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15화 - 북방 개척(3) >
상인이 손뼉을 쳐 시종을 불러오고. 시종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미곡교환용 저화(楮貨)를 가져왔다. 일곱 장의 저화에는 각기 ‘육진 유통 저화’와 ‘조선국 국왕’이 있었다.
“이 종이는 뭐요?”
“여기서 너무 많은 물산이 돌면 안 되니 처한 조치입니다. 저기 관아에 가시면 곡창에서 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근처 가게에서 다른 물자로 바꾸셔도 됩니다.”
“조선은 이런 종이쪼가리를 쓰는 것인가?”
“아닙니다. 주상전하께서 친히 내리신 조치입니다. 이곳이 아직 불안정한 곳이라서 말입니다.”
듣고 보니 길거리에 쌀이나 포목을 올린 수레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면 몰라도 도둑질을 하려는 자들은 많으니까. 그렇게 시종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경원부 절제사가 있는 진영이 보이고. 쑥색 옷 위에 갑옷과 철투구를 쓴 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여기서 쭉 가시면 창고가 있습니다. 거기서 쌀을 찾아 가시면 됩니다.”
“알겠네.”
아구지는 먼발치에서 보았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전투에 참가했던 자들이 말하기를 ‘쑥색 옷을 입고 쇠투구를 쓴 조선 병사는 끔찍하게 강하다.’ 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경비에만 저 정도의 인원을 투입한다면?
“조선에서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일인지. 여차하면 쓸어버리겠다는 소리인지 모르겠군.”
“둘 다 아닐까요? 지난번에 300호 규모 부락이 싹 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시비를 걸어봤자 답이 없었다. 그놈의 보총인지 뭔지를 들고 있는 자들도 저 멀리 망루에 있었으니.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창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거 잘 도정된 쌀이네요.”
“우리가 이런 쌀을 먹어도 되는 거야? 이리도 새하얗다니 죄를 저지르는 기분이야.”
분명 명에서 받은 것은 곡식 같은 것이지 이렇게 새하얀 도정된 쌀이 아니었다. 물론 삼남지방의 묵은 쌀이지만 서로 관점의 차이가 있으니 상관없었다. 관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별 다른 감정도 없이 말했다.
“750석을 모두 쌀로 가져가겠소? 삯을 좀 주면 마을로도 보낼 수 있소만.”
그래도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 약간의 쌀을 제외하고는 모두 잡곡으로 바꿔서 보내고. 시장의 상황을 알아보러 갔다.
“눈 감으면 코 베이는 세상이야. 기왕에 이런 곳까지 들어왔으니 알아볼 것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거 조선인이 생각보다 많은데요? 쇠투구 쓴 놈들은 계속 돌아다니네요.”
“여기 무기도 파나? 많이 팔지는 않을 것 같은데.”
슬쩍 들어봐도 제법 잘 정련된 철이었다. 함부로 쓰지 않는 한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고. 자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간도 하나 세울 생각이 있으니까 유지도 편하겠지.
“야 이 망할 놈아! 이거 부러졌잖아!”
“일부러 부러트려놓고 뭔 소리야! 여기 도둑놈이다!”
멀리서 누군가가 술을 거하게 마셨는지. 부러진 칼을 휘두르면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쇠투구를 쓴 자들이 오더니만 냅다 들고 있던 창대로 후려쳤다.
“꾸웩!”
“아오! 술 냄새. 이 망할 새끼가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절대 거슬리면 안될 것 같았다. 강하다는 말 답게 창을 순식간에 들더니만. 배에 한방. 등에 한방을 날렸고. 창대로 쳤는데도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돌 맞은 개구리처럼 찍 뻗어버렸다.
역시 싸우지 않기를 잘했어. 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걸어가자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당에 너도나도 거적을 깔고 술을 퍼마시는 여진족들이 보였다. 그 중 한명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구지! 여기네!”
“대낮부터 술판인가?”
“여기 술 좋다네. 아랄기(阿剌奇 - 원나라 시대의 증류주. 현재의 아르히) 같은 맛이 나는 술도 있어!”
아랄기를 언제 우리가 먹었다고, 어른들이 전해주는 맛이나 들었지. 그래도 모피 값을 비싸게 쳐준 덕분에 주머니는 넉넉했다. 소주라 하였나? 불꽃처럼 독한 술을 잔뜩 시켰다. 비싼 술이지만 기분이 좋아서 계속 목으로 넘어갔다.
“여기 개장국인가 뭔가 좀 개피 푹 적셔서 말아달라니까.”
“우린 그런 것 안팝니다!”
“거 나같이 많이 샀으면 말아줬다. 그래 신수가 훤하군.”
아구지는 술이 벌겋게 오른 이웃 족장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이대로 살고 싶지만 짐승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결국 모피가 떨어진다고 거주지를 옮길 수 없으니 주변으로 나서서 조선이 원하는 대로 상대를 복속시켜야겠지.
“당연히 신수가 훤하지. 처음에 준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 쇠솥도 4호에 하나씩 주고. 사람도 말하니까 찾아오고. 석감인지 뭔지도 주고.”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자신에게는 사람이 바로 왔지 요청을 해서 온 것이 아니다. 쇠솥도 2호당 1개씩 주어졌다. 혹시나 몰라서 한번 떠봤다.
“철 화살촉이라도 좀 많이 주지.”
“그러게 말이야! 딱 열 꾸러미 주더니만 이렇게 비싸게 팔아!”
“거 사람들 와서는 대충 집 짓고 대충 가지 않나?”
“대충은? 자네한테 온 자들은 성실한 자들이었나 보군?”
뭔가 조금씩 달랐다. 한번 떠보니 자신이 다른 족장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은 것 같았다. 혹시나 부락의 규모가 커서? 아니면 중요한 위치여서? 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혹시나 모르는데.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긴 누구야. 절제사 이맹전(李孟專) 그 양반이지.”
술이 계속 이어지면서 정보가 교환되었다. 그렇게 하루 죈 종일 술을 마시고. 편히 쉰 다음 부락으로 돌아갔다. 이제 석 달 동안 해온 일이 있으니. 앞으로 조선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다.
----------
그 무렵 마을에서는 사냥이 한창이었다. 석감이 부족하니 모피를 모아서 석감을 사자! 라는 생각이 앞섰고. 강 너머로 제법 진출해 사냥을 감행했던 것이다.
“잠깐! 잠깐! 저 고개 익숙한 곳이구나. 말을 조금 천천히 몰아봐라.”
“영감님. 한창 사슴 쫒아야 하는데.”
아구지의 부족에 속해있던 노인 한명은 얼마 전부터 산세를 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다 못해 54세의 노구(여진족 기준으로는 손자가 장성할 나이다)를 끌고 억지로 사냥에 따라 나왔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분명 이 산세는 익숙한데 말이야. 내가 조선에서 올라온 것이니 알 턱이 있나.”
“어르신! 사냥 하셔야죠! 어디에 표범이 있을까요?”
“자네들은 사냥을 하고 오게. 나는 말을 타고 다녀보겠네.”
“노망이라도 드신 것 아닙니까? 그냥 돌아가 보십시오.”
하지만 노인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익숙하다. 이 산세를 어디선가 본 것도 같았다. 기껏해야 자신이 말을 막 탔을 무렵의 일 같기도 했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닷새 이내에 오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말을 타고 정처 없이 달렸다. 말이 지치면 냇가에서 물을 배불리 먹이고. 사냥을 해서 먹고. 그렇게 이틀을 떠돌아다니고 나서야 기억에 남는 장소를 찾아냈다. 자신은 이 길을 알고 있었으니.
“여기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이 맞구나.”
한 수풀이 우거진 곳에 도착하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머나먼 이주 중에 기습을 당해 돌아가신 아버지. 자신은 어린 시절 너무나 멀리 떠나왔기에 다시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곳이 우리 올량합이 살던 곳이면. 지금은 누가 살고 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지?”
노인은 말을 몰아 인근 여진족 부락으로 향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늙은이가 선물로 철 화살촉 몇 개를 주니 그들의 입도 순식간에 열렸다.
----------
의문점은 산더미 같았지만. 앞으로 할 일도 산더미다. 물가를 알아냈으니 앞으로 부족에서 필요한 물자를 구해야 하고. 그렇게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노인 하나가 아구지를 찾아왔다.
“요즘 바쁩니다.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중요한 일이지. 이 곳에서 북동쪽으로 삼일 정도 올라가면. 우리의 옛 부족인 올량합(兀良哈)이 살던 곳이 나오네. 지금은 올적합(兀狄哈)의 세력권이지.”
“올적합이요? 그 싸움 잘하는 놈들 말입니까?”
“어릴 적의 일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네. 마을 어르신들이 나만큼만 말을 몰아도 충분히 알았을 것인데.”
올량합이라.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고 이미 자신은 요동 외곽의 일만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이 근처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이야기니 듣기로 했다.
“우리가 명에 입조하고 사십년도 더 전에 이주했지.”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고 보니 제 먼 친척인 먼터무의 거처도 이곳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그 먼터무가 왜 죽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게나.”
대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먼터무는 자신의 7촌이다. 이 노인네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이야. 잠깐 먼터무? 그리고 올적합?
“왜긴 왜입니까. 조선에 붙어먹고 잠시 조선에 붙어먹고?”
“올적합 놈들이 지금 상황을 보고자 잠시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조만간 족장이 먼터무의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를 할 것이 뻔히 보이지 않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노인네가 오래 살아서 그런지 생각이 깊긴 하다. 그래도 올적합이 멀리에 있겠지. 조선은 이런 관계를 다 아니까 멀리 배정했을 게 분명하다.
“올적합이 어디에 있기에 그러십니까?”
“소문을 알아보니 북쪽으로 90리(36km) 정도부터 그들의 영역이라더군.”
“이런 염병할! 거기 너! 일단 족장들 다 데려와!”
초조와 불안함이 집 안을 메웠다. 자신들이 싸우기 싫어해도. 북쪽으로 본격적으로 나가는 순간 올적합이 복수로 의심하며 자신들을 막으려 할 것이다. 올적합 뿐인가? 중심이 생기면 똘똘 뭉치겠지.
“족장님? 정말 먼터무가 이 곳에 살았고. 하필 올적합이 바로 북쪽에 있다구요?”
“올적합 놈들 막을 수는 있습니까?”
“근처에 조선군도 있고. 그놈들도 맨 정신으로는 300기 이상을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적이 대놓고 북쪽에 있는데 어떻게 나가서 활동합니까.”
부족을 안정시키고 주변을 살피며 하나둘씩 복속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북쪽에 원수지간인 놈들이 있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다.
“밖으로 치고 나가야 하는데 입구부터 적이 있다니. 이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조선 놈들이 생각이 없는 겁니다. 이건 가서 따져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아구지를 비롯한 족장들은 다시금 경원부로 달려갔다. 경원부에 넘쳐나는 쇠투구를 쓴 놈들도 점점 거북하게 느껴졌다. 혹시 그놈들 우리가 반항하면 다 죽이려는 수작 아닐까? 그런 의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절제사노 아니 절제사님을 만나러 왔다.”
“아니 잠시 만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방책을 대고 실랑이를 벌이는 아구지의 앞으로 쇠투구를 쓰고 있는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분노조절장애가 없는 아구지는 모든 분노가 사라지고 절차를 정확하게 밟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자. 절제사를 만나게 되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인가.”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를 이 땅에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대들을 이 땅에? 아 그래, 여기는 건주 좌위의 지도자인 먼터무가 살던 땅이었지.”
진하게 우린 찻물을 마신 아구지는 자신의 앞에 당당하게 있는. 경원부절제사 이맹전을 노려보았다.
“이런 곳에 저희를 보낸 연유가 무엇입니까. 이대로 북방에 나가면 온갖 놈들이 저희를 노릴게 분명합니다. 숨통을 막아놓고 풀어준다고 생색이라도 내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그렇게 무섭나?”
“온갖 놈들이 올적합을 중심으로 뭉칠 것이니 두렵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 건주위는 한때 두만강 북쪽에 있었으며. 48년 전인 1403년. 올량합(兀良哈)의 추장 어허출(於虛出 - 아합출)이 명나라에 입조하면서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부족은 요동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여기에 남아있기로 했던 자는 먼터무. 자신의 7촌이자 훗날 건주 좌위를 구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건주 좌위는 다시 회령(會寧) 일대로 옮겨왔으며. 조선과 다투기도 하고 회유되기도 하면서 양 세력간에 줄다리기를 하다. 강을 건너온 올적합(兀狄哈)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거기서 먼터무는 전사하고 부족은 서쪽으로 이주했다.
“지금이야 조선이 있으니 모르고 있겠지만. 훗날이 되면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입조할 적에 주상전하가 하신 말씀을 잊었나?”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족에서 보낼 수 있는 병력은 기껏해야 800호니 800명. 쥐어 짜내도 1600명이 한계입니다. 올적합 정도는 쓰러트릴 수 있지만 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문제가 이것이다. 다른 족장들은 기껏해야 한개의 부락을 상대하거나 회유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함부로 행동하면 상대방이 뭉칠 명분을 준다. 자신들의 힘으로 이길 수는 있어도 그 이후로는 정말 힘들어진다. 놈들은 도망쳐서 계속 복수를 외칠테니.
“이길 수는 있으되 감당할 수는 없고. 뭉치면 진다 그런 말인가?”
“놈들이 모두 뭉치면 병력은 3000명. 쥐어짜면 6000명입니다. 이걸 저희가 어떻게 감당합니까?”
“언제 자네들만 나선다 했는가? 간단히 말해주겠네. 아국이 건주위 부족장 중 자네를 필두로 하여 회령 일대에 진을 차린 것은 다 안배된 일이야.”
안배된 일이다. 아니 자신은 먼터무의 7촌이다. 그리고 먼터무의 직계인 충샨은 아직 멀쩡히 살아있다.
“안배 되었다 하심은. 7촌이 아들을 밀어내고 복수의 깃발을 세우라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네. 둔하지는 않군.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는데 자네가 먼저 해봄이 어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능성 정도는 있었다. 충샨은 지금도 요동에서 상황을 관망하면서 이득을 챙기려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부족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은 지켜준다 하였지 치고 나간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입조한 부족들을 지켜 줄 것이지 나서서 공격을 취한다는 말은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이네. 그런데 말이야. 입조한 부족이 복수를 행하고 고토를 회복한다 하는데. 그것은 지키는 것인가 나서서 공격을 취하는 것인가?”
“둘 다가 아닙니까.”
“자네가 고토를 회복하고 복수를 한다며 일어서면. 우리는 ‘정당히 보호해줄’ 뿐일세.”
조선의 국왕은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단 말인가. 어쩐지 자신들에 대한 대접이 다른 부족보다 좋다 하였는데. 이미 자신에 대해 알고 먼저 준비했다는 건가?
그 힘을 가지고도 이런 생각을 가졌다니.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벽한 자. 그것 외에는 조선의 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습니다. 복수의 깃발을 내걸 되 확실한 복수로 보여야 합니다.”
“무력을 말하는 것인가?”
“네. 놈들이 사방팔방 찢어져서 분열된다 해도. 차라리 고개를 숙일 생각을 하지. 절대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할 그런 무력이 필요합니다.”
흥분이 올라와서 식어버린 차를 거칠게 들이켰다. 세대가 두번 교체될 시간이라 건주위의 이주 당시를 기억하는 자들은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다. 반면 자신의 7촌 먼터무의 죽음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다.
“걱정하지 말게. 지금 육진 일대에 있는 훈련도감군 중 3기생 1000명은 4군 지역으로 이주를 할 것이네. 그리고 그들의 선임자가 올 것이고.”
“선임자라뇨?”
“대총 한의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처음으로 훈련도감을 졸업한 이들과 두 번째로 졸업한 이들이 오는 것이지. 수는 단 사백에 불과하지만 조선 최고의 병사들이라 단언할 수 있네.”
더 강하단 말인가? 단 400명을 가지고 그런 자신감을 보이다니? 사내로 태어나서 궁금한 것은 있었다. 도대체 훈련도감이 강하다 하는데 얼마나 강한 것일까?
“훈련도감이라 하셨습니까? 그 쇠투구를 쓴 자들이 얼마나 강합니까?”
“뭐라 말을 할 수 없겠군. 비교하려면 같은 군인이 아니고 장수가 와야 하니.”
확실한 자신감. 400명이 4000을 상대로도 이긴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이제는 자신도 믿음을 보여야겠지.
“언제쯤 시작하실 것입니까?”
“이곳에는 올해 9월에 온다네. 자네들과 합을 맞추고. 강이 얼어붙는 시일에 바로 북쪽으로 진격을 할 걸세. 거기에 충원되는 함길도 일대의 익군 4000명. 그리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던 자네 부족의 사람들까지. 이래도 부족한가?”
“조선에 입조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