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25화 - 칠삭동이(1) >
1452년 3월, 공식적인 업무이지만 사료를 찾는 것이기에 나와 김시습 단 두 명만 개성으로 향하기로 했다. 개성의 관리는 많으니 일에 쓸 사람 정도는 충당이 가능하다. 형님은 최종 확인을 위해 다시 나와 김시습을 불렀는데 내가 처음으로 천거한 사람인 김시습을 보려는 생각이겠지.
“개성 유수부에서도 나라의 일을 도울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전조는 달자들의 난(여몽전쟁)과 말년에 각지에서 난이 빗발쳤으니 서책이 소실되었을 것 같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형님은 별반 기대를 안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대를 했으면 사람도 잔뜩 보냈겠지만 나와 김시습 단둘을 보낸 것은 별반 기대도 안 하고 나에게 잠시 휴가를 준다는 소리겠지. 내가 천거한 인재인 김시습과의 대화만 들어도 충분히 보인다.
“김시습이라 하였는가, 일전에 유제학 김반의 제자를 시켜 교지를 보내라 하였는데 그대가 스승을 설득하였다 하더군.”
“그렇사옵니다. 주상전하의 혜안에 제 스승님이 관직을 얻으셨으니 크나큰 성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떠올려보니 그대를 어린 시절에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어린 시절에는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번 기회에 견문을 넓히도록 하라.”
견문을 넓히라는 말은 무리하지 말고 인맥 키우고 세상 돌아가는 것 좀 알라는 말이겠지.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지 한 가지 일을 더 주신다.
“개성에 직접 들르는 일이니 목청전(穆淸殿 - 이성계의 잠저 중 하나, 어진이 봉안되어 있으며 제사를 지낸다)에서 제사를 주관하고 시간을 내어 관리들에게 입신체비를 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하라.”
“입신체비를 알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관리들 사이에서 입신체비가 조금씩 퍼진다 하여 며칠 전에 각지로 입신체비 도구들을 보내왔다.”
겸사겸사 제사를 도우라 하는 말을 보면 정말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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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서도 살아온 지 어언 16년. 현대의 기억도 꽤나 사라져가고 아들도 이제 15살이 넘어서 내년이 되면 혼례 준비도 하면서 관례를 치르고 입신체비도 가르쳐야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정작 한양에서 하루 거리인 개성은 들어간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들어간 적은 두어 번 있었다. 명나라 사신으로 올라갈 때 태평관(太平館)에서 묵은 적도 있고 평양에서 염초전을 만들 때 임영대군과 한번 들러서 쉬다 돌아간 적도 있었지. 하지만 안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개성에서 어명을 받들어 일을 하시는 것은 처음이십니까?”
“그렇다네, 들른 적은 있지만 어명을 받들어 일을 하는 것은 처음이야.”
“하지만 체구가 워낙 장대하시니 대군 어른을 알아보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푸르륵 하면서 흑우가 고개를 털어 파리를 쫓는데 이게 비웃는 소리야 아니면 당연하다는 소리야. 하긴 내 몸이랑 말 그 자체가 신분증이나 마찬가지니까.
“주상전하께서도 너무나 어려운 명을 내려주셨습니다. 개성의 왕 씨들은 아직도 원한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면 차라리 쉬운 것이네. 전조가 시작될 무렵에 들어온 대광현(大光顯)이 왕 씨의 성을 받았는데 그의 후계자를 통해 발해의 기록을 찾아야 하니까.”
“대체 어떠한 나라였습니까?”
“먼 옛날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의 후계자들이 세운 나라일세.”
김시습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내가 간단히 요약해 주는 발해의 역사(상상과 추측이 많이 들어갔다고 변명 섞인 말은 했다)를 계속 들으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나라가 한순간에 멸망하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런데 찾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대광현이 왕 씨의 성을 받았으니 사료가 제대로 남아 있으려면 모든 난리를 이겨냈다 하여도 그의 후손들이 성씨를 잘 갈아타거나 아니면 헤엄을 잘 쳐야 했을 걸세.”
“그것이야 신하들이 저지른 잘못이 아닙니까. 그렇다 하여도 원한을 짊어지는 분은 태조대왕님이 되셨기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게 조선의 공식적인 태도이다. 지배층이 바뀌면서 기존의 기득권층을 압박하는 수준에서 끝난 것도 아니고 방계는 무조건 성을 갈아버리고 직계들은 정말 철저히 죽였고 발뺌하는 방식이다. 그나마 형님은 역사대로 왕씨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려는 생각 같다.
“다 왔네, 지나다닌 적은 많지만 직접 개성 안까지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
저 멀리서 개성 유수 기건(奇虔)이 관리들을 끌고 마중을 나온다. 개성 유수부는 현대로 치면 광역시 수준이며. 경기도 관찰사와 개성 유수가 같이 다스리는 곳이다.
“대군 어른께서 오셨으나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쁜지라 염치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말은 하지 마시구려, 주상전하의 명을 받아 왔으나 가급적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니 염려는 마시오.”
기건 이 양반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명망이 있는지 수양대군의 기억으로 보충이 된다. 청백리로 유명한 사람이고 거기에 누나가 큰할아버지인 정종의 아내 숙의 기 씨다. 집안 친척이니 깍듯하게 대해야지. 이 사람이 생육신은 아니더라도 관직을 포기했던가?
“다들 대군 어른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하다니 미안하구려. 본래 개성에는 오지 않으려 하였는데 어명인지라 방법이 없었소.”
“아닙니다, 개성의 젊은 관료들이 입신체비라는 학문을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 저도 대군 어른의 시범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기건의 표정을 보니 자신도 나이가 적었으면 당장 뛰어들고 싶다는 표정이다. 그렇게나 인기가 있단 말이야? 그렇게 개성 시내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떼를 지어 뛰어다니는데 아이고 세상에! 우려하던 일이 바로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미륵이니라!”
“닥쳐라! 거짓된 미륵 주제에! 내가 충신 신숭겸이다!”
“마구니를 때려죽이겠다!”
그놈의 내수린이 몇 개월 사이에 개성으로도 퍼졌는지 아이들이 서로 바닥을 뒹굴며 흙투성이가 되었다. 음력 3월은 농사가 제법 복잡한데도 길거리에서 저 정도면 이번 가을부터는 장난 아니겠군. 잠시 뒤에 쏜살같이 달려온 아이들의 부모가 따라와서 귀를 잡아 집으로 끌고 간다.
“신숭겸이 뭐고! 궁예가 뭐고! 태조대왕님이 또 뭐고!”
“자꾸 이런 버릇없는 짓거리를 할 것이냐!”
“여기에는 태조대왕님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악 아아악!”
민심이 안 좋다고 하는데 정말 안 좋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살짝 싸늘한 기운이 돌기도 하는 수준이다. 왕건은 고려의 왕이어서 조선 건국 이후 구분을 위해 왕태조(王太祖)라고 불렀지. 평가가 높아도 이 나라의 태조는 이성계니까 한양이었으면 혼쭐났을 일이다.
“그것참…….”
“사람들이 많이 다르지요? 아직도 앙금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관아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업무 이야기를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형님도 한 달 동안 반쯤 쉬고 개성 상황파악이나 하라고 보낸 것이지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이오.”
“물론입니다. 대광현이라는 자가 왕태조의 휘하에 들어왔다 하는데 그의 후손을 찾는 것이 문제이지요.”
“한양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차라리 쉽습니다. 김 씨라는 성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김 서방은 성이라도 있으니 쉽다고? 틀린 소리는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족보를 뒤져봐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우리 세종대왕님 덕분에 힘들게 되었다. 왜냐고? 세종대왕님은 고려사를 편찬함에 있어 역사라고 분리해서 보았을 뿐이지 왕씨의 힘을 빼놓는 일에는 철저하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1413년, 공식적인 왕씨 제거는 끝이 났지만 여파는 1417년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세종대왕님이 쐐기를 박은 것이 1426년과 1428년에 걸쳐서 역대 고려왕과 왕비들의 영자초도(影子草圖 - 어진)를 불태워 버리고 조각상들을 파묻어 버린 사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나타나 족보를 비롯한 서책들을 보여달라 하여도 내놓지 않겠군.”
“분명히 해코지를 입을까 두려워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행하실 적에는 바른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힘에 겨운 일이구려.”
세종대왕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사회의 근간이 유교이고, 내가 주장하는 것이 입신체비서의 기본 관점이 효도라는 점이다. 내가 혹시나 철저한 실용주의에 입각한 행동을 해왔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왕이 무엇인가 정책을 벌였으면 자신의 대에 되돌리거나. 그 정책으로 손해를 입은 여러 세대 아래의 왕이 되돌릴 수 있다. 유교의 교조화가 진행되지는 않았어도 유교의 논리가 이 나라의 기본적인 사상의 바탕이니까.
“하오나 주상전하께서는 왕씨를 돌보시려는 생각 같습니다.”
“그렇소?”
“얼마 전에 공주(公州)에서 제우지라는 자가 실은 왕씨라는 제보를 받아 잡혀 왔는데. 전하께서 친히 명을 내리시어 숭의전(崇義殿) 부사로 임명하고 제사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비와 전답을 내리라 하셨습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도 하다. 형님이 날 보내기 전에 미리 기름칠을 해두려는 목적이었는가 아니면 정말 뜻이 있어서 행동한 것인가. 어느 방향이든 그럭저럭 괜찮은 일 같다.
“그렇다면 조금은 쉬워지겠구려, 개성 유후로 있으시니 왕우지의 상관으로 있으며 전조의 제사와 전조의 왕릉을 관리하고 있겠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형식적입니다. 개성은 아직도 한을 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곳이지요.”
“형식적이라 함은, 그저 제사를 지낼 시기를 대충 정해서 한단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그나마 주상전하께서 은혜를 내리기는 하셨지만…….”
숭의전이면 현대 기준으로 연천에 있는 그 작은 사당을 말하는 것인가. 형님 입장에서도 이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으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다. 세종대왕님이 해왔던 일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으니 사당의 격을 올리고 공신들도 배향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했지.
난이도는 조금 내려갔지만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뺨을 있는 힘껏 마구 때려놓고 떡 하나 쥐여주고 만 상황에서 내가 뭘 얻어낼 수 있을까. 당장 내가 족보를 보자 하면 태워 버릴 수작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알겠소, 일단 외가의 성을 따른 것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야 하니. 외가로 성을 바꾼 전조의 가문들을 모두 찾아 주시구려. 그리고 혹여나 문헌에서 계(繼)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나 찾아야겠소.”
“사람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찾아 나서려 하실 때 몇 가지 당부해 드릴 게 있습니다.”
계속 이어진 이야기는 내 귀를 의심하게 했다. 관직에 오르기 힘든 자들이 대부분이니 학식을 논하여 보았자 관심이 없다 변명할 것이라 소용이 없을 것이고, 개성을 아직도 개경이라 부르는 것이 당연하며, 한양에 내려간다고 말을 하니까(한양은 왕이 있는 중심지이니 무조건 올라가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렇다면 왕우지의 집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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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를 받아서 찾아가니 숭의전 부사 왕우지는 날 만나자마자 바짝 긴장해 있다. 체구도 작고 눈도 커다란 것이 치와와 같기도 하다. 혹시 조금만 흥분하면 몸을 부들부들 떨지 않을까?
“네? 왕계라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전조가 막 개창할 무렵 북쪽에 있던 나라 발해에서 내려온 대인선이 왕태조에게 새 이름을 받았네.”
“아니, 그것이, 저는 당장 현종대, 아니, 현종의 후손인데 말입니다.”
현종이면 고려 8대 왕이잖아? 대광현이 고려로 왔을 시기를 생각해 보면 연관 자체가 있을 이유가 없다. 혹시나 모르니까 자료는 찾아보자.
“혹여나 족보는 있소?”
“족보라고요!”
“아 아니오, 전조 시절부터 내려온 선원록(璿源錄 - 왕실 족보, 족보를 높여 부르는 말) 말이오.”
치와와 맞네. 내 덩치만 봐도 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못 하는데 내가 말실수를 하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부라린다. 잘못하면 물릴지도 모르니 되도록 말은 조심히 하자.
“선원록이라 하여도 조정에서 이미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를 집필하면서 참고자료로 본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우왕과 창왕이 들어가 있는 차이만 있다(조선 시대이기 때문에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반역열전에 등록되어 있다). 방계들 간의 족보는 아예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으니까.
괜히 시간만 버렸다, 내일은 왕실의 일원으로 후릉에서 제사를 주관해야 하니 경덕궁에 묵고 목청전에 가기로 했었지. 혹시나 한명회 그놈이 나와서 인사하는 것 아닐까? 하고 흑우를 타고 들어왔는데 오히려 김시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과는 있었는가?”
“고작 하루를 본 것이라서 성과랄 것까지도 없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라네. 지금부터는 일이 고달파질 것 같군.”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경덕궁 내부를 둘러보니 반가운 대역기가 보였다. 나름 맷돌로 만든 공령과 참나무 막대로 만든 대역기봉이 있었는데 내 중량을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120근 정도이다.
“입신체비를 하고 주무실 것입니까?”
“물론이라네. 그렇지만 이 대역기는 자네 수준에 맞는 무게군.”
옆에서 종알거리는 김시습에게는 적당한 무게지만 내 기준으로는 턱도 없는 무게이다. 한양의 대장간에서 미리 경덕궁으로 보내둔 공령과 대역기를 찾았는데 한쪽 구석에 쌓여있다.
그런데 역기봉에 40근 공령 4장만이 있네? 분명 여기로 출발하기 전에 미리 보내놨으니 늦어도 오늘쯤이면 도착했을 건데? 그런데 밖에서 도와달라는 소리와 야유소리가 들린다.
“좀 도와주시오! 이러다가 허리가 부러지겠소!”
“자네의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이니 앞으로 입신체비를 하게나!”
저 멀리 수레에 쌓여 있는 공령을 누군가가 낑낑거리면서 한 장씩 옮기고 있었다. 벌써 비지땀을 흘리는 것이 다 옮기다가는 어디 한군데 크게 망가질 것 같다. 어디서 입신체비를 사람 괴롭히는 수단으로 쓰고 있나.
“거기 자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옮기게!”
“네?”
내가 수레로 달려가서 직접 공령을 옮기기 시작하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관원들이 모두 달려와서 힘을 보탰다. 그렇게 경덕궁 뿐만 아니고 개성에 있는 관리들이 돌아가면서 하면 충분한 양의 입신체비 기구들이 순식간에 옮겨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남을 겁박하려고 입신체비를 가르쳤던가!”
“죄송합니다. 절대 이러지 않겠습니다.”
“내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대들을 직접 가르칠 것이네!”
다들 고개를 조아리면서 잘못을 빌 뿐이었다. 이런 조직적인 따돌림이라니 혹시나 했는데 이 사람이 설마, 이 체구도 작고 메기수염을 기른 자의 정체는.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아니라네. 그나저나 자네 혼자서만 입신체비를 하지 않는 것 같던데.”
“아 그게 며칠 행해보았으나 몸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서.”
며칠 행해보았으나 나아지는 것 같지 않는다는 말은 집중력이 떨어지고 잔머리를 굴린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30세가 넘도록 과거도 보지 않고 경덕궁 문지기로 일하고 있다. 이놈 한명회 맞지?
“처음에는 근면하고 나중에는 태만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하라. 내가 늘 바라는 것일세. 그렇다면 조금 더 근면해 짐은 어떠한가.”
“아니, 저기 저…….”
본인의 유언을 미리 들은 소감은 어때? 라지만 이 시기의 한명회는 그냥 따돌림당하는 잉여 인간에 불과하다. 오히려 내가 한 말에 감동했는지 양손을 움켜쥐면서 다시금 열의를 보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본 관리 하나가 뒤로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삼 일이 한계이더군요.”
아무래도 한명회에게는 특별 관리가 필요할 것 같다. 아주 특별한 관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