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8화 - 만들어진 복수(1) >
1451년 10월 1일. 아구지는 지속적인 정찰로 적의 영역을 대략 파악했으며. 말을 살찌우고 곡식을 가득 쌓아놓았다.
지난 9개월 동안 다른 부족들은 마음껏 날뛰었다. 두만강 동북면 인근의 야인여진 부락 3개를 복속시켰으며. 1개를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얻어낸 수많은 재물은 고스란히 조선에 팔렸고. 석감과 곡식 그리고 더 많은 무기로 바뀌었다.
복속된 부락들은 별다른 반항을 하지도 않았고. 일대 야인여진들은 아직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혹시나 몰라 다른 족장들에게 물어보자 퉁명스러운 답이 나왔다.
“이봐. 혹시나 놈들이 뭉칠지 염려되지는 않나?”
“뭉쳐? 우리가 수백단위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기백 내외로 움직이면서 작은 놈들만 건드렸으니 문제는 없다네.”
그렇게 다른 부족들이 주변을 떠돌며 작은 부락들을 복속시키는 동안. 아구지는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명분조차 없는 복수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훈련도감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아구지는 한달음에 경원으로 향했다.
경원부의 관아에 부설된 병영에는 기존에 있었던 훈련도감군 3기 인원들이 중강진(4군 지역의 새 명칭) 일대로 이동하고. 빈 자리를 소수의 1기와 2기가 채워나가고 있었다. 마침 이맹전(李孟專)도 역관과 함께 반갑게 맞이하였다.
“미안하군 판관. 도감군의 도착이 며칠 늦어서 미안하네. 바람이 거세지 않았으면 조금 더 빨리 도착했지만 며칠 동안 원산에 대기하느라 늦었지.”
이맹전이 병영에 있는 잡부에게 말을 전했고. 잠시 뒤 병영 안에서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훈련도감 특유의 인사. 경례를 했다.
“충성! 절제사 대감께 인사 올립니다.”
“도착한 날 들어서 알고 있지 않나. 자네가 만나야 할 자는 판관 아구지일세.”
“처음 뵙겠습니다. 병마단련판관(兵馬團鍊判官)이자. 조선에 입조하신 건주위의 족장 아구지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바…반갑네.”
홍윤성은 직속 상관이 아니니 충성이라는 구호는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인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첫 인상이 박혔다.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에 상대를 알아본다 하던가. 아구지는 쇠투구를 쓴 자들을 경원부에서 만났을 때. 아무런 감정이 없이 무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풍랑에 시달려서 그런지 안색이 초췌했지만. 눈빛이 사람 같지가 않고 굶주린 늑대 같았다. 아니 늑대의 야성 이전에 사람다운 지적인 인상도 남아있었으니 대체 어떤 일을 해왔단 말인가. 절제사 이맹전이 그렇게 칭찬할 만 했다.
“그만하면 되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야지.”
“저희는 언제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아니네. 현지의 일은 현지의 사람이 잘 아는 법이네. 당연히 북변에 대해 아는 이는 앞의 판관이 아닌가.”
아직 함길도 남부의 익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제 소집 명령이 떨어져서 한창 북방을 향해 이동하고 있겠지. 그렇게 회의실에 여진족들이 좋아하는 차가 놓이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조선군과의 합을 맞추는 일은 처음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나도 마찬가지일세. 이곳의 군권을 잡고 있긴 하지만 경험은 소탕에 나선 것 한번이네. 하지만 자네들은 이미 두 번이나 북방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여도 절제사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농담도 못 한단 말인가. 그렇게 헛웃음을 지은 이맹전은 가장 먼저 행할 일을 이야기했다.
“먼저 척후군(斥候軍 - 정찰대)을 보내는 것이 답인데.”
“이미 정보는 많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깊숙이는 들어가지 않았지 않나.”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홍윤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훈련도감의 최고참이지만 그도 잘 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문제라니?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희는 말을 능숙히 타는 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기껏해야 400명중 20명이 될까 말까이니까요. 차라리 익군이나 토관중에 사람을 뽑아 보내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아구지는 순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저들의 무장을 보면 말을 타고 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창을 제외하고는 전부 보졸들이 쓸 무기였다. 그러고 보니 활도 없네? 확인을 위해 다시 물어보았다.
“저기 그러면 활도 못 쏘나?”
“네. 저희는 보총을 쏩니다.”
“보총은 소리가 요란하지 않나?”
활이면 맞은 놈의 비명소리만 나지만 보총은 사방팔방에 소리가 다 퍼진다. 아구지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만 잘 죽이는 놈들 같으니! 대체 다른 거 안배우고 뭐했느냐! 라는 소리가 나왔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는 갔다.
이 자들은 사람을 잘 죽이고. 더더욱 잘 죽이고. 효과적으로 죽이는 것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부은 것이다. 그러니 보통 장수처럼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자들이 아닌 것이겠지.
“홍 사맹(司孟)은 걱정하지 말게나. 척후군 이라 하면 산 속에서 움직이며 척후를 행할 때도 있는데. 고작 활을 쏘지 못한다고 문제가 될 것이 있나?”
“그렇다고 해도 말을 타고 추격은 못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말을 타고 있으면 이들이 머물고 있을 산 속으로 들어오지도 못하지 않나.”
옳은 말이긴 하다. 말이 올라갈 수 없는 험준한 지형에 콕 박혀있으면 보지도 못하고. 흔적을 발견해도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무시하니까.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산 속만 다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대로는 안 됩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합니다. 저희 건주위 사람들로 정찰을 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겨울의 산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걱정하지 말게나. 주상전하께서 천리경(千里鏡)이라는 기물을 내려 주었다네. 이것을 척후군에게 지급하도록 하지.”
“이게 뭡니까?”
대나무로 만든 통 양쪽에 조금 편편해 보이는 수정이 매달려 있었다. 이걸로 뭔가를 보란 말인가? 홍윤성은 통에 눈을 대고 멀리 있는 바라본 순간 깜짝 놀랐다. 저 멀리 있는 산이 몇 배는 커진 것이다.
“천리경은 멀리 있는 것을 크게 보이게 만들지.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4배 이상 크게 보이게 한다네.”
“좋은 기물이군요.”
수정을 깎아 만드는 일이 복잡해서 천리경은 고작 12개만 있었다. 그러나 12개면 충분하다. 눈이 밝은 자들이 돌아가면서 본다면 정찰이 훨씬 쉬워진다. 그 사이 이맹전이 지도를 펼쳤다.
“그동안 아구지를 비롯한 족장들의 증언을 모아서 만든 지도라네.”
“일단 판관님의 휘하에 있는 건주위는 주변 지리를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아구지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작 모아보니 녀석들의 영역이 생각보다 넓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아주 멀리까지는 모른다네. 기껏해야 북쪽으로 140리(56km) 거리에 있는 마을 근처만 돌아다녀 보았지. 거기서부터 올적합 놈들이 오간다네.”
아구지의 손가락이 지도를 스치며 지나갔다. 북방으로 나아갈수록 산은 깊어지고 길은 좁아졌다. 이 말은 함부로 길을 향해 나아가면 단번에 들킬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여기에 기록을 취합한 이맹전의 손가락은 더 동북쪽을 짚었다.
“판관이 거느린 병력이 정찰한 곳은 유선참(留善站)이라 불리는 곳이지. 기록에 따르면 올적합의 거점인 거양성(巨陽城 - 현 왕청현 동북쪽 나자구진)은 동북 면으로 70리(28km) 인근에 있다네.”
동북면 일대의 지도에는 이미 복속의 의사를 표현한 몇몇 부족들의 이름이 녹청색으로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올적합(兀狄哈)에 소속된 자들도 있었지만 일단 복속의 의사를 표현하면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결론을 내리겠네. 함길도 일대의 복속된 야인들의 영토와 아직까지 올적합의 무리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장소를 통해 산을 타고 들어가게. 훈련도감은 자신이 있지 않나.”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산세가 험하다 한들. 자신들의 첫 임무인 이만주 토벌전 보다 험할 리가 있는가? 이제 10월이 다 되어서 추위가 몰려오겠지만. 이미 함흥에서 한번 경험한 일이었다.
“정말 가능하겠소? 겨울이 다가오니 창고에 쌓여있는 늑대 모피라도 좀 줘야겠는데.”
“그러시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조선에서 온 장인들은 자신들이 모르던 창고도 만들어줬다. ‘아아 이것은 창고라는 것이다.’ 라는 말은 왜 했는지 몰랐지만 뭔가를 쌓아서 보관하니 무조건 좋았다. 요즘 값이 좀 떨어져서 창고에 쌓인 늑대 모피라면 충분하겠지.
“기한은 보름으로 하지. 아구지 자네는 날랜 이 백 명 정도를 모아서 이들을 말 뒤에 태우고 이동하게. 나는 중간에 통역을 담당할 노련한 토관 오십을 보내겠네.”
“그렇다면 10개 조로 움직이는 겁니까?”
“그렇다네. 각 조는 건주위 출신 10인, 토관 5인, 그리고 훈련도감군 10인이네. 사방으로 움직여 거양성으로 향하는 길은 물론이고. 인근의 부락들을 모조리 파악하고 돌아오게나.”
명령과 동시에 홍윤성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사흘 뒤에 경원부에서 두만강 유역으로 향한 아구지의 부족민들과 토관들 그리고 도감군은 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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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동안 말안장 위에서 시달렸다. 홍윤성을 비롯한 훈련도감군 인원들은 슬슬 피로함을 느꼈다. 말조차도 하루 40리 정도만 움직일 정도로 길이 험했던 것이다. 훈련도감의 행군속도와 차이나지 않았지만. 조선의 병사들은 일대의 지리를 모르니 도움이 필요했다.
“여기요. 이 지역 북쪽부터는 죄다 올적합이 살고 있는 땅이지.”
“저 멀리 천리경으로 보니 부락 하나가 보이는데.”
“그건 혐진(嫌眞) 놈들이오. 올적합 놈들의 분파인데 반쯤은 손 놓은 놈들이지.”
애매한 위치에 애매한 부락이 있었다. 천리경을 들어서 보았는데 규모는 크지 않은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홍윤성이 다시 물어보았다.
“접촉은 해 보았소?”
“북쪽 올적합 놈인지 알고 둘 정도 죽인 것이 전부요.”
“이런 망할! 지나간 일이니 되돌릴 수는 없지. 여기서부터 계속 북으로 향하면 되는 것이오?”
“그렇소. 앞으로 보름 뒤에 이곳에 다시 오겠소.”
그렇게 홍윤성을 포함한 척후군 1조를 내려놓은 아구지의 부족에 속한 족장은 말을 달려 동쪽으로 향했다. 훈련도감 출신들이 산을 타고 정찰하는 사이. 혹시나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서 놈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로 한 것이다. 저 멀리 서쪽 인근에서 자신들이 보인다면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쓰기는 힘들거다.
그렇게 행군은 계속되었다. 함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추위가 도감군의 온 몸을 때렸다. 눈도 별로 없어서 물을 구하려면 한참을 움직여야 하였으니. 근처에 강이 있다지만 함부로 가기는 힘들었다.
“개털냄새 지독하네.”
“참아. 산속에서 몸을 식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우리는 산에서만 사는 것 같습니다. 처음 배정되어 훈련을 뛴 곳도 산이고. 처음 임무를 행한 곳도 산이고. 요동에 가서도 산에 진을 차렸고. 이제는 산을 오르네요.”
일대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들이 원시림을 간직한 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해가 순식간에 지는 곳이어서 빠르게 준비해야 했다. 훈련도감의 사람들은 그럭저럭 쉴 만한 곳이 나오자 해가 기울어지기도 전에 천막을 쳤다.
“바닥에는 거적대신 모피를 깔아둘까요?”
“좋은 생각이군. 그래도 습기를 먹지 않게 조심하게.”
물을 아끼기 위해 얼음이나 약간 쌓인 눈을 모닥불에 녹여서 먹는다. 그리고 밤이 되자 매서운 산바람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추위였다. 음력 10월이지만 이미 영하를 넘은 지 오래였다.
“어우 춥군요. 이거 함흥 생각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더 큰일은 이 천막을 치워야 하는 거야. 함흥에서는 하루에 산 하나를 올라갔지만 여기서는 이틀에 산 하나를 올라가야 하지.”
보름의 시간동안 70리를 움직일 수 있을까. 그나마도 길을 따라 움직였을 때 70리 이다. 산은 돌아가는 일이 빈번하니 그 길이 곱절인 140리가 되어도 할 말이 없다.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잠을 억지로 청하였다. 그렇게 새벽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끄…억!”
“오 온몸이 굳었…어…….”
눈을 뜨자마자 가슴이 아려오면서 숨이 막혔다. 그리고 몸을 뒤척이자 개인용 천막에 맺힌 작은 고드름이 이마 위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찾아온 혹한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얼려버렸다. 함흥은 비교적 따듯한 곳이라는 소리를 믿지 않았지만. 정말 북변의 추위를 몸으로 체험해보니 알 수 있었다.
“이봐! 발가락 안 움직이는 사람 있어?”
“난 다 움직여!”
“나도 다 움직인다!”
천만 다행으로 챙겨온 모피가 도움이 되었고. 남한산에서 배운 지식도 도움이 되었다. 혹한에 발을 지키려면 모닥불에 덥혀놓은 돌을 침낭 아래에 깔고 자라는 말이 있었는데 직접 해 보니 동상을 막을수는 있었다.
그렇게 행군은 계속되었고. 닷새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올적합의 북쪽 근거지인 거양성 인근에 도착하였다. 혹시나 몰라서 새소리가 나는 교신용 호각을 불자 저 멀리서도 똑같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몇 조가 모였는지는 몰라도 다른 조들은 다 도착한 모양이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킬 수도 있었습니다.”
“들키지 않았으니 좋은 것 아니겠나. 흔적을 밟힌 적은 있긴 했지?”
한번은 사냥중인지 정찰중인지 모르는 여진족 셋이 자신들의 뒤를 밟은 적이 있었다. 천만 다행이도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서 발자국을 계속 추적할 수는 없었고. 자신들이 멀리서 천리경으로 감시중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본업인 사냥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자들 사냥을 나온 이들 같은데. 함부로 죽였으면 벌 받았을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나 정말로 은퇴할 생각이네.”
“네?!”
지금까지 출세의 화신 같은 모습을 보였던 홍윤성이 이런 말을 하다니. 다들 입을 벌렸지만 홍윤성의 입에서는 담담한 소리가 나왔다.
“생각해봐. 여진족 애들도 입조해서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여태까지 전쟁을 두 번이나 참가했고 이번이 세 번째야. 맨날 땅개고 맨날 전방에서 구르지.”
“그래도 조금만 더 있으면 제대로 된 군관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 썰어버리는 것도 이제 지겨워. 그냥 적당한 후방에서 남은 근무시간 때우고. 잡색군 애들 가르치면서 녹봉이나 받으며 살다 혼인하고 자식 낳아야지. 이미 자식 기르고 결혼할 돈은 챙겨놓은지 좀 되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을 한 듯이. 홍윤성의 입에서는 계획이 술술 새어나왔다. 다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