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96화 (96/573)

< 2장 35화 - 노동으로 시작되는 근면한 생활 >

“그렇지, 그렇고말고. 삼천 리를 채우기 위하여 억지로 지방을 돌아가며 유배 길을 나서는 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보행기 위에서라면 오천 리라도 편한 길이니 더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님은 징역형의 장점을 모두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실 황희나 맹사성 같은 사례만 보아도 세종대왕님은 죄를 지은 신하를 죽어라 일하게 한다. 그걸 범죄자로 확대한 개념이라 이해하신 것이 분명하다.

“도형과 달리 몸이 쉬이 상하지도 않겠구나.”

“징역형은 20년이건 30년이건 마음대로 늘릴 수 있습니다. 그저 군사를 충분히 두어 관리들에게 관할하게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 유배를 보낸 이를 하나하나 마음에 두었다가 되새기느라 바빴는데. 이렇게 하니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서한만 있으면 되겠구나. 그렇다면 무엇을 하면 좋을 것 같더냐.”

철저한 식단관리와 생활관리. 죽지 못하는 수준의 노역이 아닌 지속 가능한 수준의 인간 동력 활용. 이 얼마나 훌륭한 방침인가?

“한곳에서만 행하는 일은 실로 많습니다. 진가루(밀가루)를 빻거나, 종이를 만드는 일에도 쓸 수 있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일이라?”

“종이를 만드는 일이야 힘이 들어가는 고해(叩解 - 두드려서 섬유를 분해함) 작업을 보행기의 반대편에 맷돌을 두어 힘을 쓰게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뭔가 세종대왕님이 불만이 있는 표정이다. 왜 저러시지?

“부족하구나. 사람 수백을 한곳에 가두어 일을 행하는데 마땅히 고을처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다른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니라.”

생각해 보자. 아예 통 크게 나가는 것은 어떨까. 그렇지 않아도 전국의 관아에서 초석전을 관리하기 힘들다고 서찰이 올라왔었지. 그렇다면 초석전도 만들자.

“형무소를 고을 인근에 만들 수 있다면 초석전을 옮겨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초석전이라? 초석전은 악취가 나고 계속 사람이 관리하여 원성이 많다 들었다. 이러한 일을 형무소에서 하면 좋을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나아가 보자면 닭을 기르면 어떠한지요. 닭은 본디 잔반을 먹는데 형무소에서 나는 잔반으로도 충분한 양을 기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입신체비를 배운다는 사람 중에는 닭 가슴살을 절육시기에 먹는 자들이 늘어나니까. 가슴이나 다리는 말리고 훈제해서 팔면 되겠고 나머지는 잡탕을 끓이라 하지.

“닭이라? 양계라 함은 너른 뜰에서 행해야 하는데 설마 우리에 가둬놓고 기르는 것을 할 작정이냐.”

“그렇습니다. 그 아래의 닭의 분변과 섞인 흙을 초석전을 만드는 일에 사용하면 변소의 흙과 비슷하게 효험이 좋을 것입니다.”

“죄인들이 고생을 많이, 아니지. 고생이 아니지 않느냐. 도형과 비교하면 지극한 은혜나 다름없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지극한 은혜라. 맞는 말이다. 조금 더 임금님의 성은을 받아들이면서 범죄를 방지하게 다른 제도도 끼워 넣자.

“사람이 다시금 죄를 짓지 않게 하려면 노동만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보행기는 한 시진만 돌리게 하고 다른 상황에는 공인(工人)에게 일을 배우게 하시옵소서.”

“공인이라. 그러고 보니 나라에 공인이 부족하구나.”

“처음에는 단순한 일만 가능하오나 공인들의 가르침을 몇 년간 받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얻을 것입니다.”

왜 현대에도 이런 사람 많아, 진짜 개심해서 묵묵히 범죄에 손 안 대고 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 시대에는 그런 사람의 비율이 훨씬 많겠지. 기술직이 현대보다 훨씬 적으니까.

“바람직한 일이다. 칠반천역(七般賤役)이 아니더라도 공인 또한 배움이 힘들어 행하지 못하는 자가 넘쳐났는데 공인들의 수도 늘어나겠구나.”

“이러한 좋은 제도가 있는데도 계속 죄를 저지르는 자가 있다면 엄벌에 처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황희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조용히 퇴청하였고 우리는 아예 주안상을 차려놓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사람이 한곳에만 갇혀 있으면 너무나 고역이지 않느냐.”

“가끔 바깥바람을 쐬게 해야 합니다. 행실이 올바른 자, 노동을 성실히 한 자는 외부에서 도로를 닦는 일을 비롯한 토목을 행하며 바깥 공기를 쐬면 좋을 것입니다.”

“바깥 공기라. 분명 도형에 속하는 일이니 이 경우에는 형기(刑期)를 빠르게 줄여야 하겠구나.”

좋은 말씀. 도로 공사나 하천 공사의 경우에는 하루 임금이 3~4되에 이르니 노임을 주지는 않더라도 1일 노동으로 2~3일을 벌충하게 해야지.

“혹여나 몸이 상한다면 어찌할 생각이더냐.”

“의원은 한 명 정도만 두되 의과(醫科)의 복시에 낙방한 이를 보조로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죄수가 병을 앓으면 은혜를 다시 입은 것이니 형은 줄어들지 않아야 하겠지요.”

함부로 죽으려고? 그게 될 리가 있어? 의과 떨어졌다고 의원 못 다는 현대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의과가 합격증이자 관직 진출 자격이지 초시만 붙어도 명의 소리 들으니까.

“그렇다면 의과의 수준도 나날이 발전할 것이니라. 그렇지 않아도 군의(軍醫)를 많이 두려 하였는데 잘 되었구나. 주상께 율관과 더불어 의관도 증설하라 말씀을 드려야야겠다.”

“하오나 환갑이 넘은 이가 범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들은 서적의 필사를 비롯한 인력이 필요한 일에 두루 쓰일 것이다. 환갑이 된다고 유배의 기나긴 길이 없어지느냐? 산천을 걷지 않는 것 자체가 은혜니라.”

세종대왕님이 대차게 웃으시는 것을 보면 개념 자체가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환갑 다 된 노인이라서 노동 못 해? 그 나이에도 범죄를 저지르면 백이면 백 사대부일 것이니 필사를 시키면 되겠군!

더 이상의 유배는 없다. 잘나가는 놈은 호의호식하면서 지방관이 감싸주고. 찍힌 사람은 사실상 죽음의 길을 걷는 이유도 없다. 모두 형무소에 틀어박혀서 아침에는 주상전하의 은혜를 찬양하고. 조를 나누어 각종 노동에 투입된다!

“저녁에는 경전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깨우치지 못한 자에게도 가르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정음을 만든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고 있구나. 그리고 사람을 섞어서 서로에게 잘못된 관습을 가르치지 못하게 해야 좋을 것이니라.”

“혹여나 성과를 위하여 다시금 혹형을 행하지 않을까 우려되오니 철저히 조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거라. 여러 곳에 두어 사람을 분리하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님은 벌써 친인척과 파벌로 분류하시려는지 손가락으로 셈을 하고 계셨다. 징역형, 이 시대에는 엄청나게 빠른 제안이지만 엄벌주의를 타파하고 노동력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세종대왕님의 마음에 쏙 들어온 것 같다.

더군다나 유배형과 다르게 징역형이 제대로 돌아가면 왕권이 강화된다. 사면(赦免)의 권한은 이 시대에는 왕에게만 있으니까. 바보같이 왕권 강화한답시고 형무소에 마구 쑤셔 박으면 안 된다. 이건 이 시대에 막으면 후대에 알아서 조절할 일이니 염려하지는 말자.

“그렇다면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오나 누구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관료들의 반발도 있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배재당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당당히 나설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그들은 몸을 다루는 일에 익숙한 네 제자들이다.”

맞아, 배재당이 있었지. 야인 자제들을 교화하는 사람들을 불러다 죄인들을 교화할 방법을 모색하게 하자면? 당연히 달려 나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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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적당한 곳에 보행기 여러 개와 각종 기구들을 연결한 녀석들을 준비하고 제자들을 불렀다. 오늘 입신체비를 쉬는 자 여럿이 나왔는데 다들 보행기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죄인들을 교화하는 일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상왕 전하께서 몸소 추진하는 경국대전의 새 형법을 정하는 일이지.”

“보행기는 어찌하여 놓여 있고 연결된 기구들은 무엇입니까?”

징역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니 다들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다. 시대의 관념이 박혀 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반발이 있다. 그러니 징역형을 제안할 때 다른 관료들을 설득하기 위한 명분 싸움 시험대로 삼자.

“십악(十惡)으로 대표되는 범죄는 모두 행실이 문제일세. 그렇지 않은가?”

“실로 옳은 말씀이긴 합니다. 하오나 형벌을 엄히 하여야 행실이 바로잡히며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할 말이 없어지는 대답이네. 엄한 형벌을 당하면 저승으로 사라지니 죄를 저지르지 못하는 거잖아! 반성 이전에 사망이라고!

“조금 다르게 생각을 해보게나. 행실이 올바른 집안에 태어나 훌륭한 부모에게 배우고 좋은 스승을 만난 자가 쉬이 악행을 저지르는 일을 보았는가?”

“저지르는 이가 없다고는 말을 못 하나 그런 이를 호부견자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행실이 불순한 집안에 태어나 부모의 악행을 본받으며 좋은 스승조차 만나지 못한 이는?”

역시 말문이 막히지. 이 시대의 성리학은 교조화가 안 되었을 뿐이지 명분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니까.

내 제자들의 말문이 막히는 것이 당연하다. 성리학에서는 옛 성현을 본보기로 삼으라 했는데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를 말했으니까.

“본디 행실은 옛사람을 보고 배우기 이전에 부모를 보고 배우며 이후 스승을 통해 배우는 것일세. 이러한 기회도 없는 이가 혹형을 받는 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혹형이 아니라면 어떤 처벌이 있는 것입니까?”

“충실한 삶을 심신 모두에 새기는 형벌이라네. 어찌 보면 형벌이 아니고 올바른 일이군.”

경전을 암기하다시피 달달 외운 배재당의 내 제자들에게 통할 수준이면 조정 관료들도 정면에서 반박 못 하는 수준이 맞다. 명분 싸움에서는 승리 확정.

“군사부일체라 하였지. 부모와 스승과 임금은 한 몸이나 다름이 없는데. 잘못을 저질렀다고 엄벌에 처하기보다는 근면한 생활을 행하게 만드는 것이 옳지 않은가.”

“가르침에 따르면 옳은 말씀이긴 합니다. 하오나 모든 죄인을 그렇게 하신다면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됩니다.”

“비용이라? 근면히 일을 하는데 어찌 자신이 먹을 것을 벌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한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네.”

단순 노동에만 종사하게 하는 줄 아나? 아직도 부족한 공인의 도제로 만들어서 기술종사자도 확충할 계획인데.

“하오면 농사를 짓게 하지는 못하시니 다른 일을 시킬 생각이십니까?”

“보행기는 많은 곳에 쓰이지 않는가. 하루 한 시진을 걸으며 동력을 충당하고, 그 외에는 각종 고된 작업을 행하는 일일세. 물론 입신체비에 의거하여 몸이 상하지 않을 선에서 계속 행한다네.”

“군기시에서 전해지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집현전의 관료들이 보행기를 돌려 총열을 만든다 하더군요.”

“그렇지. 그러한 일을 하려는데 사람이 상하지 않는 정도로 조절해야 하네. 충실한 삶을 새겨서 돌려보내는 것이 목적이니 몸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네.”

근대시절 영국에서 만든 트레드밀은 고문 도구가 맞지. 곡식을 빻고 물을 푸는 일에도 썼지만 그냥 죽도록 고생해라 하는 식으로 굴렸으니까.

축을 밟아야 하는 힘도 굉장히 강하게 잡고. 경사도 심하게 두니 죄수들이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보행기 여럿을 둔 것은 힘든 정도를 조절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렇다네. 왼쪽부터 힘이 점점 강해지는데 맨 처음은 풀무를 돌려 쇠부리가마에 바람을 넣는 것일세, 그다음은 총열을 깎는 것, 곡식을 빻는 것, 닥나무로 만든 백피를 고해하는 것이네.”

“한번 시험하여 보겠습니다.”

다른 작업에는 많은 힘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맨 마지막 작업인 종이 만들기는 꽤나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반 시진이 넘게 걸었던 제자들이 소감을 말했다.

“풀무를 돌리는 일은 정말 쉽습니다. 그러하니 크기를 늘려도 되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백피를 고해하는 일은 조금 벅차더군요.”

“그러하면 한 시진을 내내 돌린다면 어떻게 되겠나?”

한 시진이라는 말에 제자들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고 나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한 시진이면 필부(匹夫)면 누구나 가능할 일입니다. 백피를 다루는 보행기만 조금 가볍게 하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좋군. 백피야 들어가는 양을 줄이면 힘이 덜 들어갈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쇠부리가마에 바람을 넣는 풀무는 조금 더 크게 만들면 되겠고, 백피를 짓이기는 맷돌은 크기를 조금 줄이면 되겠네. 나머지 형벌이야 농사일과 관련되거나 기술과 관련된 일이니 염려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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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제자들과 계속 실험해보면서 결론을 내렸다. 아직 형무소의 부지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일반적으로 수행할 업무 난이도만 정해야지.

그렇게 보고서를 만들어 세종대왕님에게 드리니 읽으시면서 감탄을 늘어놓으신다.

“몸이 상하지 않는 한도에서 노동이라. 참으로 좋구나. 또한 배재당에 있는 자들의 말문이 막힐 논리라면 관료들에게도 충분히 통하겠구나. 그렇다면 처음 형무소를 세울 장소는 어디가 좋겠느냐.”

“도성 근처에서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평양이 어떨까 합니다.”

초석전의 효율이 가장 좋은 장소도 평양이었다. 건조기후에 인구도 많아서 소변을 많이 모아올 수 있으니까. 또한 평양은 북부의 거점 도시니 유사시에 병력을 파견하기도 좋다.

“평양이라. 그 또한 나쁘지 않구나. 본디 춘천 도호부를 염두에 두었으나 사람을 옮기기에는 평양도 괜찮아 보인다.”

“춘천 또한 좋은 곳입니다.”

세종대왕님은 장소에, 나는 이득에 신경을 쓰니 의견이 갈렸구나. 하지만 세종대왕님은 별문제가 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유와 이야기를 나누다니 이렇게 심려가 깊을 줄은 몰랐구나. 그러니 내가 너에게 좋은 일을 하나 해주마.”

“좋은 일이라 하심은 어떠한 것입니까.”

수양대군이 형무소의 첫 소장이 되어라. 그런 선물은 아니겠지?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네 장남 현동이 말이더냐. 이제 원복(元服 - 관례, 성인식)을 올리고 혼인을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혹시 마음에 둔 가문이라도 있더냐.”

“관례는 본디 스무 살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까.”

“조금 일러도 상관이 없느니라. 오히려 종친으로서는 늦은 편이지.”

역사상으로는 1438년 출생인 현동이가 1437년에 태어나서 딱 16세이다. 혼담이 오가긴 했는데 내가 당시 보통 상황이어야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생기지. 매일 악몽에 시달리면서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데 그런 일이 잘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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