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56화 – 불타라 활활(3) (작전지도 포함) >
3월 4일. 북방에서 정월 대보름까지 보내고 다른 명절인 삼짇날 까지 보냈다. 이 머나먼 북방까지 오게 한 에센에 대한 분노를 삭이면서 마지막 군의를 시작하였다.
“드디어 전투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대군 어른 덕분에 달자들의 정찰병을 쉽사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나의 실책을 다른 이들에 메워주었을 뿐이오.”
이징옥은 웃어넘겼지만 보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흑우를 탄 채로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진영의 허점을 파악하러 나왔다가 근처까지 들어온 정찰병을 만났으니까. 하지만 이징옥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지도를 보았다.
“북쪽에서 이곳으로 피난해 온 홀라온(해서여진의 조선식 명칭)의 말로는 벌써 와라부의 달자들 수천이 선발대로 나섰다 하더군요. 이미 보급을 노린 별동대도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겠지요.”
탁자 위에 놓인 지도에는 주변의 전선이 폭넓게 그려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이곳 하르빈이며 강 건너편에 에센도 진을 쳤다. 그리고 남서쪽으로 쭉 내려간 곳에 다시금 압정이 박혔다.
“얼마 전에 대총 한의 동생인 지능(태자)이 서한을 보냈습니다. 자신들을 비롯한 달자의 병력 4천가량은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명국의 보급을 차단하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야선(에센)이 쓸모없는 일을 시켰다 생각하겠군.”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요동에서 보급을 받으려 하면 너무나 먼 거리이니까요.”
타이순은 이번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알코올 중독을 자각했는지 자기 동생을 보냈고. 그렇게 투메드부의 병력 맞은편에 우리 병력을 표시하는 바둑알이 올려졌다.
“우리의 대응 병력은 얼마이지?”
“정충렬 휘하에 있는 병력과 함께 일대의 홀라온으로 구성된 병력이 도합 4천 배치되었습니다.”
“얼마 전 보고에 따르면 동산(충샨)의 정찰병들이 돌아다닌다 하던데. 위장은 철저히 하였소?”
“물론입니다. 정충렬 휘하의 병력들은 후방의 산속에 거점을 만들어두었으며 홀라온의 병력을 전면에 내세웠다 합니다.”
그렇다면 들킬 염려는 없다. 서유정이 북쪽으로 충샨을 보내기로 약속했으니 두 세력의 사이에 끼워져서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리라.
충샨은 아무런 정보도 가지지 못한 채 이곳 하르빈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 기껏해야 적으로 상정한 자들은 투메드부의 소수 병력만 생각할 것이고 격퇴할 수 있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실제 적은 그 2배가 넘어선다. 짐이나 다름없는 일행들을 잔뜩 달고 2배의 병력을 상대로 싸워 이긴다고? 5대손인 누르하치가 나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병종도 동일한 유목민의 기병이니까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충렬과 대총 한이 알아서 할 일이오. 정충렬도 귀부하였을 뿐이지 당시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니 동산의 병력을 완전히 궤멸시키겠군.”
“그렇습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인 동쪽의 목단강 방면에는 야선 휘하의 장수인 백안(伯顔 - 바얀)과 5천 이상의 병력들이 배치되었다 합니다.”
정확한 병사의 숫자는 알지 못하지만 5천 이상의 정예병이면 별동대 치고는 상당한 규모다. 정면 승부가 아니고 보급로 차단과 요격이지만 조선의 물자를 강탈하겠다는 속셈도 보인다. 그렇게 바얀의 병력을 표시하는 압정이 꽂히고 다시 바둑알이 올려졌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보급대로 위장한 갑사 1천명과 훈련도감 및 화기도감 병사 1천명 그리고 야인 기병 3천기가 파견되었습니다.”
“정면으로 싸울 수 있겠소?”
“물론 가능합니다. 또한 곳곳에 있는 봉수대와 보급 창고에도 방비를 아끼지 않았으니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퇴각하면 충분할 일입니다.”
“기껏해야 기병 3천기를 생각했겠지. 하지만 짐꾼들이 모두 병장기를 들고 나서면 놀라 자빠지겠군.”
보갑사와 훈련도감은 상호 보완관계다. 서로가 자존심 대결을 하지만 결국 전장에 놓고 굴리면 성과가 좋은 편이니까. 구성 자체는 완벽한데 하나 불안한 점이 있다.
“하지만 억지로 전투를 회피하거나 거짓으로 패배한다면 적이 알아차리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물론 상대도 바보는 아니니 보급을 호위하는 병력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겠지요. 그래서 처음의 보급은 기습을 당해 빼앗길 예정입니다.”
“기습을 당해 빼앗긴다고 하셨소?”
이징옥도 많은 생각을 거듭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면서 바둑알을 목단강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저희도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송화강은 너무나 긴 강이며. 강가에는 배를 노려서 습격하기 좋은 곳이 여럿 있습니다.”
“그렇소?”
“그러한 곳을 모두 막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소수의 병력을 쪼개야 하니 각개격파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공격을 유도하고 약간의 물자를 빼앗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이후에는 모두 육로로 옮기는 것으로 위장한다는 말이구려.”
수비가 언제나 유리한 것은 아니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만, 수비하는 입장에선 보급품과 같이 비전투 병력을 다수 이동시키는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 된다.
“그렇습니다. 그러하니 약간의 화약과 잡곡을 빼앗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화약에도 미리 손을 써두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무슨 수를 써두었는지는 나중에 가서 알 일이군.”
“염려하지 마십시오. 달자들은 모르지만 명나라 출신 포로들은 알만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있는데 밖에서 전령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보고 드립니다! 마침내 와라부의 대규모 병력이 강 건너편에 집결했다 합니다!”
“숫자는 얼마인가?”
“일만 이상입니다! 대총 한 휘하의 병사가 천리경을 써서 군기를 보니 와라부의 달자가 확실하다 합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소.”
천리경과 유목민족들의 시야가 결합하면 엄청난 이점을 가진다. 타이순이 보내온 소수의 병사들은 이렇게 군사 자문과 정찰대에 속하여 요긴하게 쓰였다. 군막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데 이런 때는 내가 나서야 한다.
“상장군! 준비한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소?”
“아주 유순하게 변했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밖으로 나서자 일백에 달하는 오이라트 병사들이 속옷만 입은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보름 전에 정찰을 나온 놈들이 주변을 순찰하던 나와 마주쳤고. 그 자리에서 간신히 도망친 다음 놈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살려주십시오!”
“뭐라 하는 건가?”
“살려달라는 말입니다.”
사로잡은 다음에도 탈출 시도를 하거나 반항을 계속하기에 적당히 교육을 해줬다. 폭풍메치기(F5)나 질식투(초크슬램)를 한 번씩 먹여주니 조금 유순해졌다.
그렇게 두었는데. 틈만 나면 평소부터 원한이 있던 해서여진 사람들이 밖으로 끌고 나와 혹한의 추위 속에 몽둥이찜질을 반복했고. 교육의 효과가 대단했는지 이렇게 순종적으로 변했다.
“네놈들의 주인이 왔으니 네놈들의 처우를 결정하겠다.”
“에센 태사께서 너 같은 괴물을 두려워할 것 같더냐!”
역관이 말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말투가 반항하는 것이 맞으니까 놈의 목덜미와 허리를 잡아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아아아아아악! 살려줘!”
“네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더냐! 아국의 영토에 발을 들인 것만 하여도 대죄이거늘! 그러고도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것이 누구의 덕인지 모르겠느냐!”
놈을 바닥에 내던지니 쿵 소리와 신음성만 들려왔다. 눈을 번들거리면서 놈들을 돌아보자 다들 기가 꺾여서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놈들에게 용수(사형수에게 씌우는 깔때기 모양의 기구, 보통 술을 내리는 데 쓴다)를 씌워라! 그리고 목에 쇠사슬을 채워라!”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 가운데 하나가 300이다. 거기서 나오는 근육에 반해서 의욕을 더더욱 상승시켰거든. 역사 왜곡이고 뭐고 상관없이 그냥 근육이 좋더라고.
“잠깐 이건 뭐야! 앞이 안 보이잖아!”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크억!”
마치 개를 끌고 가듯이 놈들을 끌고 간 다음 진영의 밖에 준비한 거대한 수레에 묶었다. 300에서 나온 것이 이게 맞던가? 뭔가 왜곡되어 있지만 효과는 확실하겠군.
“나는 관대하다! 그러니 네놈들과 네놈들의 주인인 야선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요! 앞이 보이지 않고 목이 묶여 있어서 답답해 죽겠소!”
“개처럼 네발로 기어라! 네놈들은 개만도 못한 놈들이지만 그래도 살아있지 않겠느냐! 수레를 끌고 강가로 나아가서 목숨을 구걸해라!”
“저기 대군 어른, 그냥 죽이시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제자인 김종직이 나와 오이라트 병사들을 번갈아 보더니만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건 계획이다. 수많은 노예들을 지배하는 근육 덩어리들! 멋지지 않은가?
“정녕 사실입니까! 정말로 살려 주시는 겁니까?”
“그래! 너희가 말을 따른다면 정말 강 건너로 보내줄 것이다. 그러니 네놈들의 목숨을 부지하려면 손발을 바쁘게 놀려라!”
결국 제자들도 수레에 올랐고. 인간 동력 수레는 천천히 강가로 나아갔다. 음력 3월이어서 제법 날이 풀렸지만 여전히 영하의 날씨다. 이윽고 수레가 강에 닿았다.
계획은 간단하다. 나는 관대하다를 외쳐서 사기를 떨어트린 다음 제자들과 함께 근육 자랑을 시작하면 기세가 확 꺾여 버리겠지. 아주 완벽한 계획이야.
“천리경으로 보니 저 멀리에 와라부의 병사가 보인다네. 저 뒤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군.”
“어디 봅시다. 복장이 제법 화려한 것이 야선이 아닐까요?”
강 건너의 오이라트 병사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에는 화려한 복식에 갑옷을 갖춘 기병 한 무리가 강가로 나섰는데 아무래도 에센이 확실해 보인다.
“너희의 주인이 강 건너에 있다! 목숨을 구걸해라! 나는 관대한 자이니 네놈들을 살려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관대하다!”
“태사! 저희를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 괴물 놈이 저희를 죽일 것입니다!”
“이러다가 얼어 죽기 전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나의 말을 역관들이 강 건너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전했고. 포로들도 애걸복걸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자 강 건너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관이 급격히 얼굴이 붉어지더니 나에게 통역을 해줬다.
“보아하니 조선의 장수 같은데 아국의 백성들을 가지고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는군요.”
“그러니까 이놈들의 목숨은 모두 내 것이라는 말인가?”
“아무리 보아도 그러한 말 같습니다. 하오나 다음에 한 말은…….”
“분명하게 전하게. 저들이 험악한 욕설을 하여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으니.”
“너희 부모와 형제를 데리고 그러한 놀이를 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내 부모는 세종대왕님이고 형님은 왕인데 이 새끼가 지금 내 정체도 모르고 헛소리를. 아니, 정체를 알면 더더욱 저런 소리를 하고 싶겠지. 아무래도 역관은 훨씬 험한 소리를 들었지만 나를 생각해서 수위를 낮춘 것 같았다.
반면 포로로 잡힌 병력들은 상대의 도발을 듣더니 분노한 내가 죽일 것이라 생각하는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야선은 상대의 기를 꺾는 방법을 알고 있군. 이래서야 원래 계획대로 진행할 방법이 없지 않는가.”
강 건너에서 고함이 들려올 때 마다 역관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급기야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귀를 막았고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용납했다. 김종직도 상황을 알고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간악한 자입니다. 어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어쩔 수 없군. 포로들을 풀어줘라! 적어도 적들의 사기를 꺾어야 하지 않겠나!”
사실상의 사형 선고를 받고 정신이 나가 있던 오이라트 포로들은 우리 병사들이 재촉하자 얼어붙은 송화강 위를 달려 나아갔다. 예상대로 오이라트 진영에서 고함이 들리더니 화살비가 쏟아졌다.
“저들이 보내올 정보는 생각하지도 않으려는 겁니까? 야선은 참으로 폭급한 자이군요.”
“저들을 살려 보내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겠지. 낮춰 볼 상대가 아니라네.”
화살을 피한 포로 두 명은 진로를 바꾸어서 강을 따라 멀리 달아났다. 하지만 이 혹한의 벌판에 속옷만 입고 버려졌으니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
“저 머저리들을 쏘아 죽여라!”
“태사!”
“알락! 닥치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조선의 장수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대단하지 않는가! 개만도 못한 놈들을 가르쳐 개로 만들어서 수레를 끌게 하다니.”
명령은 지엄하다. 살아남기 위해 달려오던 포로들의 머리 위로 화살비가 날아들었다. 몸이 재빠른 자들은 몸을 틀어 피하려 하였으나 목숨을 건진 자는 고작 둘에 불과했다.
“저들은 지금까지 조선의 진영 안에 있던 자들이 아닙니까!”
“너는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나? 관대하다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무슨 말을 이어나갈지 분명하지 않나! 조금만 불리해져도 조선에게 고개를 숙이면 살려준다 하겠지!”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그래! 저 멍청한 놈을 쏘아 죽이고 진정하지!”
에센이 높이 날린 화살이 다리에 화살을 맞고 얼음 위에 뒹굴고 있던 포로의 몸통에 박혀 버렸다. 활을 내던진 다음 돌아가는 조선군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바얀에게 3천의 병력을 더 보내겠다. 다소 피해를 입어도 좋으니까 가급적이면 적의 화약을 약탈하는 일에 중점을 두라고 전해.”
“1만의 별동대라니 너무 많은 숫자가 아닙니까?”
“화약을 얻으면 바로 본진으로 보내야 하니 숫자를 많이 둔 것이다. 얼마나 얻어올지는 모르지만 조선 놈들의 요새를 공략하려면 화약이 필요하지 않겠나.”
에센은 본진 안에 박혀있는 명나라 출신 화포 기술자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화약이 없어서 애물단지였지만 이제는 다르겠지.
----------
별동대를 거느린 바얀은 사방에 파견한 병사들의 보고를 들으면서 공격 시점을 가늠하였다. 조선도 나름 이번 보급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3천의 기병을 호위 병력으로 보낸 것이다.
“우리의 병사는 태사께서 충원한 녀석들이 오면 1만이 됩니다. 어찌하여 지금 치시지 않는 것입니까?”
“태사께서 화약을 얻어오라고 하지 않았나. 화약이 필요한 마당에 저들을 먼저 공격한다면 보급이 오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네.”
“그렇다 하여도 언젠가는 들킬 일입니다. 차라리 적들의 수급을 챙기는 일이 좋지 않겠습니까?”
“멍청한 소리를 하기는. 저 산봉우리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두 줄기가 아닌가.”
바얀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휘하에 있던 울두치(칼을 사용하는 호위병)를 밀쳤다. 글은 어설프게 알 뿐이지만 지략은 어디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충원된 병력들이 말하기를, 태사의 병사들이 강가로 나서자 조선군의 요새에서 솟아오르던 두 줄기의 연기가 순식간에 네 줄기로 늘어났다고 하였다.
“저게 신호야. 연기 두 줄기는 아직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는 신호일거고. 연기 네 줄기는 적이 근처에 있다는 신호겠지.”
“그렇다면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연기가 네 줄이 되면서.”
“그래. 조선 놈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연기를 피워 올릴 것이 분명하네. 우리가 할 일은 한 번의 전투로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고 보급품을 노략하는 일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바얀 자신도 초조하였다. 조선군의 정찰병들도 본진의 이변을 알았는지 점차 정찰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초조한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바얀에게 정찰병이 달려왔다.
“왔습니다! 조선의 배 세 척이 저 멀리서 강을 가르고 올라옵니다!”
“모두 강으로 향한다! 가급적이면 몸을 가볍게 해라!”
드디어 왔다. 배 세 척이라고 하여도 얼마나 커다란 배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바얀이 병력들과 함께 강가로 나아가자 조선의 배가 불타고 있었다.
계획대로면 높이 있는 골짜기에서 순서대로 불화살을 쏘아 적의 배를 태우고. 혼란을 틈타 밧줄을 걸거나 아예 물을 건너가서 배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나 좋았다.
“불을 꺼! 불을 끄라고!”
“염병할! 이러다가 모두 타죽게 생겼잖아! 벌써 강가에 달자들이 모여 들었어! 너무 빠르다고!”
“그냥 킷다리(舵杆 - 타간, 배의 방향을 잡는 부품)에 나무를 끼워 방향을 돌려놓고 배를 버려라!”
이미 조선의 보급선 가운데 두 척은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 척은 커다란 배이기에 그럭저럭 버티기는 했지만 작은 배는 통제를 잃고 서서히 북쪽 기슭으로 향했다.
“놈들이 배를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냥 내버려 둬! 한 척은 이쪽으로 향하니 배의 불을 끌 준비나 해라!”
화살 몇 발이 강을 헤엄치는 조선군을 노리고 쏘아졌지만 바얀이 쏘지 못하게 하였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조선군이 옮겨왔을 화약이 중요하다.
“조선 놈들은 내버려 둬라! 놈들의 보급을 빼앗는 일이 먼저다!”
“큰 배가 아니고 작은 배가 오다니 욕심이 나는걸요.”
“배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화약이 있느냐 없느냐 바로 그것이지.”
조선인들은 하나같이 나무판자나 물통을 잡아들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보급품을 훔치는 일이 먼저기에 바얀은 병력을 동원해 물을 뿌렸고. 불길은 금세 잡혔다. 이윽고 배에 들어간 병사 하나가 몸통만한 상자를 짊어지고 나왔다.
“큰 상자가 아니고 작은 상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이 바깥에 가죽을 덧대고 틈을 밀랍으로 막았습니다.”
“서둘러 본진으로 돌아간다. 만에 하나 이 물건들이 화약이면 천둥소리를 내며 터질 것이니 절대 떨어트리지 마라.”
강 건너에서는 분노한 조선군들이 화살을 쏘아대고 소리를 질렀으나 강 건너까지 화살이 날아오지도 못했다. 첫 기습에서 성공을 거둔 바얀은 본진으로 돌아와 물건을 확인했다.
“검은 가루라. 이게 화약인가 하는 물건인가? 거기 너! 이게 화약이 맞나?”
명나라에서 잡혀와 여기까지 끌려온 늙은 화포장이 상자 안에 들어있던 가루를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냄새를 맡은 다음 한 줌을 꺼내 불을 붙였다. 푸왁 하는 소리와 함께 화약이 터져나갔다.
“화약이 맞습니다. 질이 아주 좋은 녀석이군요.”
“그래? 나머지도 화약이 맞겠지? 그리고 이 나무 쪼가리는 뭐야?”
한자를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한자 여럿만 적혀있었다. 화포장은 화약 속에 묻혀있던 죽간(竹簡)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서 뜻을 알아내려 애썼다.
“무슨 뜻이기에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는 것인가?”
“별 뜻은 아닙니다. 화약을 제조한 고장을 기입하고 용도를 분류해 넣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화약의 질이 신통치 않으면 벌을 받겠지요.”
어설프게 한자를 아는 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파자(破字)가 죽간에 적혀 있었다. 진짜 화약이 아닌 녀석들에는 인(人), 입(立), 일(日)과 의미 없는 단순한 한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앞의 세 자를 합치면 거짓이라는 의미인 가(假)자가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화약으로 화포를 쏘면 얼마나 쏠 수 있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닷새 동안 화포를 쏘아댈 양은 되는군요.”
60상자의 화약, 총 무게가 2,400근(약 1.5톤)에 달하였지만 이 가운데 진짜 화약은 단 3상자 밖에 없었다. 나머지 화약들은 염초 대신에 오줌과 납가루, 그리고 굳은 밀랍으로 만든 가짜 화약이다.
이걸 넣고 불을 붙이면 숯이 천천히 타들어가고. 납과 기름이 녹아서 화포가 망가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말해줄 의무 따위는 없었다. 조선군이 이렇게 함정을 파 놓았다면 혼란을 틈타 몸을 숨겨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