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55화 – 불타라 활활(2) >
에센과 싸우기로 작정했으니 당연히 가장 가까운 명의 영토인 요동에 보고를 올려야 한다. 군사적 동맹 관계에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이징옥은 하르빈 일대의 군권을 담당하고 있으니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결국 내가 나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음력 12월의 혹한을 뚫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 요동으로 향했다. 길잡이로는 투메드부에서 파견된 몽골 기병들이 따라왔다.
“얼어 죽겠군.”
“체격이 좋은 사람들은 추위에 강하던데 대군 어른께서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보통 몸에 지방이 많아서 추위를 막아낼 수 있지. 나는 절육(커팅)을 많이 행해서 가죽과 근육만 있는 몸이니까 추위에 약하다네.”
“입신체비에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군요.”
이맹전이 춥지 않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도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코끝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군대 생활을 했던 양구 산속의 추위를 기준으로 판단해 보면 영하 20도는 충분히 넘을 것 같다. 복면까지 둘렀는데도 콧속이 얼어버릴 지경이니 정말 엄청난 추위이다.
“승리는 확실하지만 달자들의 판도를 뒤엎어 내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궁금하군.”
“저도 답답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다다랐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번 전투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에센이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 해도 하르빈을 공략할 방법은 거의 없으니까. 병력도 충분하고 보급도 충분하다. 화약은 1만 근이 넘게 비축되어 있다.
여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2월이면 정충렬의 건주위 병력들도 파견된다. 하지만 에센은 피해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거리낌 없이 도망칠 것이다.
“지키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네. 야선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입혀야 하니 문제라는 것이지.”
유목민족은 후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황이 불리하면 훗날을 기약하며 퇴각하는 것이 상식이고, 철령 전투의 경우에는 마오나하이와 타이순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변수 때문에 일이 헝클어진 것이다. 여기에 충샨이 뒤통수를 때린 덕분에 타이순의 피해가 더 커졌고.
“그렇다고 해서 정녕 홀라온(忽剌溫 - 해서여진의 조선식 명칭)을 패배시키고 대총 한의 권위를 세워주실 작정입니까? 야선이 쉽게 달아날 자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철령의 전투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대패 중의 대패니까. 놈들은 승산이 크지 않으면 도주를 거리끼지 않지.”
“그렇다면 결국 홀라온의 피를 흘려서 달자들의 판도를 뒤엎어야 하겠군요. 앞으로의 일이 문제입니다.”
결국 해서여진과 투메드부의 병력들을 교전시키고, 해서여진을 포로로 잡게 하여 그 몸값으로 타이순을 지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연하지만 해서여진의 반발도 심할 것이고 잘못하면 상당수의 해서여진들이 몽골에 아예 귀부할 가능성도 있었다. 어디 한 5천 정도의 군대 없었나 했는데 찾아내지도 못하겠다.
그렇게 열흘 가까이 정신없이 남쪽으로 내려오니 어느 정도 사람 사는 분위기가 나오는 오솔길이 보였다. 길 안내를 위해 나온 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만 나에게 말을 꺼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명의 정찰병들이 돌아다니는 구역이니까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그렇다면 돌아가는 길도 잘 부탁하네.”
그렇게 하루를 더 남쪽으로 향하자 서평(현 길림성 서평시)에 도착하였고. 본래 망루와 소규모의 요새가 있었을 곳에는 새로 쌓은 듯 정갈하면서 거대한 장성이 보였다.
“저것이 명의 장성입니까? 저는 변방에 있는 장성이라 하여 아국처럼 산성을 이어나간 줄 알았습니다.”
“명국이니 가능한 일이라네. 북경의 동쪽으로 이어나간 장성만 하여도 2천 리(800㎞)가 넘는다 하였는데 사실인 것 같군.”
이맹전이 산성을 훑어보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축성에 대한 지식이 많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규모면 만리장성의 일각이라 불려도 충분해 보이는 수준이다. 높이만 해도 어림짐작으로 15자(5.1m) 이상의 석성이다.
그나마도 비용부담이 심해서 조선 방향으로는 장성을 쌓지 않았지만 이렇게만 쌓아도 충분한 방어력이 보장된다. 장성은 거의 환인(桓仁 - 현 요령성 번계 인근)까지 이어졌다 하니까. 그렇게 장성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자 문이 열리고 기병들이 달려온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날이 추우니 몸을 녹일 수 있게 들어오시지요.”
“이것 참 반갑소.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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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부임한 요동 총병관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전에 보았던 총병관 조의는 급박한 사태에 직면하여 정신이 반쯤 나간 정도였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같이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조선의 왕제(王弟)이자 하르빈에 파견된 수양대군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와라부(오이라트)의 달자들이 난을 일으킬까 염려되어서 논의를 위하여 여기까지 왔소.”
“와라부! 와라부라 하였습니까!”
딱 보아도 안색이 파리하고 얼굴 근육이 움찔거리면서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 대체 뭘 하는 사람이기에 통성명도 하지 않고 이런단 말인가.
“저기 잠시만 진정하시오. 와라부의 달자 삼만 정도가 하르빈을 노리고 있다 하여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아서 찾아왔소. 하지만 철령에서의 전투를 생각해 보면 별다른 일은 아니지 않소.”
“거기 있느냐? 와라부의 달자들의 행적을 조사한 것을 모아오너라! 그리고 너희는 어서 조선에게 원병을 보낼 준비를 하라!”
“화중지방에서 온 원병이 여섯 달 전에 돌아갔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농부들에게 칼이라도 쥐어서 올려보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허둥지둥거리면서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보자 이 인간의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시종이 탕약을 한 대접 가져오자 정신없이 들이켜고는 안색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내 잠시 경증(驚症 - 잘 놀라는 성질)이 도졌습니다. 북방에서 시일을 보내다 몸에 추위가 드니 가끔 사소한 일에도 놀라게 되어 이렇습니다.”
“경증을 쉬이 막아준다니 좋은 약이오. 혹여나 처방을 얻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오.”
경증을 완화시키는 강한 약재인 주사(朱砂)를 먹어봐서 안다. 이 양반이 마시는 약의 즉효성을 보건대 내가 먹었던 탕약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 분명해 보여서 궁금하다.
“앵속각(罌粟殼 - 양귀비 껍질)을 쓰는 약입니다. 그나저나 아직도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먼 길을 오신 분에게 이런 무례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본관의 이름은 서유정(徐有貞)이며 2년 전에 요동 총병관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존함을 듣게 되어 기쁘오. 보아하니 총병관께서 장성을 쌓으신 것이 분명한데 장성이 치밀하고 견고하니 솜씨가 뛰어난 것이 분명하오.”
기억에 없는 인물이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요동 총병관으로 파견되었으면 장성 정도는 직접 쌓았다고 추측했고, 실제로 장성을 쌓은 것이 맞는지 표정이 확 좋아졌다.
“황상께서 부족한 사람을 거둬들이시어 요동 일대의 장성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충심을 보이고자 구족(九族) 모두를 심양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구족 모두를? 참으로 대단하오.”
구족 모두라는 말에 감이 잡혔다. 능력은 있지만 남경 천도파에 속한 인물의 거두여서 징계 삼아 여기로 구족 모두와 같이 강제이주 당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마약인 앵속(罌粟 - 양귀비)을 먹어야 할 정도로 불안에 시달리고 있겠지.
“이것이 충심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군사의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달자들이 다시금 난을 일으킨다 하였습니까?”
“그렇소. 달자들이 와라부와 달자로 양분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와라부에 속한 이들이 명국을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전하게 하고자 아국을 노리는 것이 분명하오.”
“그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아, 아니, 일전에 대총 한을 물리친 적이 있으니 첩자들을 사이에 끼워 넣을 방도는 충분하겠지요.”
실은 그런 수준도 아니지만 알아서 이해했으니 충분하다. 요동을 직접 공격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안심하는 눈치다. 한참 생각하더니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말투가 바뀐다.
“본래 황상께서 조선에게 영토를 할양할 때는 야인들과 달자들 모두를 통솔하는 것에 만전을 기하라 하였소. 이는 반드시 조선의 일이니 방비를 철저히 하시오.”
“물론이오. 하온데 농부라 하셨으면 벌써 사민을 행한다는 말씀이오? 아무리 위소제라 하여도 배정된 인원이 적을 것인데.”
“그렇긴 하오. 생각하여 보니 조선에 지원해 줄 것이 있기는 하구려. 건주 양위(좌위, 우위)를 본래 조선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를 북방으로 보내면 전력의 한 축이 될 것이오.”
이 미친놈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전체 인구만 2만에 달하는 건주 양위를 동쪽의 조선 땅으로 보내? 그것도 철령 전투에서 막대한 이득을 먹어치우고 세력을 불린 놈들을?
“건주 양위라 하시면 모두를 북방으로 내치신다는 말씀이오?”
“일전에 병력들을 끌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소. 자신들이 가진 것들 모두와 충분한 곡식을 준다면 알아서 나갈 자들이 5천 호(약 2만 이상)에 달한다 하였지요.”
“5천 호에 달한다고 하였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서유정을 보니까 답이 나온다. 지금까지 얻었던 이득을 눈감아주고 세력을 온존해서 장성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겠지. 수많은 뇌물을 서유정에게 먹인 것은 당연하다.
상식을 가진 요동 총병관이면 건주위 세력을 분할하여 쫓아내야 한다. 이 녀석들이 거대한 세력을 구축한 채로 조선과 명의 영토 사이에서 세력을 구축하면 여진족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울 것이 분명하니까.
“실지로 장성 안에 사는 건주 양위의 총원은 6천 호보다 조금 모자라는데. 이 가운데 5천 호가 스스로 요동 밖으로 나설 것이라 청을 하니 두 달 후에 동쪽 장성을 통해 나가게 하고자 하였소.”
“그것은 동산(충샨)이 정한 일이오?”
“아니오, 동산은 본래 청하기를 서평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려 하였소. 하지만 달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동쪽으로 보내려 한 것이오.”
자신의 판단이 대단하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폭탄을 돌리다가 조선으로 던져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충샨은 처음에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서 병력이 빠진 마을들을 사정없이 노략질했고, 그 이후 조선의 승전이 확정된 순간 타이순의 본진을 모조리 털어버리고 보급부대도 약탈했다. 조선에 귀부한 건주위의 여진족들은 찌꺼기를 주워 먹고 누명을 쓴 것이고.
그런데 왜 북쪽으로 이동하려 한 것일까. 이유는 짐작이 갔지만 서유정이 내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북쪽에는 조상의 땅이 있다던가. 생각해 보니 그대로 북쪽으로 보내도 될 것 같소. 어차피 북쪽에서는 난이 일어날 것이며, 동산 또한 살기 위해서는 조선을 위해서 일해야 할 것이오.”
“총병관의 혜안에 감탄하였소. 건주 양위가 아무리 부덕한 자들이라 하여도 달자들이 목숨을 노리면 조선을 위하여 싸울 것이니.”
“목숨이 아까우면 방도가 없지 않겠소. 이렇게 하니 조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하였군.”
논의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면서 계속 고민했다. 충샨의 전력 2만은 북방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우리가 개입하지 않으면 해서여진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할 것이다.
반면 충샨의 건주 양위는 철령 전투를 시작으로 경험과 물자를 충분히 쌓아 올렸다. 심지어 조선군의 물자를 일부 빼돌린 정황마저 있었으나 잡아내지 못했고. 이 정도면 투메드부 같은 몽골의 소규모 부와 전면전을 벌여도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압도할 정도다.
가장 순탄한 방법은 이번 전쟁에서 공을 인정하여 조선으로 귀부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충샨을 좋게 보지 않는 조정 신료들의 반발도 심각할 것이고. 정충렬은 참겠지만 건주 여진족들 상당수들 또한 심한 반발을 표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서 방으로 들어가자, 아직도 몸을 녹이고 있던 이맹전이 반갑게 맞이한다.
“새로 부임한 요동 총병관과의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소. 다름이 아니고 동산(충샨)을 북방으로 보낸다고 하는데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염려되는군.”
“동산이라 하면 건주 양위를 거느린 자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국과 달자 사이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긴 자이니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 당장 정충렬 같은 자야 충분히 감내하겠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지 않는가. 또한 대총 한도 그에게 원한이 있으니 손을 잡기 힘들 것이네.”
“모두에게 원한이 있으면서도 안전하다니.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군요.”
타이순은 충샨의 이야기가 나오면 분노할 것이 분명하다. 충샨이 뒤통수를 치지만 않았으면 여기까지 몰리지는 않았겠지. 결국 충샨은 뇌물을 먹인 명을 제외하면 조선, 몽골, 그리고 기타 여진세력 모두에게 적대적이다……. 모두에게?
“모두에게 원한이 있다?”
“명이라면 몰라도 아국과 달자들 모두가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와 손을 잡으면 하책 중의 하책일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북으로 보내야 하겠군. 그는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걸세.”
“이득이라 하셨습니까?”
물론 아주 확실한 이득이지. 자고로 화합을 위해서는 공동의 적이 필요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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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의 평야에 수많은 기병들이 도열하였다. 하나같이 모피를 두르고 정렬하여 있으니 주변의 산짐승들은 숨을 죽였고 흩날리던 눈보라조차도 멈추었다.
오이라트가 원정 가능한 병력인 4만을 모두 조선과의 전투에 밀어 넣었다. 심지어 파병하기를 꺼려하던 타이순 칸의 병력 일부도 어쭙잖은 임무를 부여해서 남쪽으로 보냈고.
“역시 조선 놈들이 바보는 아니군. 주변의 부락들을 모두 휘어잡은 것은 확실한 것 같아.”
“그렇습니다. 명나라와는 사뭇 다르니 더더욱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에센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 보낸 정찰병들의 보고를 되새겼다. 조선군의 요새는 얼마 전에 타이순을 따라온 금나라의 찌꺼기들의 말과 거의 비슷했다. 해자와 석축에 화포를 쏘아대는 포대도 있었고 제법 튼튼했다.
오이라트의 병력은 양분되어 있었다. 본진의 병력은 약 3만 이상이며, 조선군의 보급을 끊어내기 위해 배치한 병력이 7천이었다.
“알락, 별동대를 이끄는 바얀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나?”
“얼마 전에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아직 조선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더군요. 하지만 기습하기 좋은 위치는 여럿 찾았다 합니다.”
“기습하기 좋은 위치라?”
“높은 지형에서 배를 향해 불화살을 날릴 만한 곳이 여러 곳 있다더군요.”
에센이 코웃음을 흘렸다. 조선군이 나름 방비를 잘한다 하여도 북방은 조선의 확고한 영토가 아니다. 물자를 옮기는 과정에서 허점이 생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보급을 나르는 병사들은 전투를 하지 못하니 적이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보급병력을 지키느라 쉽사리 추격하지는 못하겠군.”
“그렇습니다. 명과의 전투를 벌일 적에도 보급을 끊는 일은 쉬웠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대놓고 덤비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기회는 많으니까 확실한 순간을 노리라고 전해라.”
적은 반드시 화약을 보급해야 하니 필사적으로 육로를 통해서 물자를 옮길 것이다. 그렇게 지킬 것이 많아지면 기습하기도 쉽고 유리한 지형을 잡기도 좋다.
“조선군이 가져올 화약을 가져올 수 있다면 요새를 공격하는 일이 매우 쉬워질 것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야. 녀석들은 물자 보급도 거의 하지 않고 있지. 만에 하나 명에서 물자를 받으려 하면 아크바그지 녀석이 알아서 막아내겠지.”
“아무리 타이순의 동생이자 허수아비라 하지만 그 정도의 능력은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충원된 기병 4천이라.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철제 화살을 썼다 하던가?”
조선도 보급을 하지는 못했지만 병력을 충원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알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강을 따라 오지는 않았지만 각지에 파견된 탐마(정찰병)들이 정체를 모르는 병력을 만났고. 작은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으며, 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적들의 병장기는 제법 좋은 편이다.
“그렇습니다. 복장과 행동을 보아하니 조선의 병사는 아닌 것 같지만. 장비는 조선군의 것을 사용했다 하니 조선에 귀부한 지 오래된 놈들일 것 같습니다.”
“조선 놈들이 무엇에 쓰겠다고 그런 놈들을 넙죽넙죽 받아들인단 말인가. 아무래도 예전부터 거느린 놈들이 분명하군.”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조선군 본영을 염탐하겠다면서 들어간 자들이 보름째 소식이 끊겼습니다.
에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급적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일을 진행하려 하였지만 멍청한 놈은 어디에나 있었다. 각지에 파견된 정찰병들이 전투를 벌인 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던 몇몇 탐마들이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고자 조선군의 본진 근처까지 다가갔다가 소식이 끊겼다.
“그래서 조선군의 본진을 알아보려고 해자까지 접근했다고?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처음 정찰한 자들에게 포상을 주었더니. 성미도 급하게 조선군의 본진에 근접해서 정찰하려 했다더군요. 분명 죽어서 시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병사 한 명이 달려와 보고를 시작하였다.
“태사! 강 건너편에 조선군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합니다.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무엇인가가 움직입니다!”
“뭐라? 설마 화포는 아닐 것인데.”
난처한 표정의 알락을 보던 에센은 천천히 병사들을 이끌고 강가로 나섰다. 얼음이 녹아가고 있어서 병력 모두가 이동할 정도는 아니며, 어차피 병력 일부가 들킨 마당에 조선도 자신들의 생각은 알 것이 뻔하다.
아무래도 조선의 장수도 정탐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언쟁(言爭)을 벌여 기를 꺾으려는 의도 같다.
“저게 뭐지?”
“저도 눈이 침침한지라……. 거대한 수레 같습니다.”
보통 사람은 보이지도 않을 먼 거리였지만 에센의 눈에는 강 건너 멀리 있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아직 형체만 보이고 있었지만 고함이 들려왔다.
-태사! 저희를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탐마들이 잡혀서 조리돌림을 당하나 봅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멍청한 짓을 했으면 나가 죽어야지 잡혀서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이대로 멍하니 있으면 사기가 떨어진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강 건너를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점점 그 형체가 다가왔다.
“그러니까 저게 뭐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분명 강 건너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지만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 넘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