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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105화 (105/573)

< 2장 44화 – 무로마치 잔혹사(1) >

조선의 회례사가 도착한지 17일이 되었다. 교토에 있는 호소카와는 막중한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조선 사신들이 갑자기 경로를 육로로 변경한 탓이었다.

하지만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보다 뿌린 모피가 많아서 오히려 손해를 벌충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수양대군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했던 야마나 소젠이 교토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뛰어 나왔다. 예정보다 빨리 돌아왔지만 차라리 좋은 일이다.

“어르신, 그간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러시는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신들을 보고도 모르십니까? 저는 지쳤습니다.”

“이제 조선의 사신들이 바로 앞인 셋츠(현 오사카)에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신 분이 말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둘러 처소로 돌아가려던 소젠을 억지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질문을 하자 한참 동안 마음을 가다듬던 소젠의 입이 열리면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딴 생각이 없는 놈이! 대체 어떻게 세상을 산단 말이야!”

시종이 눈치를 보면서 냉수를 내왔고,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단숨에 들이켠 소젠은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했다.

“수양대군이라는 작자는 용력과 사리 분별은 하더군요. 하지만! 기본적인 것이 되어 있지 않은데 어쩌란 말입니까!”

“잠시만 진정하십시오. 이러다가 쓰러지시겠습니다.”

“쓰러졌으면 이미 여섯 번은 쓰러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소젠의 머릿속에서 온갖 굴욕과 분노, 그리고 짜증이 다시금 솟구쳐 올라왔다. 그가 본 수양대군은 무심한 것도, 무능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나라 사람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대체 어쩠기에 기본적인 것이 부족하다는 겁니까?”

“메이와쿠(迷惑 -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일본의 문화. 속된 말로 눈치)가 아예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모든 일을 법도에만 맞게 해결하니 이게 무슨 망종입니까!”

사람이 눈치가 부족할지도 모르니 한 번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눈치가 없으면 14일 동안 다섯 번의 만남에서 매번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서로 표정이 굳어지면서 순 억지로 대화를 나누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서로가 똥 씹은 표정이 되건, 부하들이 안색이 창백해져서 굽실거리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지난 14일간 우스꽝스러운 대면이 계속 이어졌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결국 소젠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피로를 핑계로 교토로 도망쳐 왔다.

“어르신께서 잘못하신 것이 맞습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맹렬한 소젠의 눈빛이 호소카와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호소카와의 입장에서는 소젠이 너무 얕은 수를 쓴 것이 문제로 보였다.

“어르신께서 처음에 수양대군이라는 자를 만나셨을 때, 자신을 올바로 드러내셨다면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가 은퇴한 자라 말하였으면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겠지요.”

소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솔직하게 은퇴한 자라 말하고 나섰으면 일이 편했다. 권력에서 멀어진 사람이니 별 비중을 두지 않을 것이고. 집안 어른 정도로 안면을 트게만 하였겠지.

“그러니 불행한 일로 생각하시고 넘어가심이 어떠합니까. 일이 힘들었을 뿐 손해는 크지가 않고 오히려 이문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한참 아랫것들에게 나서서 승려가 어떻고 하면서 거짓을 논하면서 설득하는 모습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혹여나 어르신께서 어떠한 분인지 알아차리고 일부러 행동한 것은 아닐까요.”

만에 하나 억지로 이러한 행동을 한다면 조금은 합리적인 구석이 있기는 하였다. 상전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면 권위가 급락할 것이니까.

“조선에서 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난번 조선에서 온 사신들은 노리토요가 접대하였으니 얼굴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라 하셨습니까?”

“수양대군 그자는 하루 종일 몸을 단련하기에 여념이 없고, 서책은 거의 읽지를 않는데 어떻게 계책을 논할 정도의 학문을 쌓습니까? 본디 계략이라 함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도 배워야 하지 않습니까.”

다시금 물을 들이켠 소젠은 그 상황을 떠올리면서 몸서리를 쳤다. 수양대군을 몸만 움직일 줄 아는 자로 확실하게 받아들인 날은 열흘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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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이 당도한 지 열흘이 되던 날이었다. 소젠이 어떻게든 수양대군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대낮에 수양대군이 머물던 곳으로 들어왔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고승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지금은 몸을 단련하고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몸을 단련하신다 하셨습니까?”

“몸을 거칠게 움직이지 않으니 좀이 쑤셔서 그렇습니다. 거기 너, 덩치가 큰 너 말이다. 이리 와서 내 손 위에 등을 얹어라.”

“네?”

수양대군은 마당에 있는 돌로 만든 평상 위에 누워서 자세를 잡고, 따라온 시종을 양손 위에 눕게 하였다. 옆에 있던 신숙주라는 역관도 매번 하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무뚝뚝하게 통역을 할 뿐이었다.

솥뚜껑 같은 커다란 손 위에 사람이 누운 것도 신기한데 수양대군의 두꺼운 팔 근육이 부풀어 오르면서 제법 덩치가 있는 시종이 쉽게 움직였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 같은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세상에, 지금 이게 뭐 하는 일입니까! 사람을 가지고 어찌 이런…….”

“의압(벤치프레스)라는 운동이오. 상반신 힘을 기르는 일에 가장 좋지.”

사람 한 명을 사뿐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괴력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움직이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시종을 던지다 시피 옆으로 세워놓았다.

“허어 역시 건장한 남성으로 하여야 하는데 왜국에는 건장한 남성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이래서는 효과가 없겠구나! 용아 어서 나오너라. 내가 널 써서 의압을 하겠노라!”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수양대군도 정신이 나갔지만 안평대군이라는 자도 정신이 나갔다. 방 안에서 서예에 열중하다 말고 밖으로 나오더니만. 아주 자연스럽게 수양대군의 운동기구가 되었다.

“허어, 역시 이래야 몸이 풀린다니까.”

형의 괴력에 몸이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안평대군은 침착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어서 교토로 도망치듯 피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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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호소카와는 입을 벌리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수많은 이들이 스모에 몰두했으며 자신 또한 스모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떠한 자도 그런 힘을 내지는 못했다.

“직접 눈으로 보신 겁니까? 동생이라는 자의 체격 또한 작지는 않을 것이 분명한데요.”

“20관(약 75㎏) 정도 될 법한 자신의 동생을 누운 채로 손 위에 눕히더니 100회를 들었다 내렸다 하더군요. 그러한 용력을 발휘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합니까?”

평생을 수련해 온 리키시(역사 - 力士)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안심이 되었다. 리키시들은 몸을 만드는 일에 여념이 없으며 배움이 깊은 이가 없다. 그러니 수양대군이 폭넓은 지식을 가질 이유는 없으리라.

“과연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엄청난 용력과 최소한의 학식만 갖췄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렇게만 하여도 하늘이 내린 장수임이 분명합니다.”

“수양대군은 마치 벤케이(弁慶 - 무사시보 벤케이)를 닮았더군요. 저러한 무력이면 형을 업신여길 법도 한데 극진히 모시고 있었으니 충심은 그를 능가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려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천부적인 지략을 가지고 자신을 속여 넘기려 한다면? 소젠은 고개를 털면서 애써 부정하였다. 그런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 방법이 없다. 나이도 젊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또한 계책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병사들을 따로 훈련시킬 계획을 마련하고 좋을 대로 행동하게 하면 충분할 것이지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무리 생각이 없는 자라 하여도 교토까지 와서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사방을 돌아다녔다면, 여기서는 일국의 수도이니 몸을 사리리라. 그들의 부하들 또한 적당한 명분을 두어 분리해 두면 관리하기 편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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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 소젠이 순수한 선의가 아니고 염탐하려는 생각으로 신분을 속였는데 내가 가만히 둘 이유가 있는가. 그래서 큼지막한 엿을 14일 동안 다섯 번이나 먹여줬다. 그가 사라진 덕분에 마지막 이동은 일본에서 준비한 배를 이용했지만 상관없었다.

막후의 권력자가 승려로 위장하고 부하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후련하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안평대군과 신숙주는 이미 소젠의 정체를 대략적으로 알아차려서 나에게 어울려 주고 있었다.

“경도(교토) 까지는 얼마나 남았는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낮이면 당도할 것입니다.”

“다행이군. 지금쯤이면 사람이 와야 할 것인데 잠시 기다리고 있지.”

교토 방향에서 가마와 기병들이 달려왔다. 대표자로 보이는 사람이 인사하며 예를 표했고, 나 또한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이 자리까지 나섰다면 누구인지 분명하다. 셋츠부터 우리를 안내하던 호소카와의 가신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을 뵙습니다. 저는 비록 부족한 몸이지만 쇼군을 보좌하여 칸레이(管領 - 관령)의 작위에 있는 호소카와 카츠모토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번 회례사(回禮使)의 정사인 수양대군입니다.”

조선에서는 상황에 따라 덴노를 왕으로 보기도 하고, 쇼군을 왕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집에서는 대접받을 이유가 있다. 그러니 나도 호소카와를 직급에 맞게 영의정으로 대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먼 길을 오시면서 여독이 쌓이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소젠 대사라는 분이 힘을 써주셔서 불편함을 많이 덜게 되었습니다. 아랫것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제 몸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는 말을 하였지만 무덤덤하게 넘어간다. 나를 살피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받아넘기는 것을 보면 나의 행동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했음이 분명하다.

호소카와의 이런저런 말을 들으면서 교토의 풍경을 보니 안평대군이 가져온 그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의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할 말을 해볼까?

“너른 대로와 높다란 탑들을 보니, 명나라에서 보고 온 낙양이 생각납니다.”

“낙양이라 하셨습니까? 하하, 교토의 별명이 라쿠요(洛陽 - 낙양)이지만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입이 째진다. 이 시기까지 일본은 중국 = 당(唐)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온 물건은 당물(唐物)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나라에 집착하고 있던 시대다.

“대군(쇼군)께서 나이가 어리시기에 나라가 혼란할까 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영민한 관령(管領)께서 보좌하신 덕분에 나라에 활기가 넘치는군요.”

“그렇게 말씀하여 주시니 낯을 둘 곳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와 제 동생은 모두 낙양과 장안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경도는 정녕 낙양을 뛰어넘으니 이 또한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대군께서 마음에 들 만한 일을 준비해 놓았으니 한번 보시지요.”

표정 관리 좀 해라. 너희들의 이상향이자 목표인 낙양을 뛰어넘었다고 하니까 좋아죽겠지? 그렇게 교토의 입구에서 잠시 대기하자 멀리서 병사들이 오는데 모두 기마병이다. 대열을 정비해서 좌우로 모이니 숫자가 제법 많다? 한 2,000기는 되려나?

“경도 일대를 지키는 기병들을 불러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조선에서 북방의 맹장들을 데려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말을 자기 몸 다루듯 하는 자들이라 하셨는데, 교토에 있는 동안 우리의 어설픈 기병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역시 호소카와 카츠모토다. 적어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은 챙기니까 상식적이네. 지금까지 내 행동을 보아오고 나를 억제하기 위한 확실한 수를 쓴 것이다.

교토 일대에 있는 기병을 데려와서 가르침을 청한다. 이렇게 하면 여진족들의 몸을 푼다는 핑계로 내가 함부로 나설 방법도 없으며 거절하면 상황이 애매해진다. 그래도 한 번 말이나 해보자.

“훈련을 하면 제 부하들은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근의 산에서 사냥을 할 수도 있습니까?”

“본래 사냥이라 함은 훈련의 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방법으로 훈련을 하시면 충분한 효과가 있겠지요.”

웃는 얼굴로 받아치는 호소카와. 아주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으니 할 말이 없다. 본래 계획은 여진족들을 선단 호위용으로 항구에 배치할 생각이었는데 이런다면 방법이 없네.

“정충렬, 계획이 바뀌었네. 그대들은 잠시 동안 왜국의 기병들을 가르치게.”

“대군 어른을 호위하는 것이 저희의 일입니다. 적어도 저를 비롯한 몇 명은 데리고 가심이 어떠한지요.”

“염려하지 말게나, 내 몸을 가지고 변고를 당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하시면 뜻을 따르겠습니다.”

정충렬도 눈치가 없지는 않으니까 알아서 적당히 훈련하는 척 사냥만 하면서 시간을 때우겠지. 명령을 내리자 여진족들이 쏜살같이 일본인 기병대에게 합류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호소카와가 다시금 감탄한다.

“참으로 정병 중의 정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저런 몸놀림을 보이니 쉽사리 따라오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보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제 부하들이 이러한 곳에 와서 뜻 깊은 일을 하게 되는군요.”

본래 조선의 사신들이 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푹 쉰 다음 쇼군을 만나서 예의를 표한다. 그럴 줄 알고 천천히 움직였는데 호소카와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나왔다.

“이번에 조선에서 직접 오시게 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시일이 지나면 날파리들이 몰려 들어서 눈이 어지러워질까 염려됩니다.”

지금 어소로 향하게 하는 이유는 이놈의 인삼 때문이 분명하다. 권력은 지키시겠다 이거구만. 다른 쿠교(公卿 - 공경, 일본의 주요 귀족 계층)들이 손을 댈까 염려되니 조금 무리한 부탁을 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물론이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였으니 바라던 바요.”

“그러시다면 어소로 향하시지요.”

어소로 들어가서 안내를 받고 잠시 기다리니 오닌의 난을 일으킨 무능한 쇼군이자 문화의 획을 그은 자,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나와서 내 앞에 앉았다. 직급만 따지면 나보다 한 수 위니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일본국의 정이 대장군님을 뵙습니다.”

“반갑소. 천하의 명장이라 하였는데 관복을 입은 모습만 보아도 무위를 짐작할 수 있으니 기쁘오.”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니 정치나 외교를 배우지 못하여 무능력하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온 말에 내 정신이 멍해졌다.

“다름이 아니고 어소의 위에서 조선의 사신들을 보았소. 멀리서 보아도 그대가 타고 있는 말이 빼어나 보였는데. 그 그림을 그릴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언제라도 화공을 보내시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예뻐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걸 이런 중요한 인사자리에서 맨 처음에 대놓고 말한다고? 이건 정치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없는 수준이다. 호소카와를 살짝 째려보자 그 또한 난처하였는지 얼굴을 붉힌다.

“그것참 안 될 일이구려. 그런데 칸레이께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다름이 아니고 조선에서 온 회례사의 부사가 되는 안평대군이라는 분은 서예와 회화에 능하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회화에 대해 논하고자 하시니 자리를 나누심이 어떠하신지요.”

“그렇다면 수양대군과 함께 나라의 일을 논하시는 것이 좋겠소. 이 몸이 아직 미숙하여 실수할까 염려되니 부탁드리겠소.”

17살이면 이 시대에서는 성인으로 인정할 나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없을까. 이러한 중요한 국제 관계에는 모르긴 몰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판단이야 다른 이에게 하여도 배워야 하지 않는가. 이건 호소카와도 답이 없어서 고의적으로 쇼군을 배제한 것이 분명하다.

“쇼군께서 아직 부족함이 많은 저희들을 이렇게 아끼시니 은혜가 따로 없습니다.”

“한 나라를 이렇게 잘 다스리셨으니 누대에 걸친 복을 얻을 것이 분명하구려.”

그런 말을 했지만 이놈도 한통속이다. 쇼군을 잘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나라를 주무르는 쾌락에 빠져 있지. 일본 특유의 음습한 막후(幕後)정치의 정수를 보니까 속이 역겨워 온다.

밖에 나오니 이미 관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예 자기들끼리 해먹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 분명하다. 다른 건물로 들어가서 챙겨온 인삼 상자를 열었다. 다행이도 인삼 화분은 하나도 시들 거나 죽지 않고 버텨내고 있었다.

“조선에서 인삼을 가져왔는데 어떤 물건인지 보고 싶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화분에서 기르고 있는 작은 인삼 10개와 인삼 씨앗 두 되를 가져왔으니 보시오.”

다다미 위로 인삼 화분들과 인삼 씨앗이 차례차례 꺼내진다. 살아 있는 인삼을 처음 본 일본의 대소신료들 모두가 눈이 뚫어져라 인삼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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