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68화 - 강정(剛靖) >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변했을까. 북방이라고 해서 서신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얼굴을 봐야하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족들이 문 밖으로 모두 나와서 나를 맞이한다.
“다녀왔소. 그간 별 일은 없었소?”
그동안의 소식은 서한을 통해 전해졌지만 내 눈으로 보아야 안심이 되겠다. 아내가 헌 옷 대신 새로운 입신체비복과 웃옷를 전해주자 울컥 눈물이 솟구치다 눌러 참았다.
“머나먼 북방에서 달자들을 상대로 고생을 하셨는데 저희가 고생이라 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니오,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웠는데 집안을 다스리느라 고생이 많았소. 현동이는 어머니를 열심히 보필하였느냐?”
“소자가 아직 미욱하지만 어머니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입신체비에 온 힘을 쏟은 것은 아니고? 농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삼대 운동 팔백 근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법 놀랐지만 가장 놀란 것은 하인 몇 명을 전담으로 붙여 줬는데 벌써 네 개의 금석문을 찾아낸 것이다.
“금석문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어떠한 방도를 택한 것이냐? 벌써 네 개의 금석문을 찾았으니 네가 참으로 대견하구나.”
“제가 종친임을 아는 이가 없으니 오히려 편하였습니다. 그저 산천을 주유하며 시를 읊는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을 나이는 아니지만 정말 대단하다. 생각 같아서는 압록강 변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알려주고 싶었지만 명과의 영토 경계니까 함부로 나서기엔 곤란한 곳이다. 현동이가 물러나자 마지막으로 군부인 한씨가 나섰다.
“아버님을 뵙습니다.”
“아니다 그렇게 움직이면 만삭의 몸에 탈이 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몸이 많이 변했구나.”
군부인 한씨는 만삭인 몸인데도 배가 아닌 근육이 많이 변했다. 그저 가풍(家風)에 적응한 줄 알았는데 본격적인 입신체비에 맛이 들렸는지 몸에 잔 근육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다.
“입신체비를 정진하여 보았지만 방법을 달리하였습니다.”
“방법을 달리하였다고? 본래 입신체비서를 보았을 뿐 방법을 따로 마련하지는 않았구나. 그런데 어떠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더냐?”
“몸의 큰 근육이 쉽사리 늘어나지 않기에 사방으로 놀려 자잘한 근육을 세세히 키우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큰 근육이 쉽사리 늘어나지 않아서 작은 근육을 늘린다? 부인이 입신체비를 행할 적에 효험이 적은 것을 생각하여 보니 너의 방법이 맞는 것 같구나.”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군부인 한씨의 방법이 내가 생각한 답이지만 그런 지식이 어디서 나왔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여태껏 꾹꾹 억눌러 놓고 살았다. 참 며느리 하나는 잘 골랐다니까.
“아직 제 배움이 깊지 못하여 뜻을 정리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부족한 생각을 받아주심이 참으로 기쁩니다.”
“여인의 몸은 큰 근육이 늘어나기 힘들어서 다른 방도를 찾아 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러하니 네가 찾아낸 길을 차근차근 채워 나가면 충분할 일이라 여겨지는구나.”
“아버님의 깊은 뜻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급히 움직이지 말고 차근차근 행하면 충분한 일이다. 이미 입신체비가 퍼지고 있으니 네 뜻이 헛되지 않도록 나도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군부인 한씨를 끝으로 인사는 끝났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인 근손실 복구가 남아있다.
----------
열흘 가까이 몸을 되살렸다. 이전에 삼대 운동 1,000근에 도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충분한 휴식과 운동 이후에 삼대 운동을 시험해 보려 했는데 공좌(스쿼트)는 그렇다 치자. 의압(벤치프레스)에서 진짜 죽을 뻔 했다.
“크우우우우웃! 버틸 수가 없다!”
“괜찮으십니까?”
정점에 올라선 순간에 손에 힘이 부치면서 대역기가 휘청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현동이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소름 돋는 순간이었다.
“염려하지 말거라. 대역기가 떨어졌는데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다행이도 발을 비켜서 떨어졌으니 염려 마십시오.”
“이전에는 의압으로 370근(237㎏)을 쉬이 들었는데 이제는 350근(224㎏)조차도 힘에 부치는구나. 내가 만용을 부리지 말라 가르치거늘 만용을 부렸으니 잘못이 크다.”
예상보다 심각하다. 삼대 운동으로 측정했는데 이전의 1,350근의 기록은커녕 1,250근을 간신히 들어 올릴 정도였다. 체지방 또한 수 등급(10% 가량)에서 우 등급(15%이하)로 늘어났다. 이래서는 우리 장남의 본보기라 하자니 너무 부족한 몸이다.
“내 나이가 불혹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하여 근손실이 이렇게 심각하단 말인가.”
“하오나 삼대 운동이 천이백 근이 넘지 않으셨습니까. 추운 북방에서 심혈을 기울이셨으니 오히려 근손실이 적은 것이 아닌지요.”
“아니다. 아비의 이 몸이 보이지 않느냐? 몸에 기름이 끼고 살이 늘어지고 있다. 하 체장(하위지의 직급)! 거기 있는가?”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위지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입신체비장에 있었다. 배움이 깊지 못해 훈련도감에서 일하는 마일용과 달리 하위지는 서산군과 같이 내 제자로 온 이들을 총괄 감독하는 체장(體長 - 관장 정도의 직급)의 직급을 가졌다.
“보게. 이 몸이 자네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북방에서 고난을 겪으셨으나 군살도 적으시며 근손실도 적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몸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몸이 아닌가.”
하위지는 비록 체격이 크지 않아 근육량은 적지만 배움만큼은 나의 다음이다. 이런 좋은 보조가 있다면 근손실을 메꾸기 충분하겠지. 하지만 예상하지도 못한 완곡한 거절이 돌아왔다.
“저도 대군어른의 입신체비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주상전하께서 저와 함께 입신체비를 하시는지라.”
“모든 날을 도와달라는 것이 아닐세. 그저 종제가 입신체비장에 있을 적에만 입신체비를 도우란 말이지. 잠깐 본래 종제(서산군)와 함께…….”
계산이 맞지 않는다. 서산군이 형님의 입신체비를 담당하고 하위지가 육조의 입신체비를 담당한다. 그렇게 돌아가야 하는데 왜 혼자서 세 가지 일을 다 하는 거지?
“서산군 대감은 당분간 입신체비를 궐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무슨 병이라도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요즘에 들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인지라…….”
사람을 보내서 서산군을 불러오자 갑자기 효령대군이 따라온다. 그런데 효령대군은 인사를 해도 들은 척 만 척 하고 한숨을 쉬고 서산군의 몰골은 창백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종형을 간만에 뵙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왜 이리 몸을 놀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인가. 설마 식사도 거르는 것인가?”
“배가 고프지도 않습니다.”
열량 소모를 버텨내기 위해서 입신체비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음식을 챙겨 먹어야 하며 허기도 엄청나다. 그런데 배가 고프지도 않다고?
“입신체비를 열심히 행하면 근육이 많아지지. 그러한 근육을 지탱하기 위하여 먹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아니 되는데 어쩌자고 이러한 것인가.”
“가친(家親 - 아버지)께서 위독하십니다.”
“큰 백부님께서? 술을 달고 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효령대군을 돌아보았지만 내 눈빛을 피했다. 대체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그리고 서산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봐야겠으니 입신체비장 구석에 있는 글방으로 셋을 데려갔다.
“중부님께서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니 제가 답답할 노릇입니다.”
“내가 뭐 할 말이 있다고. 더 이상 형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거라.”
“백부님!”
“형님을 한 달 전에 만났는데 이미 피부가 꺼멓게 물들고 입에서 단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러한데도 술을 됫박으로 마시고 있으니 가망이 없었느니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성품이 가장 온화한 효령대군이 이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다시 서산군을 돌아보자 우물쭈물 거리면서 입을 열지도 못한다.
“종제는 큰 백부님을 뵈러 가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저는 의절(義絶)당하였으니 뵐 방법이 없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분가가 아니었는가. 부자간의 연이 이렇게 쉬이 끊어지다니 말이나 되는 것인가? 그간 명절에는 만나 보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없는 사이에 사건이 하나 더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으니 물어봤지만 서산군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산군에게는 미안하지만 알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의절을 논하신 것인지 궁금하니 상세히 이야기 해 보게.”
“지난 정월 대보름에 종친부에서 우연히 뵙게 되었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고 골격이 쇠하였기에 입신체비를 행하여 몸을 다스리자고 하였는데 이를 단번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은?”
“몸이 쇠하셨으니 보약을 한 재 사들고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하지만 술을 드셨는지 화를 내시면서 회초리를 들고 마구 내리치셨습니다. 하지만 본심은 아니셨는지 멍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이지만 중증 알코올 중독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진짜 때리는 척을 했는지 아니면 알코올 중독으로 힘이 떨어져 상처를 입히지 못한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한참을 매질하셔도 아프지 않기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겁박할 마음을 품었다고 하시면서 의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녕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가친께서는 나날이 쇠하여 가는데 효를 뜻하는 입신체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형들은 무엇이라 하던가.”
그래 이쯤 되면 내 사촌들, 정확히는 양녕대군의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뭔가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데 가만히 방치하고 있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서산군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형님들은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이라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할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백부님의 집으로 나를 따라 오게나. 나와 의절을 하지 않았으니 환후를 보러 왔다 하면 될 걸세.”
“난 이만 들어가면 되겠지?”
“중부님이 함께 하셔야 큰 백부님을 모시기 편할 것입니다.”
효령대군이 뭐라 중얼거리면서도 내 말을 따른다. 서산군은 내 친척이자 제자이며 종친 가운데 입신체비를 가장 능숙하게 하는 인재다. 이대로 두면 아까운 사람 몸이 상하겠다.
그렇게 말을 타고 양녕대군의 집으로 향했다. 하인이 서산군을 돌려보내려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뒤로 물러섰다. 안면이 있는 것이 예전에도 봤던 하인이 분명하다.
“백부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 하더군.”
“하오나 서산군 대감을 뵈려고 하시지 않으니 이것을 어찌 해야 합니까.”
“그냥 내 얼굴을 보아 문을 열어주게나. 형님을 뵙고 싶은데 어찌 하면 좋겠나.”
효령대군이 나서자 하인이 망설이는 눈빛을 보이다가 냅다 대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장독대가 모두 깨져서 장들이 마당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양녕대군의 큰아들인 순성군이 화들짝 놀라서 달려나왔다.
“숙부님?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형님 얼굴을 뵈러 왔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난장판이냐.”
“별다른 일은 아닙니다. 그저 도둑이 들어서.”
“변명을 하더라도 제대로 할 일이다. 형님이 아프시다 하니 뵙고 싶구나. 어디에, 아니 안채에서 고함이 들리니 안채에 계시는구나.”
효령대군이 혀를 차면서 안채로 들어가는데 설마 알코올 중독으로 치매가 왔단 말인가?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이니 순성군에게 말을 걸었다.
“종형께 여쭤볼 일이 있습니다. 백부님의 환후가 얼마나 심각하십니까.”
“아아 그렇지, 상왕전하의 환후를 다스린 종제이니 내 믿음이 가는군! 의원들이 포기한 일이니 방도가 없었다네.”
믿음이 갔으면 진작 이야기를 해야지! 그렇게 노려보니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상황을 설명하였다.
“혜(서산군)의 첩실과 다툼이 있은 다음에 상왕전하께서 다시금 난행(亂行)을 벌이면 위리안치에 처할 것이라 명을 내리셨네. 집안에만 계시며 술을 드시더니 점점 더 많이 드시게 되었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술을 얼마나 드신 것입니까?”
“처음에는 많이 드시지 않으시더니 근래에 들어서는 소주와 청주로 하루 다섯 되(3리터)를 드시네. 그리고 두 달 전부터 술을 드시고 저렇게 난동을 부리시니 답이 있나.”
청주만 해도 현대에서 파는 소주와 비슷한 도수인데 하루 3리터를 마시면 병이 안 생길 이유가 없다. 우물쭈물하는 순성군을 보다 못하고 안채로 나갔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노인치고는 제법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양녕대군이 아니었다. 시커먼 피부와 흐리멍덩한 눈알을 굴려대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동생아! 우리 착한 호(祜)야! 네가 불공을 드리는 동안에 사슴을 잡아먹으니 기분이 좋구나! 같이 석전이나 하자꾸나!”
“아버지!”
이미 치매, 흔히 말해서 노망기를 보이는 양녕대군이 온몸에 된장을 바르고 효령대군을 향해 바둑돌을 던지고 있었다. 효령대군은 그저 손을 합장하고 불경을 읊는데 호(祜)라는 말이 무슨 의미지?
“저도 형님도 환갑이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옛 이름을 부르시는지 영문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이놈이 감히 세자를 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니! 저기 도(세종대왕) 녀석이 책에 고개를 박은 것이 보이지 않더냐!”
“저 자는 형님의 셋째 아들인 서산군입니다.”
나조차도 이런 중증 알코올 중독자를 처음 보는데 이 시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증으로 보이겠지. 서산군은 양녕대군의 옷에 묻은 된장을 손으로 닦아내고 말을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 정신 차리십시오! 셋째인 혜(譿)입니다!”
“난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부인은 어디로 간 거야? 오늘이 길일이겠는데.”
“형님! 아버지께 의원이라도 소개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의원도 술을 끊으라고 하니 답이 있던가? 그렇기에 네가 집에 오는 일을 한사코 막은 것이다. 보아서 될 것이 있고 안 될 것이 있느니라.”
효령대군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돌렸고 이제 저 몰골을 보고 넘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천천히 걸어 나가자 양녕대군이 혼탁한 눈으로도 내 모습을 훑어보더니만 흠칫 놀라면서 물러났다.
“태조대왕님!”
“백부님! 저는 태조대왕님이 아니고 조카인 수양대군 유 입니다!”
“아닙니다! 태조대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세자가 되어 행패를 부렸습니다. 아아악!”
뒤로 자빠지며 기절한 양녕대군을 부축했는데 몸이 가볍다 못해서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간암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비교해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은퇴한 양홍수(세종대왕의 어의)를 불러올 것이니 백부님을 방으로 모시겠소?”
정말 싫은 사람이지만 서산군의 마음고생을 덜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책을 저술하고 있던 양홍수를 불러오자 저녁노을이 내려오고 있었다.
기절한 양녕대군을 한참 동안 진맥하던 양홍수는 침을 몇 번 놓고 다시 진맥하기를 반복하였다. 계속 식은땀을 흘리면서 양녕대군의 맥을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효령대군이 나섰다.
“형님의 환후가 어떠한가? 더함도 덜함도 없이 그대로 말해주게.”
“가망이 없습니다. 양녕대군 어른께서는 간장과 폐부에 열이 스미고 비장에도 습이 스미셨으며 이미 소갈증이 중증에 달해 있습니다.”
“그러고도 의원이요?”
“제가 편작(扁鵲 - 중국 전설상의 명의)이라 하여도 가망이 없습니다. 설령 술을 끊는다 해도 한 달을 살기가 힘들 것입니다.”
현대라면 살아남을 희망이 보일지 몰라도 이 시대에서 어의 출신을 불러와서 진료를 했으면 할 일은 다 했다. 밖으로 나오자 서산군이 쭈그려 앉아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이제 어찌 하여야 합니까. 몸으로 효를 표현함이 입신체비인데 저는 효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자식으로 할 도리는 충분히 하지 않았는가. 백부께서 입신체비를 행하셨다면 술을 그렇게 드시고 몸을 망쳤겠는가. 어의였던 양홍수도 답이 없다 하였으니 이만 돌아가세.”
결국 양녕대군은 사흘 뒤에 피를 토하고 숨을 거뒀다. 서산군을 의절한 일에 대해서는 형제들 모두가 광증(狂症)에 시달리다 헛소리를 한 것이라 치부하였고. 서산군도 자신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였다고 받아들이고 더 이상은 언급하기를 꺼려하였다.
형님 또한 백부의 죽음이어서 그런지 시호를 강정(剛靖)으로 내리고 애도하였다. 하지만 술을 마시다 술병으로 죽었다면 왕실의 치부라 생각하였는지 고의적으로 노령으로 기력이 쇠하여 쓰러졌다는 소문을 퍼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