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42화 - 근자일본국행(2) >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라도에서 하루 쉰 것을 제외하면 다들 6일 내내 배 위에서 시달렸으니 지쳐있다. 10월의 바다는 본격적인 겨울은 아니지만 파도도 높고 제법 거칠다.
“반갑습니다. 조선에서 오신 분이시니 혹여나 수양대군 님이 아니십니까?”
먼저 내린 신숙주가 직접 통역을 하는데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자는, 아니다, 일단 말에서 내리자. 그냥 훌쩍 뛰어내리니 바닥에서 쿵! 소리가 났다.
“이번 회례사(回禮使)의 정사로 오게 된 수양대군이네.”
“조선에서 오신 분이신데 정말…….”
크지? 그래도 맞이하는 입장이니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데 목 아프겠다. 신장이 한 155㎝ 정도 되려나? 차림새를 보니 다이묘가 보낸 가신이나 친척 같아 보이는데 조선 기준으로 평균적인 신장이다.
“저는 오우치 노리히로. 오우치의 가독(가문 대표)입니다.”
“대내씨라 함은 이전에 백제의 혈통을 받은 가문이 아닌가?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몰려 있으니 아국에서 온 사람들이 내릴 자리가 없어서 불편하네. 자리를 마련해 주겠나?”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들 무엇 하고 있느냐! 손님들을 맞이하는데 이런 소란을 보이면 되겠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오우치라는 거대 세력의 대표라고 하기 딱 알맞은 모습이다. 그런데 미안해. 혼란은 계속될 거야.
“이제 내리셔도 좋습니다!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너희들이 먼저 내려서 다른 이들을 보호하여라!”
“네! 대군 어른!”
다들 처음 내리는 사람이 내 동생인 안평대군이라 생각하겠지? 그래서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보려고 사방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 있는데 충격과 공포나 처먹어라! 작은 왜놈들아.
“땅이다! 왜국의 땅은 물에 떠 있는 것인가 걱정했었다고!”
“나 그냥 뛰어내릴래! 나무가 튼튼하니 버틸 것이 분명해!”
여진족들은 얼마나 배 위에서 시달렸는지 널빤지를 타고 질서정연하게 내리지 않고 말에 탄 채로 땅을 향해 바로 뛰어내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수십 명의 기마병들이 배에서 바로 뛰어내리자 화들짝 놀랐지만 여진족들의 차림새를 보고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저 복장은 도이가 아닌가!”
“조선에서 저렇게 호위 병력을 보내나? 그런데 모피로 만든 웃옷을 입었네?”
“저 모피 진짜 비싸겠는데 한 조각만 받을 수 없나?”
말은 잘 모르지만 듣기만 해도 어떤 분위기인지는 안다. 예상은 했지만 몰려나온 일본인들 중에는 다른 영지에서 몰래 보내온 첩자들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였다. 첩자들은 여진족들을 보고 정체를 알아차려 – 당연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니까 - 안색이 창백해져서 뒤로 물러났지만. 보통 일본인들은 모피를 휘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부자들이라 생각해 환호하고 있었다.
“지금 뒤로 물러난 놈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더냐!”
내가 뒤를 빤히 바라보자 노리히로가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뒤로 뛰어가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신숙주는 내 주변에 도열한 여진족들과 당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보면서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저기 대군 어른, 지금 이게 무슨…….”
“항구에 쥐들이 많아서 겁을 주었다네. 겁을 주면 쥐들은 달아나지 않는가.”
잡다한 다이묘들이 보낸 자질구레한 놈들이 정리되고 소란도 정리되자 회례사 인원들이 모두 뭍으로 내려왔다. 안평대군은 벌써부터 해협을 보면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으니, 시간이 나면 신나서 그림을 그리겠군.
“근방에 쥐가 조금 많구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 쥐를 쫓아주시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조선에서 오신 분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닐세, 조선에서 온 이들이 맞으며 내가 설득하여 조선에 귀부시킨 북방의 야인들이라네. 많이 피곤할 것이니 당분간 아무런 말도 나누지 말게.”
지금 얘들을 함부로 건드리면 진짜 큰일 난다. 다들 생소한 환경에서 극한의 스트레스를 오랜 시간 겪었으니까.
“머나먼 길을 오신 분들이니 여독을 푸셔야 할 것입니다. 연회를 준비하였으니 다들 짐을 놓으시고 함께하심이 어떠하신지요.”
“아주 좋군. 그런데 저기 있는 승려들은 어떤 분들이오?”
“조선에서 오신 손님들을 뵈러 교토에 있는 각 사찰에서 이름난 대사들께서 오셨습니다. 연회를 준비하는 동안 만나보심이 어떠하신지요.”
“아주 좋소이다. 아국에서는 불도를 걷는 이가 적으나, 이곳에서 고명한 분들의 법명(法名 - 불교에 귀의한 자의 이름)을 알며 인연을 맺고 싶던 참이었소.”
이름난 대사나 고명한 승려라고 해봤자 여기는 일본이다. 일본의 특징은 출가한 놈이 사람 죽이는 장수가 되고, 아들에게 권력 물려주려고 출가한 뒤, 배후에서 가문을 주물럭거리니 무조건 안심할 놈들은 아니지. 그렇게 소개를 받다 보니 아는 이름이 나왔다.
“소승은 교토 난젠지에서 불도를 걷고 있는 소젠이라 합니다.”
“소젠이라 하셨소? 덕이 높은 분 같으시구려.”
“조선에서 오신 대군 어른께서도 불법에 능하신 분이시며 학식이 깊다 하셨으니 이 늙은이에게 영광일 뿐입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늘어놓는 입담이 부럽다. 내가 많이 알고 있는 전국시대 이전 일본의 인물은 열 명 정도인데 그중 한 명이 여기에 있었다.
법명만 말해서 자신을 속이고 일행에 합류한 속셈이 분명하다. 아주 자연스럽게 고명한 승려의 흉내를 내고 있는데 잘못하면 속아 넘어갔겠지. 혹시나 해서 데려온 사람인데 역시 쓸모가 있었다.
“그렇소? 마침 고명한 승려가 한 분 계시니 소개해 드리고 싶소. 신미대사 계시오? 불법은 나라를 가리지 않으니 저들과 함께함이 어떻겠소?”
사람들 사이에 혼자 떨어져 있던 승려인 신미가 천천히 걸어서 나에게 다가온다.
“대군 어른께서 소개해 주시니 반가울 뿐입니다. 하온데 여기서 범어(산스크리트어)를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는지요. 이 미천한 승려를 위하여 역관을 대동함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 시대 명승들의 소양은 산스크리트어다. 천주교 신부들 중 학식이 깊은 사람들이 라틴어를 심도 있게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경전은 산스크리트어가 필수니까. 신미대사가 산스크리트어로 인사말을 전하니 반갑게 답하는 승려가 있었다.
- 저는 할 줄 압니다. 조선에서 오신 분이 덕이 깊으시군요.
- 그렇습니까? 부처님의 자비하심을 배우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도 산스크리트어는 어깨너머로 대충 배워서 해석은 못 하지만, 표정을 보니 대충 이런 말인 것 같다. 신미대사는 재주가 뛰어나서 원래 역사에서는 몇 년 뒤부터 불경을 언해(諺解)하는 일을 도맡아 한 사람이니 당연히 능숙하다.
서로 산스크리트어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 합장을 하였다. 반면 승려들 사이에 끼어 있는 적당히 출가하여 시선만 돌리려고 한 자들. 특히 가장 최근에 출가했을 야마나 소젠은 우물쭈물하며 대화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고승들이 머나먼 곳에 오다니. 아국도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만천하에 퍼지면 좋을 것인데.”
“조, 조선에서 오신 승려분이 학식이 대단하시군요.”
그 어색한 말을 들으니 기억났다. 오우치 노리히로는 지금 야마나 소젠과 사돈 관계지? 그래서인지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신미대사를 비롯한 승려들에게 가 있었다. 신미대사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소젠이 계속 나를 염탐하려 수를 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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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의 세력이 강대한 것을 입증하듯이 연회장도 거대하게 마련했다. 아예 인근에 있는 저택의 마당 전체에 주안상이 차려졌고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떼로 몰려왔다. 그리고 나와 안평대군은 지체 높은 신분이어서 가문의 여식이 왔나 보다.
“술은 직접 따라 마시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러니 피해주시겠소?”
“귀하신 분인데 제가 따를 기회를 주십시오.”
“어허, 아니 된다 하지 않았소.”
체격이 작은 건 그렇다 쳐도, 나는 도저히 이 시대 일본의 풍습을 이해할 수 없다. 눈썹을 빡빡 밀고 얼굴을 새하얗게 칠한 다음, 이마빡에 점 두 개를 찍고 눈썹이란다. 안평대군은 이미 공포로 얼굴이 물들어 있었다.
“아니 된다 하지 않았소. 왕족인데 함부로 술을 따르시면 훗날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하오!”
“그렇다면 제 얼굴이라도 담아두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이러면서 미소를 짓는데 덧니는 이 시대에 많으니 그렇다 쳐도! 아주 새카맣게 물들인 흑치야! 얼굴에 담다 못해 트라우마가 되겠다! 생각을 가다듬으려 주안상을 보니 생선도 있고 전골도 있었다.
“이런 진귀한 음식들이라니. 고생이 참으로 많았겠소.”
“아닙니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니 산의 진귀한 것들을 많이 준비하였습니다. 산고래 고기로 전골을 만들었으니 즐겨주십시오.”
“다들 대내씨가 차린 음식을 들도록 하게! 머나먼 땅에 건너와 배탈이 날지도 모르니 과식은 금물일세!”
아직 조선에는 냄비가 없는데 여기서 보니 반갑네. 냄비에 담겨 있는 산고래가 뭔지 알겠다. 고기의 형태를 보니 멧돼지 고기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지만 오우치는 조선과 친해서 나름 준비했나 보다.
한 숟갈 떠서 먹으니 비릿하고 텁텁한 냄새가 올라와서 고기가 잘못되었나 싶었다. 안평대군도 신숙주도 한 입 먹더니만 솟아오르는 냄새를 느꼈는지 표정이 안 좋아진다.
“조선 분들은 고기를 즐겨 드시는데 후추를 곁들여 드심은 어떠하신지요.”
“멧돼지 고기는 질길 뿐이지 이런 향이 나지 않을 것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실은 이 멧돼지는 잡는 방법을 몰라 매달아 놓고 망치로 두들겨 패서 잡느라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후추를 넣어 드심이 어떠하신지요.”
일본인들은 600년대부터 지금까지 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 고기라고 해봤자 생선과 멧돼지, 토끼 그리고 들오리 정도가 전부겠지. 생선이야 피를 덜 빼도 먹을 수 있고 토끼나 오리는 작으니 피도 적고 오히려 풍미를 내려고 피를 빼지 않기도 하지.
하지만 거대한 동물은 피 빼기를 하지 않으면 피비린내는 물론이고 누린내가 나면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데도 후추를 넣어서 피 빼기를 안 한 고기 향을 살리겠다고? 평소 같으면 참겠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울상을 짓고 있다.
“아니, 연회라 하였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멧돼지 고기는 질겨서 그렇지 맛이 좋은데 왜국의 멧돼지는 이렇게 맛이 없나?”
사신행에 참가한 자들은 아무리 잡부라고 해도 나름 잘사는 집의 사람들이다. 당연히 내가 명에서 수입한 돼지의 맛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고, 돼지고기 맛이 좋아져서 값싸진 멧돼지 고기를 먹은 자들도 많지.
하지만 불만을 표시하는 정도면 양반이다. 저 멀리 있는 주안상에서는 짜증과 분노가 섞인 여진족의 말이 들려왔다.
“우리도 야만인이라 생각했는데 고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왜인들은 뭐 하는 놈들이야?”
“술도 맹숭맹숭하게 맛대가리 없는 놈이고. 저기 대군 어른과 같은 식사를 하니 이해는 하겠지만.”
“우리가 그냥 나가서 사냥해도 이거보다 잘 만들겠다!”
말투만 들어도 여진족들의 분노를 알겠다. 북방에서는 모피를 팔아 돈을 제법 만진 자들이고, 북방에 파견된 관리들이 일을 마친 다음에 기운을 북돋워 준다고 돼지를 많이 잡아서 먹였다 했었지.
“용아. 네 입맛에는 이것이 맞더냐?”
“냄새가 심합니다만 왜인들은 고기요리를 알지 못하고 먹지도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내씨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방법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방법을 모르는 이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당연하신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 동생이 동의했구나? 고기를 먹는 방법을 모르면 가르쳐야지.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잡담을 나누며 비위를 맞추던 오우치 가문의 남자 가신이 화들짝 놀란다.
“무엇인가 불편한 것이 있습니까?”
“차려주신 것은 좋으나 고기의 질이 좋지 않아서 말이오.”
“그렇습니까? 하오나 저희도 고기의 맛을 모르는지라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어허, 부족한 것은 채우면 그만이 아니겠소. 정충렬! 지금 북방에서 온 이들은 어떠한가!”
말이 끝나기가 여진족들은 이미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리고 자기들끼리 말을 나눈다. 이미 내가 할 짓을 알아차린 신숙주는 반쯤 포기한 듯이 속삭인다.
“대군 어른, 무슨 일인지는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행한 일에 대가를 주셔야 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게. 야인들이 모피를 잔뜩 가져왔으니 그걸 조금 풀면 되겠지.”
그사이에 정충렬을 시작으로 한 여진족들은 답을 내놨다. 이 답이 안 나올 리가 없지.
“제대로 된 고기를 먹고 싶습니다!”
“그렇군. 짐 안에 있는 모피를 적당히 가져오게나.”
신숙주는 모두 다 포기한 통역기계가 되었다. 그렇다 해도 오우치 가문이 나선 일에 ‘너희들 대접이 시원치 않다!’라고 대놓고 말하면 형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니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아야지. 적당한 핑계가 뭘까? 에이, 그냥 대충 말해!
“저희의 대접이 부족하였다면 제가 잘못하였으니 벌을 받겠습니다.”
“아니라네. 그저 근손실이 염려되니 직접 나설 것이네!”
“그렇다! 우리는 올바른 고기를 먹을 권리가 있다!”
“삼시 세끼 질 좋은 고기를!”
삽시간에 여진족들은 연회를 위해 억지로 입은 관복을 적당한 곳에서 훌러덩 벗어 던지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사냥을 나가는데 갑옷을 챙겨갈 이유가 없다. 나도 방 안으로 들어가서 사냥을 위한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고.
“근손실이 무슨 질병입니까?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인지 영문을 알 길이 없습니다.”
“사내대장부라면 피해야 할 것이며 누구나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네. 오늘 사냥을 위해 이 산을 빌릴 것인데 이 정도 모피면 충분하나?”
모피를 잔뜩 얹어주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이제 사냥의 시간이다! 사신행 첫날은 온몸의 근육을 풀기 위한 사냥으로 시작한다.
“가자! 우리가 육백 명이니 멧돼지 서른 마리만 잡으면 어떠한가!”
“멧돼지뿐이겠습니까!? 사슴도 있고 오소리도 있고! 하온데 범이 있습니까?”
“왜국에 범은 없다네! 염려하지 말게!”
세상에 어느 누가 진귀한 모피를 주면서 하루 동안 산을 빌려 사냥만 하겠다고 하는가. 그게 바로 나 수양대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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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승려들의 모임의 주축은 조선에서 온 승려 신미대사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처음에 승려라고 말했던 야마나 소젠 또한 그 자리에 억지로 끼어 있었다. 억지로 승려들이 모인 자리에서 빠져나오면 이상하게 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라는 자는 제대로 된 승려이니 어쩔 방도가 없구나.’
자신을 처음 소개하였을 때 거짓으로 고승이라 말한 것이 후회되었다. 차라리 늦은 나이에 출가하였다 하면 수양대군이 의심할지는 몰라도 이런 의미없는 자리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승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숨만 나오고 있었다.
- 실은 선왕께서 계실 적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원히 쇠하는 줄 알았습니다.
- 그렇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시는 것인지요?
- 제가 어릴 적에 종단이 2개로 폐합되었고, 사찰이 200여 개에서 36개로 줄어들었습니다.
범어로 잘도 대화를 나눈다. 뱃속에 들어갈 것도 없으니 천천히 주변을 거닐면서 풍경을 돌아보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수십 명이 몰려다니는 소리이다. 주변에 서 있는 병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서 물어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누가 이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야?”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조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란이라?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가니. 사돈인 노리히로가 급하게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나서던 참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조선의 대군이 갑자기 고기가 맛이 없다면서 산으로 사람들을 끌고 나갔습니다!”
“그게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근손실(筋損失)인지 뭔지가 염려된다면서 갑자기 나서기에 말리지도 못했다는군요.”
조선의 대군이 무슨 지병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런데 고기와 근손실이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근손실은 또 뭐야?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있다던가.”
“모피를 잔뜩 주더니만 산을 하루만 빌려서 도이들을 데리고 사냥을 한다 하였습니다. 무슨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기에 확인하러 가려던 참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기가 맛이 없다고 핑계를 대면서 갑자기 도이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서? 조선인들이 고기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는 자주 했는데 이런 파천황(破天荒)같은 행보를 보이는 것은 무슨 의도가 있단 말인가?
“나도 따라나서겠네. 말을 한 마리 주게.”
“승복을 입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빨리!”
승려의 옷을 입고 있지만 답이 없다. 어떤 미친 짓을 하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겠다. 미친 것도 정도가 있지 정말 산으로 사냥을 하러 갔을까. 혹시나 조선의 왕이 미쳐서 침략의 선봉장으로 자신의 동생을 보낸 것은 아닐까.
“이얏호! 멧돼지가 지천에 널려 있구나!”
말을 타고 한참 따라가니 멀리서 조선말로 된 환호성이 들려왔다. 거침없이 말을 달리는지 말 발자국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산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대군이나 되는 자이니 무엇인가 수를 쓸 것이다. 단순하고 무식하게 사냥만 할 이유는 없다.
-뀌에에에에에엑!
“잡았다 요놈!”
갑자기 수풀이 요동치면서 멧돼지가 쏜살같이 도망치고, 그 뒤에서 몽둥이라고 봐야 할 큼지막한 화살이 날아와서 멧돼지의 몸통을 말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그러더니만 그 아름답고 거대한 말 위에 탄 조선의 대군이 나타났다.
“고승 소젠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그리고 대내씨의 가독 되시는 분이 아니신지요.”
정말 사냥을 하고 있었다. 저 위에서부터 달려 내려오는 도이들 대부분이 사냥감을 제각기 말 뒤에 올려놓고 돌아오고 있으니 정말로 사냥만 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