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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119화 (119/573)

< 2장 57화 – 불타라 활활(4) >

강 건너편에 정박한 조선군의 피해는 아주 적었다. 습격을 예상하고 있었고 충분한 대비를 하였지만 불화살이 날아오는 가운데 사람이 다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홍윤성은 여기에 끌려오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거양현에 근무하면서 훈련도감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했던 낭청(郞廳) 홍윤성, 아니 이제는 종 5품 부사직(副司直)으로 진급한 홍윤성은 북방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였지만 피할 방법이 없었다.

“부사직님께 보고 드립니다! 사망 4인, 실종자 2인입니다.”

“그렇게나 주의를 기울이고 또 기울였는데도 희생자가 나왔단 말인가.”

“하지만 적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당해준 것 같습니다. 어서 물 위로 올라오시죠.”

훈련도감 후임자의 손을 잡고 강 위로 올라온 홍윤성은 정말 도망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훈련도감 출신 가운데 최고참이자 최고 직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단 석 달의 차이로 자신의 파병이 결정되었다.

가까스로 강에서 벗어나자 찬바람이 강물에 젖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첫 고의 패배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나중에 날을 잡아서 굿이라도 올려야겠다는 생각만 거듭하였다.

“그래서 우리 꼴이 무엇인가? 쑥색 철릭은 내다 버리고 허술한 옷이나 입고 말이야.”

“달자들을 속일 계략이라 하니 방도가 있겠습니까. 부사직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 계략을 제안한 것은 내가 아닐세. 거양현의 꾀주머니인 홍길동이라는 자이지. 그나저나 자네도 물에 젖은 쥐새끼 같군. 어서 몸이나 녹이게.”

홍윤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모닥불을 쬐면서 손발을 녹이고 있는데 옆으로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다가와서 따듯한 물을 한 대접 전해줬다.

“이거 참 고맙네. 그런데 길동 아우의 생각처럼 놈들이 속아줄까 궁금하군.”

“저도 많은 고심을 하였지만 셋 중 하나라 하지 않았습니까. 검은 가루면 모두 화약이라 생각해서 본진으로 보낼 수도 있고, 시험해 보았는데 가짜 화약임을 알아차리고 버릴 가능성도 있고, 마지막으로…….”

건너편 산기슭에서 작은 폭음이 울렸다. 그 모습을 본 홍길동은 손뼉을 치면서 홍윤성을 돌아보았다.

“혹여나 진짜 화약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명나라 출신의 화포장을 데려왔을 가능성 말입니다. 저렇게 터트려 본다면 파자(破字)를 읽는 자가 진짜 화약을 골라 터트린 것이 분명하지요.”

“그렇다면 적들의 공격이 거세지겠군. 그들이 원하는 화약이 여기 있다 생각하지 않겠나.”

홍윤성은 겉으로는 당당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적이 가짜 화약임을 알아차리고 철수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며 의제(義弟 - 의동생) 마저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

“저야 싸움에 능숙하지 못하니 형님만 믿겠습니다.”

“활이라도 들고 쏘라고! 제발 좀! 내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너스레를 떨면서 돌아가는 홍길동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쑥색 철릭을 꺼내 입고 군막으로 들어가자 별동대의 지휘관인 삼수도호부사(三水都護府使 - 종3품 관직) 박중손(朴仲孫)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황은 어떠한가. 사람이 넷이나 죽었다고 하던데.”

“다른 둘도 살아남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강물에 휘말렸으니 살아날 가망성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강 건너에서 폭음이 들려왔다는 보고가 있네. 그렇다면 저들이 가짜 화약에 손대지 않고 진짜 화약에 손을 댔다는 증거인가.”

현재까지는 작전대로 진행 되고 있다. 박중손은 고개를 돌려 구석에 서 있는 홍길동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거양현에서 열심히 일한다 하였는데 정말 머리가 좋은 자였다.

“그렇다면 명나라 출신의 화포장이 적의 별동대에도 소속되어 있다는 말이 맞겠군.”

“옳은 말씀이십니다.”

“적들이 화포를 가져온 것도, 화포를 사용하려고 용을 쓰는 것도 상장군 대감과 대군 어른의 계책일세. 더군다나 가짜 화약을 가져갔으니 적에게는 화포가 아니고 고철더미가 잔뜩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효과적인 공성병기가 없이 사다리와 원시적인 투석기만 만들 수 있는 유목민족에게 있어서는 적의 거점을 공격할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화약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 적의 허점을 만들었다.

애써 가져온 화포가 무용지물이 되면 별동대로 보낸 병력과 물자 모두를 헛되이 날려먹게 된다. 여기에 승전까지 거두면 더더욱 좋은 일이다.

“그렇다 하여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찰에 의하면 적의 병력과 아국의 병력은 거의 대등하다 합니다. 또한 달자들은 병력이 바삐 움직이니 충원도 고려해야 합니다.”

홍윤성이 그렇게 속내를 숨긴 채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자 박중손이 다시금 웃으면서 홍윤성을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 치고는 매우 신중한 모습이니 더더욱 천거할 욕심이 생겼다.

“부사직의 말도 옳군. 그렇다면 적의 충원이 있다 생각하고 작전을 논해보지. 자네는 대총 한(타이순 칸)이 보낸 사람이니 적의 전략을 잘 알고 있겠군? 한번 이야기 하게나.”

“확실히는 모르지만 대충 압니다. 우선 적의 병력은 최소 5천, 충원을 고려하면 8천 까지는 보아야겠지요. 이 가운데 전투에 나설 놈들은 5천 정도입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타이순의 부하가 입을 열고는 지도에 손을 기울였다. 지도를 읽을 줄은 모르지만 일대를 순찰한 결과 어느 지형인지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본래 우리가 공격할 때에는 유리할 때에만 싸우고. 적은 수로 적의 대군을 포위하기를 좋아합니다. 선봉대가 주력을 담당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원이 일제히 공격합니다.”

“포위하고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인가?”

“보통 높은 곳에서 적진을 돌아보며 전략을 결정합니다. 평상시라면 사방에서 기습하여 피로하게 만들고 손해를 유도할 것이나. 적은 우리의 물자를 노획하기를 원하고 있겠지요.”

다시금 지도에 손을 얹으면서 경로 곳곳에 있는 골짜기나 매복하기 좋은 장소들을 지나쳐 나갔다. 그러더니 조선군이 만들어 둔 보급창고 중간의 위치에서 손가락이 멈추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물자를 노획하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요. 아마 제가 짚은 세 곳 중 한 곳에서 결판을 내려 할 것입니다.”

박중손이 보기에는 별다른 곳이 아니지만 부하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상대의 군략을 온전히 아는 자는 이 자 하나였다.

“단 한 번에 물자를 노획하려 할 것이니. 질서 없이 달려들어 거짓으로 패배하고, 기세가 오른 우리의 기병들을 매복지로 끌어 들이겠지요. 이러한 능선을 타고 내려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잘못하면 능선 위의 적들이 반전하는 틈을 노려 역으로 돌격할 수 있지. 하지만 남쪽에는 숲이 있지 않은가? 거기서 말을 타고 기습을 한다고?”

“큰 말도 쓸모가 있고 작은 말도 쓸모가 있지요. 작은 말을 타고 있으면 힘은 적어도 동작은 날랩니다. 숲 속을 뚫고 나와 대열을 일제히 기습할 것입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전술이었다. 기병들이 꿋꿋이 본진을 지키면 능선 위에서 쏘아대는 궁시에 피해를 입을 것이니까. 그렇다고 보총수가 맨 앞에 나온다면 돌격을 막아내기가 힘들다. 다들 신음성을 흘리는 가운데 홍윤성이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작은 말을 탄다면 기습하는 놈들 가운데 철기는 없을 것이고. 궁시로 무력한 보인들을 쓸어버릴 생각이겠군.”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너희들이 상대라면…… 상상하기도 싫군.”

타이순의 부하는 분명 철령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홍윤성의 쑥색 철릭을 보더니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으니까. 박중손은 고심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부사직! 계획대로 보병에 속한 이들 모두를 수레를 끄는 보인으로 위장하게. 적이 습격하면 짐으로 위장한 병장기를 바로 꺼내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또한 대총 한의 부하가 짚어준 곳 인근에 매복하여 탐망(探望)을 게을리 하지 말게. 특히 가장 매복하기 좋은 곳에는 자네가 직접 탐망에 끼어들도록 하게. 적의 매복을 발견하면 신호 대신 인근 봉수대의 불을 완전히 끄게나.”

지금까지는 봉화가 늘어났지만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봉수대의 연기를 완전히 꺼 버린다. 단순한 방법이지만 효과는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호부사께서는 어디에 게시는 겁니까?”

“야인여진들은 내가 직접 인솔하겠네. 기병 4천에 보인으로 따라온 이들이 3천이니 모두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네.”

야인여진들은 조선의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나름 좋은 대접을 하는 것에 있어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몇몇 야인여진들은 옛날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행패를 부렸지만, 그러한 자들은 평양으로 끌려갔다.

“주상전하께서 야인들을 품으실 생각을 하셨으니. 내가 아무리 직책이 높더라도 그들을 거느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함께 하면 저들도 쉽사리 달아나거나 명령을 어기지는 않으리라. 군막 밖으로 나오니 벌판에는 아직도 얼음이 가시지 않았다. 봄기운이 올라오는 남도와 달리 북방은 아직도 몸서리치게 추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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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라트의 별동대는 사기가 잔뜩 올라있었다. 첫 전투에서 화약을 보름 어치나 얻어냈으니 앞으로 얻어낼 물자에 욕심이 생긴 것이다. 반면 바얀은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조선 놈들은 지금 어떻게 행동하고 있던가.”

“습격을 경계하면서 대열을 나누지는 않고 있습니다.”

“적이 생각이 없지는 않군. 그렇다면 적의 총 규모는?”

명나라를 상대할 때와는 달랐다. 당시에는 겁에 질린 왕진이 소식을 알아내고자 소규모의 분견대를 파견하여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정작 본대에 호위하는 기병이 부족하여서 마음대로 궁시를 날리고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인근의 금나라 찌꺼기들을 불러 모아 기병 4천 정도에 소수의 조선 병사들. 그리고 수레를 끌고 있는 짐꾼과 말을 탄 주변 부락 출신의 짐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규모와 위치는 알고 있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적으로 알 법 합니다. 본진 근처에서 한 무리의 병력이 도주하였으나 잡지 못하였지요.”

“화약을 얻어야 하니 문제지. 불화살을 쓰면 화약에 불이 붙어 터질 것이고. 그렇다고 상대를 함부로 공격하면 일을 포기하고 화약을 모두 폐기하겠지.”

평소라면 소규모의 분견대를 계속 파병해서 마음껏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물자인 화약 때문에 다소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생각 같아서는 화약을 노획하는 일을 포기하고 불화살을 쏘아 화약을 터트리고 싶었다.

“화약을 포기하시면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조선의 요새를 공략하는 일이 힘들어지겠지. 단 한 번의 전투로 노획에 성공하려면 좋은 지형이 필요한데.”

“여기서 조선의 요새까지는 우리의 속도로 열흘은 걸립니다, 조선 놈들이면 발이 느리니 스무날 이상은 움직여야겠지요. 천천히 지형을 파악하며 적의 허실을 노립시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조선군은 천천히, 그리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느릿느릿 이동하였고. 조바심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함정임을 절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가짜 수레야. 말들이 너무 많고 마갑을 착용하지 않았는가.”

“중간에 창고에 들려서 모든 물자들을 가져왔나 보군요.”

“함부로 저런 놈들을 기습하면 난리가 난다. 우리가 보이면 즉시 수레를 풀고 말 위에 올라타겠지. 본진과 거리도 가까우니 저건 행렬이 아니다, 선봉이자 함정이다.”

본진에서 에센이 보낸 서신도 전혀 재촉하는 말은 아니었다. 천천히 공략에 나설 것이니 가급적 많은 화약을 가져오라는 명령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닷새의 시간이 더 흘렀고. 조선군의 경계가 풀렸다는 징조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조선의 가짜 행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놈들도 열흘 정도 가만히 내버려두니 경계가 풀리는군. 그래도 소수의 경계병을 제외하면 뭉쳐 다니지 않는가.”

아무리 보아도 조선군으로 보이는 기병 다섯과 주변 부락에서 징집한 것으로 보이는 기병 열 정도가 조를 이루어 주변을 순찰하였다. 함부로 공격하면 손해를 볼 정도이니 조바심이 점점 커졌다.

“지금이면 태사께서 요새를 신나게 두드리고 있겠지. 처음으로 보낸 화약이 지금쯤이면 본진으로 옮겨졌을 시간이니까.”

“바얀님! 적을 습격하기 좋은 위치를 찾았습니다!”

“적을 습격하기 좋은 위치라?”

조바심이 난 채로 전선에 직접 나온 바얀의 앞에 선 자는 부하 가운데 제법 우수한 밍간(천호장) 볼라이였다. 볼라이는 숨을 몰아쉬면서 손가락으로 저 멀리 있는 산을 가리켰다.

“길가에 능선이 있어서 거짓으로 퇴각하기도 좋고. 본진을 기습할 병력이 매복하기 좋은 소나무 숲이 깔려있습니다.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아 말을 타고 다니기 충분합니다.”

“그렇단 말인가? 아니 혹시 모르니 확인해야 겠네.”

바얀이 바삐 말을 놀려 다가가자. 조선군이 이틀 뒤에 지나칠 곳에 정말로 좋은 매복지가 있었다. 전면전이 아니고 약탈을 위해서 적의 병력을 양면에 갈라놓을려 했는데. 그런 일에 아주 합당한 위치니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으니.

“저건 조선군이 연기를 피워 올리는 곳이 아닌가?”

“산 능선 반대편에 있으니 이곳이 보일 이유는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놈의 연기를 피워 올리는 건물을 함부로 건드릴 방법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놈들이 연기 줄기를 많이 피워 올릴 수도 있었으니까 위치가 드러나게 되리라. 하지만 시야에는 닿지 않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병력을 옮겨와라! 여기서 놈들을 기습하겠다!”

그렇게 움직이는 오이라트의 병사들을 바라보는 눈빛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이라트의 별동대는 조선군이 예측한 장소에 매복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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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라트의 별동대가 매복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산. 유목민족의 뛰어난 시야로도 확인하기 힘든 거리이지만 천리경을 통해 바라보는 사람들이 한 무리 있었다.

“조바심이 났나 보군. 좋은 자리를 찾으니 신나서 돌아가는데?”

“그런 것도 있지만 아직 땅이 얼어서 발자국이 찍히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겠지. 발자국을 지우지 않고 있다. 놈들도 조바심이 난 것이 분명해.”

천리경에서 눈을 뗀 타이순의 부하는 태연하게 술을 홀짝이는 홍길동을 보면서 감탄이 새어나왔다. 이 자는 여진어와 몽골어를 모두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

“그렇게 좋은가?”

“물론, 상대가 내 손아귀에서 놀아나니까 기분이 아주 좋네. 형님을 생각하면 저런 놈들은 아주 귀여운 녀석들이지.”

“대체 형님이 어쩠기에 그러나.”

“묻지 말게. 어휴 형님 생각하니 지금 생활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홍길동은 반쯤 마신 소주의 뚜껑을 닫지 않고 그대로 타이순에 부하에게 건넸다. 타이순의 부하 또한 추위에 시달렸는지 소주를 들이켰고 완전히 비워진 대나무 통이 바닥을 뒹굴었다.

“젊은 나이에 세 나라의 말에 모두 능통하다니. 나중에 뭘 하려고 그러지?”

“문반이건 무반이건 뭐건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아. 그냥 나리 소리 들으면서 편히 머물 고장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군. 돈이야 장사로 모으면 그만 아닌가?”

“꿈도 야무지군. 장사를 한다 했는데 천리경이라는 녀석을 팔 생각은 있나?”

“직접 만들어 보지. 계속 만져 보았으니 몇 년 정도 고민하면 만들 방법이 생각날 거라네. 자네도 핑계를 대고 조선에 귀부하지 그러나? 편안하게 살면 그만 아니겠어?”

그날 저녁부터 오이라트의 병력들이 매복하고 있는 산의 봉화대는 연기를 피우지 않고 완전히 침묵했다. 평상시라면 한 줄기의 연기가 피어올라야 하고. 완전히 침묵하면 봉화대가 함락되었다는 신호이지만 그걸 알 방법은 오이라트에게는 없었다.

오이라트의 병력이 매복한 산길을 따라 조선군의 대열이 이동하였다. 하지만 길게 늘어선 수레들과 느슨하게 배치된 야인여진 출신의 기병들은 피로와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는 듯이 느릿느릿 움직일 뿐이었다.

“전방 능선에 적입니다!”

“진영을 갖춰라! 적이 대열을 습격하지 못하게 막아라!”

급작스러운 습격이었지만 대응은 빨랐다. 순식간에 대열을 갖춘 야인여진의 기병들은 뭉쳐서 달려들기 시작하였고. 그 뒤를 조선군의 기병이 쫒아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작전대로 해라! 아마 능선을 넘어가면 놈들이 사방에서 들이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능선을 넘어선 순간부터 속도를 줄여라!”

소수의 오이라트 기병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더니만 돌진을 포기하였다. 그만큼 무서운 기세로 야인여진 기병들이 앞 다퉈 달려 들었고. 순식간에 본진에는 소수의 호위 병력과 등짐을 짊어진 보인들만 남았다.

“다들 천천히 등짐 내리고 작전대로 준비해! 말은 미리 수레에서 풀어놔!”

“놈들이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우리가 도망칠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겠지.”

몸에 두른 두꺼운 모피 안에는 찰갑과 피갑이 있었으며. 수레 위의 나무 상자에는 바로 꺼낼 수 있도록 병장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기묘한 함성이 숲에서 들려왔다.

“온다! 작전대로 수레를 등지고 장비를 챙겨!”

고함소리와 함께 호각이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병사로 돌변하는 무리를 본 오이라트의 매복병들은 흠칫 놀랐지만 자신의 숫자는 2천, 상대는 기껏해야 1천의 보병이었으니 오히려 좋다고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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