하였군.”
“육조에 속한 관원들이 각출하여 길거리를 정비한다 하더군요.”
“육조의 관원들이? 그렇군, 길거리가 진창이면 가장 고생할 자들이니 무슨 말인지 알겠네.”
입신체비는 속보가 필수이다. 당연히 육조 각각의 후원이 클 이유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서 속보를 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진창에 빠지는 자들이 하나씩 생겨남은 당연한 것이다.
진창에 질 좋은 가죽신을 버리느니 길거리에 자갈과 모래를 깔면 오히려 값싼 일이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변하는 도성을 보니 문종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저기 주막이 있습니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 운이 좋은 것 같군요.”
“별미라 하는 등뼈탕을 한번 먹어보고 싶군. 잘 부탁하네 강 사맹.”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기 자리 있소?”
덩치 큰 사람 셋이 들어오자 주모가 잠시 놀랐지만 강곤이 태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주모에게 말을 걸었다.
“주모, 먼저 등뼈탕 셋을 주게. 그리고…….”
“청주 한 병도 주게.”
대낮인지라 주막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모가 먼저 청주를 내놓고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건너편에 모인 보부상들이 하는 말이 문종에게 들려왔다.
“양녕대군인가 그분 말이야?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아무렴. 듣기로는 집안사람들이 모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낸다 하더군.”
장안의 화제는 종친의 죽음이었다. 문종은 어떻게든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으려 하였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참을 길이 없어서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효령대군 어른께서 삼각산(북한산)을 쉬이 오르는 것을 내가 보았고. 상왕전하께서도 매양 몸을 단련한다 하시는데?”
“정말인가?”
“아무렴. 입체신비인지 뭔지를 하시면서 두 분 다 장정만한 무게를 가진 쇳덩이를 쉬이 들어 올리신다 하더군.”
“그게 입체신비의 효험 아닐까? 무병장수 말이야.”
“케흑 엑! 에흑!”
사람들의 시선은 몰라도 같이 미행을 나온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왕실의 체면을 위하여 소문을 퍼트렸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자거리에 소문이 퍼질 적에는 살에 살이 붙기에 마련인데. 이 또한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진상을 알면 모든 이들이 손가락질 하여 욕할 일이 아닌가. 체면 문제일세.”
등뼈탕이 나왔지만 옆에 있던 보부상들은 입신체비인지 입체신비인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문종이 주모를 불렀다.
“이보시오. 내가 수양대군 어른의 제자로 있다가 상사 독서를 이 년간 행하여 도성의 일을 알지 못하고 있소. 요즘 사는 것이 어떻소?”
“사는 것이라 하면 매양 좋을 일은 아닙니다. 작년에는 흉년도 아니어서 술도 마음대로 마셔대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하면 묻겠소, 등뼈탕에 고기가 제법 적은데 혹여나 돼지 가격이 오른 것이오?”
문종이 듣기로는 등뼈탕은 한 입 베어물면 고기가 가득 들어찬다 하였는데 직접 보니 고기가 별로 붙어있지도 않았다. 그런 지적에 주모가 얼굴을 붉혔다.
“돼지 가격이 작년보다 이 할이 넘게 올랐습니다. 같은 값을 받으려면 고기를 적게 남겨야 하니 방법이 없지요.”
“돼지 가격이 올랐다? 혹여나 상인들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요?”
매점매석 행위는 범죄이며 새로운 형전에 의거하면 7년 이상의 징역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문종의 기대와는 다르게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요즘 들어서 묵은 잡곡 가격이 계속 올라서 묵은 잡곡을 먹이는 돼지 값도 올라가고 있지요. 시장에 묵은 잡곡이 없다 하니 방도가 있겠습니까?”
“묵은 잡곡 가격이 올라간다?”
“저도 영문을 모를 일입니다. 사람이 먹지 못할 묵은 곡식만 꾸준히 가격이 오르니까요.”
이야기가 끝나자 남빈이 미리 챙겨온 오승포로 값을 치르고 밖을 나섰다. 문종은 궁궐로 돌아오면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우행을 저질렀군, 그저 명국에서 가져온 돼지 하나면 일이 순탄할 줄 알고 있었지.”
“우행이라 하시니 제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군마들이 얼마나 먹는가? 사람 셋이 먹을 곡식을 묵은 곡식으로 매일 먹는다네. 다른 날에는 마초(馬草)면 충분한 일이지만 전쟁을 대비하여 훈련을 하는 날이면 곡식을 매일 먹여야 하지.”
남빈과 강곤 또한 무관이었기에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은 지금까지 전쟁을 치르고 승전을 거듭하며 군마의 수를 급격히 늘려나갔다. 그 상승폭이 지나칠 정도였기에 먹이를 공유하는 돼지의 가격이 상승했던 것이다.
“하오나 지금도 남도에서 군마를 계속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당연히 군마를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조만간 다른 방법을 모색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돼지의 가격 하나로 백성들이 고달픈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를 내버려 둔다면 다음 문제가 벌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문종은 다음 논의를 계획하면서 침소에 들었다. 아무리 험난한 일이라도 어디엔가엔 해답이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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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대전 안에 냉기가 감돌았다. 새하얀 얼굴색과 대조되는 깊은 눈 그늘이 깔린 경태제는 조선에서 온 자문(咨文 - 공식적 외교문서)을 다시금 읽어보았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요동 총병관 서유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한 일을 용납한 것인지 영문을 알 길이 없구나!”
“황상께 아뢰옵니다. 조선의 영토에 달자들이 몰려오는 일이기에 관여치 않았다 하옵니다.”
“요동에서 조선의 땅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어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더냐! 상국으로서 위엄은 보이지 못할망정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단 말이냐?”
자문에는 오이라트의 침략을 막아내었으며. 요동으로의 침략을 염두에 두라는 정상적인 조언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경태제가 분노한 일은 자문의 말미에 있는 항목이었다.
[달자들이 격퇴당해 물러나는 와중에 명국의 사람 스물 가량을 두고 떠났습니다. 모두 달자들에게 시달려 기력이 쇠하였으니 당분간 몸을 보하여 다음 동지사 편에 보내겠습니다.]
“보아라, 조선에서 스물이 넘는 포로들을 구출하였고 이들이 기력을 찾을 때 까지 보호할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포로들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야선이 아무리 무도한 자라 하여도 분명 포로를 전쟁에 쓰려고 데려갔을 것입니다.”
“스물에 불과하니 북경 전투에서 납치당한 화포 기술자들이 분명하겠지.”
병기에 관련된 기술은 상국이라 하여도 함부로 넘겨줄 수 없는 기술이다. 조선이 순순히 보총을 바친 일이야 조공국의 입장에서 올바른 행동을 보인 것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은혜를 내리는 것이니 충분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포로들은 돌아와서는 자신들이 조선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주장하겠지만 간이고 쓸개고 모조리 내줬음이 분명하였다. 생각을 마친 경태제의 눈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요동이 아무리 사민이 끝나지 않고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하여도 최소 십만 이상의 병사는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이 상할까 염려하여도 일천의 기병만 지원을 보냈으면 이러한 일을 막을 수 있었겠지.”
“하오면 요동 총병관에게 어떠한 처벌을 내리실 것이옵니까?”
“서유정은 지금까지 장성을 쌓은 공을 자랑하며 황하를 치수할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책을 저지르는 자에게 대업을 맡길 이유가…….”
말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마른 기침소리가 대전 안에 울렸다. 경태제는 한참 동안 기침을 내뱉다 조금 진정한 모습으로 다시 명을 내렸다.
“눈앞의 일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이는 더욱 많은 배움이 필요할 것이다. 벌은 내리지 않겠으나 먼저 요동에 있는 강을 치수하며 소임을 다하라고 전하라.”
“황상께서 은혜를 내리시니 서유정은 감복하여 소임을 다 할 것이옵니다.”
신료들이 입을 모아 경태제의 뜻을 칭송하였다. 대부분의 신료들이 6년 전의 전쟁에서 피 흘리며 북경을 수호하였으며 힘에 부쳐 목숨을 바친 이들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식솔들을 강남으로 피난시킨 서유정에게 좋은 평가를 내릴 자는 없었다.
그렇게 피하고 싶은 최전선인 요동에 구족 모두를 보내 평생 살게 하였으며.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으니 돌아올 방법이 없으리라. 이후로도 논의가 계속되었고 경태제의 안색은 점점 더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마침내 신료들이 물러나고 대전에서 걸어 나온 경태제는 마른기침을 연달아 하다가 피 끓는 소리를 내뱉었다. 옆에 남아 있던 태감 조길상이 신호를 보내자 궁녀들이 경태제를 부축하고 대기하고 있던 어약방 소속 의원들이 침을 놓을 준비를 하였다.
입을 가로막은 비단이 떨어지자 검은색 각혈이 바닥을 물들였다. 의원들은 애써 좋은 말을 하였지만 경태제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습사가 모조리 빠져나오면 쾌유할 것이옵니다.”
“습사(濕邪)가 아니고 토혈이겠지. 남궁으로 가서 태상황을 만나고 싶구나.”
“지금 몸을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짐의 몸은 짐이 알고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경태제와 달리 자금성의 남궁에 유폐된 영덕제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에센의 포로가 되어서 끌려 나왔을 때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의 의사를 밝혔으니 조정이 분열될 이유도 없었다.
남궁의 문이 열리고 경태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궁 안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리던 영덕제가 쟁기를 집어던지고 앞으로 나섰다. 아직도 손에 흙이 묻어있고 굳은살이 배어있으니 농부라 불러도 무방한 모습이리라.
“황상께서 여기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형제가 마주하였지만 너무나 대조되었다. 볕에 그을린 영덕제의 얼굴에는 아직도 젊음이 맴돌고 있었으며 이전과 같이 두툼한 살집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경태제가 남궁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영덕제의 황후인 전 씨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차를 내왔다.
“얼마 전에 견제(경태제의 아들)가 명을 달리한 것은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황상께서 슬픔이 크실 것이나 다음 태자를 정하심이 어떠하십니까.”
영덕제는 권력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눈빛이었지만 경태제는 복잡한 눈초리를 보이면서 자신의 형을 뚫어져라 보았다. 자신의 명이 다하면 멀쩡한 형과 폐위된 황태자인 견심(영덕제의 아들)이 남고. 아직도 아들이 들어서지 않아서 후계자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전에 견심을 폐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되돌릴 것이네.”
“황상께서는 아직 젊으시며 후사(後嗣)를 두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농담도 잘 하는군. 짐의 몸이 얼마나 버티리라 생각하는가.”
영덕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만에 하나 후사도 없이 절망에 빠진 동생이 자신을 옭아매려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자 정통제가 웃음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형님께서 원하는 것이라도 있소? 일전의 양위를 되돌리는 일은 법도에 어긋나니 불가한 일이니 나머지는 모두 들어주겠소.”
“남궁에만 머물고 있으니 몸이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황상께서 잠시 배려를 해주시어 백성들의 삶을 볼 기회를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미복잠행을 논하는 것이오?”
새 황제가 자리에 오르면 실권은 영덕제에게 돌아간다. 양위가 확정된다면 사실상 황제의 자리에 되돌아오는 것이니 마음대로 돌아다닐 방법이 없어진다.
이미 양위의 뜻을 나타냈으니 미복잠행으로 위장하여 반란을 조장할 이유도 없었다. 경태제는 영덕제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