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32화 - 근육으로는 안 되는 일(1) >
고을을 다스리는 업무는 막중하다 못해 넘쳐나는 것이 현실인데 어떻게 오전 내내 업무를 여진족들과 함께 개척하는 일에 몰입한단 말인가. 물론 해가 저물면 현감으로 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업무를 하겠지만 그걸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지방관들의 덕목인 수령칠사(守令七事)에는 농상성(農桑盛 - 농업), 호구증(戶口增 - 인구), 학교흥(學校興 - 교육), 군정수(軍政修 - 군사 및 치안), 부역균(賦役均 - 노역), 사송간(詞訟簡 - 민사재판), 간활식(奸猾息 - 관리 통솔)이다.
그렇게 걱정이 넘치다 못해 안색이 창백해진 홍윤성을 보면서. 홍일동은 파견되기 전 문종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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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본디 수령의 업무라 함은 막중하여 저와 같은 범인(凡人)은 고을을 다스리기도 벅찹니다. 거기에 변방의 험지를 새로 고을로 삼으라 하시니 책무가 너무나 무겁사옵니다.”
작은 고을 하나를 다스린 경험조차 없는데 개척까지 행하다니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문종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개척에 대한 고난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노라. 또한 수령들의 업무가 막중함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의 능력이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군.”
“하오나 저의 능력으로는 모든 일을 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일을 행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가장 필요한 일이며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행하게.”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하라니. 왕의 뜻이 무슨 것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러자 문종은 손가락 세 개 펼친 손을 보여줬다.
“가장 중요한 일은 당연히 농업과 인구 그리고 송사이다. 이 세 가지 업무를 못한다 말할 수 있는가.”
“충분히 가능하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군정에 관련된 일은 낭청으로 있는 홍윤성이 담당할 것이며. 부역과 관련된 업무도 보조할 것이다. 또한 교육은 아직 때가 이르니 필요가 없으며. 관리의 부정을 찾아내어 기강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관리를 뽑아 그 재능을 확인하도록 하라.”
먼저 파견된 군관인 홍윤성의 협조 하에 일을 행하란 말인가. 그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관리를 모집하라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법도대로면 수령은 지방을 관할하며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 하는 것은 자질이 뛰어난 자들이 가까스로 가능할 뿐이다. 이번 호구조사에서 남도에 있는 수령들의 부정이 드러났으며. 원인이 막중한 업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뜻은 높았지만 현실은 냉정하였다. 막중한 업무를 견디지 못한 수령들이 작황을 모두 확인하지 못하여 전세를 적게 부과하는 경우는 빈번하여 처벌을 내리기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러하시면 지방관을 늘린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이미 늘렸다. 훈련도감 출신 병사들 중 5년 이상의 근무를 마친 이들 중에 원하는 자는 지방으로 파견되어 제승방략(制勝方略)을 굳건히 하고 있노라. 일전에 행해보니 효험이 좋더구나.”
지방관을 늘려서 부담을 덜어낸다. 쉬운 말이지만 그 자금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문종의 머릿속에서 이미 답은 나온 지 오래였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번에 호구조사를 겸하여 토질과 작황을 평가하여 보았는데 부정이 난립하여 참담할 다름이었다. 상왕께서 세우신 아름다운 법도가 폐단과 악습으로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있겠더냐.”
“그러한 부정은 제 눈앞에서는 벌어질 수 없사옵니다.”
“옳은 말이다, 그러니 거양현을 시금석(試金石)으로 삼아 지방관의 소모를 가늠하고자 하니 염려치 말거라. 혹여나 필요한 물자나 사람이 있다면 언제라도 경원부에서 지급해 줄 것이다.”
문종은 이미 호구조사를 시행하면서 각종 폐단을 보고받았다. 땅의 토질을 낮게 보고하는 자들, 풍흉을 다르게 보고하는 자들이 여럿 발각되었다. 죄질이 무거운 자들은 전가사변을 시행할 예정이었으며. 지방 수령들도 이 대상에 속하는 이가 많았다.
얼마나 많은 지방관이 더 파견되어야 이러한 폐단을 막을 수 있는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거양현의 업무를 시험 삼아서 분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속사정을 알자 홍일동도 약간의 욕심이 생겨났다.
“하오면 전하께 감히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전가사변을 당한 자라 하여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니 임시 관직을 주어서 협력하게 하여도 괜찮다.”
보통 고을이면 토호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거양현의 사람들은 전가사변으로 보내진 자들이 대부분이니 토호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나중에 정식 현이 될 무렵에 해결하면 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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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본래 위기상황에 놓여야 자신의 힘을 모두 발휘한다. 입신체비에서는 이를 조건형성(條件形成)중 하나라고 하면서 상상을 통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는 일에 사용하라 하였지. 자신의 행동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다.
만약 필요한 것은 경원에서 보내온다 하면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자들은 태만하진 않더라도 안심하여 만족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몰리는 상황을 만든다면? 홍윤성의 말을 들으니 자신의 뜻이 통한 것 같았다.
“수령칠사에 의거하여 군정수의 업무는 제가 담당할 것이며, 학교흥에 관련해서는 아직 향교나 서당도 없으니 제외하여도 될 일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일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주상전하께서 자네를 보낸 이유가 있지 않은가? 송사 또한 반드시 관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하지만 여진족들이 없다면 고을을 제대로 만들 방도가 없다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훈련도감에 자신과 같이 들어온 자들 몇몇은 지방으로 내려가 잡색군을 통솔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일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힘을 써야 하겠군요.”
“그렇다네. 업무가 막중하겠지만 동생이 재능이 있으니 많은 도움을 줄 걸세. 또한 원하는 이가 있으면 나에게 소개하거나 업무를 담당하도록 서리로 삼게나.”
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친 숨을 내쉬는 홍길동과 시선이 마주쳤다. 졸지에 병사들을 통솔하는 일을 시작으로 각종 업무를 떠맡았으니 책임이 막중하다 못해 도망치고 싶었다. 이미 포기한 것 같은 홍길동의 눈빛을 보자 홍윤성도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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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앞의 마당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여진족들이 며칠 동안 해야 할 일을 하루 만에 하였으니 그 기념으로 늙은 말을 잡아 고기를 베푼 것이다.
말 한 마리에서 나오는 고기로는 배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먹고 마시면서 분위기가 물씬 달아오를 무렵이었다. 홍일동은 절육을 행하는 기간이어서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조용히 있다가 홍윤성을 찾았다.
“오늘 보니 몇몇 민가에는 흙더미를 담장처럼 쌓아서 벽을 만들었는데?”
“추위를 경험한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벽을 두껍게 쌓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관아의 벽도 대책을 세우기 전에는 널벽(板壁 - 널빤지를 세워서 끼운 벽)으로 임시로 세웠던 겁니다.”
홍윤성의 말에서 혹한에 대한 공포가 묻어 나왔다. 민가들이 저렇게 담장 같은 벽을 만들었지만 보통 건물을 세웠다가는 혹한에 정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이 고장의 겨울이 얼마나 험하기에 이다지도 두려워한단 말인가. 자네는 훈련도감 출신의 정병이 아니던가.”
“저도 추위에는 자신이 있으며 함흥 정도야 충분히 오갈 수 있긴 합니다만, 여기서 지난 한겨울에 몸을 움직여보니 정말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끔찍하다 하면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가.”
“지난번에 한겨울에 소피를 보면, 바닥에 닿자마자 소피가 얼어버리더군요.”
홍일동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홍길동이 갑자기 일어서더니만 고함을 쳤다.
“형님! 저 형님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형님이라. 여기는 관아이니 현령나리라 하여라.”
평상시에는 나리라는 말이 나왔던 동생에게서 나온 형님 소리에 홍일동의 표정이 풀어졌지만 여기는 관아이다. 나지막한 꾸중에 홍길동은 죄송하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금 말을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가 서리로 일하면서 행한 일이 얼마인데 저를 믿어주시지 못하는 것입니까? 저도 업무를 담당해 저의 재능을 뽐내고 싶습니다!”
무례하다 생각하였지만 옳은 말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이 동생이라니 당장 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막내 혼자서는 힘에 겨울 것이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네가 장성현에서 일할 적에 관아 건물을 값싸고 튼튼하게 세웠던 적이 있었지.”
“그렇습니다. 제가 한번 나서볼 것이나 제가 능력이 부족하면 바로 다른 이를 찾겠습니다.”
그런 정도면 괜찮다. 실패하여도 두꺼운 벽을 바로 쌓으면 추위를 막을 수는 있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좋다, 네 마음대로 행하되 겨울을 반드시 지낼 수 있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홍윤성은 홍길동이 저렇게 나서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말리지 않았으면 홍일동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는 자신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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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부터 일어난 홍일동은 몸을 풀고 성터로 내려가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여진족들이 알아서 모이기 시작했다.
“어제는 밭을 일구면서 상체를 단련하였으니 오늘은 성벽을 쌓으면서 하체를 단련할 차례이다! 다들 준비는 되었나?”
“네 현령나리!”
“그렇다면 지게를 짊어지기 전에 몸을 덥히도록 하라!”
밭에서는 농민들이 어제 헤집어 놓은 흙을 뒤섞으면서 돌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렇게 다들 분주한 가운데 관아에서는 홍윤성과 홍길동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나서신 것이오? 나야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불만이 가득하였는데 화를 입을 수도 있소.”
“낭청나리께서는 현령나리의 생각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을 그대로 두었다간.”
“아마 토벽이나 화방벽(火防壁 - 방화용 벽, 외부에 커다란 돌과 석회를 겹쳐 쌓는다) 정도도 아니고 아예 벽을 두껍게 한다고 돌을 가져와 담장을 둘렀을 것이 분명하였지.”
“바로 그것입니다! 입신체비를 행하기 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그리하였을 것이 뻔합니다.”
홍윤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까지 보여준 홍일동의 행동대로면 ‘아아 이것이 하체운동이라는 것이다’ 하면서 사람을 꼬드겨서 아예 벽 사이에 담장을 둘러치겠지.
“그렇다면 대책은 있소? 자신 있게 나섰다 하지만 나 또한 반은 포기한 일이오.”
“실은 저도 현령나리를 멈추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라 막막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벽에 무엇을 써야 튼튼하고 겨울 추위를 막을까 그런 궁리를 하는데 관아의 한 구석에서는 사람들이 한창 벽돌로 벽구들(페치카)을 쌓다가 참을 먹으러 나갔다.
“저게 뭡니까?”
“벽구들이라네, 이러한 북방은 보통 사용하는 구들로도 부족하니 등은 따듯해도 숨이 얼어붙을 지경이지. 그래서 한겨울에는 저 벽구들에도 불을 땐다네.”
“저거 이전(泥塼 - 굽지 않은 점토벽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지, 듣자하니 본디 백토(고령토)에 석묵(石墨 - 흑연)을 섞은 벽전(甓甎 - 구운 벽돌)을 써야 하지만 그냥 벽전으로도 충분히 효험을 보인다고 들었네.”
그렇게 한참을 벽구들에 몰입한 홍길동은 젖은 진흙으로 아직 남은 구멍을 막더니만, 장작을 한 더미 가져와서 바깥에 불을 붙였다. 방법을 찾는 와중에 이런 일을 왜 한단 말인가?
“자네 지금 추운가?”
“아닙니다. 그저 이것이 열을 얼마나 막아내나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열을 막는다고? 벽구들의 장점 중 하나가 두꺼운 두 겹의 벽돌이 열을 품고 있어서 한번 불을 때면 아침나절까지 따스한 공기를 퍼트리는 것이었다. 불을 붙이면 쉬이 따듯해지지 않지만 열이 한번 오르면 오래 가는 것이 장점이다.
홍윤성의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홍길동은 벽구들의 반대편에 손을 대고 있었다.
“젖은 점토는 다 말라버리고 이미 뜨거워지고 있는데 벽전은 따스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괜히 시간을 낭비하지, 잠깐 젖은 점토가 다 말랐다고?”
홍윤성도 놀라서 점토에 손을 댔지만 이미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조만간 열을 이기지 못한 점토가 갈라지면서 연기가 안으로 들어오리라.
“방법을 찾았습니다, 벽전을 이용하면 효험을 볼 것입니다.”
“벽전이라? 어찌하여 벽전인가?”
“본디 우리가 쓰는 벽이라 함은 흙을 짓이겨 붙이고 위에 고름질(미장)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비슷한 두께로 만들어 보았는데 흙보다 벽돌이 열이 늦게 파고들지 않습니까.”
열이 늦게 파고든다. 홍윤성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나왔다. 이 젊은이의 생각이 남다르다 하였는데 벽구들 하나를 보고 이런 것을 알아내다니.
“그래 맞아, 그러고 보니 벽구들을 옆으로 늘려 쌓으면 그 자체가 전벽(磚壁 - 벽돌벽)이 되겠군. 그렇다면 보통 쓰이는 회벽보다는 추위가 늦게 전달되겠지.”
“그리고 장점이 또 있습니다. 본디 외풍은 나무와 벽의 틈 사이로 파고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전부 다 벽전으로 쌓으면 틈이 갈라지기도 어렵고, 설령 갈라진다 하여도 쉽사리 메꿀 수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회벽과 나무사이에 틈이 생긴다. 여기를 메꾸기는 힘들기 때문에 (건조하면 목재의 수축이 심해진다) 바람이 다시금 스민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도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조금 더 궁리를 해보게나. 경원에서는 창도 두 겹으로 만드는데 전벽을 두 겹으로 만들어 사이를 비워두면 좋을 것 같군. 사이에 지푸라기라도 끼워 넣으면 효험이 좋을 걸세.”
“기왕이면 조금 더 궁리를 해봅시다. 경원에서 온 대목장(목수)과도 논의를 해야겠지요.”
홍윤성도 많은 지식은 없었지만 목수를 불러서 계속 토의가 이어졌다. 목수도 처음에는 벽돌을 쓴다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천천히 이야기를 듣고는 거의 다 이해하였다.
“과연 이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실패하면 새로 만들면 그만 아닙니까?”
“좋은 생각이시오, 그런데 이게 추위를 막아낼지 의문인데 어떻게 시험할 것인가?”
“이 고장은 여름에는 꽤나 덥다 들었습니다. 여름의 더위를 막아낸다면 겨울 추위도 막아내겠지요.”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초겨울쯤 되어서 정 아니다 싶으면 모두 갈아엎으면 그만이니. 하지만 시행착오를 감안하면 한 달은 금방 지나가리라. 그렇게 홍윤성과 홍길동은 바삐 달려 개성에서 올라온 와공을 찾아냈다.
“벽전이요? 저는 와공인데 어찌 벽전을 만들라 하시는지.”
“내 알기로는 합각(合閣 - 팔각지붕 측면에 쌓는 작은 벽)에 벽전을 쓴다고 들었소.”
“여기 와서도 벽구들인지 뭔지를 쓰려고 조금만 만들었을 뿐입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홍길동은 시험을 위해 건물 한 채를 모조리 벽돌로 벽을 쌓을 생각에 처음부터 크게 주문했다.
“사람을 보낼 것이니 벽전을 아주 많이 구우시오. 한 오천 장 정도면 적당할 것 같소.”
“그 땔감은 어디서 구하시려고 하십니까. 오천 장을 만들려면 가마 또한 크게 나와서 여러 번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어찌 합니까?”
“그것이야 벽구들을 만들 듯이 벽전으로 먼저 가마를 쌓으면 충분하지 않겠소?”
생각해보니 북방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조선에서 벽돌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땔감으로 쓸 나무가 부족해서 벽돌을 기껏 만들어 보았자 값이 비싸고. 추위도 몸으로 버틸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장은 다르다. 추위는 극심하고. 땔감이야 산에 지천으로 널려있으며. 며칠 뒤면 홍일동이 여진족들과 함께 목책을 만들면서 잔가지를 쳐낼 것이니 충분하다 못해서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