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31화 - 근육적 방법론(2) >
“밭이긴 한데 새로 만든 곳이라 지력을 보하려고 갈아엎기만 하였습니다.”
밭을 만드는 일이 늦어서 작물을 심을 시기를 놓쳤지만 홍윤성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조정에서 지원을 하였지만 사람이 부족했다. 이 드넓은 곳을 고작 100호 400명의 전가사변을 와서 집을 짓는 사람들을 가지고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군, 그러니 주상전하께서 심려가 크신 것이군. 관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일단 관아는 구색에 맞춰놓긴 하였으나 아직 벽을 올리지 않고 널벽으로 막았습니다.”
“아직 날이 춥지 않으니 별 문제는 없다네.”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넘어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른 농토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야인들이라 하여도 농사는 짓고 살지 않는가? 그곳에 농사를 하지는 않는가?”
“야인들의 전답(田畓)은 아국에서 보기에는 황무지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새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궁금해 하는 홍일동을 이끌고 강가에 만들고 있는 밭으로 갔으나 거기에 있는 것은 여진족들의 밭이자 조선인들의 눈에는 황무지였다.
거양성 일대에 있었던 올미거 부족은 자기들 딴에는 제법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훈련도감 출신의 홍윤성조차도 여진족 보다는 잘 지을 자신이 있었다. 그냥 땅에 구멍을 뚫고 씨를 뿌려놓으면 밭이라 하는 것이다.
“대체 이게 뭐야? 땅을 10결씩 준다 해서 왔는데 밭 만들다가 사람 죽게 생겼네.”
“거기 이봐! 손가락보다 큰 돌은 다 골라내야 한다니까!”
“아, 이보쇼. 조선에서 온 사람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농사 잘 지었다니까!?”
홍귀동이 도착할 시점에도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땅을 가구당 10결씩 준다 하였는데 10결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소도 여러 마리 있었지만 땅이 너무나 단단하고 험해서 쟁기가 부러지니 소를 쓰기도 힘들었다.
묵힌 밭도 아닌 황무지를 처음부터 개간하자니 노동력이 너무나 부족해서 여진족들을 고용했다. 그러나 여진족들은 조선인 기준으로 기본적인 농사 지식조차 없어서 땅을 다듬는 둥 마는 둥 하여서 진척은 더딜 뿐이었다.
“작물 소출이 좋으려면 잔뿌리가 잘 파고 들어야 한단 말이오! 그러려면 밭 위에서 굴러도 몸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잔돌이 없어야 한다고!”
“알겠소! 다 아니까 품삯이나 충분히 주쇼!”
중간에 끼인 역관만 고생하고 있었다. 여진족들이 불만을 담은 목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조선인들과 힘을 합쳐 밭을 만들어갔지만 까마득한 일이다. 심지어 불만은 식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여기 새참 드시게.”
“이런 푸성귀나 먹고 힘이 나겠어?”
이른 새참으로 사발에 가득 담긴 보리와 밀을 섞은 밥에 근처에서 채취한 나물을 줬지만 여진족에게는 짜증이 솟는 식사였다. 곡류보다는 육류 위주의 식습관이 남아있었기에 자신들이 소나 말로 보이냐고 투정을 부렸다.
“이래서야 일이 한도 끝도 없겠군.”
“그나마 고용된 야인들이 일을 돕고 있습니다만 불만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법도대로 농사를 짓는 것이 익숙하지 않게 보이는군.”
조정에서 받아온 증보(增補)판 농사직설을 펼쳐 본 홍일동은 책의 내용을 대조하면서 이 지형과 맞는 작물을 선별하려 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북방까지 농사를 지어본 적은 없으니 소출이 나오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은 관아와 마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관아라? 혹여나 저 성터의 안쪽에 관아를 지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직 구색만 갖추었지만 말입니다. 거기에 성은 돌무더기가 무너져서 더 이상은 쌓기 곤란한지라 그대로 둔 상태입니다.”
아무리 여진족과 우호적이라고 하여도 도둑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못 했다. 그러니 집과 관아를 모두 언덕 위의 성터 안에 몰아넣고, 성을 다시 쌓아 경계를 확실히 하려고 하였다.
“돌무더기가 무너지다니. 아예 처음부터 다시 쌓으려 했다면 그런 사고는 피했을 것이네.”
“그러기에는 사람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고을이 될 장소도 모두 돌아봤다. 상황을 다 알았으니 토의를 위해 파견된 관리들과 홍일동, 홍윤성 그리고 서리로 일하게 된 홍길동이 임시로 완성한 관아에 모였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별다른 일을 하지도 못하여서 현령께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니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그래도 마을 행색은 나게 하였지 않은가. 주상 전하께서 이곳까지 보내셨으니 마땅히 여기를 현 다운 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일세.”
홍윤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머나먼 북방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령 홍일동은 별다른 부담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문제라?”
홍윤성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며 여진족들과 함께 일하는 일선의 관리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문제점이었다. 현령이 새로 왔다 하니 며칠간은 잠잠해지겠지만 조만간 일이 터질 느낌이 들었다.
“야인들의 의욕이 너무나 부족하고 일을 거르고 있습니다.”
“야인들에게는 일한 만큼의 삯을 주지 않는가?”
“그렇다 하여도 거의 두 달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니 성과가 없다 생각하나 봅니다.”
여진족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이미 밭은 완성되었고 씨앗을 뿌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조선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한 해는 묵혀둬야 소출이 좋게 나온다. 농사를 어설프게 하느니 다음 해를 기약하는 것이 좋다.
반면 여진족들이 보기에는 조정에서 보내온 곡식으로 한 해를 보낼 계획을 세운 조선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북방에서 살 가능성도 없는 나약한 자들이 투정을 부린다고 보겠지.
“농사를 짓는 데는 법도와 순서가 있는데 어찌하여 불순한 생각을 가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칠게 살던 자들이니 그럴 수가 있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도 있을 것 같은데.”
“실은 마을에 목책을 설치하고 성벽을 다시금 세우는 일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까지 일어났으니 더더욱 그렇지요.”
목책과 성벽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기면 일하던 자들도 모두 성으로 들어와 외적을 막아 싸워야 하니까. 하지만 여진족들은 성을 쌓은 경험도 이유도 없다. 맞서 싸우기 버거운 적이면 모두 도망가면 된다.
“뭐 그리 불만이 많단 말인가.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겠지.”
“현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옳은 것입니다. 하오나 여진족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니 그렇지요.”
“자네들은 입신체비를 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이겠지. 방법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입신체비가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하긴 이 자리에서 입신체비를 제대로 배운 자는 홍일동과 홍길동 두 형제이다. 자신은 훈영체조를 하였으며 동생인 홍길동은 기껏해야 3대 운동 500근을 행할 체격이니 그리 좋은 몸도 아니었다.
홍윤성은 속이 쓰렸다. 성품이 담대하다 하였는데 담대함이 아니고 무심함이었던가. 거친 야인들을 함부로 다루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현령이 이 고장의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이니 그의 뜻을 따라야 한다.
“야인들과 농민들은 내일 모두 밭으로 나오라 하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행할 것이니 염려는 말고. 비상시에 쓰기 위해 비축해 둔 미숫가루도 꺼내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런 것이 아니고 야인들을 어르고 달래는 일인데. 그런 홍윤성의 시선을 홍길동은 놓치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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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이 밝아오자 홍일동은 몸을 풀고 관복이 아닌 입신체비복 위에 철릭 하나만 입은 채로 가장 커다란 밭에 내려왔다. 밭이라 부르기보다는 언덕에서 잡초와 나무들만 베어낸 곳이었다.
“현령님, 야인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불만이 많은 것 같군, 배움이 부족한 자들이라 하였으니 가볍게 생각하면 좋지 아니한가.”
옛날의 자신이었으면 이들을 절대 다루지 못하였으리라. 오히려 욕을 먹고 쫓겨나면 다행이었겠지. 하지만 수양대군의 위대한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있었다.
“그대들이 일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니 내 친히 가르쳐 주겠네.”
“일하는 방법이요? 방법을 안다고 달라지겠습니까?”
퉁명스러운 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홍일동은 피식 웃었다. 역시 이 자들은 의미가 없고 지겨운 일이라 생각하니 목적과 의지 모두를 상실한 것이었다. 입신체비서에서 절대 경계해야 할 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입신체비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네. 수양대군께서는 지식이 얼마나 심오하신지 단순히 몸을 놀리는 동작으로도 배움을 얻을 수 있다 하였지.”
“네? 나리께서 직접 밭을 일구는 겁니까?”
“자고로 모든 일을 행함에는 목적과 의지가 있어야 효험이 생긴다네. 자네들은 그걸 모르고 있기에 힘이 들고 피곤한 것이라네.”
홍일동은 가장 커다란 곡괭이를 들고 몸을 풀면서 말했다. 입신체비서는 노동조차 훈련으로 탈바꿈시킨 위대한 학문이며 북방에서도 충분히 통용될 것이라는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
“한 번!”
등 뒤로 돌려 온 힘을 집중하여 내리 찍힌 곡괭이가 땅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거칠게 뽑아낸 다음 다시금 앞으로 반 발자국 나아가 곡괭이를 힘차게 내리찍으며 외쳤다.
“길동아! 내가 파헤친 자리를 삽으로 걷어 내거라!”
“네! 현령 나리!”
홍일동이 거침없이 꽂은 곡괭이의 주변으로 삽이 연거푸어 박히면서 땅을 말 그대로 갈아엎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속도가 보통 사람의 몇 배는 빨라서 주변 사람들은 멍하니 보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홍윤성을 비롯한 훈련도감 출신들은 그 훈련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들이 남한산에서 지겹도록 행한 동작 중 하나였던 것이다.
“저건 장작 패기잖아?”
“장작 패기가 뭔데 그러십니까?”
“훈련도감에서 행했던 훈련이야. 정확히는 그루터기를 두들겨 패서 조각내는 훈련이며 장작을 쪼개거나 말뚝을 박는 일로도 대신할 수 있다 하였지.”
본래 수양대군이 훈련 방법을 만들 때에는 각종 트레이닝 방법을 입신체비서에 기록하기 위해 현대에서는 생소한 훈련법도 적당한 미화와 묘사를 통해 기입하였다.
현대에는 망치를 폐타이어에 내리치는 방식으로 변형되었지만, 과거에는 충분히 실생활에 쓰일 수 있는 해머 트레이닝도 당연히 들어갔다. 당장 장작 패기는 양반들도 정력을 기른답시고 하는 운동이지만 저런 완벽한 자세로 행하다니?
“보게나. 이렇게 거대한 곡괭이를 힘차게 내리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밋밋한 등판이 아니고 이렇게 멋지게 변한다네!”
수십 번의 곡괭이질로 땅을 박살 내놓다시피 한 홍일동은 땀이 차올랐는지 철릭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땀에 젖은 입신체비복 아래로 울퉁불퉁한 등 근육이 솟구쳐 올라왔다.
“집중하여, 전력을 다하고, 자신이 계속할 수 있는 정확한 힘으로 그리고 정확한 자리를 치는 모든 것이 중요하네. 일이 아니라 생각하게! 그대들의 몸을 단련시키는 방법이지.”
“나리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곳이 좋아집니까?”
걸렸구나, 홍일동이 다시금 등 근육을 불룩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거부(巨斧)를 이용하는 훈련은 내리칠 적에는 등, 어깨, 삼두의 모든 근육이 활성화되며 몸에 심부에 있는 근골이 모두 활성화된다네. 열심히 임하면 이런 일도 가능하지. 길동아, 영압을 하자꾸나!”
“잠깐만요, 또 저를 쓰시는 것입니까?”
홍길동은 난데없이 자신을 들어 올리는 형에게 질겁하였지만 그냥 포기했다. 이놈의 형님이 입신체비를 배우고 나니 자신을 운동기구로 삼아 영압(밀리터리 프레스)을 행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오오, 세상에! 저건 지난겨울에 보았던 그 동작이 아닌가?”
단순한 동작이지만 천하장사의 의미를 가졌으니 여진족들의 눈이 돌아갔다. 홍윤성도 홍일동의 완력 이전에 절육(커팅)이 충실히 행해진 몸을 보고 놀랐다.
“저기, 저도 한 번.”
“너는 삽이나 들어!”
대식가인 홍일동의 특기 중 하나는 평상시에는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속을 다스리는 데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절육의 시간에도 이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양생(벌크업)이 필요한 시기에는 필요량을 초과하는 영양섭취로 폭발적인 근육 증가가 가능하며. 절육(커팅)이 필요한 시기에는 입신체비서에 의거해서 볶은 콩을 잔뜩 넣은 미숫가루로 절육을 비교적 쉽게 행했다. 그의 기이한 식습관은 입신체비에 최적화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곡괭이 없다니까! 거기 왜 그러쇼!”
“아니, 갑자기 일을 열심히 하려고 발광들이야?”
“근육! 등 근육을 기르자!”
자신들의 지겨운 노동을 몸을 키우는 방법으로 바꾼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새로 부임한 현령에게 있었다. 홍일동이 어떠한 일을 시키더라도 여진족들이 그를 따라올 준비는 이미 끝났다.
“마침 새참을 먹을 차례군. 새참은 나와 같은 것을 먹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이게 뭣입니까?”
“미숫가루라네, 나는 절육을 행할 때에는 대두와 귀리를 갈아 넣은 녀석을 먹지만 이건 보리와 밀을 비롯한 잡다한 것들을 섞었다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시대에 말토 덱스트린을 사용한 게이너(체중 증량을 위한 보충제)는 없으니 대체용으로 미숫가루에 콩과 다른 곡물의 비중을 늘린 특제품을 추천했던 것 또한 수양대군이었다. 여진족들은 한번 마셔보고는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거 미스가라(몽고를 비롯한 북방의 미숫가루)잖아?”
“나리는 몸을 만드실 적에 이걸 드십니까?”
“물론이네, 몸을 혹사시킨 후에 걸쭉하게 타서 한 입씩 꼭꼭 씹어 먹으면 아주 좋다네.”
그러나 홍윤성의 속은 다시금 타들어가고 있었다. 여진족들의 불만이 사라지고 의욕이 생기는 것은 홍일동의 지시를 듣고 함께 행동하니 저런 것이다. 그 이외의 상황에서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다.
“오늘은 상체를 하였으니 내일은 하체를 할 것이다! 낭청 자네도 내일부터 같이 임하게! 몸을 바삐 놀려야 하지 않는가?”
“현령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농지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땅을 평평하게 만들고, 괭이로 갈아서 부드럽게 만들며 돌을 골라내고, 나무를 베어내서 그루터기까지 모두 뽑아내고, 마지막으로 충분히 시비를 하고 물을 축여서 기력을 북돋워야 한다. 몇 개월에 걸쳐서 현감이 이런 일만 한다고?
“이 농지의 개척 하나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당장에야 믿고 따르겠지만 아직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며. 이렇게 하신다면 현령님께서 계속 여진족들을 통솔하셔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현령의 업무가 얼마나 막중한데 이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