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61화 – 대단원의 막(2) >
송화강에 설치된 부교(浮橋)를 통해 강 건너의 본영으로 퇴각한 에센은 분노하다 못해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도 못했다. 여기까지 가져온 화포는 결정적인 순간에 소용이 없었다.
노획한 물건 중에 가장 상태가 좋고 가장 구경이 큰 천자뇌포(天子雷砲) 15문을 가져왔지만 단 12차례의 발사 이후 모조리 독한 연기를 뿜으면서 먹통이 되었다. 그렇게 게르에 냉기가 감돌던 가운데, 에센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피해는?”
“아시테무르님의 시신은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몰리하이님 중태이며, 우익은 칠천 가운데 삼천이 멀쩡한 상황입니다. 중상자는 천 명이 넘습니다.”
“조선의 장수가 내 아들의 머리통을 반쪽을 내버렸는데! 네놈들은 대체 뭘 했어! 그렇다면 좌익은!”
“좌익은 손해가 적어 팔천 중 육천이 멀쩡하고 오백 가량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본진은 만 사천 가운데 이천이 죽고 팔백 가량이 중상입니다.”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멍청한 아들놈이 죽은 것이야 상관없지만 전체 병력 3만 가운데 3할에 가까운 구천 가량이 사상자였다. 조금만 더 전투가 진행되었으면 혼란에 빠져서 더 이상 군대라고 불리기도 힘든 지경에 몰렸을 것이다.
“삼만이 몰아 쳤는데 구천이나 죽거나 다쳐?”
“조금만 더 전투가 길어졌으면 본진도 위험했습니다. 태사께서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습니까?”
오이라트의 계획은 장기전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양익을 내세워 적의 기병을 묶어두고 적의 화포를 노려 쏘아 화포만 부숴버린다. 화약의 부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은 일이다.
화포를 부수고 차근차근 망루를 무너트리면서 목을 조여 나갈 생각이었는데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었다. 당분간 내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휘하 4개 투멘(부족)을 통솔할 일이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명나라 놈들과 망가진 화포를 게르 앞으로 끌고 와라. 그리고 튼튼한 몽둥이도 준비해라.”
“네! 태사님!”
에센이 심호흡을 하면서 분노를 삭이는 와중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명나라 화포장들이 줄줄이 게르 앞에 집합했다. 에센은 몽둥이를 붕붕 돌리면서 가장 앞에 있던 한 명을 가리켰다.
“화포가 어째서 이 꼴이 난거지?”
“가짜 화약이었습니다. 처음 세 상자는 멀쩡한 화약이었지만 네 번째 상자부터는 가짜 화약이었습니다.”
“가짜인데 왜 쑤셔 박아서 화포를 엉망으로 만들어! 네놈의 눈깔은 무엇으로 만들었나!”
애꿎은 명나라 출신 화포장의 옆구리에 몽둥이가 쑤셔 박혔다. 신음소리를 내면서 주저앉은 화포장의 몸 위로 몽둥이찜질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화포장을 두들기던 에센은 피에 젖은 몽둥이를 집어 던지더니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그렇다면 너희는 왜 진짜 화약부터 썼나 차라리 가짜 화약을 먼저 썼으면 손해가 적었을 것인데?”
“나리께서 좋은 화약이라 하시면서 먼저 쓰라고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영문도 모르고 화포만 쏘았을 뿐입니다.”
기억을 되새기던 에센은 바얀이 보낸 전령이 상자에 따로 표시를 했던 것을 기억했다. 칼집을 낸 상자의 화약이 가장 좋은 물건이라고 먼저 쓰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났어. 그래서 네 번째 상자부터 가짜화약이라고? 질감도 조금 다르긴 하군. 그렇다면 바얀에게 보낸 늙은 놈이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마음을 먹었군.”
다시금 냉정해진 에센은 가장 먼저 할 일을 택했다. 자신의 작전을 농락한 놈을 먼저 죽여야 한다.
“바얀한테 전령을 보내, 그 늙은 놈을 반드시 살려서 우리에게 데려오라고. 아니 바얀도 이미 당했겠군. 이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놈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꼴이야.”
“바얀의 별동대가 당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이틀 전에 금나라 찌꺼기를 앞세워서 헛소리를 한 적이 있었지. 놈들이 허세를 부렸을지는 몰라도 일부는 사실임에 분명하다. 더 싸워봤자 손해만 본다.”
시작부터 상대의 손아귀에 있으니 이길 전쟁이 아니었다. 타이순에게 보낸 첩자들도 가짜 첩자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증거는 없지만 정말로 타이순의 태도가 괘씸했다.
지금까지 타이순이 살아있는 이유는 쿠릴타이로 선출된 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노려서 다른 칸을 세우면 될 일이다. 아무런 물증은 없었지만 심증은 충분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좋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투메드부가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 분명해. 조선 놈들과 싸웠는데 무슨 이득을 거뒀겠나?”
계획이 망가졌으면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면 된다. 알락은 계획을 이해하고는 맞장구를 쳤다.
“조선과 타이순이 손을 잡고,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함정을 파놓은 거라 말씀하실 작정이십니까? 투메드부는 그렇기에 조선과 싸우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지, 투메드부 따위가 조선을 상대로 이길 가망이라도 있나? 쥐죽은 듯이 박혀있을 것이 분명하지. 무능력하고 외세까지 끌어들인 칸이라 하면 충분히 갈아치울 수 있어.”
이렇게 명분을 앞세워서 쿠릴타이를 열고 새로운 칸을 옹립하면 일은 훨씬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알락은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투메드부를 이끄는 아크바르지가 대승을 거둔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푸하하하하핫!”
분노에 차있던 에센의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의 아버지인 토곤이 타이순을 칸으로 옹립하고 동생인 아크바르지에 손을 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허수아비 칸으로 올릴 가치조차 없는 놈이었으니까.
“투메드부의 병력의 절반은 금나라 찌꺼기이고, 절반은 양이나 키우면서 편안히 살던 놈들인데. 그냥 금나라 찌꺼기와 싸워도 힘든데 조선의 지원을 받는 놈들을 싸워서 이기라고? 조선 놈들이 목이라도 내밀어 주나?”
“제가 너무 염려를 하였나 봅니다.”
“아니야, 가끔 이런 농담을 하면 아주 좋겠군. 기분이 풀렸어. 놈들이 대승이라 칭할 정도면 수급을 삼천 개는 거둬도 모자를 판인데 오히려 수급 삼천 개를 조선에 헌납하겠지.”
에센은 너무나 웃다가 생긴 눈물을 훔치다가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만에 하나, 천에 만에 하나라도 아크바르지 그 놈이 열 살부터 아버지를 속여서 한심한 짓거리를 할 정도로 뛰어난 놈이라면 가능성은 있겠지.”
“하오면 저 포로들은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화포가 저렇게 고철덩이가 되었으니 데리고 다닐 이유도 없다. 하지만 에센의 기분이 너무나 좋았기에 선심을 쓰는 척 자비를 베풀었다.
“저놈들을 조선에게 선물로 남겨둘 것이니 퇴각 준비나 해라. 바얀에게도 전령을 보내서 알아서 퇴각하라 일러 둬라.”
심각한 패배를 겪었지만 아직 기회는 많았다. 타이순의 동생인 아크바르지가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적어도 수천 이상의 적을 쓸어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에센의 바람과는 다르게. 투메드부의 전선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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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의 북방으로 나올 적에는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줄 알았다. 북방에서 건주 양위를 상대로 우세를 점할 세력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건주 양위는 그만큼 막대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철령 전투에서 몽골의 패색이 보인 순간 부하들이 예비마를 모조리 강탈했다. 모든 부족민에게 말을 한 마리씩 나눠 줄 정도로 말을 뜯어낸 것이 시작이었다.
그 다음엔 길안내를 해준 다음 타이순의 서평에 둔 보급대를 습격하여 이득을 다시 챙겼다. 다른 놈들은 조선의 뒤꽁무니나 따라 다니거나 마을을 습격하여 노략질을 하면서 주머니를 채웠지만 자신은 가장 큰 이득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충샨님! 또 습격입니다!”
“대체 그놈의 새끼들은 뭘 처먹고 전 병력을 동원했단 말이냐! 그래서 이번에는 피해가 얼마야?”
“투메드 부에서 기습하여 장정 오백 가량이 죽고 아녀자 천 명이 납치당하거나 죽었습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들어가듯 차츰차츰 피해가 누적되었다. 서로 견제해야할 해서여진과 투메드부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전 병력을 동원해서 자신을 공격했다.
“지금이라도 요동으로 돌아가서 서유정에게 복속을 청하심이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빠져나오려고 말 오천 마리를 뇌물로 바쳤는데. 들어가면서 다시 오천 마리를 바치라고? 우리가 여유 말이 몇 마리나 있어!”
예전에 노획한 말을 조선군에게 팔아 보급품을 구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 섞여있던 독한 술이 보였지만 참았다. 지금 술에 취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식은 찻물이 목을 넘어갔다. 조상의 땅인 하르빈을 찾아 요동을 나설 적에만 해도 자신 아래에는 5천호의 백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3천호가 될까 말까다. 하지만 눈치도 없는 부하는 셈을 해보더니 기쁘게 말했다.
“오천 마리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다시 서유정에게 바치면 우리는 손해만 보라고?”
부하가 밖으로 나서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몸을 정돈할 틈도 없어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짧은 머리카락을 긁은 충샨은 결단을 내렸다.
“방법이 없어, 빨리 투메드부 세력권이라도 벗어나서 한 놈만 상대해야지. 후룬 놈들은 별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든 뚫을 방법은 있다.”
다음날, 건주 양위는 불안감을 집어 삼키며 애써 이동을 시작했다. 경계를 넘었다 해도 해서여진의 영토이니 계속 전투가 이어지겠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런 건주 양위의 모습을 천리경을 통해 산 위에서 지켜보는 정충렬과 조선인 군관들은 혀를 차면서 말에 올랐다.
“정 만호님, 도적놈들이 돌아가려 합니까? 하르빈에서는 며칠 전에 싸움이 끝났다고 하던데 놈들이 진로를 돌리면 좋은 일 아닙니까?”
“아니오. 진로를 보아하니 이대로 있다가는 이틀 뒤에 본진 근처로 접근할 것이오.”
“지금까지는 올적합(兀狄哈 - 해서여진의 조선식 명칭)의 영토 밖에 있었으니 관망만 하였지만. 이제는 직접 나서야지 방법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독한 도적떼군요.”
“그렇소이다. 아녀자와 노인도 끼어있는 악랄한 도적들이지.”
정충렬을 웃음을 참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복수는 언제나 즐거운 일인데 남의 손을 빌리는 복수는 더더욱 즐거운 일이니까.
“비록 내가 요동에 있을 적에, 누명을 쓰고 조선으로 쫓겨난 일이 있었소.”
“오호 그렇습니까? 만호께서는 참으로 힘에 부치셨을 것입니다.”
“주상전하께서 야인인 이 몸을 받아주시고, 조상의 원한을 갚게 하셨으니 그 은혜를 잊을 일이 있겠소? 그저 주상전하의 명을 받아 감히 아국의 영토를 침입한 도적들을 벌할 뿐이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목책을 대충 쌓은 본진으로 내려가며 서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너스레를 떨면서 주고받았다. 눈치가 빠른 군관이 재빨리 역관을 시켜 몽골의 문자로 서찰을 써내려갔다.
“방침을 정리하겠소. 달자들은 난폭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나 아국과 일시로 동맹을 맺었으니 그들이 너무 깊숙이만 들어오지 않으면 방치하시오.”
만호(萬戶)정충렬의 명령으로 투메드부 병력들은 일정 범위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건주 양위를 사냥할 권리를 얻었다. 이 서찰은 즉시 전해져서 지침이 되리라.
“송화강 동쪽의 올적합은 아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소. 그들이 아국의 영토를 침범한 도적들과 싸우는 일은 당연한 일이며, 만에 하나 ‘가족을 잃은’ 자들은 가족으로 만들어 주시오.”
다시금 정충렬의 명령으로 해서여진이 건주 양위를 습격할 권리와 포로를 거둬갈 권리가 보장되었다.
“나는 머나먼 북방에서 일어난 일로 바쁘오. 주상 전하께서 내리신 명이 군영을 지키라 하신 것이니 명을 충실히 따르겠소.”
“훌륭한 판단입니다.”
“만에 하나 도적들이 협상을 하려고 나설지도 모르오. 하지만 아국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한 죄를 갚기 전에는 협상은 어림도 없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분명 도적들이 얕은 수를 쓸지도 모르니 심계가 깊으시군요.”
다시 이틀이 흘렀고. 충샨의 건주 양위는 습격이 끊어진 것에 안심하며 천천히 북방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충샨은 사방을 살피면서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쉴땐 쉬고 움직일 때는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임시 거처가 세워지고 척후병이 돌아왔다.
“투메드부 놈들은 어디쯤 있나.”
“대충 반나절 거리에 정찰병만 보내고 있습니다.”
“다들 힘을 내라! 몽골 놈들의 영역은 지나왔다. 이제 북방으로 삼백 리만 더 올라가면 조상들의 거느렸던. 태조대왕께서 세우신 암반안취운 구룬(대금국)의 수도인 하르빈에 도착한다!”
이틀 전만 해도 투메드부가 바짝 따라 붙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주변의 부락 따위야 충분히 몰아낼 수 있고. 이제 옛 조상의 땅인 하르빈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전방에 보냈던 척후가 말을 급히 몰면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저 앞에 조선의 군영이 있습니다! 놈들이 우리에게 활을 쏘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조선 놈들이 대체 여기까지 왜 튀어나와!”
“놈들이 뭐라 말을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활을 쏘아대면서 군영에 오지 말라며 소리칩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조선에서 명나라에게 할양받은 영토라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잡으려고 머나먼 북방까지 나섰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이유 따위는 없다. 아무리 보아도 몽골이나 오이라트와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설치한 거점 중 하나이겠지. 그렇게 부하들과 함께 조선의 군영으로 향했다.
“이보시오! 한때 명나라의 신하였으며, 요동 총병관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북방으로 나선 건주 양위(兩衛)의 족장인 충샨이 왔소! 조선에서 오신 분은 어서 나와 이야기를 들어 주시오!”
잠시 동안 조선의 군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조선의 갑옷 위에 표범가죽을 걸친 자가 말을 타고 나섰다. 얼굴을 보니 충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자였다.
“아구지 아니오? 건주위의 족장에서 조선의 신하가 되었으니 출세하셨구려.”
“지금은 주상 전하께서 이름을 내려주셨으니. 새 이름은 정충렬이네. 그래서 아국의 영토에 무단으로 침입한 주제에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다름이 아니고 조상이 거주했던 땅을 찾아서 요동을 떠나 북방으로 향하였는데. 조선의 일익이 되고 싶소이다. 충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준마 오천 마리를 먼저 바치겠소.”
준마 오천 마리를 고스란히 바치면 큰 손해이지만 방법이 없다. 조선이 영토로 삼기로 작정한 땅이니 이전처럼 몽골과 조선 사이에서 오가지 않고 한 쪽에 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그런 어설픈 기대는 정충렬의 고함과 함께 무참하게 박살났다.
“감히! 아국의 땅을 범한 도적 주제에 고개를 꼿꼿이 들고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네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군마 오천 필을 거두면 충분할 일이다!”
“투메드부에게 시달렸으니 놈들과 싸우겠소, 우리는 한때 아는 사이 아니었소!”
“닥쳐라! 당장 쓸어버려도 시원치 않을 네놈들에게 마지막 자비를 주어 돌아갈 길을 열어 둘 것이다. 앞으로 한 시진 이내에 행렬을 돌리지 않으면 공격에 나설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명백한 축객령에 충샨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정충렬이 군영으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야, 아니 지금 누가 누구랑 싸우고 있냐고! 아구 아니 정충렬! 이보시오! 여긴 조선의 영토가 아니오!”
“타이순 칸은 아국과 동맹을 맺었으니 신경 쓸 이유가 없고. 일대의 올적합 아니 후룬 또한 아국에게 복속하였다. 그런데 너희 같은 도적떼를 치는 일을 우리가 말릴 이유가 있더냐?”
조선과 몽골이 동맹을 맺었다면 북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적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에게 뇌물을 바쳐서 극복하려고 해도 상대는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건주위 출신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차라리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요동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답이었다. 요동을 떠나올 적에는 남아 있는 놈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돌아가자! 본진을 구원하고 전력을 다해 요동으로 탈출해야 한다!”
만에 하나 벌어질 일이 일어났지만 마지막 희망을 가졌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천 기의 병력은 투메드부나 해서여진 중 한 세력을 상대로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그렇게 본진으로 돌아가자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놈들이 양쪽에서 우리를 에워싼다!”
“사방이 적이라니까!”
협곡의 뒤를 투메드부의 병사들이 틀어막고 있었다. 산 위에 있던 해서여진 병력들은 신나서 화살을 아무렇게나 쏟아 부었다. 장정들은 불리한 와중에도 애써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무리한 이동으로 지친 건주 양위의 병사들은 피로에 절어 속절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족장님! 조선 놈들이 우리를 받아 준답니까?”
“이대로는 버티지를 못합니다! 병사들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아녀자들도 같이 있으니 싸울 방법이 없습니다!”
임시로 마련한 거처에는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적들은 마음대로 화살을 날렸고. 부하들이 어떻게든 저항하고 있었지만 얼마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혼란 속에서 적들이 시체와 포로를 가지고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놈 목은 나 주게, 칸께서 수급이 필요하다 하시는군.”
“어허, 그러면 그쪽 꼬맹이는 나 하나 주게. 노예로 쓰면 좋겠어.”
“이 늙은 놈의 목도 수급으로 쓸 수 있을까?”
“그냥 버려, 아니 삶아서 두개골만 가져가면 아무도 모르겠네.”
“그럼 그 모피랑 바꾸자고.”
서로 이를 갈아야 할 몽골과 해서여진이 너스레를 떨면서 자신의 부족들을 하나하나 나눠 가지는 모습이 보였다. 시체가 되었건 살아있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투메드 부의 병사가 잘린 목을 받는 대가로 어린아이를 해서여진 청년에게 넘겨줬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충실하게 해왔던 일을 자신이 당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모두 다... 내가 했던 일이잖아.”
“지금이라도 조선에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조선이 말하면 녀석들이 멈출 지도 모릅니다!”
“조선의 장수 정충렬에게 항복 의사를 밝혀라. 조선으로 내려가 죄를 뉘우칠 것이라고.”
그렇게 훗날 청나라를 건국하는 누르하치의 조상이자, 여진 육조(六祖)의 후손인 충샨은 조선의 포로가 되어 여진족의 국가는 뒤틀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휘하 부족들은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포로와 마찬가지로 한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