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89화 (89/573)

< 2장 28화 - 사필귀근(事必歸筋) >

“대군 어른! 대군 어른 일어나십시오!”

“무슨 일인가? 오늘 잠자리가 뒤숭숭했는데 변고가 일어났나?”

김시습이 한참을 뛰어왔는지 헐떡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설마 한명회가 일을 저질렀을까? 사람이 나아질까 기대는 했었는데 애초에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었나?

“현릉에 도둑이 들었다 합니다. 내일 공사가 끝나고 제사를 지내야 하니 왕우지가 근처에 미리 와 있었는데 현릉 인근에 횃불이 보이기에 바로 병사들과 향했다 합니다.”

“도둑이라? 설마 공사로 혼잡한 틈에 능을 부쉈단 말인가?”

“아닙니다. 저도 정확히는 듣지 못하였지만 능의 북쪽에서 일을 저질렀다 합니다.”

역시 낚여 버렸구나. 놀란 마음보다는 일을 수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재빨리 일어나서 의복을 갖춰 입고 마구간으로 갔다. 흑우는 간만에 달릴 일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신이 나서 고개를 숙이고 날 태우려 했다.

“가자 흑우야! 다들 횃불을 들고 현릉으로 향한다.”

“네! 대군 어른.”

한명회가 왕건 동상이 묻혀 있는 북쪽 능선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내가 북쪽 능선에서 총감독을 하면서 왕건 동상을 발굴했을 것이다. 물론 덤터기는 내가 쓰는 것이고 한명회의 지략은 기준 이하이니 그냥 포상이나 내리고 내버려 두지만.

만약 한명회가 북쪽 능선에서 무엇인가 묻혀 있다고 보고를 한다?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으니 역시 내가 덤터기를 쓰고 한명회를 관직에 천거하기는 해야겠지. 사람이 달라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안전을 위해서 고위직에 오르기 힘든 방향으로 했을 것이다.

“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아!”

“사람 살려! 내 얼굴! 아아아악!”

“태조 대왕님, 죄송합니다!”

능 근처까지 달려오니 들려오는 소리만 봐도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분노한 왕우지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인지 짐작조차 안 갔지만 횃불의 희미한 빛으로도 보일 건 다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왕태조가 잠든 현릉에서 무슨 망발이냔 말이야!”

“대군 어른, 살려주십시오!”

“닥쳐!”

“아아아아아아아악! 이놈이 사람 문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눈을 굴리면서 한명회를 덮쳐 정신없이 깨물고 두들겨 패는 왕우지, 온몸에 흙이 묻어서 왕건의 동상에 절하는 사람들은 한명회가 부른 왈패들일 것이고. 그들을 둘러싼 개성 병사들은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어쩔 줄을 몰라서 멍하니 있는데 한명회가 두들겨 맞다가 날 알아보고는 애처롭게 소리쳤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보물이 있다는 말에 제가 대죄를 범했습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게!”

나와 김시습이 달려들어 둘을 떼어놓자 왕우지는 왕건 동상으로 달려가더니 주변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왕태조님! 어찌하여 이런 상처를 입으신 것입니까! 네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저희는 이가(李家 - 조선 왕실의 멸칭)의 주구(走狗)에게 속았을 뿐입니다.”

“그 이가라는 자가 날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 다들 이실직고하라!”

호통을 치자 다들 날 주목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사건을 정리할 차례다. 우선 이 동상의 정체부터 다시금 확인하자.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인지시켜야 하니 뻥을 쳐야 한다.

“왕우지에게 우선 묻겠네, 왕태조의 동상인지는 어떻게 알았나.”

“통천관과 금으로 만든 옥대를 보십시오. 이는 왕의 상징이 아닙니까?”

“없다네, 그렇다면 전조에서 만든 다른 이의 동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모르는 척을 하자 왕우지는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말투로 다 말을 시작했다.

“저의 조부께서 전하시기를 태조 대 아니 왕태조의 동상을 봉은사에 보존하고 있을 적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왕태조의 동상만이 통천관에 금이 씌워져 있었다더군요.”

“그렇다면 이것이 왕태조의 동상은 맞는 것 같군, 여기 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충 얼버무리자. 왕건의 동상은 그냥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설 무렵 천안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고 가져갈 수 없어서 여기에 묻어놨던 거라고 나중에 말하면 되겠지. 그러자 정신을 차린 한명회가 흑우 앞에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빈다.

“대군 어른!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잔꾀를 부려 모든 일을 망쳤습니다!”

“자네는 성실한 것 같더니 어찌 이러는가! 이미 늦었으니 방법이 없네.”

한명회는 지금 상태에서는 내가 손을 써줄 방법이 없다. 포승줄을 받아서 다들 굴비 엮듯 줄줄이 엮어 유수부로 데려갔다. 가장 먼저 한명회의 포승줄을 직접 묶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게. 그래도 그대를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손을 써 주겠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한명회의 능력은 내가 검증했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잡았다. 이런 역사로 검증된 능력 있는 간신배를 쓰는데 안전장치도 없을 것 같아?

“그나저나 왕태조의 상은 어디에 두지요?”

“일단 유수부로 가져가세나.”

그렇게 개성 유수부에는 10여 명의 왈패들과 주범 한명회가 끌려가게 되었고. 거적으로 감춰진 왕건의 동상 또한 같이 들어가게 되었다. 형님에게 바로 서찰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이틀 만에 답장이 돌아왔다!

[왕태조의 동상이 어찌하여 그런 곳에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다시 묻어버리면 이 또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흠이 잡힌 곳을 충분히 보수하고 옷을 입혀 본래 있었던 봉은사가 아닌 유수부에 보관토록 하고 본디 하던 대로 일을 행하되 누가 되지 않게 하여라.]

그 이후로 유수부는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첫 번째 처벌 대상자는 한명회에게 고용되었던 왈패들이다. 처벌 사유는 도굴 실행범이고. 기건은 형식상의 태형을 내리고 훈방하려 하였으나 일이 갈수록 커졌다.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저놈들을 매우 세게 쳐라! 왕태조의 능을 어지럽힌 죄인들이다!”

“아이고! 아아아악!”

곤장을 맞고 풀려났지만 이들의 고난은 끝난 일이 아니었다. 왕건의 동상과 관련된 소문은 막을 길이 없어서 이들 중 몇 명은 저자거리에서 두들겨 맞았고 집에는 오물이 뿌려졌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동상에 삽과 곡괭이로 자국을 낸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살려주십시오! 전가사변! 전가사변의 형벌을 저에게 내려주십시오!”

“지금 전가사변을 가면 함경도 가장 북쪽의 경원부로 간다네. 그래도 괜찮겠는가?”

“죽는 것보다는 났습니다!”

형벌은 곤장으로 끝났지만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전가사변을 택했고. 이들을 습격했던 자들도 전가사변을 당해 개성의 가구 중 총 100호에 가까운 가구가 경원으로 끌려갔다. 경원까지 가서 사람을 때려죽이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그렇게 소문이 퍼졌고. 형님에게 서찰을 보내고 사흘도 지나지 않아 유수부에 개성의 유력가들이 몰려와서는 금을 내놓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양인지 청백리로 이름난 기건조차도 점잖게 있지 못하고 흥분할 정도였다.

대표삼아서 상인 조씨가 왔는데 현릉의 정비를 담당했던 나를 찾아서 꾸벅 인사를 하면서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

“왕태조의 동상이 해를 입었다고 하니 조상대에 은혜를 입었던지라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금을 모아왔으니 동상에 난 자국을 메꾸는 것에 써 주십시오.”

“그런데 왜 모아온 금을 다 합치면 한 근이나 되는 거요?”

“그러게 말입니다. 모으다 보니 손이 마음대로 움직였나 봅니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해라. 대놓고 뇌물을 이렇게 보내니 동상에 나 있는 흠집을 메꾸는 것을 넘어서서 개성 유수부의 1년 예산에 가까운 액수가 남았다.

“그리고 대군 어른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본디 왕태조의 상은 연등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알고 있소. 주상전하께서는 예부터 행하던 대로 하라 말씀하셨으니 염려 마시오. 다만 다른 이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원하셨소.”

“그렇다면 제사를 허가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보세요? 왕건 제사는 이미 왕우지를 통해서 행하고 있는데 그렇게 의심을 하면 안 되지. 이미 확정된 이야기니 좀 더 나가도 되겠지?

“유수부에 고려 현종의 후손인 왕우지가 오도록 하겠소. 그로 하여금 연등회의 시작을 알리는 제사를 주관하게 할 것이니 염려 마시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이 있으니 들어줄 수 있겠소?”

“일전에 물에 빠졌다는 책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개성의 유력가로 있던 사람이 책 한 꾸러미를 건넸다. 다 무슨 책인가 했더니만 유득공이 발해사를 편찬하면서 소실을 한탄했던 발해국기(渤海國記)에 이건 또 뭐야? 성국문집(盛國文集), 정안국기(定安國記), 거기에 이건 족보잖아?

“얼마 전에 모임을 가졌습니다. 거기서 왕계(王繼)님의 후손이 저에게 족보를 내어놓고 조상들이 모아온 자료라면서 책 여려 권을 건네주더군요.”

“아니, 이것을 모두 어떻게 모아온 것이오?”

“전조에서는 상황이 마땅치 않아 북방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지만 도리는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이 있더군요.”

대충 훑어보아도 많은 양의 사료는 아니지만 발해사를 편찬할 분량은 충분하다.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아도 허술할 뿐이지 위서의 느낌은 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이 사서들이 나온 것인지는 알 길이 없구려. 물에서 솟아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아니면 중요한 내용이 있으니 불에 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소. 이렇게 중요한 서책이면 그럴 수도 있구려.”

일이 잘 되었으니 웃어야지. 그렇게 서로 농을 주고받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마지막 질문을 한다.

“그리고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그 동상을 처음으로 파낸 자는 누구입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어차피 약점을 잡은 한명회를 감싸줘야지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지. 나만 아는 약점은 아니고 형님과 세종대왕님이 같이 공유하는 약점이니까 적어도 한명회는 충신으로 남지 않으면 즉시 실각이다.

왕우지에게도 이야기를 해놓았다. 한명회가 불순한 마음으로 저지른 일이라도 결과가 좋으니 참으라고 말했고. 잘못 건드렸다가는 명문가로 있는 청주 한씨에게 역으로 미움을 살 거라고. 그래서 한명회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

“공사를 하던 자는 아니었소, 주변 능선에서 거닐던 자였는데 오밤중에 땅을 팠다 하는구려.”

“그렇습니까? 거참 이상하긴 합니다.”

“그러게 말이오. 세상에는 별의별 일들이 다 있으니 그리 마음에 두시지는 마시구려.”

역시 대표로 온 사람이라 그런지 숨겨진 뜻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조금씩 배려를 하겠으니 조정의 일에 협조해라, 이번 사건을 저지른 자는 보호해 줄 것이니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마라.

“기껏해야 광부(曠夫 - 홀아비)가 할 일이 없으니 일을 저질렀겠지요.”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양으로 내려왔다. 주요 목적인 발해 관련 기록도 충분하니 지리를 잘 아는 사람과 연결시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냥 동경용원부는 훈춘 근처라고 말을 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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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친놈이 맞았다, 다른 왈패들이 곤장을 맞는 사이 그냥 방면되었지만. 아내는 온몸이 깨물리고 두들겨 맞은 모습을 보더니만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았다.

“미안하오, 수양대군 어른께서 힘을 써주신다 하였는데 귀양길에 오를지도 모르겠소.”

“대체 무슨 짓을 하였기에 이러십니까!”

방안에 틀어박혀서 쥐 죽은 듯이 지냈다. 여기서 도망쳐 보았자 야반도주밖에 더 되겠는가? 이미 수양대군이 손을 써놨는지 경덕궁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왕태조의 동상이면 분명 상왕께서 없애라 명하신 것인데. 이거를 내 손으로 파서 꺼냈으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내가 미쳤지 진짜.”

수양대군에 대한 원망은 생기지도 않았다. 보름 동안 열심히 해왔고 아마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각한 것이겠지. 모두가 다 자신의 탓이다.

보물을 찾으려고 북쪽 능선을 택한 것이라야 변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파 내려가던 땅이 이상하면 즉시 보고를 했어야 한다. 거기서 동상이 나오더라도 수양대군이 알아서 했겠지. 설마 나의 약점을 잡고 옭아매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나는 지금 머리가 좋다 자부할 뿐이지 이렇게 멍청한 짓을 저질렀잖아. 이런 나를 어떻게 하려고? 당장 매월당도 나보다 머리가 좋던 것 같은데.”

가문의 뒷배? 세상에 명문가는 넘쳐나고 청주 한씨는 중간보다 조금 위일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그런 일을 싫어하긴 하지만 수양대군의 신분이면 말만 해도 윽박지를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열흘이 지났다. 온갖 난리가 벌어졌지만 수양대군이 어떻게든 손을 썼는지 자신은 여전히 멀쩡하다.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벌써 열흘 동안 집에 있는데 알 길이 없다고.”

이미 수양대군은 한양으로 내려가고 며칠이 흘렀으며 자신이 발견한 왕태조의 동상은 유수부에 모셔져 있었다. 그렇게 근신 명령이 풀리지 않은 채로 이틀이 더 지나서 손님이 왔다.

“한명회 있소?”

“무슨 일이십니까?”

“수강궁에 계신 분께서 찾고 계시오. 서둘러 의복을 갖추고 한양으로 올라가시구려.”

수강궁에 계신 분이면 상왕이시다. 상왕께서 행했던 일을 되돌려 버렸으니 상왕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뭐라 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게 터덜터덜 한양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 벌을 내리시려고 했으면 주상전하께서 부르실 일인데 상왕께서 부르시니 쓴소리를 들을 것 같다. 다행이 단번에 수강궁으로 향해 내관의 안내를 받아 안뜰로 들어갔다.

“상왕전하를 뵙습니다.”

“자네가 한명회인가? 조금 일찍 왔으니 황 정승과 이야기라도 나누도록 하라.”

잠시 얼굴을 비춘 상왕께서는 다시금 자리를 비우셨다. 구석을 바라보자 사람인지 유령인지 모를 늙은 자가 구부러진 허리를 억지로 펴면서 돌아봤다.

“황…… 정승님?”

“청주 한씨의 명회라 하였는가. 상왕전하께서 자네에 대한 일을 알려주셨네.”

“제가 천하의 몹쓸 일을 저질렀습니다.”

“알아, 내가 다 알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는 나의 뒤를 따르게나.”

나의 뒤를 따르라? 황 정승이라 하면 이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일을 해왔던 자이며 자신을 손자로 볼 사람이 아닌가? 저 묘한 웃음을 보면 농담이 아니고 진담 같은데 왜 이러지?

“그래, 관상도 아주 좋아. 자네는 잡생각만 없으면 아주 좋겠어.”

“저를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좋다는 말만 들으니 소름이 돋는다. 저 웃음도 묘한 것이 나의 불행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렇게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기다리자 상왕께서 다시금 부르신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자네가 어떠한 일을 저질렀는지는 이미 수양대군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염려하지 말라.”

“상왕전하께 누를 끼쳐드려 송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내 뜻이 어떻게 되었던 주상의 뜻이 분명하여 개성의 민심을 돌리려 하니 그것을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적어도 주상전하와 상왕전하 두 분은 모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그것만이 아니지 않은가.

“하오나 제가 나라에서 일을 할 수 있을지 그것이 염려됩니다. 조만간 개성 일대에는 소문이 퍼질 것이며. 제가 행한 일은 도굴(盜掘)에 속하는 일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한가?”

“조정에서 일하려 하여도 개성 출신의 신하들이 적다 한들 소문은 천 리를 갑니다.”

“그렇다면 몸이 변하면 알아보기 힘들어지겠지. 그러면 모를 것이네.”

몸부터 달라진다? 사람이 타고 난 체구를 어떻게 변하게 하란 말인가. 막 먹어서 살을 찌우면 조금은 달라질까? 하긴 몸이 변하면 인상도 변하긴 하지.

“그렇다면 체격을 크게 만들도록 식사를 많이 하겠습니다.”

“그건 아닐세. 자네는 행해온 것을 보면 잔재주는 충분한 것 같지만, 몸이 부족한 것 이전에 배움이 부족하니 관직에 나설 수 없다네. 그렇다면 해결할 방법이 있지.”

“설마 몸과 배움을 행하는 곳이라 하시면.”

이제야 황희가 웃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놈의 윤 생원이 말하기를 수양대군 아래에서 몸을 키우고 배움을 얻었다 하였는데 설마 그 지옥 같은 입신체비를 행해야 하는가?

“자네에게 어떠한 벌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3년 동안 배재당에서 근면히 생활하면서 입신체비를 익히고 성실함을 몸에 주입하게. 입신체비를 열심히 하여 온몸의 근육이 늘어난다면 벗들조차 쉽게 알아보지 못할 것이네.”

“전하께서 내리는 명을 충실히 행하겠사옵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그놈의 입신체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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