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46화 – 조선 쇼군(1) >
사흘 동안 시간만 날리는 것 같았다. 인삼 협상과 관련해서는 나는 뒤에서 불편한 표정만 짓고 가만히 있으면 호소카와와 신숙주는 서로 무역 조건을 조정한다. 그렇게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 되자 서로 피로가 쌓이고 입술이 부르트기 시작했다.
“내일은 쇼군께서 친히 축제를 여실 것이라 하니 하루를 쉬심이 어떻습니까.”
“좋은 말씀이십니다. 저희도 피로가 쌓여가던 참이었습니다.”
호소카와가 보기에는 내가 다급한 성격이어서 짜증이 쌓인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머릿속에 잡념이 많아서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다. 돌아가는 와중에 신숙주가 말을 건넸다.
“무슨 심려가 그리 깊으십니까.”
“축제에 날 내세운다 하지 않았는가. 왜인들이 용력을 자랑할 적에 어떻게 하는지 알던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혹여나 대군 어른께서 정이대장군을 만나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오늘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일이 바쁘다고 서신만 받고 거절하며. 그저 아국에서 따라온 예인(藝人 - 예술가, 여기서는 춤꾼을 비롯한 사람들)들을 준비하라 하니 어찌 된 노릇인지 모르겠군.”
그나마 오늘은 서신을 보내서 '호소카와 공은 나라의 일을 담당하니 자리를 비우면 곤란할 것입니다' 라고 전하였고 이러한 요청은 받아줄 것 같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고, 새벽부터 몸을 정돈하고 축기(펌핑)까지 마치고 관복을 갖춰 입었다.
“형님, 이제 출발합시다.”
“혹여나 너에게 어떠한 말을 전달한 적은 없더냐?”
“없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것이니 지필묵과 안료를 필요한대로 말하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말 그대로 축제 한복판이었다. 이 시대의 소문 전달속도를 감안해 보면 나의 이야기가 퍼지려면 한참 걸린다. 이건 바람잡이를 풀어 놓은 것이 확실하다.
“조선에서 오신 대군이다!”
“악명 높은 도이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잔악한 무쿠리 고쿠리들을 소탕하신 대단한 장수시다!”
환호성 속에 무쿠리, 고쿠리, 도이 같은 단어들이 넘쳐났다. 대체 안평대군은 얼마나 요시마사를 흔들어놓았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단 말입니까. 왜인들이 축제를 좋아한다지만 정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정이대장군은 며칠 동안 내 접견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축제 준비에 몰두하던 자이다. 이러한 자가 정도를 알 리가 있겠더냐. 이건 또 뭐야.”
“조선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가마를 준비하였으니 어서 오르십시오!”
요란한 장식이 달린 거대한 가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 수십 명이 밀고 당기는 수레 가마다. 축제 가마는 이동하는 신사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우리를 태우겠다고?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입니까? 우리가 주상전하라도 됩니까 아니면 상여(喪輿)를 탄 주검이라도 됩니까?”
“여기서 예의를 보인답시고 나온 일이니 거부하기도 힘들다. 잘못하면 정이대장군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니 어서 오르자꾸나.”
덜컹거리는 수레 위에 올라 료안지의 입구에 다다르니 환호성이 하늘을 찌른다.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서 가마에서 뛰어내리니 뭔가가 쏟아진다. 벌써부터 분위기에 젖어서 나에게 엽전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덴노 같은 걸어 다니는 신사가 아니야!
“그만! 조선에서 오신 사신이 친히 용력을 보여줄 자리인데 소란은 나중에 피워도 되지 않겠느냐.”
관리가 나서자 잠잠해지지만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돈벼락이다. 덴노의 행렬에 돈을 집어던지는 신토 문화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이었나. 관리는 내 눈치를 보더니만 고개를 조아린다.
“죄송합니다! 배우지 못한 것들이 폐를 끼쳤습니다.”
“염려 말게나. 그런데 무척이나 거대한 사찰이군. 이 고장의 불심이 깊다 하는데 참으로 좋은 일이야.”
앞에 있던 신숙주 또한 동전세례를 맞아서 어설프게 통역을 마쳤다. 사찰에 축제를 열 장소가 있을까 염려되었는데. 료안지는 교토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사찰이었는지 드넓은 회랑 앞에 거대한 터가 있었다.
그 거대한 마당을 수많은 사람들이 메우고 있었는데 훑어보아도 호소카와는 없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소젠 또한 없다. 화려한 단상 위에 요시마사가 앉아 있더니만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소. 조선에서 오셨으니 제법 놀라셨을 것 같은데 어떻소.”
“어찌 저에게 이런 배려를 해주시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너무 겸손해하지 마시오. 용력이 대단하다 하였는데 뽐낼 기회는 마련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시종들이 너른 마당에 짚단들을 놓는데, 이걸 칼로 베어버리라고? 칼 쓰는 방법을 모르는데 어쩌지? 하면서는 생각을 하는데 알아서 변명이 튀어나왔다.
“사찰에서 무기를 함부로 다룬다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 조선에서는 그런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소.”
“순수한 용력을 겨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저와 용력을 겨룰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렇군. 내가 실수를 저질렀으니 양해해 주시겠소? 어서 리키시(역사)들을 데려오너라!”
다이묘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리키시들이 다가왔는데 덩치는 제법 있다. 얼핏 보아도 훈련도감에 들여보내면 딱 좋은 수준들? 그리고 공통점이 있는데.
“쇼군을 뵙습니다!”
“이들은 각 다이묘들이 손꼽아 키우는 스모의 달인들인 리키시들이오. 보기가 어떻소?”
근육은 제법 있지만 하나같이 배가 불룩 나와 있다. 옛날의 격투가나 스트롱맨 중에 보이는 많이 먹고 많이 움직여서 몸을 키운 체형이다. 뱃살이 남아있는 것은 나처럼 집중적으로 커팅이나 부위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이런 사람들이 싸움은 잘 하지.
“용맹한 자들이며 장수의 자질 또한 보입니다.”
생각에도 없는 말이지만 칭찬해주자. 리키시들은 모두 내 몸을 훑어보면서 놀라고 있다. 신장은 한 170정도에 체중은 80정도. 타이순 칸에 비교하면 작은 편이지만 유목민과 일본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나.
“과찬하지 마시오. 일단 용력을 겨루기 위하여 스모가 괜찮을 것 같은데. 조선에서 스모의 규칙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소. 혹여나 다른 생각이 있으시오?”
“잠시 생각을 하여 보지요. 흐음 무엇이 좋을지.”
스모라고 하여도 이 시대의 스모는 규칙이 다르겠지. 그리고 생 초보가 규칙을 억지로 맞춰가면서 싸우라고? 너무 힘든 일이다. 생각해 보니 내 용력을 뽐낼 자리이지 리키시를 빛낼 자리가 아니잖아?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타고 온 가마가 있다.
“자고로 용력을 가졌다 하면 몸의 용력을 모두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네. 그것이야 말로 힘을 가진 자의 본래 의미이지.”
“제가 타고 온 가마를 수십 명이 끌고 다녔습니다. 그렇다면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가마를 움직이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통 스트롱맨 대회에서 대형 트럭을 끌어당기니까 적당하지 않겠어? 요시마사는 신숙주를 통해서 그 말을 듣더니 손뼉을 치면서 감탄했다.
“그거 참 좋소이다. 저런 거대한 가마를 혼자 움직이려면 용력이 필요할 것이오.”
“저 또한 머나먼 곳에 와서 경박하게 행동하면 올바르지 않을 일입니다.”
이미 충분히 경박했는데 요시마사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료안지 앞의 사람들이 밀려나고 다들 가마의 옆으로 이동했다. 거의 2층 건물에 가까운 거대한 가마였는지 다들 질려 있었다.
“한번 움직여 보는 것이 어떤가.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거기 여덟 명은 나와서 가마를 밀어 보아라!”
타고 올 때는 서른 명이 끌고 왔던 가마다. 당연히 여덟 명의 사람들이 민다고 쉽사리 움직이지도 않고 아주 조금씩 밀리기만 한다.
그 광경을 보며 리키시들은 갑자기 웃옷을 벗어던지더니 괴성을 질러댔다. 기합을 넣는 것 같은데 자신이 있나? 요시마사가 손을 들고 신호를 보낸다.
“밀어보아라!”
“으랴아아아아아아앗!”
리키시는 안타깝게도 뒤에서 밀어붙이고 있다. 얼핏 보면 팔의 힘과 다리의 힘 모두를 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지만 틀렸다. 가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다섯의 리키시 모두가 실패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개중에는 가마를 조금 움직인 사람도 있었지만 온전히 움직이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너무 무거운 것 같은데 가능 하시겠소? 자칫 몸이 상할까 염려 되는데.”
“저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으니 밧줄을 준비해서 가마에 묶어주시길 바랍니다. 뒤에서 밀지도 않고 앞에서 소처럼 끌고 나가겠습니다.”
“그러한 방식이 더 불리한 것이 아니요? 뒤에서 밀면 모든 힘을 고스란히 쓸 수 있지 않소!”
대회에서 왜 트럭을 당기거나 뒤에서 밀지 않고. 가슴에 끈을 감아서 몸으로 당기겠는가? 순수한 하체의 미는 힘만 사용하는 방식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소 또한 쟁기를 밀지 않고 쟁기를 당긴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방식이 더더욱 돋보일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가마에 묶인 밧줄이 몸을 쓸어버릴지도 모르니 그냥 관복을 입은 채로 해버리자. 가마의 앞으로 가서 몸에 밧줄을 칭칭 동여맨 다음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펌핑도 마쳤으니 준비 운동은 충분하다.
“끄오오오오오오옷!”
괴성을 지르면서 구부렸던 다리에 힘을 준다. 의압(스쿼트)과 마찬가지로 전신의 근육이 모두 밀어내는 힘에 집중된다. 여기에 밧줄에 힘을 전달하는 등 근육도 안간힘을 쓰면서 구부리며 팔은 자세를 잡는 정도에서 만족했다.
“조금씩 움직인다!”
“지금 막 힘을 주었는데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방식을 썼다면 몇 명은 움직일 가능성이 보였다. 하지만 올바로 힘을 쓰는 방법을 모르니 답이 없지. 그렇게 전신의 힘을 쥐어짜내며 허벅지에 힘을 집중하며 땅을 박차자. 포석이 뒤흔들리는 느낌이 들며 가마가 조금씩 움직였다.
“세상에 사람 여덟이 움직일 수 없었던 가마를!”
“혼자서 끌고 있어!”
“수양 대군! 수양 대군! 수양 대군!”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던 바람잡이들이 수양대군을 연호한다. 수얀다이쿤이라는 어설픈 발음에 더더욱 힘이 솟아오르면서 움직이던 수레에 속도를 붙였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걸어가던 와중에. 누군가가 내 어깨를 손으로 잡아서 힘을 풀었는데 요시마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뜯어 말리고 있었다.
“그만! 그만! 이러다가 사람들이 다치겠소!”
“제가 얼마나 움직였습니까?”
“서른 보를 넘게 움직였소! 세상에 이러한 용력이 있다니!”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듣고 흥분이 넘쳐나서 상의를 훌러덩 벗어던졌다.
“보라! 이것이 아바마마께서 내려주시고 가꾸어낸 완벽한 몸이다! 나의 승리이니 승리의 흑룡세를 취하겠노라!”
흑룡세는 빅토리 포즈다. 그러니까 승리하면 당연히 흑룡세를 만들어야지! 자세를 유지하며 복근을 불룩거리고 대흉근을 움직이니 사람들이 말 그대로 뒤로 놀라서 자빠지고 있었다.
“저게 뭐야! 어떻게 저런 몸이 나와! 무서워!”
“가슴이 갈라져있어! 그리고 움직여!”
“흑룡이라 하였는데 정녕 검은 용과 같구나!”
너희들의 패인은 인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다. 한 리키시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만 얼굴을 붉히면서 질문을 하였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희가 어떻게 하여야 조선에서 오신 분과 같이 강해질 수 있습니까?”
“문제는 하나다. 근육이 부족한 것이 전부이다!”
참으로 원론적인 대답을 하였다. 리키시들의 몸을 보니 이런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부족한 일본에서도 제법 튼실한 몸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숨을 고르며 파들파들 떨리는 근육을 진정시키는데 요시마사가 내 손을 잡으면서 감탄한다.
“참으로 훌륭하오. 포상으로 무엇인가를 내려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왕제(王弟 - 왕의 동생)이니 조선에 실례가 될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저 혼자서는 여기까지 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오나 상왕전하와 어마마마께서 저에게 이런 튼튼한 몸을 물려주신 덕분입니다.”
“상왕전하와 어마마마라. 용력과 겸손함을 같이 가지고 있으니 조선의 북방은 언제나 안전할 것이 분명하오.”
주변을 둘러보던 요시마사는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리려는지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조선에서 온 예인(藝人)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도록 하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선에서 온 악공, 사당패를 비롯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지금까지 높으신 분들만 대접했던 이들은 타국의 백성들이라도 함께 어울리니 분위기에 취해서 풍악을 울려대며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소? 밖에서는 알아서 축제를 즐길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또한 동생의 그림을 간만에 보고 싶었습니다.”
요시마사도 이제 나의 편이다. 다음 차례는 안평대군의 문제작을 적당히 포장해서 전달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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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명나라에서 돌아오고 기본적인 일을 마친 다음부터는 사가에 칩거하면서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
칩거라고 하여도 입신체비는 꾸준히 하면서 몸을 다스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을 무렵에 하나 둘씩 걸작이라 불릴만한 회화들이 나왔다.
그 중에는 낙양과 장안에 다녀온 나에게 확인하려고 보여준 그림 또한 있었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낙양시전도가 그것이었다.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 하나하나의 표정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저 높다란 탑도, 거대한 성문 또한 당나라의 그것이며 마치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 눈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그림은 안평대군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그린 것이었다. 처음에 안평대군은 한 나라의 수도였던 낙양과 장안을 그리면서 예전의 수도라는 점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그림을 그렸지.
“금분(금가루)을 아낌없이 사용하여도 그림에 천박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풍경이라니, 인생 절반을 허투루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요시마사도 그렇고 휘하의 예술가들도 하나같이 감탄하지만 낙양을 직접 가봤던 내 입장에서는 영 아니었고. 안평대군 또한 만족하지 못하던 작품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평시에는 쓰지도 않던 금분까지 사용했지만 더더욱 좌절했다던가.
“이 그림은 같은 무게의 금으로, 아니 열 배의 금으로 살 것이니 금을 가져오겠소.”
“아닙니다. 그저 제가 그린 것이 헛된 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시주를 하셔서 새로운 사찰을 건립하심이 어떠합니까?”
“새로운 사찰이라, 조금 힘든 일이지만 차라리 좋은 일이오. 이 그림이 금과 같으니 새로운 절은 긴카쿠지(銀閣寺 - 은각사)라 하겠소. 은이 되어야 이 그림을 품을 도량이 될 것이니 염려 마시오.”
은각사가 이렇게 지어지게 되나? 하여튼 저 그림은 너무나 밝고 웅장하다. 그래서 안평대군도 완성하고 나서 좌절하였고. 내 도움을 받아서 새로 그린 뒤에야 마음이 풀리게 되었다.
새로 그린 낙양시전도와 장안시전도는 원근법을 이용해서 건물은 작고 희미하게 하여 한산한 모습을 크게 그렸다. 그래서 한 나라의 수도라 보기에는 음울하고 씁쓸한 느낌이 도는 가운데. 찬란한 옛 문화가 보이는 역작 중의 역작이었다.
“다음은 장안시전도입니다. 이 또한 제가 한껏 힘써본 그림이나 낙양과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였던 곳. 드리는 김에 이것 또한 새로 지을 은각사라는 절에 두심이 어떠한지요.”
“낙양과 장안. 두 개를 손에 쥐면 과욕이 아니겠소? 하나는 조선에 두셔서 쌍을 이룸이 좋을 것 같소만.”
“아닙니다. 저는 이 그림을 뛰어넘어야 하니 여기서 만족하면 주저앉을 뿐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졸작을 일본에 베푸는 척 넘기는 저 뻔뻔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아직도 당나라를 좋아하는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희대의 보물이겠지.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오. 부탁이건데 앞으로 교토에 들리지 않더라도. 사신을 통하여 좋은 작품들을 보내주실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제가 붓을 놀리는 대로 진귀한 풍경들을 그려 보낼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조선에서는 무엇이 필요하시오.”
보답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조금 무리수를 써 볼까? 안평대군 옆으로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본론을 꺼냈다.
“쇼군께 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오우치 씨와 관련된 일이나 여기서 해결하고 싶기에 그러합니다.”
“오우치와 관련된 일이라 하였소? 어인 일이기에.”
“본래 오우치는 아국의 옛 조상인 백제의 의성태자라는 자의 후손이라 칭하였으며. 일전에는 아국의 영토를 원하였습니다.”
“그렇소? 백제라는 나라는 팔백년 전에 멸망하였다 하는데 무리한 일이 아니겠소.”
백제는 알고 있네. 하지만 일본서기의 내용까지는 모르겠지. 과연 헤이안 시대의 판본이 아닌 그 이전의 삼국시대 영향이 남아있는 판본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