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39화 - 인삼의 쓴맛 >
“그게 무슨 말이냐. 아국에서 인삼을 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는지 모른다는 말이냐.”
“물론이옵니다. 명국에서 서책을 가져오고 8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인삼의 소출이 가능하였으며 지금도 작황이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을 왜인들이 쉽게 기르겠습니까?”
인삼 수출로 은자 기준 30만 냥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것이 맞지만 그 과정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나마 인삼을 많이 채취해 봐서 사질토에서 인삼이 잘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고, 연작이 불가능해서 삼림이 우거진 언덕을 개간해서 퇴비를 뿌려 인삼밭으로 삼으니까.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다. 만에 하나라도 침입한 왜구들이 인삼밭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말 그대로 밭에서 은을 캐는 일이니 벌떼같이 몰려들 것이 분명하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지금도 인삼의 소출이 불안정하며, 한번 인삼을 길렀던 곳에는 인삼을 다시 심을 수 없으니 왜인들은 헛고생을 하다 지치겠구나.”
“왜국의 영주들이 인삼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씨앗만을 받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인들은 신의가 없고 욕심이 많으며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법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더냐. 서로 속이고 헐뜯으며 인삼을 기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형님의 말을 들으니 이게 그냥 일본의 특성 같다. 나는 전국시대 이전의 일본이 어느 정도는 눈치가 있고 신의가 있는 정상적인 국가라고 기대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냥 포기해야겠다.
“왜는 간사하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하니 서로 헐뜯으면서 지내도록 인삼을 보내심이 어떠하십니까.”
“하지만 훗날의 일을 생각하여 보거라. 저들도 싸운다 하지만 수십 년을 내리 싸우겠느냐. 그들에게도 족리(足利 - 무로마치 막부)씨라는 엄연한 왕이 있다.”
그런 말을 하면서 형님은 잠시 생각을 하고 계셨다. ‘아뇨 앞으로 12년 뒤부터 100년 넘게 죽어라 싸우는데요.’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어느 누가 이 말을 믿어줄까?
“비록 족리의정(足利義政 - 아시카가 요시마사)이 어린 왕이라 하여도 10년이 지나면 충분히 장성할 것이다. 성년이 되면 질서를 정립하고 인삼의 재배법을 퍼뜨릴까 염려되는구나.”
“하오나 왜국은 각지에 수호(守護)라 하는 지방관으로 어설프게 통치하지 않사옵니까.”
“오히려 제각각 움직이는 자들이니 이문을 위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논할까 두렵다.”
형님의 걱정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시대의 조선인이면 오닌의 난의 원인과 경과를 예상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까 일본에서 기껏해야 내전이나 몇 번 일어나고 끝난다 생각하겠지. 안평대군도 같은 식으로 예측했는지 입을 열었다.
“주상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둘째 형님께서 말씀하신 계책을 행하면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훗날이 되면 인삼을 너도나도 기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국이 아니고 왜 또한 인삼을 기르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서로 인삼의 가격을 낮춰 이문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 염려되는구나.”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지만 형님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일본에서는 인삼이 자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인삼의 유사품도 만들어질 수 없는 기후이다.
“분명 주상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하오나 아국의 인삼이 어찌하여 고려인삼(高麗人蔘)이라고 불리며 천하의 명약으로 대접을 받는 것입니까.”
“약효가 가장 뛰어나기에 그러한 것이지. 북방의 야인이 거하는 곳에서도 인삼은 나며 명국에서도 인삼은 나지만 아국의 인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밭에서 기르는 삼조차도 북방의 인삼보다는 우수하다.”
인삼은 한반도의 기후에 최적화되었는지 한반도산이 가장 효험이 좋다. 만주 인삼? 같은 종이지만 겨울이 너무 추워서 그런지 약효가 절반으로 줄어들어서 양으로 승부하는 저질 제품이다.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서인지 종자가 같은 종 내부에서도 특징이 조금 다른 편이고.
원래 역사에서 누르하치가 인삼 무역으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유사품인 만주삼조차 품귀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지속적인 채취로 산의 인삼이 고갈되고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인삼을 캘 여력도 없어서 인삼 가격이 폭등했으니까. 재배? 훗날의 일이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오면 왜국에서 기르는 삼의 효험은 아국에서 기르는 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낮을 것입니다. 제가 왜국의 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기후의 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하다고?”
“제가 장안에서 시장을 거닐 적에 약재상을 들른 적이 있습니다. 명국 각지에서도 인삼이 나는데 모두 모양이 다르더군요.”
형님이 신중하게 날 바라본다. 실제로는 장안에서 죽절삼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적당히 과장을 섞자. 어차피 내가 말하는 정보가 거짓말도 아니잖아? 500년 뒤에야 밝혀질 일일 뿐이지.
“명국에도 인삼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약효가 그렇게 다르단 말이더냐?”
“아국의 인삼이 으뜸이요, 그다음은 전칠삼(田七蔘)이라 하는 토란 모양의 삼이요. 마지막이 운남에서 나는 죽절삼(竹節蔘) 이었습니다. 왜국에서 삼을 길러도 운남과 같이 습하고 따듯한 기후 탓에 죽절삼이 나올 것입니다.”
“종자가 같은데 다른 삼이 나온다는 말이더냐? 약효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있느냐.”
기후가 같으면 종자를 예상할 수 있다. 현대라면 사람을 설득하기에 부족한 논리지만 이 시대에는 충분히 통할 논리이고 형님이 믿어주시니까 설득력이 높다.
“삼이긴 한데 사삼(沙蔘 - 더덕)보다 못하다 합니다.”
“뭐라? 사삼은 산아에 흔한 잡초인데 인삼의 씨를 심어도 그리된단 말이냐?”
“그러하니 값 또한 사삼과 비슷하였습니다. 윗몸은 인삼과 비슷하지만 뿌리는 울퉁불퉁하여 대나무 마디 같은 삼이었습니다. 왜국에서 애써서 길러 보았자 이러한 삼이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죽절삼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녀석이다. 현대에 있을 적에 막냇동생이 사기를 당했거든.
동생은 일본 여행을 즐기는 녀석인데,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아버지 환갑선물이라고 산삼주를 사 왔었다. 하지만 그건 산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모습이었고, 결국 아버지는 아는 약재상에게 일본산 산삼주를 보여줬었다.
- 일본 죽절삼이네요? 50년 넘게 자란 녀석은 맞지만 약효는 5년 묵은 더덕보다 못합니다. 그냥 일본에서 나는 인삼은 약효가 없다고 보시면 되니 그냥 더덕을 사서 드십쇼. -
동생은 현실을 부정하면서 인삼주가 아닌 죽절삼주를 잔뜩 마시고 담겨 있던 죽절삼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하지만 얼마나 효능이 없던지 어마어마한 숙취와 구토에 시달리면서 일주일 동안 뻗어버렸다.
나도 마셔봤지만 약간의 쓴맛만 올라오고 인삼이 발만 담근 수준의 밋밋한 인삼향이 느껴졌다. 애써 길러도 고산지대가 아니면 저런 녀석이나 튀어나오는 것이 일본의 기후이다.
“그것참 우습구나. 애써 길러보았자 잡초보다 못한 인삼이 된다 하였느냐?”
“오히려 잡초보다 못할지도 모릅니다. 왜국은 운남보다 습하고 여름이 길어 더욱 약효가 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형님의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저 또한 명국에 있어보았지만 그러한 것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인삼이 저렇게 기후를 따진다면 주어도 왜국에서 이득을 거둘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일본은 바보가 아니었다. 훗날에는 산간지방을 이용해 인삼을 길렀지만 약효는 형편없이 떨어져서 미국산 화기삼을 수입했지. 형님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는지 다시금 신중하게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하여도 왜국에 인삼을 줄 이유는 없다. 인삼이 왜국에 넘어가 보았자 그들은 귀중한 물건이라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저 서로를 이간질할 목적만 있으면 아니 된다.”
“그렇다 하여도 아무런 값어치를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다. 아국이면 몰라도 왜에서는 푼돈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왜인들은 모를 것이니 염려하고 의심할 것이 분명하다.”
나도 놓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인삼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걸 재배할 밑바탕을 깔아준다면서 생인삼과 씨앗을 준다면? 누가 봐도 의심할 거다.
“만약 왜에서 아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면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북방에서 변고가 벌어졌는데 이를 도우면 모를까. 너무 과한 성의는 의심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인삼은 그만큼 귀한 물건이니 함부로 보낼 수는 없구나.”
“제 생각이 너무나 짧았습니다. 한낱 이득을 위하여 너무 허술한 방책을 생각하였습니다.
형님의 말을 듣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생각해 보면 역시 나는 왕의 재능이 없는 현대인 기반의 어중간한 조선인이라니까.
“그러한 좋은 수단을 생각하였으니 가꿔 나가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시기가 되었는데 인원을 선출하는 동안에 계책을 마련해 보겠다.”
“통신사라 하심은 왜와의 통교를 위한 것입니까?”
“그렇다. 이번에도 너를 보내려 하였는데. 왜국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니 네 체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되는구나.”
다시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온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향이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전국시대로 망가지고, 이후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변질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작은 기회를 잡았다고 이렇게 나서나?
“나라의 일이라 함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수양대군은 어서 사복시(司僕寺)에 가서 소를 한 마리 도둑질하여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소도둑의 표정 같구나.”
“소도둑이라니 주상전하께서 너무나 가혹하신 말씀을 하십니다.”
이건 내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지어서 하신 농담이지. 형님은 웃으면서 내 몸을 훑어보았다.
“수양대군의 체격을 보아하니 소도둑도 아니고 사복시를 통째로 뜯어갈지도 몰라 염려되는구나. 어서 소를 한 마리 훔쳐가거라.”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웃긴 이야기지만 어명은 어명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몇 달 뒤에는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나라를 도둑질하려는 놈이 소를 도둑질. 잠깐? 영의정 자리도 도둑질한 놈인데 장군 자리를 도둑질하지 못하겠어?
“주상전하께 아뢰옵니다. 좋은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계책이라?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냐.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적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더구나.”
구리, 물소의 뿔, 유황의 공통점은? 무기를 만드는 일에 쓰인다. 그리고 나를 누가 지략가라 생각하겠는가? 몸이 흉기나 다름없는 장군이라 생각하겠지. 여기에 조금 무식하고 난폭한 모습을 보인다면?
“제가 소도둑 같다 하였는데 장수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까?”
“어허, 소를 훔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북방을 책임지는 장수의 모습을 훔친다, 그런 말이더냐? 왜국에서는 아국의 형편을 정확히 모르니 통할 법도 하구나.”
“그렇습니다, 저는 주상전하께 전권을 위임받아 북방의 적들을 물리치는 장수라 하면 될 것입니다.”
봉건제인 현재 일본에서는 통할 계획이 분명하다. 이놈들은 막후에서 음습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권위와 권력을 분리하기를 좋아하니까. 나는 지금부터 북방을 호령하는 장군이다.
인삼을 팔아치운 일? 내가 군자금이 부족해서 팔았다. 인삼 씨앗을 기르라고 주는 것? 지속적인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다. 아무 생각이 없고 몽고를 패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을 하면 다들 설득 당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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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8월. 대마도에서는 아직도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조선에서 온 사신들은 평소처럼 서계(書契)만 내주고 돌아가질 않았다. 지금도 신숙주라는 자를 시작으로 한 조선 사신단은 방 하나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가신들이 모인 방 안은 침울함이 가득 차 있었다. 조금만 상황이 좋았다면 칼춤을 춰서 가신들의 목을 베었을 것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다.
“주변 놈들이 모두 발작하고 있는데 이제는 조선까지 이런단 말이냐?”
“조선에서 저렇게 강압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저리도 말을 잘하는 자가 같이 왔다면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서계의 내용은 ‘한양에서 직접 약조를 논할 것이니 한양으로 가신을 보내 협상을 진행하라.’이었다. 조선에서 거절 통보만 보낼 줄 알았는데 애꿎은 자신들을 끌고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시게모토는 무릎을 치면서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이유를 알았다.
“오우치 놈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차렸겠지.”
“차라리 지금 조선에게 빌붙어서 이득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삼은 그야말로 천금과 같은 물건입니다. 중계를 통한 소득이라도 제대로 얻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본래 쓰시마는 쇼니씨(少弐氏)의 영지라는 것을 잊었나? 조선 놈들은 위에 머리가 어떻게 변하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몸뚱이만 제대로 돌아가면 충분해! 우리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아!”
시게모토는 고개를 박고 있는 사다쿠니를 보면서 화를 내려다가 참았다. 어디까지나 그놈의 인삼이 문제였다. 적당한 재물은 복을 불러오지만 지나친 재물은 화를 일으킨다는 속담이 딱 맞아떨어지는 물건이 인삼이었다.
자신이 다이묘직을 막 물려받아 바쁘게 지내던 작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사다쿠니는 다른 가신들과 함께 중계무역을 담당했는데 동래에서 인삼을 사들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갔다.
“히코시치(소 사다쿠니의 아명) 이 멍청한 놈아! 네놈이 인삼만 함부로 사들이지 않았어도! 아니, 한 번이야 이해는 한다만 세 번이야! 세 번!”
“그렇다 하여도 인삼이 이렇게 귀한 물건일지는 몰랐습니다.”
“오냐, 교고쿠(京極 - 현 시마네 현 동부 일대)에, 아소(阿蘇 - 현 구마모토 현)에, 머나먼 에치고(越後 - 현 니가타 현) 촌놈들도 이 일을 알겠구나.”
가신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을 대표하여 사다쿠니가 욕을 먹을 뿐이지 같은 실책을 저지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인삼을 너무 싼 가격에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