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122화 (122/573)

< 2장 60화 – 대단원의 막(1) >

지난 12일 동안 오이라트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다. 허점을 찾으려고 나름 사방을 들쑤시고 있었다.

그에 맞서서 하나하나 받아치면서 적의 사기를 계속 떨어뜨렸다. 지금도 망루 한곳으로 결사대가 다가와서 불화살을 쏘아 지붕을 태우려 하였다.

“적들이 동쪽 을(乙)번 망루에 불화살을 쏘아댑니다!”

“상관없다, 좀 전에 놈들을 도발한 야인들이 정말로 꼴 보기 싫었나 보구나.”

이징옥의 입가에서 오랜 간만에 미소가 피어나왔다. 매복하고도 야인여진에게 패배한 얼간이라고 놀려댔더니 발작적으로 나선 일이 분명하다.

화약이 부족하다는 시늉을 하려고 전투 시작 9일부터 화약 병기의 사용을 최대한 줄였다. 자모포의 사용을 억제하고 운총의 조준 사격과 보총만 쏘게 하였다. 당연하지만 신기전은 사용하지도 않았다.

“물에 젖은 거적을 던져라!”

“놈들이 반전하는 순간을 노려라! 화약을 낭비하지 마라!”

불화살이 지붕의 두꺼운 목판에 막혀버리고 물에 적신 거적이 던져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불이 꺼졌다. 애초에 화공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망루니까 어중간한 불은 그냥 꺼버리면 충분하다. 이맹전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이틀 전에는 땅을 기어서 오다가 벌집이 되더니만, 오늘은 불화살로 바꿨군요.”

“저럴 것이면 참호를 파고 접근할 것이지. 아직 땅이 녹지 않아서 오십 보 조차도 파고들지 못했을 일이지만 효험은 있었을 것인데.”

“그러고 보니 개천에 분뇨가 섞여 내려오는 것이 아무래도 물길을 끊으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식수는 송화강의 얼음을 캐서 마시는데 우스운 일이군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군. 해자에 분뇨가 섞이면 놈들이 더더욱 고생할 것인데.”

공성전의 기본은 식량과 물을 끊어서 적을 고사시키는 방법이다. 당연하지만 적의 퇴로와 연락망을 차단하는 일이 필수고. 그렇지만 소수의 전령 정도는 언제든지 주변과 연락이 가능할 정도로 포위망이 느슨하다. 창기병 4천기는 괜히 가져온 것이 아니다.

요새의 방어와 보급품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난다. 놈이 무슨 작전을 계획했는지 몰라도 충분하게 받아 칠 기회가 있으니까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틀이 흐른 새벽. 사방에서 울리는 징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놈들이 총공격에 나섰다는 신호가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대군 어른!”

“무슨 일이오 상장군, 야선이 총공격을 감행한 것이오?”

“그렇습니다. 방금 전에 송화강에 있는 부교(浮橋 - 배다리)를 통해 무엇인가가 남쪽 기슭으로 건너오고 있으며. 적의 기병들이 주변에 도열한다 합니다.”

놈들이 화포를 앞세웠나? 그렇다면 일이 쉬워질지도 모르니 석벽으로 나아가 천리경을 들어 적진을 살펴보았다. 어슴푸레한 와중에도 배다리를 건너는 거대한 덩어리가 보였다. 그 거대한 물체는 너무 독특하게 생겨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회회포(回回砲 - 트리뷰셋)를 얹은 포차(抛車 - 이동식 투석기)가 아니오? 저걸 어떻게 만들었지?”

“명나라의 화포 기술자가 여럿이 있는데. 개중에 회회포의 설계 정도는 알고 있는 자가 있겠지요.”

“하지만 너무 어중간한 물건이 아니오. 손만 많이 들어가지 실지로 쓰이기는 힘들 것 같군.”

무게추식 투석기가 무서운 이유는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서 위력과 사정거리가 모두 좋으며. 바닥에 고정하여 조준이 흐트러지지 않는 장점 덕분이었다. 하지만 저건 너무나 어중간한 물건이다.

“아국의 화포를 두려워하여 바퀴를 두어 이리저리 움직이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껏해야 일백 보(180m)의 거리로 돌을 날리면 족할 녀석이겠군요.”

“상장군의 말이 옳소. 무게추도 작아 보이니 쏘는 힘도 약하겠군.”

도대체 왜 이런 녀석을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차라리 바퀴를 달아둘 것이면 대형 노포(弩砲 - 쇠뇌)가 효과적이다. 위력은 약해도 망루의 틈을 노려 쏠 수 있으니까.

“아마도 회회포로 기름을 뿌리고 그 위에 불화살을 쏘아 망루를 태우려는 책략이 아닐까 합니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진흙을 올린 망루에 불이 쉽사리 붙겠소. 어차피 자모포는 적어도 이백 보(360m)를 노려 쏠 수 있으니 가장 먼저 회회포를 노리라 하면 될 일이 아니오.”

“돈대(墩臺 - 화포를 쏘는 장소)에도 명령을 내려서 신호가 떨어지면 회회포를 쏘도록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혹여나 모를 일이니 망루에도 사람을 보내 미리 젖은 거적을 덮어 두고 물을 준비하라 하지요.”

본래 몇 개월 동안 벌어져야 할 전쟁을 최대한 우리에게 유리한 시기, 유리한 장소에서 벌이도록 조절했어도 모든 일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게 된다면 나와 이징옥이 아니고 충무공 이순신 정도는 되겠지.

그렇게 적들은 천천히 사방으로 퍼지면서 요새의 동쪽부터 서쪽까지. 자신들의 진영 방향의 모든 면을 포위하고 이십여 대의 회회포를 사방으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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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를 담당하는 훈련도감 출신 부사정(副司正 - 종7품 무관) 이수붕(李壽朋)은 묵묵히 자신이 특별 주문한 운총을 닦으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기도감 2년 차인 신병은 지급품인 운총의 탁한 연철 총열을 닦고 화약을 부어 다지고 있었다. 대조되는 강철제 총열 운총을 보며 미소를 지은 이수붕은 천리경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개머리판에는 빗금이 스물두 개나 새겨져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일은 경험을 살려서 주변을 보고 조준을 보정하는 관측병이다. 이미 장전을 마친 자모포 담당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이수붕은 지시를 하달했다.

“자모포로 회회포를 노려서 쏘라는 지시는 들었지? 회회포 세 문이 삼백 보 거리에 있군. 바퀴가 달린 놈이니 치고 나오는 것도 빠를 거야.”

“먼저 한 발 쏘아서 오차를 확인할까요?”

“확실한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잠자코 있어. 운총이 이백 보 넘게 날아간다고 함부로 쏘더냐? 백 보에서 노려 쏘지?”

천천히 다가오던 회회포가 멈추더니 삼백 보(540m)의 거리를 유지한 채 거세게 요동쳤고. 잠시 뒤에 사람 머리통보다 조금 큰 돌덩어리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와 바닥에 떨어졌다.

“돌이 뭐 이리 작답니까?”

“무게가 기껏해야 30근(19.2㎏)이 될까 말까니까 지붕을 부수는 일에만 수십 발은 쏘아야 할 거다. 그동안 자모포는 백 발은 쏘고도 남겠네. 답례로 한 발 날려줘!”

주변에서 포성이 들려왔다. 자모포의 유효사거리보다 조금 먼 거리이지만 오차를 보정하면 맞추지 못할 것은 없으니 거침없이 발사했다. 이수붕은 천리경을 들고 오차를 보정하고 있었다.

“열 보 우측으로 빠졌다. 좌측으로 약간만 틀어서 다시 쏴봐. 옳지! 이번엔 세 보 좌측이다.”

“거참 벌써부터 무슨 고생입니까?”

“잠깐! 녀석들 갑자기 회회포를 앞으로 밀고 온다. 조금 각도를 아래로 낮춰라.”

그렇게 느긋하게 천리경으로 관측하며 오차를 줄여 나가는 와중이었다, 다시 회회포가 요동치면서 생각보다 거대한 물체를 일제히 하늘로 날렸다.

먼저 발사한 돌보다 가벼운 물체였는지 철퍽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고. 개중 하나는 땅을 굴러 망루 아래의 해자에 쑤셔 박혔다. 이수붕이 좁은 틈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니 기름 냄새가 나는 둘둘 말린 멍석이 해자를 뒹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드디어 한 놈 잡았습니다! 그런데 놈들이 뭘 하는 겁니까?”

동시에 자모포가 쏘아지고 회회포에 적중하였다. 회회포가 박살 나면서 병사들이 피를 뿜었지만 나머지 두 개의 회회포는 계속 멍석을 쏘아댔다. 자모포가 조준하는 잠시의 틈을 노려 궁기병들이 몰려와 불화살을 쏘아댔고. 몇 발이 해자에 있는 멍석에 박혀 타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보이지 않잖아. 저놈들 지금 도대체 뭘 하는…… 이건 화공이다! 자포 빼서 밖으로 던져!”

시야가 가로막히기 직전, 이수붕의 눈에는 멀리서 작은 통을 들고 달려드는 적의 기병이 똑똑히 보였다. 멍석에서 더욱 많은 연기가 치솟고 시야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이런 염병할! 이대로라면 못 버틴다! 빨리 화약 빼내고 사방에 물 뿌려!”

“하지만 적이 몰려오지 않습니까!”

“닥치고 튀어! 망루라도 건져야 한다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망루를 탈출하자 주변이 보였다. 다급하게 물통을 들고 달려드는 보인들을 밀치고 주변 망루를 돌아보았다. 옆에 있는 망루는 미처 화약을 빼낼 틈이 없었는지. 화공에 당하고 굉음을 내면서 화약이 터져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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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위력이 부족하니 가벼운 물건을 쏠 것은 확실했는데 그게 기름 항아리가 아니고 기름에 적신 멍석이었다.

물론 훈련도감 고참병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망루 안에 물을 뿌려 화재를 방지하고 화약을 망루 밖으로 빼내서 폭발을 막았다. 하지만 판단이 늦었던 망루 두 곳은 굉음을 내면서 무너졌다.

“돈대에 전해라! 화약은 아직 많으니 신기전과 화포를 아낌없이 적의 회회포를 겨낭해서 쏘라고! 대군 어른! 저는 기병을 이끌고 양 익중 하나를 분쇄하겠습니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는데 이맹전이 병사들을 보내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 이징옥이 내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보낸 것이겠지. 일단 진정하고 질문부터 시작하자.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놈들이 기름 항아리를 쏜 것이 아닌가?”

“멍석입니다. 망루의 아래에 멍석을 던져 넣고 불화살을 쏴서 불을 붙였습니다!”

“멍석에 불을 붙여도 석벽을 뚫고 들어올 수 없지 않소!”

“화염과 연기로 시야가 가려집니다. 멍석만 던진 이유는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겠지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망루를 무너뜨리는 척 공성 병기로 접근하고. 멍석을 던져서 불을 붙이고, 연기로 시야가 가려지면 다시금 기름병을 던져 넣고 불을 붙이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불 붙인 멍석을 날리지 않는 것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겠지.

망루는 밀폐된 공간이고 시야가 좌우로는 넓어도 상하로 좁으니 대응하기 힘들다. 결국 어설픈 전략을 제시했다가 화를 입었다. 입술을 깨물어 핏물이 솟구치는데 이맹전이 위로의 말을 전했다.

“망루는 불길에 잠시 쓰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며 기껏해야 두 곳만이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한 각(15분)이면 다시금 병사들이 드나들 수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징소리와 호각소리가 사방을 메웠고. 돈대에서는 화포가 쉴 새 없이 쏘아졌다. 생각을 가다듬고 조용히 전장을 돌아보자. 내가 할 일은 없지만 적이 우리에게 한 방 먹였을 뿐이고 우리는 수십 방은 먹일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 적이 노리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 놈들은 아직도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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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가 일제히 불길에 휩싸이면서 조선군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망루 밖으로 나온 화기도감 출신 병사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면서 점차 혼란이 가시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자모포를 잠시 쓰지 못할 뿐이다! 염려하지 말고 적들을 맞이하자!”

“망루가 불타면 우리가 죽어주나? 밖에서 쏘면 되니 염려하지 마라!”

“놈들이 대놓고 운제(雲梯 - 공성용 사다리)를 끌고 온다!”

망루에서는 아직도 불길이 넘실거렸다. 적들이 돌격을 시작하는 사이 지난 12일 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화약 병기들이 하나 둘씩 장전을 마치고 전면으로 나섰다.

“화약 아끼지 마라! 총통기화차도 석축 앞으로 내밀어 방포해!”

“놈들을 끌어들여서 쏘아라! 가급적 많이 죽여야 한다!”

“해자에 빠진 놈들에게 비격뢰 던지지 마라! 그냥 창으로 찔러 죽여!”

비 오듯 화살이 쏟아지고 보총과 운총의 사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망루의 기능이 정지하였기에 이전 전투와는 다르게 곳곳에 틈이 노출되었다. 망루에 있던 화기도감의 운총수들은 입술을 짓씹으면서 조준 사격을 시작하였다.

“운총수는 알아서 방포하라! 먼저 적의 기세를 꺾는다! 보총수 일제 사격 개시!”

“좌에서 우로 일제사격!”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사격을 날리고. 뒤를 이어서 화살이 하늘을 갈랐다. 하지만 철저한 산개대형을 펼친 오이라트의 병사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군에게는 화포가 충분히 있었다.

“지원사격이다! 돈대에서 대장군전을 날렸어!”

“한발에 여섯이라니! 놈들이 산개한다! 명령을 내리는 놈을 찾아!”

수성전이기에 자율 사격이 시작되었다. 돈대에 있는 대형 화포들에서는 원거리에서 기병을 쓸어버리기 위해 쇠사슬이 여럿 매달린 대장군전(大將軍箭)을 변용한 녀석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쇠사슬에 휩쓸린 기병들은 사지가 잘려나가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이걸 이제야 쏘네! 처먹어라 말박이 새끼들아!”

“방포합니다!”

지난 전투에서 쓰이지 못한 현자총통 또한 아낌없이 산탄을 난사하였다. 지난 전투와는 격이 다른 화력에 직면한 오이라트의 기병들은 말 그대로 곤죽이 되어서 바닥을 적셨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운제 걸쳐진다! 전령 보내! 서쪽 병(丙)호 망루 인근에 적이 들이치고 있다고!”

“방패수! 장검수! 다들 나서서 적을 물리쳐! 더 들어오면 본진까지 뚫린다!”

한 무리의 오이라트 병사들이 마침내 해자를 넘어 사다리를 걸쳤고. 석축을 뛰어넘는 순간에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사다리를 포위한 조선군 병사들은 방패수를 앞세워 적을 몰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지휘관 놈을 족쳐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망루는 언제쯤 불이 꺼진대!”

투구에 박힌 화살에 아찔해 하던 화기도감 고참병은 발작적으로 앞의 적을 노려 쏘았다. 백 보를 넘게 날아가는 운총이 고작 코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잡병의 머리통을 터트렸지만 쉴 틈이 없었다.

조선군의 요새 사방에서 적이 침입하고, 격퇴당하기를 반복하면서 요충지인 망루가 하나둘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물에 젖은 자모포는 쓸 수 없었지만 서서히 전장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저놈 십인장 맞지! 다들 조준해! 일제 발사!”

“발사!”

“자모포만 멀쩡했어도 운제를 통째로 부술 수 있는데!”

망루 안에 있던 화기도감 병사의 본래 역할. 지휘관을 노린 조준 사격이 적의 지휘체계를 서서히 무너트리면서 대응을 둔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말발굽 소리가 요새의 서쪽에서 들려왔다.

“상장군께서 적들을 짓밟으러 출병하신다!”

“상장군님! 저희는 굳건히 막고 있을 것이니 말박이 놈들을 박살내 주십시오!”

오이라트의 본대는 3만의 규모지만 돌격을 담당하는 철기는 기껏해야 육천 기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좌우 양익과 본대로 나누었으니 이징옥이 들이치는 서쪽의 철기는 천오백 기에 불과하였고. 황급히 대응하려 하였지만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강철의 물결이 오이라트의 철기 무리를 관통했다. 5년 전이라면 비등했을지도 모르는 싸움이지만 조선군의 기병 지휘관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징옥이었다.

“몰아쳐! 몰아쳐라! 몇 놈이건 상관이 없다! 본대를 쓸어버릴 기세를 보여라!”

“놈들이 겁에 질려 등을 보입니다! 추격할까요?”

“추격하되 본진까지는 나서지 마라! 잘못하면 휘말릴 것이니 적의 좌익(오이라트 입장에서는 우익)을 완전히 분쇄하라!”

이징옥의 눈에 사방을 돌아보면서 허둥지둥 거리는 화려한 복식의 적장이 보였다. 호위병이 제법 있었지만 이징옥은 김종서에게 물려받은 한혈마를 거세게 몰아 나아갔다.

“네놈이 좌익을 담당하는 장수가 분명하구나!”

이징옥의 손에서 핏물이 흐르는 세 척(104㎝) 길이의 어사검이 번뜩였다. 지휘용으로 하사한 거대한 검이 오이라트 적장의 투구를 가르고 머리통을 양 쪽으로 갈라버렸다. 가슴까지 내리 그어진 것이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적장을 잡았다!”

그렇게 오이라트의 우익이 무너지는 와중에 조선군의 돈대 인근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화포 사격에 돈대에 있던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적진을 바라보았다.

“적진에 저거 뭐야! 저거 화포 아니야!”

마침내 오이라트의 본진에 있던 화포가 불을 뿜었다. 본진을 호위하던 기병이 빠져나온 틈을 노리고 있었음이 확실했다. 처음에는 돈대에서 한참 먼 곳에 떨어진 포탄은 점차 화포가 밀집한 돈대를 향해 움직였다.

기병이 본진에 남아 있었으면 바로 돌진을 시도해서 적의 화포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병은 서쪽 전선에 있다. 돈대에 있던 화기도감 병사들은 적의 화포 위치를 가늠하면서 포구를 돌렸다.

“대응사격! 대응사격을 날려!”

“놈들이 조금 더 빠릅니다! 돈대를 미리 겨누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가 먼저 당합니다!”

서로 3리(1,200m)가량을 두고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서로가 오차를 수정하면서 천천히 숨통을 조여 왔지만 오이라트의 화포가 조금 더 정확했다. 조선군의 화포는 사방에 지원 사격을 하면서 사각이 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천자총통을 빼내야 합니다! 휘말리면 위험합니다!”

“아니다! 조금만 더!”

아슬아슬하게 석환 하나가 돈대 구석에 있는 천자총통의 열 보 옆에 박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오이라트 본진의 화포 모두 침묵하고 적진이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한참 동안 침묵한 화포를 보면서 돈대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적의 화약이 떨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멍청한 놈들아! 다시금 화포를 돌려 사방을 때려라!”

화포를 돌린 조선 포병들은 사방을 들쑤시면서 아낌없이 화력을 쏟아 부었다. 마침내 적의 우익이 완전히 분쇄되었고. 썰물과 같이 오이라트의 병사들이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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