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62화 –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 >
1455년 2월, 이른 새벽의 원평도호부(原平都護府 - 현 파주)의 임진강 근처에는 난데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명재상 황희가 얼마 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황희는 조문객으로 도성이 마비될까 염려되어 말년에 찾던 낙하정(洛河亭 - 훗날의 반구정) 인근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허리가 꼿꼿이 펴진 노인과 아직 앳된 기가 남아있는 젊은이, 그리고 신장이 작지만 옹골차 보이는 중년인이 나아갔다.
“압구(狎鷗)형님이 길을 잘 아시니 자주 오셨나 봅니다.”
“은퇴하신 영의정부사께서 부르신 일이 세 번 정도 있었다네. 세상에, 저게 다 조문을 위하여 온 자들이라니. 지금은 새벽이 아닙니까.”
“당연하지 않는가? 내가 무인년(1399년) 문과에 급제하여서 기쁠 무렵에도 정랑(正郞)으로 계시던 분인데 시기를 잘 택하여 다행이네. 한낮에 왔으면 저녁에 돌아갈 뻔 했어.”
놀라는 한명회와 김시습과 다르게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을 돌아보던 김반(金泮)은 서서히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보이자 마지못해 말했다.
“나는 잠시 면식이 있는 분들께 인사를 드릴 것이다. 시습아, 너는 배재당을 대표하여 문상을 드리고 압구 자네는 면식이 있으니 아는 이와 만나보게.”
빈객들을 맞이하기에 바쁜 황보신과 황수신을 보던 한명회는 이어지는 행렬에 질려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래서야 우리는 끼일 자리도 없겠군, 그렇지 않은가 매월당(梅月堂)?”
“인맥을 쌓으려다가 잘못하면 망신살만 뻗치겠군요.”
“잠시 틈이 생겼으니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나 하면 적당할 것 같은데……. 자네 가칙(可則 - 홍달손의 호) 아닌가?”
한명회의 친구 가운데 하나인 홍달손이 있었다. 한명회는 반갑게 다가가서 인사를 했지만 홍달손은 눈을 부비면서 한명회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제야 나를 알아보다니 너무 섭섭하군.”
“자네를 누가 같은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 왜소한 몸이 변했으니 이제는 무관인 나보다 장대한 것 같군. 그게 입신체비의 힘이란 말인가?”
“물론이라네. 벗을 간만에 보니 회포를 풀고 싶지만 너무나 번잡한 곳이어서 말을 나누기가 힘들어. 나중에 다시 보세나.”
홍달손이 돌아서자 한명회의 입에서 웃음이 피어올랐다. 몸을 키우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말은 정말이었다. 시일이 지날수록 자신을 알아볼 사람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 분명하였다.
조금 더 기다리자 상주를 보조하는 황희의 셋째 아들 황수신을 만나게 되었다. 평상시라면 거들떠 볼 수도 없는 자이지만 한명회와 면식이 있었던 터라 혼쾌히 이야기를 나늘 수 있었다.
“그간 체격이 더욱 좋아졌군. 이 자리에서는 미안하지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네. 혹여나 부군(府君)께서 재미난 이야기라도 하신 적이 있었나?”
“선대인(先大人 -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의 존칭)께서는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높은 관직에 오르면 처세가 중요하다면서 거듭 강조하셨지요.”
한명회를 만난 황희는 조용히 관직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한명회가 알 방법이 없는,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에 처세법 같은 뼈와 살이 되는 이야기를 했으니까. 하지만 황수신은 더더욱 의심하는 눈초리로 한명회를 보았다.
“남길 자를 남겨놓고 가셨으니 만족하신다는 말을 자주 하였지. 그리고 웃으시며 돌아 가셨다네.”
“웃으시면서요?”
“집필하시던 법전의 초본 표지에 해천산천(海千山千 – 오랜 경험으로 세상을 다 안다)과 다음 글귀를 쓰시다 말고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돌아가셨다네.”
“아무래도 경국대전에 심혈을 기울여서 그러하신 것 아닐까요.”
사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황희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던 그 눈빛은 마치 전쟁터에 나서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과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훗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알겠네.”
황수신이 더 이상은 언급하기 싫은 눈치를 보이자 한명회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아침이었고 문상객이 몰려드는 가운데 일행 모두가 가까스로 일을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그만 한양으로 올라가시지요. 날이 추운데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체운동을 하는 날이지? 압구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승마는 하체 운동으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하물며 돌아가는 길이 팔십 리이니 과할 지경이지요, 염려하지 말고 기입하시면 충분합니다.”
한명회는 품속에서 입신체비를 기록하는 근생부(筋生簿)를 꺼냈다. 모두 세필로 식사와 운동량을 적어나가는 와중에 김시습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보아도 형님의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근생부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기 위한 살생부(殺生簿)와 운율이 맞지 않습니까? 제가 지었다면 일성록과 대조되는 체비록으로 지었을 겁니다.”
“떽! 우스운 소리를 하지도 말게! 사람이 어찌 생과 사를 논한단 말인가?”
그런 말을 듣던 김반도 제자인 김시습의 말에 떠올린 것이 있는지 맞장구를 쳤다.
“다른 이들 앞에서 거짓을 논하면 아니 된다네. 자네는 처음 왔을 적에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하다 못해서 근생록(錄)이면 모를 일이군.”
“입신체비는 행함과 행하지 않음이 명확하니 록(錄 - 기록)보다는 부(簿 - 장부)가 옳지 않습니까?”
그러한 말에도 상관없이 김반과 김시습 모두 오늘 일어났던 일을 착실히 기입하였다. 일성록(일기)과 마찬가지로 근생부는 참으로 요긴한 물건이었다.
먼 길을 돌아온 다음날의 배재당도 여느 날과 같았다. 관직에 나서거나 북방에 나서는 등 인원의 변동이 있었지만 여전히 야인 자제들을 교화시키고 입신체비를 행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모두 숙련자이기에 스스로 부족한 부위를 찾아 입신체비를 행하였으며 최근에 한명회가 만들어낸 근생부를 통하여 더욱 쉽게 입신체비에 임할 수 있었다. 한명회는 가슴을 단련하는 날이어서 더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끄읍! 수우우웁!”
“자세가 아주 좋아! 한 진사 자네는 역시 흉부(胸部)를 다루는 일은 대단하구만.”
여느 누구보다도 안정적인 자세. 3년 전에만 하여도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려고 애썼지만 나날이 달라지는 모습에 한명회의 성품도 많이 강직해지고 올곧아졌다. 한 회차(세트)를 마친 한명회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면서 답했다.
“역시 엄신(딥스)은 평대에서 해야 제 맛이 아니겠습니까.”
“한 진사를 처음 보았을 적이 생각나는군. 그때는 어떻게든 빠지려 하지 않았나.”
“그저 열심히 행할 뿐이지요. 모든 배움에는 왕도가 없지 않습니까.”
배재당의 젊은이들 중 한명회만 진사였다. 시문에 재주가 있는 김시습마저도 배운 것이 아까워서 생원시를 보았지만 한명회는 꿋꿋이 진사시를 보았으며 단번에 합격하였다.
규칙적인 생활과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입신체비와 근면육연화기억술이 아니더라도 규칙적인 공부법은 한명회가 가진 장점을 부각시켰다.
“압구 형님도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형님의 상체는 제가 보아도 부러울 지경입니다.”
“되었네, 그리 하여도 기껏해야 3대 운동 700근을 만들지 못하였어. 그리고 서로 학문에 힘써야지 몸에만 힘쓰면 되겠나? 증광시 대과가 보름조차 남지 않았다네.”
그러한 말을 하는 한명회도 횟수를 모두 채우고 아래를 내려 보며 가슴에 힘을 주었다. 잘 발달된 그의 대흉근이 불룩거리면서 위용을 뽐냈다.
“부모님께서 나를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
칠삭둥이로 태어났으나 이제야 사람이 되었다. 한명회는 다시금 입신체비의 뜻인 효도를 되새기면서 천천히 정리운동으로 몸을 가다듬고 복식을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오랜 벗인 권람과 술을 마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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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람은 더 이상 집현전 소속이 아니었다. 고려사의 성공적인 편찬으로 직급이 올라 사헌부에 소속된 것이다. 가문의 힘과 능력으로 꾸준히 진급하고 있었지만 한명회와는 오랜 벗인지라 스스럼없이 술잔이 오갔다.
“한 잔 받게나. 자네는 요즘 들어 몸이 더더욱 좋아지고 있어.”
“그저 다른 이들과 함께 행할 뿐이네. 내가 뛰어난 사람이 아님은 익히 알고 있지.”
“그렇다 하여도 지난 증광시(增廣試) 진사시에는 대번에 합격하지 않았는가. 이제야 자네의 재능이 드러나는군.”
멋쩍게 웃는 한명회는 아직도 부족하다 생각했다. 이번 대과에 바로 응시하여도 가까스로 말석을 차지하면 다행이다. 알면 알수록 배움은 끝이 없어 보였다.
“겸손함이라? 배재당에 있으면 매일 겸손함을 배우지.”
“그런가? 그러고 보니 자네는 삼대 운동을 얼마나 하는가? 내가 체격이 더 좋지만 자네 정도면 나와 비슷하게 600근은 가뿐할 것 같은데.”
“시거(데드리프트)를 광시거(스모 데드리프트)로 변용한다면 700근 정도는 가까스로 가능하지. 상체가 긴 편이라서 광시거가 조금 더 안정적이거든.”
“측간에서 하는 그 자세 말인가?”
“어허! 입신체비는 모두 쓸모가 있으며 귀천은 없다네! 대군 어른께서도 최초로 행한 것이 광시거였어! 훗날 몸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자세를 변용하신 것이고!”
다시금 술잔이 오가면서 한명회의 머릿속에서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번 증광시를 치른 이유가 명확하지 않던데 대체 무슨 경사란 말인가?
“소한당(所閒堂 - 권람의 호) 자네는 사헌부에 있으니 나라의 일을 잘 알겠지. 이번 증광시는 어찌하여 행하는 것인가? 근래에 경사라고 할 만한 일이 있는가?”
“상왕께서 힘을 들이셔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핵심인 육전(六典)이 완성되었고. 고려사(高麗史)도 집필되었지만 경사라 볼 일은 아니라네. 하지만 나라에 사람이 부족하니 북변을 개척했다고 명분을 삼은 것이지.”
“사람이 부족하다고? 설마 그 훈도(訓導)를 뽑기 위해서인가?”
“아니네, 북변을 개척해야 하니 사람이 부족하다네. 자네가 이번 시험에 합격한다면 삼남 지역에서 경험을 쌓고. 훗날 지금 대군 어른이 계신 곳에서 고을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지.”
하르빈이라고 하였던가. 듣자하니 10월부터 강물이 얼어버리고 4월이 되어야 풀린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추위이다. 한명회는 잠시 상상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다시금 술잔을 잡았다.
“내 그간 자네와의 정을 보아서 좋은 것을 알려주겠네. 다름이 아니고 이번 증광시…….”
“삿된 일은 논하지도 말게!”
“자네 많이 변했군. 예전의 자네였다면 귀를 기울였을 것인데.”
“내가 무슨 변고를 당했는지 자네라면 잘 알지 아는가? 상왕전하와 대군어른께서 나를 감싸주시지 않으셨으면 까마귀밥이 되었을 것이네!”
분노한 왕우지에게 깨물리고 두들겨 맞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개성에서 일어난 일을 아는 자는 세상에 열 명 조차 안 될 것이며 개중 한 명이 한명회의 벗인 권람이었다.
계책이라 하면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는 것이지 사소한 일에 얽매였다가는 화를 입으리라. 한명회가 화를 내면서 술을 연신 들이켜자 취기가 올라와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입신체비로 체격이 좋아져도 술은 늘어나지를 않으이.”
“그게 무슨…… 끄익! 조금 취했군. 그러기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가!”
“그렇다면 내 사과의 뜻으로 자네가 접하지 못하였을 좋은 이야기를 하겠네, 고려사는 본 적이 있겠지만 자네는 모르고 있을 전조의 이야기를 해 주겠네. 어떤 것이 좋겠나.”
“재산일세.”
한명회는 멀쩡해지려고 애썼지만 술기운이 올라오자 입신체비로 억누른 성격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물욕과 권력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좋은 이야기가 있네. 왕태조의 가문은 본디 배를 타고 무역을 행하는 가문이었다네. 그리하여 전조는 무역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개중에는 대식국(大食國 - 아라비아)과의 무역을 성사한 적이 있었지…….”
“대식국이라? 송과 교류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송은 당연히 교류하였지. 머나먼 대식국에서 배를 타고 아국에 직접 왔다더군. 대군어른께서는 고려사에 간단히 적으셨지만 상세한 일은 내 머릿속에 있다네.”
술에 취한 한명회의 머릿속에는 권람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속속들이 박히고 있었다. 그렇게 거의 반 시진(한 시간)을 내리 이야기를 하느라 지쳤던 권람 또한 피로가 몰려왔고. 술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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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광시가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궁궐에서도 출제하는 내용에 대하여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문종이 제시한 마지막 문제에 대해 대신들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윽고 영의정 하연이 모두를 대표해 입을 열었다. 증광시에 대한 필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시험 문제가 가장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전하 전시의 논(論 - 주어진 주제에 논평하다)에 관련된 주제가 정녕 이러하옵니까?”
“사소한 일은 중요하지 않다네. 상왕께서도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일을 논하셨는데 시국이 변한 지금에 와서 국책을 묻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증광시를 치르는 일은 당연하다 생각했으며, 목적 자체가 북방에 보낼 관료들을 선발하기 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연의 손 또한 파들파들 떨렸다. 그만큼 문종이 써내려간 문장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와 달리 논에 해당되는 것이 세 문항이나 되었다.
1. 명국과의 외교를 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떠한 방침을 정해야 하는가.
2. 사나운 북방의 야인들을 교화하고 아국으로 끌어들임에 있어서 북방에 나아가 행할 일이 무엇인가.
3. 아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왜국과 유구국(流球國 - 오키나와)과 교역을 행한다면 무엇이 우선인가.
“신 하연, 전하의 의중을 알 길이 없사옵니다. 상왕께서도 논에 있어서는 하나의 주제만 논하셨는데 이러하면 유생들이 혼란에 빠질 지경입니다.”
“염려하지 말게. 지금 필요한 자는 시야가 넓은 자, 큰 계획을 세우고 수행할 수 있는 자, 그리고 그 과정을 쉽사리 아는 자라네. 설령 그렇지 아니하여도 어려움은 적절하지 않은가.”
“하오면 등위는 어떻게 정하실 것입니까?”
“각 항목에서 가장 빼어난 자를 가리고, 그 자들끼리 장원, 방안, 탐화(과거시험의 1, 2, 3등)를 나눌 것이라네.”
파격적이면서 골방에서 경전만 읽는 유생들의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문종의 입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 좋은 인재가 뽑힌다면 동생을 더더욱 열심히 굴릴 수 있다.
눈앞의 일은 몰라도 나라의 백년대계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지면 동생은 언제나 생각하지도 못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번 증광시에서 뛰어난 답안을 제출한 자는 적당한 관직을 주고 동생과 함께 움직이면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